본문 바로가기

신동아 로고

통합검색 전체메뉴열기

르포

‘아빠의 부도’ 그 후… 아이들이 살아가는 법

“학원 안 가도 공부 잘하고, 휴대폰 없어도 기죽지 않아요”

  • 글: 박성원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parker49@donga.com

‘아빠의 부도’ 그 후… 아이들이 살아가는 법

1/4
  • 사업에 실패한 가장(家長)에게 돈보다 더 심각한 고민거리는 자녀 문제다.
  • 널찍한 아파트에서 반지하 셋방으로 옮겨가면서 아버지는 아이들의 얼굴부터 살핀다.
  • 내 실패가 혹 아이들의 ‘실패’로 이어지지 않을까 하는 걱정 때문이다. 그러나 기특하게도 아이들은 어려움을 극복하는 방법을 안다. 그들은 ‘성공은 뜨겁고, 실패는 차갑다’는 진리를 가슴으로 깨달으며 건강한 삶을 열어간다.
‘아빠의 부도’ 그 후… 아이들이 살아가는 법
수재만 모인다는 과학고에서도 은아는 두각을 나타낸다. 은아의 꿈은 유전공학자다. 실력이 뛰어나 꿈은 이뤄질 것 같다. 은아의 별명은 ‘백만 볼트’. 양 볼이 전구 불빛처럼 발그레하다고 붙은 별명이다. 그 얘기를 하면서 살짝 미소짓는 얼굴엔 아직 앳된 티가 남아 있다. 하지만 대화를 해보면 나이답지 않게 당차다는 것을 금방 느낄 수 있다. 은아는 맑고 당당했다. 어두운 구석은 찾아볼 수 없었다.

그러나 4년 전에는 그렇지 않았을 것이다. 초등학교를 졸업하던 무렵, 은아의 아버지는 벤처사업에 도전했다가 실패했다. 아파트에서 살던 은아네는 경기도의 허름한 반지하 전세방으로 이사했고, 아버지는 주말에만 겨우 볼 수 있었다. 늠름하던 아버지의 어깨는 늘 축 처져 있었다. 그런 아버지를 바라보는 은아에게도 ‘사는 게 힘들어지겠구나’ 하는 불안감이 스쳐갔을 것이다. 부모나 아이들이나 모두 힘든 시기였다.

“아빠, 힘내세요∼”

같은 또래인 은아와 준영이, 그리고 민주(학생들의 이름은 모두 가명)를 서울에서 만났다. 이들은 비트컴퓨터 조현정 회장이 운영하는 재단에서 주는 장학금을 받기 위해 일요일 하루 시간을 내 서울에 올라왔다. 조현정 재단은 5년 전부터 어려운 형편에서도 공부를 잘하는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주고 있다. 올해는 특별히 아버지가 벤처기업을 운영하다가 부도를 내고 집안이 어려워진 고등학생들에게 대학 4년간의 장학금을 수여했다.

조 회장도 어려운 청소년기를 보냈다. 어릴 때 아버지를 여의고, 한쪽 귀마저 들리지 않는 악조건에서 이를 악물고 공부해 자수성가한 경영자다. 그는 역경이 청소년을 부쩍 자라게 한다는 것을 몸소 체득한 사람이다. 조 회장은 학생들과 만나는 자리에서 “실패를 가슴으로 받아들이고 불편한 것을 쉽게 참아내는 사람이 성공할 가능성이 높다”며 “성공이 얼마나 뜨거운지, 실패가 얼마나 차가운지를 아는 것은 소중한 경험”이라고 말했다.

그날은 올해 벤처기업협회장을 맡은 조 회장으로서도 가슴 뿌듯한 날이었다. 그는 학생들에게 “벤처 기업가 아버지들이 겪은 실패가 우리 사회의 소중한 자산이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초등학교 6학년이던 해 은아는 사업을 접은 아버지를 위로하기 위해 두 여동생과 반지하 셋방에서 조촐한 파티를 열었다. 그리고 편지 한 장을 아빠의 손에 쥐어드렸다. 전날 밤, 졸려서 하품을 하는 동생들을 다독여 함께 볼펜을 꾹꾹 눌러가며 쓴 편지였다.

“아빠, 힘내세요. 우리 할 일은 알아서 잘 할게요.”

짧은 편지였지만, 아빠의 눈은 금방 빨갛게 변했다.

집안 살림은 어려워졌지만 자신마저 초라해져서는 안 된다고 은아는 다짐했다. 그러나 쉽지 않았다. 친구들에게 당당한 모습을 보여주려고 했지만,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은아는 반 친구들 아무에게도 자신이 어디에 살고 있는지 말하지 못했다. 갑자기 이사를 오는 바람에 친하게 지내던 초등학교 친구들과 헤어져 마음속에 담아둔 고민을 털어놓을 상대도 없었다. 낯선 친구들에겐 아무래도 속마음을 털어놓기가 어려웠다.

학원에만 갈 수 있었어도

경기도의 한 중학교에 입학한 은아는 첫 시험에서 전교 3등을 했다. 선생님은 공부 잘하는 은아에게 반장을 맡으라고 했지만 그러지 않겠다고 했다. 초등학교 시절엔 학급 반장과 전교회장을 도맡아 할 만큼 활발한 아이였다. 그러나 은아는 가정형편이 어려워진 후에는 한번도 학급 임원을 맡지 않았다. 임원을 하면 부모가 학교에 자주 와야 하고, 돈도 써야 한다. 은아는 어머니가 그럴 수 없다는 것을 잘 안다.

학원에 갈 수 있는 처지도 못 됐다. 친구들은 학원을 두세 개씩 다니며 모자라는 공부를 보충했지만 은아는 집에서 혼자 공부했다. 동생들도 그렇게 했다. 동생들은 은아만큼 공부를 잘하진 못한다. 집안이 어려워도 밝게 커온 동생들은 요리사와 미용사가 되는 것이 꿈이다. 안정된 돈벌이가 된다는 것이 이유다. 그래도 은아는 동생들이 공부를 더 잘했으면 하는 마음이 있다. 그래서 틈틈이 동생들의 공부를 봐준다.

은아는 딱 한 번 아버지가 야속한 적이 있다. 그렇게 원하던 과학고에 진학했지만, 중학교 3학년 겨울방학 때 학원에서 선행학습을 하지 못해 첫 시험을 망쳤다. 처음으로 꼴찌라는 걸 해봤다. 학원에만 갈 수 있었어도 이렇게 창피한 점수는 받지 않았을 텐데. 벤처사업을 한다고 나섰던 아버지가 미웠다.

그러나 은아는 꾸준히 성적을 끌어올려 전교 10등 안팎으로 뛰어올랐다. 선행학습이 꼭 고등학교 실력을 좌우하는 것은 아니라는 확신이 들었다. 아빠를 미워한 것이 조금은 후회스러웠다.
1/4
글: 박성원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parker49@donga.com
목록 닫기

‘아빠의 부도’ 그 후… 아이들이 살아가는 법

댓글 창 닫기

2018/11Opinion Leader Magazine

오피니언 리더 매거진 표지

오피니언 리더를 위한
시사월간지. 분석, 정보,
교양, 재미의 보물창고

목차보기구독신청이번 호 구입하기

지면보기 서비스는 유료 서비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