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6월호

“고구려 시조 주몽이 한고조 유방 건국 도왔다”

중국, 고구려 건국 연도 조작의혹

  • 글: 송동건 한양대 교수·행정학 mouxri@yahoo.co.kr

    입력2005-05-25 18:4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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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구려의 건국 연도는 기원전 37년이다. 하지만 옛 문헌과 자료를 근거로 유추해볼 때 그보다 172년 전인 기원전 209년에 세워진 것으로 보인다. 이는 중국 한(漢)나라의 건국 시기보다 3년 앞선 것이다. 중국의 사가들은 고구려가 중국을 통치한 사실을 감추기 위해 고구려의 건국 연도를 조작했다.
    “고구려 시조 주몽이 한고조 유방 건국 도왔다”
    한국 고대사 중 고구려·백제·신라 3국의 건국 연도에 대해서는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의 기록을 정설로 삼는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주몽이 고구려를 건국한 것은 기원전 37년 갑신(甲申)년이다. 이것은 기원전 57년 갑자(甲子)년에 박혁거세가 건국한 신라보다 21년이 뒤진다. 백제의 건국 연도는 이보다 더 늦은 기원전 18년 계묘(癸卯)년이다.

    그런데 학계에서는 고구려 건국 연도에 대해 논란이 일고 있다. 남쪽 학자들이 문제삼는 것은 고구려가 신라보다 늦게 건국됐다는 점이다. 이에 비해 북쪽 학자들은 고구려 건국 시기가 ‘삼국사기’ 기록보다 적어도 100여 년은 앞선다고 본다.

    남북학계 모두 고구려 건국 시기에 관한 한 ‘삼국사기’ 기록에 의문을 나타내고 있다. 그러나 한 가지 사실은 공통적으로 인정한다. 그것은 고구려가 중국의 한(漢)이 건국된 후에 세워졌다는 것이다.

    그러나 앞으로 살펴보겠지만, 고구려가 건국된 것은 유방이 한을 세우기 3년 전인 기원전 209년 임진(壬辰)년이다. 이것은 한국과 중국의 고대사에서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고구려가 한나라보다 후에 세워진 것으로 기록을 조작해 마치 중국 왕조의 번병(藩屛)으로 봉건(封建)을 받은 것처럼 역사를 왜곡했기 때문이다.

    결론이 앞서지만, 고구려 건국은 유방이 한을 세운 것보다 3년이 앞선다. 그리고 중국 황제는 고구려의 봉건을 받았다. 고구려는 황제를 봉(封)하면서 이를 ‘장(장)’이라 했다. 지금부터 이러한 사실을 하나하나 고증해본다.



    “유방이 漢 세울 때 이미 부여왕”

    고구려 건국에 관한 가장 확실한 단서는 ‘역림’(‘초씨역림(焦氏易林)’의 약자, 전한(前漢)시대에 씌어진 역술서)에 있다. “사슴을 쫓다 얻지는 못했지만(逐鹿不得), 바닷가로 가서(去之海隅), 바람을 맞으며 술을 뿌리면서(臨風洒酒), 스스로 부여왕이 되다(自王扶餘)”라는 대목이다. 진(秦)나라가 사슴을 잃은 것(秦失其鹿)은 진시황이 죽고나서다. 따라서 추무(鄒牟·고구려 시조 주몽)가 부여왕이 된 것은 진시황 재위 37년인 기원전 210년 신묘년 이후라야 맞다.

    또 하나의 단서는 ‘이밀묘지명(李密墓誌銘·고구려 시조의 직계후손으로 수나라에서 벼슬을 하다가 반란을 일으킨 이밀의 묘비에 새겨진 글)’이다. 묘지명을 풀어보면, “처음에는 항우가 패권을 잡았다고 들었으나(始聞楚覇), 마지막에는 유방을 황제자리에 앉혔다(終基漢皇)”고 했다. ‘역림’과 ‘이밀묘지명’ 기록대로라면 초한(楚漢)이 쟁패할 때 추무는 이미 부여왕이었다. 항우가 서초(西楚)의 패왕이 되고 유방이 한왕(漢王)이 된 것은 기원전 206년 을미년이다. 학계에서는 이 해를 한고조(漢高祖) 원년으로 잡는다. 또 유방이 황제에 오르는 것은 고조 5년, 즉 기원전 202년 기해년이다.

