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6월호

‘과외 1번지’ 대치동 현장취재

체면과 허영으로 분칠한 부실 사교육 ‘메카’

  • 김순희 자유기고가 wwwtopic@hanmail.net

    입력2005-05-24 14:3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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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과외 1번지’ 대치동 현장취재
    “야이 새끼들아, 공부해! 너네 집에 돈이 많아, 아니면 ‘빽’이 있어? 공부라도 잘해야지, 못하면 니들이 나중에 뭐가 되겠어!”

    영화 ‘공공의 적2’에서 선생님이 패싸움한 아이들을 죄다 ‘엎드려뻗쳐’ 시켜놓고 한 말이다. 가진 것 없는 ‘촌놈’이 출세하는 유일한 길은 공부 잘해서 신분 상승하는 것임을 강조하는 교사의 외침이다.

    그러나 공부는 가진 것 없는 ‘촌놈’의 전유물이 아니다. 요즘엔 돈 있고 ‘빽’ 있는 부모일수록 자식을 명문대에 보내려고 혈안이 돼 있다. 먹고 살기에 충분한 부를 쌓았거나 명예를 거머쥔 사람들, 교육을 통해 신분 상승을 경험한 사람들이 자녀 교육에 ‘올인’하고 있다. 이러한 사회현상이 극명하게 드러난 곳이 ‘강남 속의 강남’이라 부르는 대치동이다.

    경향 각지의 알부자와 의사, 변호사 같은 전문직 종사자가 많이 거주하는 것으로 알려진 사교육의 ‘메카’ 대치동. 이곳의 교육방법은 ‘특별하다’고 알려져 있다. 딱히 그 이유를 모르는 사람들도 ‘대치동식 교육’은 남다르다고 믿는다.

    대치동 엄마들의 입시전략을 쓴 책이 언론에 크게 소개될 만큼 이곳의 교육열풍은 우리 사회에서 유별난 대접을 받는다. 이곳 엄마들은 자녀의 명문대 입학이라는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초등학교부터 고등학교 졸업 때까지 10여 년에 걸쳐 피눈물 나는 노력을 아끼지 않는 것으로 알려졌다. 아이의 학습과정과 능력을 면밀히 관찰해 알맞은 학원과 개인교사를 붙여주는 교육 전문 매니저 노릇을 하는 것이다.



    대치동의 명성이 높아진 것은 1990년대 초로 거슬러 올라간다. 강북에 있던 일부 명문고와 대형 학원들이 대치동에 둥지를 튼 후 자녀를 이른바 ‘SKY대학(서울대·고려대·연세대)’에 보내려면 대치동으로 이사를 해야 한다는 입소문이 퍼졌다. 전입자는 빠르게 늘었고 이는 곧 집값 상승으로 이어졌다.

    널리 알려졌다시피 대치동에서 13억~15억원(45평형 기준)을 호가하는 아파트는 지은 지 20년 된 우성·선경·미도 해서 일명 ‘빅3’ 아파트다. 길 건너편에 우뚝 선 최고급 주상복합아파트 타워팰리스 주민들 가운데 초·중학생을 둔 학부모가 오래되고 낡은 ‘빅3’ 아파트를 부러워하는 까닭은 오직 하나, 그곳에 명문 초·중학교가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다.

    우성아파트 단지에는 한때 특목고 진학률 전국 1위를 자랑하던 대청중학교가 있고, 선경아파트 단지에는 대치초등학교가, 미도아파트 단지에는 대곡초등학교가 있다. 두 초등학교는 대청중학교로 진학하는 지름길로 통한다. 강남 개발 이후인 1987년에 개교한 대청중학교는 강남 내 최고 명문학교로 손꼽히며, 대치동의 명성을 높이는 데 매우 중요한 구실을 한 것으로 평가된다.

    선경과 우성아파트 맞은편에 위치한 청실아파트와 삼성래미안아파트 가격은 ‘빅3’ 아파트에 비해 평형에 따라 적게는 1억원에서 많게는 3억원 가량 낮다. 그 이유에 대해 인근 부동산중개업소 관계자는 “대형 평수가 적은 점도 있지만, 무엇보다 대청중학교에 배정될 수 없다는 점이 결정적 영향을 끼친다”고 분석했다. 대청중학교 입학이라는 ‘특권’이 최소 몇 억원의 값어치를 한다는 것이다.

