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10월호

이인용 남작 부부의 ‘소송 전쟁’

친일파 귀족의 백만금 유산이 5년 만에 먼지로 변한 까닭은?

  • 전봉관 한국과학기술원(KAIST) 교수·국문학 junbg@kaist.ac.kr

    입력2005-10-13 15:2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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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인용 남작 부부의 ‘소송 전쟁’

    막대한 재산을 두고 벌인 소송으로 장안에 화제를 일으킨 이인용 남작(왼쪽)과 부인 조중인.

    부유하고 귀해지기는 어려워도 가난하고 천해지기는 쉬운 것이 세상의 이치다. 부귀는 이루기보다 지키기가 어렵고, 대대로 이어가기는 더더욱 어렵다. 오늘날이 그러할진대 식민지 시대라고 달랐을 리 없다. 일제의 서슬이 시퍼렇던 시절, 친일파는 일본의 비호 아래 대대손손 부귀영화를 누렸을 것 같지만, 사실은 그렇지도 않다. 나라를 팔아먹은 대가로 일본의 작위를 받은 이른바 ‘조선귀족’들도 마찬가지다.

    조선시대에는 귀족이 없었다. ‘조선귀족’은 역설적으로 조선이 사라진 이후 생겨났다. 1910년 7월 한반도를 손에 넣은 일본은 같은 해 10월7일 소위 ‘합방 유공자’ 76명에게 작위를 수여한다. 공작은 없었고 후작이 6명, 백작이 3명, 자작이 22명, 남작이 45명이다. 작위는 재산과 함께 세습됐지만, 몇몇은 처음부터 작위 받기를 거부했고, 몇몇은 독립운동, 파산, 품위실추 등의 이유로 작위를 박탈당해 1930년대에는 60명 내외의 귀족만이 남게 되었다.

    일본으로부터 작위를 받은 ‘조선귀족’은 대부분 조선왕실의 종친, 척족이거나 대한제국 시기 대신들이었다. 명문거족의 후예로 물려받은 재산이 많았고 무능한 정부의 고위관료로 재직하면서 갖가지 비리를 저질러 긁어모은 재산도 엄청났다. 게다가 작위와 함께 등급에 따라 2만5000원에서 50만원까지 지급된 ‘은사공채’를 덤으로 받았다. 산술적으로만 생각하면 어지간한 사치와 방탕으로는 줄어들지 않을 재산이다. 그러나 ‘조선귀족’ 대부분은 작위를 받은 지 겨우 10여 년 만에 그 많던 재산을 탕진하고 심각한 생활난에 허덕였다.

    ‘제일선’ 1932년 12월호에 실린 ‘조선귀족 어디로 가나’라는 기사는 그 원인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비록 작위는 얻었으나 정계의 실권에는 하등 머리를 들이밀지 못하게 되고, 귀현(貴顯)은 얻었으나 사회의 대우는 그다지 향기롭지 못하게 되니 그들은 할 수 없이 사회의 한 귀퉁이에 숨어서 한가한 나날을 보냈다. 세상과 격리되어 일신상 부족한 것이 없는 생활을 영위하기 그럭저럭 10여 년이었다. 밖으로 할 일이 없고 안으로 생활이 궁하지 아니할 뿐 아니라 옛날에 살아오던 풍도(風度)와 운치는 그대로 남았으니 그들의 하는 일이 묻지 아니하여도 가히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사람의 욕망은 끝이 없고 물질의 공급은 한이 있는 것이라 마침내 몇몇 사람을 제외하고는 조선귀족 일체가 공황에 휩싸이게 되었으니 그것은 무엇보다도 지금껏 호화를 자랑하던 그들의 생활에 몰아닥친 재정의 파탄이었다.



    ‘조선귀족’의 몰락

    상속 받은 유산과 긁어모은 재산을 1930년대까지 유지한 귀족은 ‘토지왕’ 민영휘 자작, 이완용의 장손 이병길 후작과 차남 이항구 남작, 박영효 후작, 고희경 백작, 윤덕영 한창수 이달용 이풍한 김사철 남작 등 열손가락으로 꼽을 정도였다. 나머지 귀족들은 재산을 송두리째 들어먹고 오늘은 이왕직, 내일은 총독부, 발바닥에 땀나도록 드나들며 살려달라고 애원했다. 깡통만 안 찼을 뿐 거지나 진배없었다.