    ‘역림’에는 또 이런 표현이 있다. “성공한 사람은 물러나고, 덕을 품은 사람은 흥한다(成功者退, 懷德者興). 유계가 발분해 자영을 잡아 멸했다(劉季發憤, 擒滅子嬰).” 여기서 유계는 유방을 말하고, 자영은 진(秦)의 3세를 말한다. 자영이 죽은 것은 진 2세인 호해 3년, 즉 기원전 207년 갑오년이다. 이런 맥락에서 유추하면 추무는 같이 사슴을 쫓다가 갑오년 이전에 이미 건국에 성공, 즉 부여를 세운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그가 건국한 해는 진 2세 원년인 기원전 209년 임진년이거나 이듬해인 208년 계사년 둘 중 하나다. ‘한서’ 예악지에서 천마가의 두 번째 부분과 관련해 ‘집서(執徐·秦의 해)’라는 태세(太歲·그 해의 간지(干支))를 명기한 이상 그 시기는 기원전 209년 임진(壬辰)년이다. 이 해는 추무가 서정(西征·서쪽을 정벌)을 하고 돌아와 해본(忽口)에 건국, 건도한 해가 된다. 그렇다면 진나라의 사슴을 얻지 못했으면서 성공했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

    ‘역림’에는 “용과 뱀이 땅에서 일어나니, 천지가 반복한다(龍蛇起陸, 天地反復). 진나라가 그 사슴을 잃으니, 천하가 함께 쫓는다(秦失其鹿, 天下共逐)”라 씌어 있다. 진의 후사가 미정이라 천하의 호걸들이 투쟁에 나섰다는 뜻이다.

    같은 내용이 ‘이밀묘지명’에는 “용의 무리가 원 사슴을 쫓아 달리니, 주나라의 구정(九鼎)을 노리면서 다투어 진족을 멸망시킨다. 때에 (추무는) 몸을 움츠리지만, 운명으로 배필을 만난다(口龍馳走原鹿, 競窺周鼎, 爭亡秦族. 時遭口屈, 運偶鳳翔)”라고 기록돼 있다. 영웅들이 진나라를 멸망시키려 한 것은 주(周)의 정통을 이어받기 위해서였다.

    진이 주를 멸망시킨 것은 주의 제사를 하나하나 뺏어왔기 때문에 가능했다. 따라서 진시황이 죽고 주의 대통을 잇는다는 것은 그 사슴을 차지하는 것과 사시(四時)의 제사를 주재하는 권리를 차지하는 것 두 가지를 뜻한다. 즉 추무가 사슴을 얻지는 못했지만 성공했다 함은 시황이 죽은 뒤 주정(周鼎)을 확보했다는 뜻으로 이해된다. 진의 사슴을 얻은 유방은 진시황이 만든 남전옥새를 주정을 가진 자에게서 전수함으로써 황제위를 확보한 것이다. 그후 한(漢)은 국가적인 주요 제사의식을 감천궁(甘泉宮)에서 행했다.

    ‘역림’에 언급된 부여 건국에 관한 표현, 즉 “바람에 임해 술을 뿌렸다(臨風洒酒)”는 것은 나라를 세우면서 가장 먼저 한 일이 제사를 지낸 것이라는 뜻이다. ‘역림’에는 또 “해본이 감천궁에 미치다(木底及泉)”라는 표현도 있다. 이 대목으로 미루어 감천궁의 제례의식을 해본이 주관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유방이 받은 옥새는 연면히 이어져 수양제가 양주에서 잃어버릴 때까지 황제위를 승계하는 상징으로 사용됐다. 해본의 제주는 신으로 기록됐을 것이다. 그들은 ‘천손(天孫)’이었기 때문이다. 이들은 ‘황(황, 況)’하는 자들이다.