    그동안 대치동이 각광받은 이유는 간단하다. 질 좋은 학교와 학원 등 교육 인프라가 뛰어난데다 ‘결과물’이 좋은 것으로 알려졌기 때문이다. 이러한 입소문은 대치동 엄마들의 교육전략과 사교육 열풍이 자녀를 명문대에 보내는 지름길로 작용한다고 믿는 타 지역 학부모의 유입으로 이어졌다. 2005년 현재 대치초등학교의 1학년은 5학급에 불과하지만 학년이 올라갈수록 한 학급씩 늘어나 6학년은 1학년의 두 배인 10학급에 이른다. 전학 오는 학생이 그만큼 많다는 증거다.

    아빠의 경제력, 엄마의 정보력

    대치동에 거주하는 학생의 사교육 비중은 다른 지역에 비해 훨씬 높다. 학원 의존도가 낮은 편에 속하는 초등학생의 경우 영어와 수학, 논술이 기본이다. 조금 ‘세게’ 하는 아이들은 ‘기본’ 외에 예체능 및 원어민과의 1대 1 영어회화를 비롯해 중학교 내신성적 대비용 체육까지 다양한 선행학습을 한다. 대치동에서는 ‘노는’ 아이를 찾아보기 힘들다. 하교 후 곧바로 학원가를 순회하기에도 시간이 빠듯하기 때문이다.

    초등학생의 경우 학원 선택은 전적으로 엄마 몫이다. 과목별로 특성화, 세분화한 학원 중 자녀의 적성과 수준에 맞는 곳을 고르는 안목이 엄마의 능력이라는 평가도 뒤따른다. 자녀와 ‘궁합’이 맞는 학원을 선택하고 진도나 교육내용을 파악하는 것도 엄마 몫이다. 아빠의 경제력과 엄마의 정보력이 자녀의 명문대 입학을 결정하는 잣대로 알려진 대치동식 교육방법의 문제점은 무엇일까.

    지난해 11월10일. 민족사관고등학교 출신의 한 교사가 강남 대치동의 한 외국어학원에서 고교 입학생 자녀를 둔 학부모 특강을 통해 “강남, 특히 대치동 엄마들의 극성이 오히려 자녀 교육을 망치고 있다”고 주장했다. 요지는 이랬다.

    “엄마가 시키는 대로 공부하고 학원과 과외교사 의존도가 높은 학생은 스스로 공부하는 방법을 모른다. 결국 부모의 강요와 학원 등에서 이뤄지는 주입식 교육을 집중적으로 받은 아이는 자생력이 떨어지고 창의성이 부족해 다른 아이들에 뒤처지고 만다. 아이를 학원으로만 내몰 게 아니라 공부하는 분위기를 만들어주고 부족한 과목을 보충할 수 있도록 부모가 조언자 노릇을 하는 것이 중요하다.”

    2005학년도 고교입시에서 대청중학교 최상위권에 속하는 학생이 강원도 횡성의 민족사관고등학교(이하 민사고)에 지원했다가 떨어지는 이변이 발생하자 학부모 사이에는 “민사고가 다른 중학교와의 형평성을 의식해 대청중학교 학생을 일부러 덜 뽑았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7명가량이 합격할 것으로 내다봤으나 합격하자 4명에 그치자 나름대로 불합격의 원인을 분석한 것이다.

    이에 대해 민사고 이청 사무국장은 “(민사고에) 지원했다가 떨어진 자녀의 학부모가 온갖 소문을 만들어내는 진원지”라고 비판했다.

    “우리 학교에 대해 엉터리 소문을 양산하는 곳이 바로 ‘강남땅’이다. 실력을 갖춘 학생이라면 당연히 뽑는다. 대청중학교에서 (민사고에) 40명이 들어온다고 한들 무슨 문제가 되겠는가. 우수한 영재 선발이 우선이라 학교와 지역을 구분하지 않고 선발한다. 토플을 만점 맞은 학생도 있었는데 종합적으로 판단할 때 실력이 부족하다고 판단했기에 안 뽑았다. 민사고는 강남 아줌마들이 좌지우지 하는 그런 학교가 아니다. 지금까지 그랬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섭섭하게 들릴지 모르겠으나 강남 아이들이 전부는 아니다.”

