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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민족 高大’ 100년

압제에 항거하고 독재에 저항하며 써내려간 자유·정의 100년사

  • 글: 성기영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sky3203@donga.com

압제에 항거하고 독재에 저항하며 써내려간 자유·정의 100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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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인촌 김성수 선생(오른쪽)이 내세운 ‘교육구국’이라는 고려대학교의 건학이념은 일제 식민통치는 물론 광복 후에도 좌우갈등과 민족분단, 독재정권의 탄압 등 무수한 시련에 도전하면서 100년 역사를 지탱하는 기폭제가 되었다.
  • 2005년 5월5일 고려대 개교 100주년에 즈음해 그 피어린 史草를 펼쳐본다.
압제에 항거하고 독재에 저항하며 써내려간 자유·정의 100년사
고려대학교의 전신인 보성전문학교(普成專門學校, 이하 보전)가 설립된 1905년, 우리나라는 외세의 침탈로 풍전등화의 위기에 처해 있었다. 1904년 러일전쟁을 일으킨 일본은 대한제국의 중립선언을 묵살하고 2차에 걸친 한일협약을 체결하여 고문(顧問) 정치를 감행함으로써 조선은 일본의 보호국으로 전락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국권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근대적 지식과 실력을 갖춘 인물을 양성하는 것이 무엇보다 시급한 과제로 대두됐다. 특히 고등교육기관 설립의 필요성이 절실해졌고 보전은 이러한 요구에 부응하기 위해 지어졌다.

보전을 설립한 이는 대한제국의 내장원경(內藏院卿)이던 이용익 선생이다. 내장원(內藏院)은 대한제국의 황실 재정을 담당하던 기관으로, 이러한 사실만으로도 보전 설립에 고종 황제의 의지가 강력하게 작용했다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다. 실제 당시 ‘황성신문(皇城新聞)’에는 ‘고종 황제가 보전을 특립(特立)하였고 재정 지원을 했다’는 대목이 눈에 띈다.

보성전문학교의 ‘보성’이라는 이름을 고종이 하사했다는 사실도 근현대사에서 고려대의 위상을 잘 보여주는 일화다. 고려대는 바로 이러한 점을 일제가 식민지배를 위해 세운 관학(官學)이나 외국인 선교사들이 세운 여타 사립학교와는 다른 건학 정신의 하나로 내세우고 있다.

그러나 보전이 설립된 직후부터 고려대가 걸어온 길은 순탄한 적이 별로 없었다. 당장 설립자 이용익 선생이 을사조약 체결 후 해외로 망명하면서 경영난에 빠져버렸다. 고종의 최측근 중 한 명인 이용익 선생은 1905년 9월 고종에게서 모종의 임무를 부여받고 중국으로 망명한 뒤 프랑스, 러시아 등을 돌며 국권회복을 위한 외교활동을 벌이다가 1907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사망했다.

이용익의 망명 직후부터 보전 경영의 실질적인 책임은 손자 이종호에게로 넘어갔다. 이종호는 안창호, 이동휘 등이 주도한 항일 비밀결사조직인 신민회에 적극 참여했을 정도로 독립운동 진영에서 영향력을 행사한 인물이다. 그는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이준 열사를 보낼 때도 자신의 집에서 안창호 등과 회합을 가졌을 정도로 독립운동을 깊숙이 후원하고 있었다.

압제에 항거하고 독재에 저항하며 써내려간 자유·정의 100년사
2대 교주(校主)인 이종호에게 학교가 넘어간 이후에도 황실은 계속 재정을 지원했다. 그러나 반일세력과 황실의 잦은 연락을 감지한 일본이 황실 재산을 정리해 국고로 이관함으로써 황실을 무력화하려 했다. 이렇게 일본이 민족교육의 자금줄을 죄면서 한때 보전의 관립화(官立化)설도 제기됐다.

그러나 학생들의 저항 때문에 관립화 기도는 성공하지 못했다. 오히려 문제는 1910년 경술국치에 즈음해 교주 이종호가 해외 망명길에 오르면서 생겨났다. 이 당시에는 보전 1회 졸업생이 중심이 돼 천도교측의 의암 손병희와 꾸준히 접촉한 끝에 그가 경영 책임을 이어받음으로써 일단 위기를 극복할 수 있었다. 하지만 3·1 독립운동의 핵심인물인 손병희 선생이 일본 경찰에 체포됨으로써 보전은 다시 한 번 난관에 봉착했다.

그 후 1921년에 천도교와 김기태, 김원배 등 독지가의 기부금으로 경영의 모체가 된 재단법인 보성전문학교가 설립되고, 다음해 4월 조선교육령에 의해 전문학교 인가를 받음으로써 비로소 경영의 재정적·법적 기반을 굳혔다.

仁村과 民立대학의 꿈

약 10년이 지나 1929년에 비롯된 세계적 경제공황의 여파로 보전은 또다시 심각한 재정난에 처하게 된다. 이러한 곤경에서 고려대를 건져내 오늘날과 같은 발전의 터전을 마련한 사람이 1932년부터 경영 책임을 맡은 인촌 김성수 선생이다. 당시 김성수 선생은 이미 중앙중학교와 동아일보사를 경영하고 있었다.

1932년에 운영난에 처한 보전을 인수한 인촌은 민립대학의 꿈을 펴기 위해 북악산 기슭, 현재의 성북구 안암동에 새 교사(校舍)를 세웠다. 이로써 ‘민족을 위한 민족의 대학’을 설립한다는 그의 오랜 꿈이 실현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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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성기영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sky3203@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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