    ‘한서’에 따르면 황(況)은 공(貢)이다. 또 황(황)과 같은 자로 아주 높으신 분이 아랫사람에게 사(賜)하는 것을 뜻한다. 조공(朝貢)의 공이란 것이 반드시 아랫사람이 윗사람에게 바치는 것만은 아님을 알 수 있다. 이 부분에 관해 ‘한서’에는 몇 개의 구가 부연돼 있다. 한무제도 “두 손으로 공손히 황을 받았다(拜況)”고 기록되어 있다

    천마는 말이 아니라 사람

    ‘사기’ 악서의 ‘태일지가’와 ‘한서’ 예악지의 ‘천마가’의 앞부분은 악와수중(渥洼水中)에서 신마(神馬) 또는 천마(天馬)를 얻어서 지은 노래다. 그러나 이밀을 ‘악와용종(渥洼龍種)’이라 한 것을 보면 신마 혹은 천마는 분명 사람이다. 태일신(太一神)이 내려 보낸 천마와 대완(大宛·기원전 2세기경부터 중앙아시아의 페르가나 지방에 존재했던 이란계 민족의 국가)에서 데려왔다는 천마는 둘 다 분명 사람이다.

    ‘사기’는 그냥 “앞서(嘗), 신마를 악와수중에서 얻었기로” 태일지가를 지었다고 언급할 뿐 언제라고 밝히지는 않았다. ‘사기’는 이어 “후에 대완을 정벌하고 천리마를 얻었는데 말 이름을 포초(蒲梢)라 했다”고 적고 있다. 그리고 역시 가시(歌詩·노래와 시)를 지었다. 따로 제목은 없다. 이 둘을 합해 ‘한서’는 ‘천마가’에 포함시켰다.

    포초란 이름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또 그 유래가 무엇인지는 알 수 없다. ‘구당서’에는 ‘고려 역대 포주(逋誅)’란 표현이 더러 보인다. 포초는 포주와 관련 있는 단어인 것 같다. 당나라에서 악의적으로 쓴 표현이었을 것이다. 모돈을 묵도(墨毒) 또는 보도(朴達)로 읽는 것과 마찬가지로 욕설이 아닐까 싶다. 앞으로의 연구를 통해 밝혀지길 기대한다.

    ‘사기’의 ‘태일지가’는 신마를 노래한다. 그 내용은 이러하다. “태일신이 천마를 받들어 내리셨네. 붉은 땀에 젖어 땅도 그 땀에 붉게 젖었네. 달리는 모습은 만리를 내닫네. 이제 배필을 안돈하니 용이 친구일세(太一貢兮天馬下, 霑赤汗兮沫流再赭, 騁容與兮口萬里, 今安匹兮龍爲友).”

    ‘사기’의 두 번째 ‘천마가’의 내용은 이러하다. “천마가 오네. 서쪽 끝에서부터, 만리를 지났네. 덕을 갖고 돌아오네. 영령의 위엄에 힘입어 외국을 항복시켰네. 사막을 섭렵해 사이를 복종케 했네(天馬徠兮從西極, 經萬里兮歸有德, 承靈威兮降外國, 涉流沙兮四夷服).” 이 시가가 대완에서 데리고 왔다는 포초마에 관한 것이다.

    이 부분에 관해 ‘한서’에는 가시의 본문 중에 “천마가 오네. 집서시에(天馬徠, 執徐時)”라는 표현이 있다. 여기서 집서란 앞서 말했듯 진의 해를 말한다. 또 보태진 내용에는 “천리를 질러오고 동도를 순행하네(徑千里, 循東道)”라던가 “나의 몸을 세워 곤륜을 갔다 오네(竦予身, 逝昆侖)”라는 표현이 있다. 여(予)와 모(矛)는 혼동하기 쉬운 자다. 서(逝)는 ‘갔다가 거기서 출발했다(往發)’는 뜻으로 해석된다.

    이 두 번째 천마가를 ‘이밀묘지명’에서 추무를 묘사한 것으로 보이는 내용과 비교할 필요가 있다. “힘써 수많은 전쟁을 치르며, 사방을 통치하고, 육합을 떨쳐 흔들며, 팔황을 수중에 거두었다(勞百戰, 經營四方, 振蕩六合, 牢籠八荒).” 육합이란 천지와 사방을 합한 것으로 세계 혹은 우주란 뜻이다. 팔황 역시 팔방(八方)의 끝이란 뜻으로 전세계를 의미한다.

    “고구려 시조 주몽이 한고조 유방 건국 도왔다”

    2004년 8월27일 중국의 고구려사 왜곡에 분노한 시민들이 서울 탑골공원에서 항의집회를 열고 있다.