    획일적 학원교육에 길든 아이들

    민사고 출신의 또 다른 한 교사는 “강남 지역 출신 학생들은 입학 초기엔 타 지역 학생에 비해 두각을 나타내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성적이 떨어지는 경향이 있다”면서 “학교 특성상 기숙사 생활을 하기 때문에 학원교습이나 개인과외를 받을 수 없다. 따라서 교사의 가르침에 따라 스스로 공부해 실력을 쌓아야 하는데, 강남 지역 일부 학생들은 혼자 공부하는 방법을 터득하지 못한 것 같다”고 진단했다.

    강남 출신 아이들의 학업성취도가 떨어진다는 민사고 출신 교사들의 주장에 대해 이청 사무국장은 “그런 경우가 전혀 없다고는 말하지 않겠다. 그러나 ‘강남 지역 출신’이기 때문이라고 일반화하는 것은 잘못”이라며 강남 출신 학생을 특별한 학생으로 규정하는 것을 경계했다.

    “학원에서 만들어지고 다듬어진 아이들은 다 그런 부류에 속한다. 과외에 의존해 공부한 학생들 중 일부는 도와주는 손길이 없어지자 어찌할 바를 몰랐다. 우리는 오로지 민사고 합격만을 위해 공부한 학생은 선발하지 않는다. 창의성이 뛰어난 ‘원목’(학원에서 만들어지지 않은 영재를 이렇게 표현했다)을 발굴하기 위해 해마다 입학요강을 보완하고 있다. 지난해부터 자체적으로 실시하고 있는 ‘토론경시대회’도 그 일환이다.”

    올해 민사고 입학생 150명을 출신지역별로 분류하면 역시 서울 강남구가 14명으로 가장 많다. 분당신도시(13명)와 일산신도시(12명)가 그 뒤를 이었다. 특기할 점은 명문으로 알려진 대치동 소재 단국대 부속중학교와 휘문중학교가 지난해와 달리 단 한 명의 합격자도 배출하지 못한 반면 분당과 일산 지역의 합격생은 늘었다는 사실이다. 두 학교 관계자는 내신 비중이 강화된 2008학년도 새 대입제도에 영향을 받아 민사고를 지원하는 학생이 줄어든 것은 아니라고 설명했다.

    강남 못지않게 분당과 일산 지역의 합격률이 높게 나타난 이유에 대해 민사고 관계자는 “분당과 일산은 학부모의 교육 수준이 높은 데다 강남과는 학습 분위기가 다른 것으로 안다”면서 “분당과 일산 학생들의 합격률이 높은 것은 우리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독창적인 사고력을 갖춘 영재가 많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이 관계자는 또 “강남 지역 학원들이 선전하는 민사고 합격생수가 민사고 전체 입학생수(150명)보다 많은 것으로 알고 있다”고 일부 학원들의 무분별한 홍보행태를 비판했다.

    ‘과외 1번지’ 대치동 현장취재

    대치동 학부모의 교육 목표는 자녀를 특목고에 보내는 것이다. ‘부모의 꿈’을 실현하기 위해 아이들은 학교 수업이 끝난 후 밤늦게까지 학원과 개인과외 수업을 받는다.

    지난 3월21일. 대치초등학교 5학년 X반 교실. 교실 벽면 한쪽에 ‘학교 폭력’에 대해 자신의 생각을 글로 표현한 작품이 전시돼 있었다. 40여 명의 학생이 작성한 글은 마치 논술학원에서 ‘A’라는 질문에는 ‘B’가 정답이라고 가르침을 받기라도 한 듯 대체로 비슷비슷했다. 독창적인 사고가 담긴 작품은 찾기 힘들었다. 획일적인 학원교육의 문제점이 한눈에 들어왔다. 이러한 현상은 한 학년 한 학급에서만 나타나는 게 아니다. ‘대치동식 교육’의 수혜자인 거의 모든 학생에게 직간접으로 나타나고 있기에 문제가 더욱 심각한 것이다.

    “우황청심환부터 챙겨라”

    그러나 대치동 엄마들은 이런 문제점에 아랑곳하지 않고 오늘도 자녀를 학원순례로 내몬다. 오직 학원 공부만이 최상의 대안이라는 듯이 말이다. 대치동 초등학생은 대입을 앞둔 고교생 못지않게 밤늦게까지 학원을 전전한다. 특목고에 보내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학부모가 많기 때문이다.