    지성이면 감천이라 했던가. 1929년, 영락한 ‘조선귀족’을 구원해줄 은인이 나타난다. 총독부 정무총감으로 부임한 이케가미(池上)는 조선귀족의 몰락 소식을 듣고 ‘일본의 작위를 받은 귀족이 생활의 곤궁을 겪는다는 것은 국가의 체면상 그대로 둘 수 없다’고 판단한다. 그의 지시로 총독부는 250만원의 자금을 할애해 ‘창복회(昌福會)’라는 재단을 설립하고 몰락한 귀족의 구제에 나선다. 창복회는 생활고에 시달리는 귀족에게 매월 100원, 200원씩 나눠줬다. 당초 총독부가 이들에게 작위를 내준 명분은 ‘민심 수습’. 결국 이 때문에 총독부는 광복 직전까지 돈 달라고 물귀신처럼 물고 늘어지는 ‘조선귀족’의 등쌀에 시달려야 했다. ‘조선귀족’에 몸서리친 것은 조선 민중이나 총독부나 마찬가지였다.

    과거의 영화에서 몰락의 참경(慘景)을 당하여 창복회에 등을 대고 목숨을 이어가는 귀족이 69인 중 33인으로 거의 반수라 한다. 30명 내외의 귀족이 몰락하였다 하여 일반의 사회인으로서는 하등 슬퍼할 일이 아니지만, 그들 자신으로 지나간 날을 회상하고 오늘의 영락을 생각한다면 또한 강개참회(慷慨懺悔)의 눈물을 흘릴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최근에 와서는 윤택영 후작의 파산사건을 다음하여 세인의 화제에 오르내리는 또 하나의 사건이 생겼으니 그것은 누구나 다 아는 이인용 남작 가의 부부전(夫婦戰)이다. 그 내용에 이르러서는 이미 신문잡지에 떠들 대로 떠들어놓았으니 다시 늘어놓을 필요도 없거니와 백만의 재산을 가지고도 사람이 못생겨서 남의 바람에 녹아 나는 이인용 남작 가의 일은 오늘날 귀족 생활을 여실하게 반영하는 현상이 아니고 무엇이랴. (‘조선귀족 어디로 가나’, ‘제일선’ 1932년 12월호)

    조선귀족의 경제적 파탄을 이야기하다가 뜬금없이 이인용 남작 집안의 부부싸움 이야기가 등장한 이유는 무엇일까. 부부싸움을 얼마나 크게 했기에 싸움이 아니라 전쟁이라고 표현했을까. 이인용 남작가(家)의 부부싸움은 소위 ‘귀족계급’의 무능과 부패, 도덕적 타락을 가장 집약적으로 보여주는 대사건이었다.

    지금부터 ‘신문잡지에 떠들 대로 떠들어놓아서 세상사람 누구나 다 알고 있었다’는 세기의 부부싸움 현장으로 들어가보자.

    이인용 남작 집안의 ‘夫婦戰’

    이인용 남작의 부인 조중인은 1932년 5월9일 동대문경찰서를 찾아가 고소장을 제출한다. 이로써 이재극 남작의 100만원 유산을 둘러싼 5년간의 암투가 백일하에 드러나게 된다.

    고 이재극 남작의 상속인인 장남 이인용 가(家)에 가정쟁송사건이 일어났다. 이인용의 아내 조씨는 그 남편 외 수인(數人)을 걸어 작 9일 동대문경찰에 폭력 취체령 위반과 협박·공갈의 죄명으로 고소를 제기하였는데, 고소장의 내용은 조씨가 간통하였다고 그 남편 이인용과 시가 사람들이 이혼장에 도장을 찍으라고 구타·협박하고 또 피고소인들은 이재극 가 재산관리위원장인 박영효씨가 관청의 교섭을 맡아보니 이혼장에 도장을 찍지 않으면 경찰에 잡아넣겠다고 공갈하였다는 것이다. 이인용과 그 아내에 대한 분쟁은 이전부터 일어난 것으로 상당한 내용이 숨어 있는 듯하다. (‘동아일보’ 1932년 5월10일자)

