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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과 사람

손길승 전 SK 회장 부인 박연신씨

청각장애 아들 서양화가로 키우고,13년째 장애인 잡지 만드는 아름다운 어머니

  • 구미화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mhkoo@donga.com

손길승 전 SK 회장 부인 박연신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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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93년 여고동창생들과 ‘열린지평’창간
  • 비장애인 필자 원고료 없고, 장애인 원고료는 후하게
  • 1층은 아들 화랑, 2층은 어머니 작업실
  • 매일 편집실에서 울다
  • SK 전·현직원, 알게 모르게 도움의 손길
손길승 전 SK 회장 부인 박연신씨
오전에 인사동에 가본 적이 있는가. 이른 아침이 아니더라도, 오전 11시 무렵만 해도 인사동은 들뜨거나 분주하지 않다. 상점의 절반쯤은 문을 열고 영업 준비를 하지만 나머지 절반은 아직 문이 닫혀 있다. 그래서 이 시각 인사동을 찾을 때면 말끔히 치장한 모습만 보던 연인의, 부스스하지만 그래서 더 안아주고 싶은 얼굴을 보는 듯 가슴이 설렌다.

인사동에 계간 ‘열린지평’ 편집실이 있다. ‘열린지평’은 장애인의 재능을 발굴하고 건전한 사회참여 기회를 제공한다는 취지로 1993년 전북 전주가 고향인 주부 5인이 창간한 잡지. 창간 멤버이자 현 편집인인 박연신(朴姸信·63)씨는 손길승(孫吉丞·64) 전 SK그룹 회장의 부인이다.

인사동 초입에 있는 낡은 건물 2층, 작은 창밖으로 더 작은 화분들이 앙증맞게 놓인 그곳에 박연신 편집인이 있다. 하얀 나무문에 달린, 어릴 적 시골집에서 보던 동그란 문고리를 잡아당겼다. 갑자기 상점에서나 들을 법한 벨소리가 나 주춤하고 보니 좁고 가파른 나무계단으로 막혀 있다. 고개를 들이밀고 올려다보았다. 문이 열리며 난 벨소리에 누군가 왔음을 알아차린 중년 여성이 이쪽을 내려다본다.

“편집인 계신가요?”

아무 말 없이 손으로 안쪽을 가리키기에 들어오라는 신호로 알고 계단을 올랐다. 책상과 탁자 하나가 겨우 놓일 만큼 좁고 천장이 낮은 게 영락없는 다락방이다. 컴퓨터 한 대 없이 책과 종이들만 어지러이 놓인 책상 앞에 그가 앉아 있었다. 집에서 대충 자른 듯한 단발머리에 수수한 옷차림, 그리고 계단참에 가지런히 벗어놓은 운동화에서 그가 어떤 사람일지 힌트를 얻는다. 문을 열고 처음 본 이는 수년째 ‘열린지평’을 돕고 있는 자원봉사자였다. 막 나가려던 참이던 자원봉사자는 노란 꽃잎을 띄운 물 한 잔을 기자 앞에 놓고 떠났다.

“조용히 일하고 싶다”

그와 단둘이 남았다. 9월 초, 가을호 마감을 막 끝내고, 책이 인쇄되어 나오길 기다리는 가장 한가로운 시간이다. ‘열린지평’은 두 개의 사무실을 갖고 있다. 기자가 찾은 인사동 편집실 인근에 다른 사무실이 하나 더 있다. 그곳에 3명의 직원이 있고, 인사동 편집실엔 주로 박씨 혼자 나와 있다.

낯선 이의 방문에 경계의 눈빛을 보이던 그는 ‘기자’라는 말을 듣자마자 “인터뷰하지 않겠다”며 손사래를 쳤다. “손길승 회장 얘기가 아닌, ‘열린지평’ 얘기만 하자”고 해도 고개를 저었다. 어떤 구실을 내놓아도 소용없었다. 그는 이미 여러 번 같은 일을 겪은 듯 침착하고 완강하게 자신의 뜻을 분명히 전했다.

“남편이 아무것도 하지 않고 조용히 있는데 내가 매스컴에 얼굴을 내밀고 떠들 수 없다”는 게 한 가지 이유이고, “자식 키우듯 키워온 잡지인 만큼 생색내지 않고 조용히 일하고 싶다”는 게 또 다른 이유다. 그는 무엇보다 “기사가 나가봤자 장애인이나 ‘열린지평’에 실질적으로 도움 되는 일은 전혀 없을 것”이라는 확신을 갖고 인터뷰를 거부했다.

장애인 이야기를 다룬 영화가 흥행에 성공하고 오락 프로그램에 출연한 장애인이 시청자들에게 감동을 주는 걸 보면 우리 사회의 장애인에 대한 거부감이 줄어든 것 같지만, ‘관람’이 아닌 ‘실천’을 요구할 때 사람들은 여전히 뒤로 물러선다는 것. 그는 “여기저기서 인터뷰도 하고, 취재도 해갔지만 그걸 보고 정기구독을 하겠다고 연락해온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며 씁쓸해했다.

‘열린지평’ 창간 당시 장애인 잡지를 만든 전업주부들의 이야기는 여러 일간지와 방송에서 화제로 다뤘다. 한 예로 1994년 1월31일자 ‘한국일보’엔 ‘주부들이 만든 장애인 전문잡지 ‘열린지평’ 잔잔한 파문’ 이라는 제목의 기사가 실렸다. 1993년 11월 창간호에 이어 봄호를 냈는데 정기구독자가 1000명에 이르는 등 장애인의 등불 구실을 톡톡히 하고 있다는 내용이다.

“…장애인들에겐 삶의 희망을 주는 대신 장애인과 비장애인들 사이에 놓인 두터운 벽을 깨고 열린 마음으로 더불어 살아가게 하는 노력이 짙게 배어 있다. 슬프고 어두운 내용보다는 밝고 긍정적인 얘기로 채워진 것도 특징이다. 다리와 발가락으로 예술혼을 불태우는 임인석 화가, 청각장애를 가졌으면서도 현대정공에 입사한 송지욱씨 등 좌절하지 않고 극복하는 장애인의 삶이 가정주부의 입장에서 그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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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미화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mhko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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