    학부모 김모(36)씨는 “이곳으로 전학 오는 초등학생 학부모의 목표는 대부분 특목고 진학”이라면서 “민사고와 외국어고, 과학고 입학이라는 큰 꿈을 안고 대치동에 입성하는 경우가 많다”고 전했다. 초등학교 4학년과 2학년을 둔 김씨는 초등학생을 둔 엄마들이 가장 열성적으로 자녀교육을 뒷바라지하는 이유에 대해 “초등학교 때 공을 들이고 좋은 학원에 보내면 원하는 특목고와 명문대를 보낼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라고 전했다.

    하지만 학부모들의 ‘원대한 꿈’은 중학교 1학년 2학기를 맞기 전에 물거품이 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중학교 1학년 중간고사 점수가 명문대 진학을 좌우한다.’ 많은 사람이 고개를 갸웃거릴 이 말을 대치동 엄마들은 금과옥조처럼 신봉한다. 그동안 여러 학생을 지켜본 결과 이러한 주장이 맞아떨어졌기 때문이란다.

    얼마 전 중학교 1학년 자녀를 둔 대치동의 한 학부모는 같은 반 아이의 엄마에게서 “중간고사 점수가 발표되기 전에 우황청심환을 사 먹어라”는 조언을 들었다. “대부분의 학부모가 초등학교 때 시킨 강도 높은 선행학습과 과외 덕분에 자녀가 상위권에 속할 것이라고 기대하지만 뜻밖의 결과에 놀라게 된다. 그러니 성적표를 받은 후 기절하지 말고 미리 대비하라”는 뼈 있는 농담이었다고 한다.

    “중1 때 성적이 좋지 않게 나와도 대다수 학부모는 2학년 초까지는 희망을 갖고 특목고와 명문대 진학을 위해 갖은 노력을 기울인다. 하지만 중2 학기말 또는 중3 학기초가 되면 자녀의 성적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 이때 특목고를 포기하고 일반고 진학으로 돌아서는 학부모가 많다.”

    대치동에 5년째 거주해온 김모(41)씨의 말이다. 고1과 초등학교 5학년 자녀를 둔 김씨의 경험담을 더 들어보자.

    “올해 초등학교 학력평가가 부활되기는 했지만 전 과목이 아니라 국어, 수학, 사회, 과학만 평가한다. 하지만 중학교는 사정이 다르다. 전 과목을 시험보기 때문에 주로 수학과 영어 등 선행학습을 한 학생들이 나머지 과목을 혼자 공부할 줄 모르면 성적이 낮게 나올 수밖에 없다. 공부를 잘하고 못하고는 결국 학원이나 과외교사가 아닌 학생 자신에게 달려 있다. 기타 과목에 대해 따로 지도받는 학생이 적지 않지만 이것은 순간 위기를 모면하는 정도밖에 안 된다. 과외에 길들여진 학생은 반짝 성적은 낼 수 있지만 대입이라는 마라톤 경주에서는 결국 뒤처지고 만다.”

    “고액 과외 학생, 성적 신통찮다”

    4월26일 오후. 학생들의 생생한 의견을 듣기 위해 대치동 학원 밀집가에서 이른바 ‘8학군’에 다니는 중·고생 36명을 만났다. 무작위로 선정한 이들과의 면담은 1대 1, 또는 3~4명씩 그룹으로 이뤄졌다. 이들 모두에게 “초·중학교 때 여러 학원을 전전하며 고액과외 등을 받은 학생들의 학교 성적이 어떠냐”는 질문을 던졌다. 32명(고1 8명, 고2 18명, 고3 6명)의 고등학생은 사전에 입을 맞추기라도 한 듯 “별볼일 없다”고 잘라 말했다.

    “난 대치동의 ‘FM 코스’라 불리는 대치초등학교와 대청중학교를 졸업했다. 명문대나 특목고에 보내기 위해 눈 벌겋게 뜬 엄마들이 극성을 떠는 모습을 생생히 지켜봤다. 하지만 그런 엄마 밑에서 자란 아이치고 좋은 성적 내는 아이 못 봤다. 중학교 1학년 때 잠깐 높은 성적을 낸 아이가 있기는 했지만 대부분 최상위 그룹에는 끼지 못하고 중상위권 수준이다. 이런 현상은 고등학생이 돼도 마찬가지다. 진짜 공부 잘하는 학생은 극성스러운 엄마 밑에서 자라지 않았다.”