    그런가 하면 이런 표현도 있다. “이곳 동하에서부터 떠나더니 돌아와서는 서방의 진리를 설파한다(爰自東夏, 言遵西路).” 여기서 동하는 동중국이며 준로는 참된 길, 즉 진리라는 뜻이다. 동쪽에서 출발해 불교 탄생지, 즉 계림(鷄林)을 다녀왔다는 뜻이다. 따라서 두 번째 천마가는 추무(鄒牟)를 노래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가마구지(高句驪)나 구려(句驪)나 모두 마(馬)부 변이 붙은 자를 쓴다. 주몽의 후예는 악와(渥洼) 천마(天馬) 종들이다. 그렇다면 첫 번째의 천마가는 추무의 어머니인 ‘고구려(高句驪)’를 노래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한서’에 따르면 첫 번째 신마가는 원수 3년(기원전 120년) 악와수중에서 말이 태어난 것을 가리킨다. 그해는 신유(辛酉)년이다. 두 번째 신마가는 태초 4년(서기 101년)에 대완국 왕을 죽이고 얻어온 대완마를 대상으로 해서 지어진 것이다. 경진(庚辰)년이니 태세 집서에 해당한다.

    그러나 가시의 끝에 부연한 연도에 구애할 필요는 없다. 당(唐) 태종의 이념에 충실했던 학자 안사고(顔師古)가 고구려 건국 시기를 한나라 이후로 만들기 위해 ‘한서’를 해설하면서 가필했을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또 앞의 논증처럼 그것이 말(馬)이 아니라 사람을 노래한 것이 명백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추무의 고구려 건국은 앞에서 고증한 것처럼 진시황 사후이면서 한고조 유방이 제위에 오르기 전이다. 이 시기의 집서를 찾으면 진의 2세인 호해 원년인 임진(壬辰)년이다. 태세가 진(辰)의 해니 집서의 해며 진나라가 사슴을 잃은 것과도 합당하다. 따라서 해본(忽口)에 추무(鄒牟)가 고구려(高句驪)를 건국하고 건도한 것은 정확하게 기원전 209년 임진년이다. 고구려가 멸망한 시기를 서기 668년으로 잡으니 고구려의 존속 연한은 877년이라 하겠다.

    ‘당서’ 고려전에는 668년 당 장수 이적이 고구려를 치러 떠나는 것과 관련해 가언충의 말을 빌려 고구려는 멸망할 것이라고 예언한다. 그 근거로는 고려 비기(秘記)에 ‘고려가 900년에 미치지 못할 것이며 80세의 대장이 멸할 것’이라 했는데, 고씨(高氏)가 나라를 세운 것이 한나라 때이고 지금까지의 존속기간이 900년이고, 이적의 나이가 여든이니 비기의 예언처럼 고구려는 반드시 망한다는 것이다.

    이 문장은 두 가지 사실을 동시에 얘기하고 있다. 고구려 존속기간은 900년이 채 안 된다는 것과 고구려 건국은 한나라 때라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중국이 고구려 역사를 다루는 기본 방향이다.

    “한나라 황제 기반 마련”

    우리가 고찰한 바와 같이 고구려의 존속기간은 900년이 못 된다. 그러나 중국의 뭇 왕조는 그보다 훨씬 짧은 기간에 명멸했다. 여기서 고구려가 900년을 버텼다는 것이 어떤 점에서 중요하느냐는 의문이 든다.

    사실 장수한 것으로 치면 신라가 고구려에 앞선다. 1690년대까지 존속한 중국 푸젠(福建)성의 신라가 아니라 ‘당서’에 기술된 것처럼 서기 935년에 망한 반도의 신라라 하더라도 고구려보다 더 오래 존속했건만 이것은 언급할 가치가 없다.

    고구려의 건국시점과 존속기간이 중요한 것은 중국의 옛 왕조가 고구려의 통치를 받았기 때문이다. 중국의 사가들은 이 사실을 감추기 위해 한나라 때에 고구려가 건국된 것으로 기록했다. 따라서 앞의 두 가지 내용은 “고구려는 한나라 때부터 국가로 존재했다(高氏自漢有國)”는 기록이 거짓임을 뒷받침하는 셈이다.