    이재극 남작은 왕실의 종친으로 구한말 한성판윤, 법부대신, 학부대신, 내부대신, 궁내부대신 등 요직을 두루 지낸 대표적인 친일 정객이다. 일본 공사관에서 열린 일왕의 생일잔치에 가서 “텐노 헤이카 반자이(천황 폐하 만세)”를 불렀다가 “신하는 제 나라 국왕에게만 만세를 부르는 법도도 모르느냐?”는 고종의 꾸지람을 듣자 “반자이라고 했지 만세라 하지 않았나이다”라고 변명을 늘어놓았다는 일화는 지금껏 인구에 회자된다. 그는 가렴주구로 긁어모은 재산을 죽을 때까지 지켜낸, 열손가락으로 꼽을 수 있는 귀족 중 하나였다. 그러나 그렇게 살뜰히 지켜낸 재산도 어리석은 아들에게 상속된 지 5년 만에 바닷가 모래알처럼 뿔뿔이 흩어진다.

    부부싸움의 주인공 이인용과 조중인은 이재극의 장남과 며느리다. 귀족가 부인이 남편과 시가 사람들을 걸어 고소를 제기하는 것도 이례적인 일이지만, 고소장의 내용은 더욱 가관이다.

    남편 있는 여인이 간통을 하고도 이혼하지 않겠다고 버티면 경찰에 고발해 콩밥을 먹이든지 조용히 법원에 이혼소송을 제기하든지 하면 그만이다. 그처럼 손쉬운 일을 제쳐두고 알 만한 집안에서 뭐가 아쉬워 애꿎은 여인을 구타·협박하고 공갈까지 하면서 이혼장에 도장을 찍으라고 강요했을까. 중추원 부의장으로 공사다망했을 박영효 후작은 왜 상속자가 시퍼렇게 눈뜨고 있는 집안의 재산관리위원장으로 들어앉아 남의 가정 이혼문제에 개입한 것일까. 기사의 마지막 줄에 적시된 대로 ‘상당한 내용’이 숨어 있는 사건임에 틀림없다.

    조중인은 남편과 시가 사람들을 경찰에 고발하는 데 그치지 않고 열흘 후 전대미문의 ‘동거청구소송’을 제기한다. 말하자면 남편과 한이불 덮고 살게 해달라고 법에다 호소한 것이다.

    고 이재극 남작의 상속자 이인용 남작의 부인 조중인은 원고가 되어 그의 남편을 상대로 19일 경성지방법원 민사부에 동거청구소송을 제기했다. 소장의 내용을 보면, 원고는 구한국시대의 명문대가인 황주목사 조윤희의 둘째딸로 지금으로부터 9년 전 앞서 말한 이남작과 결혼을 하여 장남 이해윤 장녀 이진숙 등의 1남1녀를 낳았으나 남편은 지난 1927년 남작을 습작한 후 주위에서 남작을 이용하려는 모든 악배들의 꼬임을 받아 화류계에 투족하여 원고를 학대하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지난 2월16일 밤에는 그들 악배 5, 6명이 원고의 침실에 달려들어 남작의 명령이라고 하면서 원고로 하여금 남작의 집에서 나가라고 강요했다. 그러나 원고는 이에 불응하고 끝끝내 저항을 하였으나 악배들은 그 다음날 밤에 또다시 몰려와서 원고의 퇴거를 강박하였으나 원고는 죽기를 각오하고 이에 저항하였다. 그 악배들은 필경 원고의 몸에 손을 대어 강제로 몰아내므로 약한 몸이 어찌할 수 없어 친가로 갔다가 그 익일 다시 들어온즉 피고의 집 문간에는 다수한 굳센 남자들이 지키고 서서 원고가 들어오지 못하게 하였다. 그후 원고는 할 수 없이 피고의 개심하기만 기다렸으나 도무지 회개치 않으므로 부득이 법률의 보호를 받고자 이 소송을 제기한다고 하였다. (‘동아일보’ 1932년 5월20일자)

    경찰 고소장에는 남편과 시가 사람들, 박영효 후작, 재산관리위원회가 등장하더니, 법원 소장에는 ‘악배들’까지 나타난다. 이 가련한 여인은 5년 동안 도대체 몇 사람을 상대로 싸웠단 말인가.