    숙명여고 2학년 학생의 말이다. 또 다른 고등학교 2학년 김모(17)양의 말을 들어보자.

    “대치동 엄마들이 몰두하는 일이 좋은 학원과 과외교사 정보 교환이라고 외부에 알려져 있다. 하지만 그건 뭘 모르고 하는 소리다. 일부 그런 엄마가 있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그 부류의 엄마는 십중팔구 공부 못하는 자식을 뒀다고 보면 틀림없다. 친구들 중에 엄마 손에 이끌려 다니는 아이들은 대부분 공부에 흥미를 느끼지 못하고 시계추처럼 학교와 학원을 왔다갔다한다. 그러니 학원에 간다한들 무슨 효과가 있겠는가. 학원에서 노는 학생이 많다는 것을 엄마는 잘 모르는 것 같다. 그러니까 학원을 계속 보내겠지만….”

    김양은 하고 싶은 말이 많은 듯 목에 핏줄을 세웠다. 자신을 대치동 교육의 피해자 중 한 명이라고 소개한 중앙대 부속고등학교 1학년 박모(16)양은 무분별한 학원교육에 대해 울분을 터뜨렸다.

    “초등학교 때 아무것도 모르고 엄마가 시키는 대로 이 학원 저 학원에 다녔다. 중학교 때 성적이 제대로 안 나오자 안절부절못한 엄마가 또 다른 학원을 찾아 나섰지만 내가 반대했다. 엄마와 학원문제 때문에 숱하게 싸웠다. 결국 엄마가 항복했다. 무조건 학원에 자식을 맡기는 것은 자살행위나 다름없다고 생각한다. 특히 자기주장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초등학생의 경우 그 피해는 더 크다.”

    옆에서 박양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친구 3명이 그의 아픔을 익히 알고 있다는 듯 등을 토닥거렸다.

    영·수 과외, 주 2회에 월 100만원

    32명의 고등학생과 이야기를 나눈 후 공부 잘하고 못하고는 ‘학원이나 엄마가 아닌 학생 스스로의 노력에 달려 있다’는 지극히 ‘평범한’ 결론에 도달했다. 학생들의 이야기를 요약하면 이렇다.

    “진짜 공부 잘하는 상위권 학생은 학원 의존도가 낮다. 그들이 학원에 가는 것은 자신에게 부족한 부분을 채우기 위해서일 뿐이다. 이 아이들은 대치동이 아니라 대한민국 어디에 내놔도 최상위권을 유지할 학생들이다. 대치동의 명성은 대다수 학생이 아닌 상위 10~15%의 우수한 학생이 유지하고 있다고 본다. 상위권 학생의 경우 학원 선택권도 엄마가 아닌 학생에게 있다. 친구와 여러 경로를 통해 학원 정보를 입수해 자신에게 맞는 학원을 찾는다.”

    고액 과외를 하는 아이의 성적에 대한 시각에도 큰 차이가 없었다. 개인별 고액 과외는 중위권 또는 일부 중상위권 학생들이 상위권에 진입하기 위한 수단으로 애용한다. 하지만 이들이 상위권에 진입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는 게 학생들의 주장이다. 상위권 학생 중에서도 일부는 개인과외를 받는데 이는 드문 경우라는 것.

    대청중학교 2학년생 4명의 주장도 고교생 32명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학원과 과외공부에 의존하는 학생이 스스로 공부하는 학생을 따라잡을 수 없다는 것이다.

    32명의 고등학생 중에는 종합반에 다니는 학생이 4명, 수학과 영어 등 개인과외를 받는 학생이 1명 있었다. 나머지는 단과학원과 EBS 강의 및 인터넷을 통해 온라인 과외를 하고 있다고 밝혔다. 중학생 4명은 모두 단과학원에 다닌다고 답했다.

    종합반에 다니는 고등학생의 학원비는 월 40만원대, 단과학원에서 3~5과목을 수강하는 학생은 월 70만~130만원을 지출한다고 답했다. 개인과외를 하는 학생은 옆에 있는 친구 3명에게 과외비가 알려지는 것을 꺼리는 듯 “얼마인지 모른다”고 얼버무렸다. 대치동에서 중·고생 과외비는 수학과 영어 과목의 경우 주 2회에 월 80만~100만원으로 알려졌다. 단과학원비는 중학생과 고등학생 사이에 별 차이가 없었다.