    당나라 초 위징(魏徵)이 편찬한 ‘이밀묘지명’에는 분명히 고구려 시조 추무가 “마지막에는 한나라 황제의 기반을 마련해주었다(終基漢皇)”고 기록돼 있다. 그리고 이밀의 시신을 거두어 장사를 지내게 해달라고 당 고조에게 애걸한 사람은 80세의 장군으로 뒷날 고구려를 멸망시킨 이적이었다. 이적은 고구려의 이밀이 거느린 고구려 한 부(部)의 옛 관리였다. 고구려가 중국의 황제를 통치한 내용은 앞으로 차차 밝혀질 것이다.

    추무가 해본에 수도를 창건한 해인 기원전 209년은 추무의 어머니 모두(旄頭)가 흉노, 즉 고구려(高句驪)를 건국한 지 38년째에 해당한다. 진시황이 죽은 다음해다. 그러나 고구려는 물론 이후의 구려, 즉 고려에서도 부여신인 추무의 어머니는 절대적으로 신격화된 존재였으므로 그녀가 탄생한 해를 특히 중요시했을 가능성이 크다. 그래서 첫 번째 천마가는 악와수중에서 천마가 태어난 것을 기려서 만든 것이라 했다(元狩三年. 馬生渥洼水中. 作).

    그러나 정작 ‘한서’ 무제기에는 원수 3년(기원전 120년)이 아니라 원정 4년(기원전 113년) “6월에 후토사 옆에서 보정(寶鼎)을 얻었다. 가을에는 악와수중에서 말이 태어났(馬生渥洼水中)기로 보정과 천마지가를 지었다(作寶鼎, 天馬之歌)”고 언급돼 있다.

    주(注)에는 이배의 해설이 인용돼 있다. 남양 신야현에 사는 폭리장이란 사람이 무제 때 형을 받아 지금의 둔황 일대에서 둔전을 하고 있었는데 그곳의 야생마들 가운데 기이한 말이 있었다. 이를 잡아 길을 들여 조정에 바쳤다. 악와수는 지금의 간쑤(甘肅)성 안시(安西)현 당허의 지류에서 발원한다고 한다.

    ‘한서’와 ‘일본서기’의 오류

    ‘사기’ 악서는 사시가의 다음에 “또 전에 악와수중에서 신마를 얻었기로(又嘗得神馬渥洼水中) 다시 다음으로 태일지가를 지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 표현은 신마를 얻은 것이 꼭 무제 때가 아닐 수도 있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사기’ 효무제본기에는 악와수와 신마에 관한 언급이 없다. ‘한서’에 기록된 ‘마생(馬生)’과 ‘사기’에 기록된 ‘득신마(得神馬)’는 그 의미에 엄청난 차이가 있다. 지존(至尊)한 태일신이 내리신(況) 신마 또는 천마가 어찌 야생마일 수 있을까 하는 의문부터 든다. 한무제도 효사(效祀·제사)에서는 “황을 받들어 받았다(拜況).” 또한 생(生)했다는 것과 득(得)했다는 것도 크게 다르다.

    이상의 여러 가지 사정을 감안해보면 ‘한서’의 ‘악와 천마’ 관련 부분은 당나라 때 손을 본 것이 틀림없다. 그것이 ‘고구려’란 이름의 여인을 칭송한 노래라는 점을 감안하면 더욱 그러했을 것이다.

    주갑(周甲)을 단위로 연대를 조작해 놓은 ‘일본서기’가 초대 천황의 즉위 연대를 잘못 기술한 것은 확실하다. 정확한 기록을 ‘서기’ 편찬자도 갖고 있지 못했거나 ‘한서’를 근거로 계산하느라 착오가 생겼을 가능성이 있다. 아니면 가마우지(高句驪)를 그들의 신화 속에서 일신(日神)으로 만들었기 때문에 가마우지의 건국 연도를 추무왕이 건국한 시기나 즉위한 해로 잘못 이해했거나 아예 그렇게 만들기로 방침을 세워 착오가 생겼을 수도 있다.



    그러나 신유(辛酉)라는 연도 자체가 ‘한서’ 효무제본기와 서로 어긋나는 것으로 보아 애초 조작된 ‘한서’를 참조한 것일 수도 있다. ‘일본서기’가 씌어진 것은 8세기 초엽이고 안사고가 ‘한서’를 손본 것은 7세기 초엽이기 때문에 가능한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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