    그러나 조중인의 주장에도 미심쩍은 부분은 있다. 우선 남편이 화류계에 발을 들여놓은 후 5년 동안 아무 말이 없다가 그해 2월 들어서야 갑자기 아내더러 집에서 나가라고 한 이유가 석연치 않다. 5년 동안 살던 대로 살면 되는데, 이인용은 왜 안 나가겠다는 아내를 억지로 내치려 했을까. 아내가 잘못을 저지르지 않았다면 폭력까지 행사하며 내쫓으려한 까닭은 무엇이었을까.

    이인용 남작 부부의 ‘소송 전쟁’

    당대의 친일파였던 이재극 남작

    조중인이 남편과 헤어지지 않으려고 소송까지 걸면서 매달린 것도 이해하기 어렵다. 도대체 남편을 얼마나 사랑했기에 학대하고, 때리고, 협박하고, 공갈해도 법에 호소해가며 남편과 같이 살고자 했을까. 조중인에게도 숨겨놓은 비밀이 있었음이 분명하다. 아닌게아니라 그로부터 2주 후 이인용은 음탕·방종한 아내와 도저히 같이 살 수 없다고 이혼청구소송을 제기한다.

    시내 이화동 20번지 이인용 남작의 부인 조중인이 그의 남편을 상대로 동거청구소송을 제기한 것은 이미 보도한 바와 같거니와 지난 2일 이인용 남작은 다시 원고가 되어 그의 처 조중인을 상대로 이혼청구의 반소를 경성지방법원에 제기했다.

    그 소장의 내용을 보면 피고 조중인은 귀족 집 주부의 몸으로 천성이 음탕 방종한데, 지난 1927년 원고의 부친 고 이재극 남작이 사망한 후 가사를 정리하기 위하여 박영효, 이달용 제씨와 총독부와 이왕직 관계자들로서 가사 정리위원을 선정하여 원고의 집 재산을 정리하는 중 피고는 이 정리위원들을 싫어하며 스스로 이팔용이라는 자를 불러들여 가사를 정리하면서 이상의 정당한 정리위원들을 모해할 목적으로 기도를 하여 그 위원 중 우연히도 두 사람이나 죽어버렸다.

    그리고 1927년부터 1930년까지 3년간 피고는 원고의 집 재산을 거의 탕진해버렸으니 즉 원남동 가옥을 6만원에 팔고 은행회사 주권과 안성, 포천 등지에 있는 토지와 현금 등 10만2000원을 자유 처분해 가지고 그 중 4만5000여 원은 피고가 소비해버렸다.

    이외에 피고의 음탕한 증거로는 전기 사설정리위원 이팔용과 지난 1927년 여름부터 정교 관계를 맺고 또 피고가 지난 1929년 봄 관철동 민영진 병원에 입원해 있을 때에 친척관계가 있는 민성기와 정교 관계를 맺어서 동년 여름 석왕사까지 동행하여 그 관계를 계속하고 또 피고의 상노(床奴) 이철돌과도 정교를 하였으므로 원고의 호적 면에 입적되어 있는 장남과 장녀도 기실 원고의 자식이 아니다.

    원고는 이 사실을 투서와 기타 모 방면으로부터 정확하게 알고 원고의 친족회를 한 결과 피고와 이혼하기로 되어 피고에게 이 사실을 고했던바, 피고도 그 비행을 부끄러워하여 자기 친가로 퇴거한 것이다. 그러므로 지난번 피고가 동거청구소송을 제기한 소장에서의 주장처럼 원고가 폭력을 행사하여 피고를 내쫓은 것은 아니며 단연 이혼을 청구했는데 재판은 오는 22일로 결정했다고 한다. (‘동아일보’ 1932년 6월3일자)

    귀족가의 부부싸움은 점입가경이었다. 폭행·협박·공갈죄로 형사고발되고, 동거청구소송의 피고가 된 이인용은 합의를 시도하기는커녕 도리어 아내를 간통죄로 고소하고 이혼청구소송을 제기한다.