    중학교 2학년과 초등학교 4학년 남매를 둔 정모(42)씨는 사교육비로 매월 250여 만원을 쏟아붓는다. 대기업에 근무하는 남편 월급은 350여 만원(건강보험, 국민연금과 각종 세금을 뗀 금액). 남은 100만원으로 네 식구가 한 달 동안 먹고산다.

    “경기도 일산 집을 팔고 31평 아파트에 전세 살고 있는데 관리비가 20만원가량 든다. 그러니까 한 달에 쓸 수 있는 생활비는 80만원 정도다. 차량유지비에, 휴대전화와 인터넷 요금에 부식비에…. 정말 ‘답이 안 나오는’ 생활을 하고 있다. 아이들 교육을 위해 대치동에 이사 온 3년 전부터 저축을 할 엄두가 나질 않는다. 노후문제? 그건 그림의 떡이 된 지 오래다. 빈익빈 부익부 현상이 극명하게 나타나는 곳이 바로 대치동이다. 주차장에 세워진 차만 봐도 알 수 있다. 수천만원에서 억대에 이르는 외제 자동차와 국내 고급 승용차가 즐비한 가운데 낡아빠진 국산 소형 승용차가 군데군데 눈에 띈다.

    나처럼 사는 사람이 주변에 적지 않다. 대치동 주민의 3분의 1은 나와 처지가 비슷한 부류이고, 나머지는 전문직 종사자와 부자 부모를 둔 사람들이다. 전문직 종사자 중에서도 특히 의사의 경우 사교육비를 포함해 월 1000만원이 넘는 생활비를 쓴다고 들었다. 이들의 씀씀이를 보면서 상대적 박탈감에 시달린 적도 있다. 그들과 어울리는 게 부담스러워 비슷한 처지의 학부모끼리 만난다. 우리끼리 만나면 스스로 ‘대치동 거지’라고 부른다.”

    2003년 사설 입시기관인 중앙교육진흥연구소는 ‘학생부 성적과 대학입시의 관계에 관한 연구’ 자료를 공개했다. 지역별·고교별 수능 평균성적이 처음 공개된 이 자료에 따르면 서울 강남지역 고3 학생들이 받은 수능성적 평균점수가 같은 평준화 지역인 대구지역 학생들보다 낮은 것으로 조사됐다. 또 같은 평준화 지역인 부산지역 고교생들의 수능성적과도 큰 차이가 없는 것으로 나타났다. 명문고와 학원이 몰려 있어 해마다 위장전입을 통해 우수 학생이 몰려드는 강남지역의 학력이 다른 지역에 비해 훨씬 뛰어나며 대학 진학률도 높다는 통념을 깬 보고서였다.

    이 보고서에 따르면 ‘사교육 1번지’로 부르는 강남지역 학생들의 실력은 알려진 것과 다르게 그다지 높지 않다. 교육특구인 대치동의 실상과 허상이 극명하게 드러난 자료였다. 전국 136개 고교(6만1304명)의 2002학년도 수능 성적을 분석한 결과 평준화 지역 중에서 대구 24개 고교(1만2681명)의 수능 평균점수가 237점(400점 만점 기준)으로 가장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서울 강남 대치동의 D·H고를 포함해 명문고로 꼽히는 강남지역 15개 고교 전체 학생(8538명)의 평균점수는 236.5점이었다. 또 부산지역 27개 고교(1만3376명)는 235.5점으로 나타났다.

    강남 수능성적 평균, 대구보다 낮아

    사교육이 집중된 서울 강남 지역이 타 지역에 비해 성적이 좋지 않은 것은 과외 등 사교육의 성과가 의외로 크지 않다는 것을 뜻한다. 강남지역은 다달이 적지 않은 사교육비를 쏟아붓지만 효과는 예상보다 낮아 ‘고비용 저효율’의 전형이라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보고서에 따르면 또 강남지역 고교에서는 학생들 간 성적 격차가 다른 지역보다 더 크게 벌어져 있다. 어설픈 사교육이 오히려 교육을 망쳐 ‘사교육 1번지’라는 명성을 무색케 하고 있는 것이다.

    대치동 열풍이 뜨겁게 달궈진 1990년대 중반부터 현재까지 대치동으로 전입한 사람들의 직종 중 대표적인 것은 무엇일까. 대치동 주변 부동산중개업소 관계자 8명은 한결같이 ‘의사’라고 답했다. 한 부동산중개업소 상담실장 박모(45)씨의 설명.

