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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봉관의 ‘옛날 잡지를 보러가다’

이수탁 살부(殺父) 공판

희극과 비극이 뒤엉킨 백만장자 외아들의 패륜 드라마

  • 글: 전봉관 한국과학기술원(KAIST) 교수·국문학 junbg@kaist.ac.kr

이수탁 살부(殺父) 공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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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탁 살부(殺父) 공판

▶1935년 6월20일 이수탁의 무죄확정 소식을 전하는 ‘동아일보’ 호외.▲이수탁이 8년1개월 만에 살부 혐의를 벗고 무죄 석방된 후 ‘삼천리’ 1935년 8월호에 쓴 옥중기.

인간의내면에는 파괴본능이 있다. 무언가를 가꾸고 건설하고 창조하기보다, 때리고 부수고 깨뜨려버리는 것이 본능에 좀더 가깝다. 이러한 파괴본능에서 인간을 보호하는 것이 도덕이고 윤리고 법이다. 그러나 본능을 억누르는 이러한 금기들은 억압적이고 거추장스러워서, 인간은 항상 대리만족을 얻을 방법을 찾아 어슬렁거린다. 폭력이 등장하지 않는 영화는 팥소 없는 찐빵처럼 밋밋하다. 지금도 스크린 속에서는 무수한 건물이 무너지고 수많은 사람이 총에 맞아 쓰러진다. 비행기는 푸른 하늘을 유유히 날아가다가 난데없이 폭발한다.

파괴본능의 총아는 뭐니뭐니 해도 살인이다. 아무리 성인군자 같은 사람이라도 살아가면서 한번쯤 누군가를 죽이고 싶다는 충동을 피할 수 없으리라. 우리가 아직 선량한 시민으로 남아 있는 것은 누군가를 죽이고 싶도록 미워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 아니다. 죽일 만한 용기가 없었거나, 살의(殺意)를 추스를 줄 알았기 때문이다.

성욕, 식욕, 수면욕 같은 욕망은 적당히 절제하면 크게 문제될 것이 없지만 살인욕은 절제 정도로는 부족하다. 철저히 금지돼야 한다. 간절히 죽이고 싶은 경우에 한해 부분적으로 살인을 허용해도 이 세상에 살아남을 사람이 몇이나 될까. 살인의 금기는 전 인류가 공유하는 몇 안 되는 보편문화의 하나다. 그러나 아무리 강하게 금지한다 해도 패륜적 살인사건은 일어나게 마련이다.

옛날 사람들이 얼마만큼 윤리적이었는지 알고 싶은가? 그렇다면 그 시대의 살인사건을 찾아보라. 유영철의 엽기적 살인행각이 우리 시대의 윤리수준을 보여주듯, 옛날 사람들의 윤리수준은 그 시대의 살인사건에 여실히 드러난다. 살인이라고 다 똑같은 살인이 아니다. 살인에도 품격이 있고, 그 품격이 곧 윤리적 수준이다.

아비를 죽인 이수탁

이수탁의 살부(殺父) 사건. ‘익산 백만장자 이건호 독살 사건’이라고도 하는 이 사건은, 비록 70년 세월의 무게에 잊혔지만 1920~30년대 사람들이라면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했다.

도적놈이 사람을 죽이는 것도 돈 때문이요 이수탁(李洙倬)이가 살부공판(殺父公判)을 받는 것도 돈 때문이다. 돈 돈 황금! 얼마나 좋은 것이냐 얼마나 위력이 있는 괴물이냐. (‘제일선’ 1933년 2월호에 발표된 채만식의 ‘황금무용론’ 중에서)

아들이 백만장자 아버지를 죽였다니, 시작부터 어쩐지 ‘돈 냄새’가 솔솔 풍긴다. 우선 이 사건의 개요를 알아보자.

전라북도 익산의 백만장자 이건호를 그의 아내 박소식과 아들 이수탁, 그리고 며느리 김영자가 공모하여 아편을 먹여 독살했다. (‘익산 백만장자 독살사건 1’, ‘동아일보’ 1929년 12월17일자)

이건호라는 사람은 고약한 아들뿐 아니라 몹쓸 아내와 며느리까지 둔 지독히 불운한 사람이었나 보다. 그런데 아무리 돈이 좋다손 쳐도 온 가족이 한마음으로 뭉쳐 가장에게 아편을 먹였다는 점이 석연치 않다. 아편을 먹고도 사람이 죽을까. 궁금증이 꼬리를 문다.

익산의 부호 고(故) 이건호의 유산 백만원에 가까운 황금을 중심으로 그의 첩 박소식과 그의 아들 이수탁, 이수탁의 첩 김영자가 공모하여 전기 이건호를 독살하였다는 전기 세 명에 대한 살인사건은 누보(屢報)한 바와 같이, 재작년(1927년) 5월 직접 경성지방법원 검사국의 손을 거쳐 동(同) 법원 오정(五井) 예심판사의 담임으로 무려 2년반 동안이나 죽은 지 3년이 넘은 시체를 발굴하여 해부하고, 해부한 그의 고깃덩어리를 이곳저곳으로 감정을 시키는 한편, 사건의 피고는 물론 사건에 직접간접으로 관련이 있는 50명에 가까운 증인을 소환하여 심문하였으나 오히려 범죄를 구성할 만한 증거는 미약하여 사건 담임 오정(五井) 예심판사는 사건의 좀더 확실한 증거를 얻기 위해 오는 11일 약 5일간 예정으로 동(同) 예심 복전(福田) 서기, 신(申) 통역(일본어 통역관-인용자)을 대동하고 사건 담임검사와 한 가지로 논산, 강경, 익산 방면에 출장을 하게 되었는데, 아직 독살이냐? 그렇지 아니하면 병사냐? 하는 경계선에서 배회하고 있는 동 사건은 소설로도 진기한 소설의 모델이 될 만한 것이라더라. (‘이수탁 사건 현장 임검(臨檢)키로’, ‘동아일보’ 1929년 12월4일자)

과연 범상치 않은 사건이다. 남편을 죽인 박소식은 본처가 아니라 첩이고 아비를 죽인 이수탁은 적자가 아니라 서자다. 며느리도 아들의 본처가 아니라 첩이다. 도대체 어찌 된 집안이기에 아비도 축첩(蓄妾)이고 아들도 축첩이란 말인가. 더욱 가관인 것은 이건호가 죽은 지 3년이 지나서야 세 명의 ‘시부시부범(弑父弑夫犯)’이 체포됐고, 독살을 증명하기 위해 땅에 묻힌 지 3년이 지난 시체를 파내 해부하고, 해부한 ‘고깃덩이’를 여기저기로 보내 감정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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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전봉관 한국과학기술원(KAIST) 교수·국문학 junbg@kaist.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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