    “내가 화류계에 투족하여 아내를 협박했다고? 아니다. 간통을 한 것은 아내다. 아내가 나은 자식들도 내 자식이 아니다. 어디 그뿐인가. 아내는 허랑방탕한 생활로 가산을 탕진했다.”

    진실을 말한 사람은 누구일까. 아내일까, 남편일까, 아니면 둘 다 진실을 말한 것일까. 이쯤에서 법정공방 이야기는 잠시 미뤄두고,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지난 10년간 이인용 남작 집안에서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부터 알아보자.

    철없는 어린 신부

    서울 동쪽 낙산 곁에 우뚝 솟은 대궁은 이재극 남작의 저택이었다. 재산이면 재산, 명예면 명예 어느 것 하나 아쉬울 게 없었건만 이재극에게는 남모르는 근심이 있었다.

    “내게는 가까운 친척이 없는데 아들의 건강이 부실하니 내가 죽으면 이 집안이 어떻게 될지 걱정이다.”

    이재극은 현명한 며느리를 얻어 가사의 뒷날을 맡기기로 결심한다. 그리고 집안, 재산, 외모 같은 것을 일체 따지지 않고 총명한 처자를 백방으로 수소문한다. 그 결과 아들 이인용이 12세 되던 해, 14세 먹은 조중인을 며느리로 맞아들인다. 남편이 무엇인지 아내가 무엇인지를 알지도 못하는 어린 부부였지만, 두 사람은 웅대한 대궁에서 오누이처럼, 원앙처럼 사이좋게 지낸다.

    1927년 봄이었다. 철모르는 열네 살 소녀는 어느덧 성숙한 여인으로 성장했다. 무엇 하나 부족한 것 없이 살아온 조중인은 꽃같이 화려한 청춘에 이르자 남편의 부실한 건강이 원망스러워졌다. 봄꽃 향기가 바람에 실려 대궁의 담을 넘어 들어오자 대궁의 젊은 여주인의 마음은 몹시 심란해졌다. 하루는 신경이 날카로워지고 까닭 없이 짜증이 난 조중인이 이재극 남작이 부인 방에서 집안일을 이야기하는 것을 보고 중얼거렸다.

    “늙은이는 부부 사이 의가 좋고 젊은 사람은 아내를 돌볼 줄 몰라.”

    조부인은 저도 모르게 이런 말을 입 밖에 내었다. 이 말은 어느덧 하인의 입에서 남작부인 귀에 건너오고 다시 이재극 남작에게까지 알려졌다. 이재극 남작은 모든 일을 알았다는 듯이 머리를 끄덕이고 말을 삼가라 할 뿐 며느리를 꾸짖지 않았다. 아들을 아는 이재극 남작은 며느리의 ‘히스테리’를 꾸짖을 생각보다도 며느리의 청춘기가 까닭 없이 두려웠다. 이재극 남작은 며느리의 꽃피는 듯한 청춘을 보고는 가여워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금단의 과실’을 따 먹는 불상사가 이 집에서 나지 않을까 하고 남모르는 불안을 느꼈다. (‘이남작가 집안싸움’, ‘매일신보’ 1932년 10월24일자)

    이인용 남작 부부의 ‘소송 전쟁’

    ▲▲‘동아일보’ 1932년 8월13일자에 실린 조중인의 밀서.<br>▲조중인이 시아버지 이재극 남작에게 써준 자복서. ‘동아일보’ 1932년 11월1일자에 실린 사진이다.

    불길한 예감은 적중했다. 이재극의 귀에 며느리의 추문이 수시로 들려왔다.

    “하인 이철돌과 부정한 관계를 맺었다. 또 누구누구하고도 이상하다.”

    이재극은 길게 한숨을 쉬고 머리를 흔들었다.

    ‘참자. 가문을 생각하자.’