    “32평 아파트의 전세가가 3억~3억5000만원에 이르고 매매가는 8억~9억원에 이른다. 집값이 지금처럼 뛰기 전인 3~4년 전에는 일반 회사원 중에서도 대출을 받아 매입한 사람이 더러 있었지만 지금은 어림없는 소리다. 혹시 돈 많은 부모가 지원사격을 해주면 또 모를까…. 매매든 전세든 의사가 가장 많다. 대치동에는 전국 각지의 의사들이 다 모였다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니다. 집을 사서 오는 경우 90% 이상이 의사다. 대치동은 다른 지역에 비해 월세가 많은 편이다. 지방에서 활동하는 의사나 전문직 종사자 중 일부가 아내와 자식만 대치동에 전입시키면서 월세를 구하는 것이다.”

    휘문중학교 3학년 강모(15)군은 4월6일 캐나다로 떠났다. 성적이 중하위권을 맴돌았다는 강군은 유학을 가는 이유에 대해 인터넷 사이트 ‘다음’의 한 카페에 “지금 성적으로는 한국에서 좋은 대학에 가기 힘들 것 같아 외교관이 되고자 캐나다로 유학 간다”고 밝혔다.

    ‘초등학교 때 영어를 위해 1~2년간 단기유학을 하는 학생을 빼고는 중학생이 유학 가는 경우 대부분 ‘도피 유학’이다?’

    이 얘기가 맞는지 알고 싶다면 앞서 언급한 고교생 36명의 얘기를 더 들어볼 필요가 있다. 서울 강남 압구정동 구정중학교 출신 고2 여학생은 “중3 때 반에서 10명이 유학을 간 탓에 25명만이 졸업장을 받았다”고 밝혔다. 대청중학교 출신의 또 다른 여학생은 “우리 반에선 7명이 유학 갔다는데, 걔네 성적은 한마디로 ‘구리다(성적이 낮다)’. 다른 반에서도 유학 간 애들의 성적은 낮은 편이다”고 평가절하했다. 강군처럼 한국에서 명문대 진학이 어렵게 되자 차선책으로 유학을 선택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자녀를 유학 보내는 학부모들이 내세우는 대외적인 명분은 학생들 주장과는 다르다. 한국의 교육여건이 세계적으로 경쟁력을 상실했기에 좋은 교육환경을 찾아 떠나는 것은 당연하다는 논리를 편다.

    그런데 대치동 소재 유학·이민·해외이주·컨설팅 업체 관계자는 학부모들의 주장과 정반대되는 의견을 내놓았다.

    “중·고생의 경우 공부 잘해서 유학 가는 학생은 드물다. 지난해 우리 회사를 통해 이민이 아닌 순수 유학 목적으로 해외로 나간 대치동 중학생은 70~80명에 달한다. 주로 미국과 캐나다로 보냈는데 성적이 중하위권인 학생이 많았다. 기숙사 있는 사립학교를 선택할 경우 학비와 기숙사비 등으로 연간 4000만~5000만원이 든다. 공립학교도 1200만~1500만원이 소요된다. 유학 간 학생들은 대부분 의사 자녀다. 공부를 아주 잘하는 최상위권에서도 유학을 떠난 학생이 두어 명 있긴 했다. 이 학생들의 부모는 외국 명문대학에서 학위를 받은 대학교수와 연구원으로, 외국에서 공부하는 것이 낫다고 판단해 자녀의 조기유학을 결정했다. 대치동뿐만 아니라 강남의 중·고등학생이 외국 유학을 가는 경우 대부분 공부 못하는 학생이 떠난다는 것은 유학업계의 공공연한 비밀이다.”

    의사 자녀가 유학을 많이 가는 이유에 대해 취재과정에 만난 대치동 학부모 30여 명과 학생 대다수는 “첫째는 돈이 받쳐주기 때문이고, 둘째는 부모 자존심 상하지 않고 ‘쪽 팔리지’ 않기 위해서”라고 입을 모았다. 명문대 진학을 위해 대치동에 입성했는데 자녀의 성적이 미치지 못할 경우 자존심 때문에 연고지로 돌아가지도 못하고 계속 뒤처지는 것을 내버려둘 수도 없어 유학을 선택한다는 것이다.

    한 학부모는 “대치동에 사는 걸 아는 친지와 친구 등 지인들이 자녀가 어느 대학에 가는지 관심 있게 지켜보고 있기 때문에 별볼일 없는 대학에 들어가면 자존심이 상하지 않겠느냐”면서 “조기유학은 그런 사태를 피하기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라고 주장했다.

    지난해 서울지역에서 유학을 목적으로 우리나라를 떠난 초·중·고교 학생수는 사상 최대를 기록했다. 특히 부모의 해외근무나 이주에 따른 출국을 제외한 순수 유학 목적으로 해외로 간 학생이 5928명으로 2003년에 비해 33.9%나 늘었다.

    서울시교육청에 따르면 지난해 3월부터 올해 2월말까지 해외이주와 부모의 해외근무를 포함해 유학을 간 초·중·고교생수는 1만2317명으로 2003학년도의 1만1546명에 비해 6.7% 증가했다. 서울지역에서만 하루 평균 34명의 학생이 한국을 떠난 셈이다. 해외이주 등을 제외하고 순수 유학 목적으로 한국을 떠난 학생은 초등학생 2160명, 중학생 2144명, 고등학생 1624명으로 전년도 같은 기간에 비해 각각 38.6%, 25.8%, 39.4% 증가했다.

    국가별로는 2003학년도에 비해 호주와 뉴질랜드 유학은 1357명에서 1050명으로 줄어든 반면 중국과 동남아시아 국가 유학은 2016명에서 2620명으로 크게 늘었다. 미국과 캐나다에 대한 선호도는 여전히 높지만 경기가 어려워진 후 중국이나 싱가포르 등 동남아 국가로 유학을 가는 비율이 높은 것이 눈에 띈다.

    서울시교육청 통계에 따르면 지난해 서울 강남지역 일반계 고등학교의 대학 진학률은 강북지역보다 크게 떨어졌고 서울 전체 학생의 평균치를 밑돌았다. 서울시교육청은 지난해 4월 현재 강남구 일반계 고등학교 졸업생 8820명 가운데 전문대와 교대, 4년제 대학 등 각종 대학교에 진학한 고등학생은 73.2%에 불과하다고 밝혔다. 이는 전체 평균치인 77.2%에 크게 못 미치는 수치다. 강남구 여학생의 대학진학률은 더 떨어져 남학생이 75%인 데 비해 여학생은 71%에 불과한 것으로 조사됐다.

    강북보다 낮은 대학진학률

    강남의 대학 진학률이 이처럼 평균치를 밑도는 것은 상당수의 고교 졸업생이 명문대학을 가기 위해 재수를 선택하거나 해외유학을 가기 때문으로 분석됐다. 서울시 교육청 관계자는 “강남구의 경우 학부모들의 기대치가 높아 입시생들이 상향지원을 하기 때문에 강북지역에 비해 탈락자가 많다”고 밝혔다.

    반면 강북지역 고등학교는 10명 중 8명이 대학에 진학할 정도로 진학률이 높았다. 은평구 내 일반계 고등학교 졸업생의 대학 진학률은 82.3%로 서울시내 25개 구 가운데 가장 높은 것으로 나타났으며, 노원구가 82%, 도봉구 81.3%로 그 뒤를 따랐다. 강북지역 일반계 고교의 대학진학 비율이 높은 것은 합격안정권 대학에 소신지원을 했기 때문인 것으로 분석된다.

    지난해 교육부가 2008학년도 대입 개선안을 발표하자 대치동 유입 인구가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예년 같으면 방학 이사철을 맞아 유명 학원, 학군 수요 등으로 북적거려야 할 대치동 부동산시장에서 겨울방학 전·월세 특수가 사라졌다. 2003년만 해도 강북 등 다른 지역 거주자의 유입이 많았는데, 지난해 말부터는 전입자수가 크게 줄고 있다. 내신 비중이 대학입시에 주요 변수로 떠오르자 중3 학생들의 전입 수요가 줄어든 것이다.

    교육의 ‘메카’로 불리며 국내 최고의 교육열풍지대로 자리잡은 대치동. 하지만 ‘대치동식 교육’의 부작용은 명성만큼이나 큰 것 같다. 서민의 상상을 초월하는 집값과 마찬가지로 교육에도 엄청난 거품이 끼어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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