    이재극은 가을바람같이 우수수 들려오는 풍설과 소문에 눈을 감았다. 그러나 며느리의 행동만은 밤낮으로 감시했다. 며느리가 수상한 거동을 보일 때마다 그는 혼자 속으로 근심을 거듭했다. 과연 조중인은 제3자가 봐도 수상하게 여길 만큼 하인 이철돌을 총애하고 자주 불러들이는 것이었다.

    하루는 이재극이 집안일로 며느리를 꾸짖었다. 그날 밤 조중인은 금비녀를 뽑아놓고 후원에 있는 우물에 나아가 자살한다고 난리를 쳤다. 이 일을 본 이재극은 지금까지 참아오던 온갖 분노가 폭발하여 조중인을 본가로 돌려보내려고 결심한다.

    이남작은 엄격한 목소리로 며느리를 불렀다. 조부인은 무시무시한 태도로 남작 앞에 앉았다.

    “부모의 꾸지람에 반기를 들고 자살을 하려는 일이 자식의 도리더냐?”

    이남작의 목소리는 노여움에 떨렸다. 조부인은 머리를 수그린 채 아무 대답을 못했다.

    “내가 그 동안 너의 행동이 아름답지 못한 점도 있고 소문도 들리었으나 젊은 때 일이라 참아왔다. 네 소행이 부모의 명령에 반항하는 뜻이 있는 이상 너는 내 집을 떠날 사람이다.”

    이 최후의 엄명을 받은 조부인은 흐느껴 울며 용서를 구했다. 며느리가 눈물을 보이자 이남작의 노여움은 눈 녹듯 풀어졌다.

    “그러면 이번은 용서할 터이니 서약서를 써 오너라.”

    조부인은 시아버지의 용서를 받고 자기 방으로 돌아와 서약서를 썼다.

    “이번 한 번만 용서하여주시면 다시는 그런 일을 하지 않겠습니다. 이후에는 내쫓겨도 항거치 않겠습니다.” (‘매일신보’ 1932년 10월25일자)

    그후 조중인은 울분을 삭이며 우울한 나날을 보낸다. 그녀의 일거수일투족에는 시아버지와 친척들의 감시의 눈초리가 따라붙었다. 그는 의식적으로라도 행동을 삼가지 않을 수 없었다. 애매한 하인들에게만 수시로 분풀이를 했다. 그러나 유독 이철돌만은 친절히 대했다.

    이 시기 잘생긴 청년 하나가 대궁에 나타난다. 바로 삼등비행사이자 소문난 ‘오입쟁이’ 민성기였다. 그는 이재극의 외손자, 이인용의 조카였다. 민성기는 상하이 임시정부에서 활약하던 아버지 민정식의 권유로 안창남과 함께 잠깐 동안 중국내전에 참전했다가 서울로 돌아와 어머니가 기거하던 외가에 머물렀다.

    외숙모와 생질. 조부인과 민성기는 이러한 친척의 계단을 놓고 수시로 접촉하였다. 히스테리에 신경이 예민하여진 외숙모에게 민성기는 친절한 간호를 베풀어 남모르는 위안을 주었다. 그동안에도 이인용 남작은 아무것도 모르는 듯이 조부인을 아내로 대하고 접촉하였다. 그러나 건강이 부실한 이인용 남작은 항상 조부인에게 불만과 번민을 안겨주었다. 민성기의 대궁 출입은 날마다 빠지지 않았다. 조부인과의 접촉도 날마다 있었다. 외숙모의 방에서 민성기는 달콤한 감언을 널어놓았다. (‘매일신보’ 1932년 10월25일자)

    며느리를 꾸짖은 지 두 달 후, 이재극은 앓고 있던 지병이 악화되어 괴로운 신음을 계속하다가 유언 한마디 없이 세상을 떠난다. 주인을 잃은 대궁은 그 순간부터 커다란 비극에 휩싸인다. 가까운 친척 하나 없는 젊은 주인은 거대한 대궁을 꾸려갈 만큼 기질이 건실치 못했다. 대궁은 키가 부러져나간 배마냥 방향 없이 흔들리기 시작한다.

    이재극 남작이 죽은 후 대궁의 주인은 조부인이 아닐 수 없었다. 이재극 노남작의 뒤를 이을 이인용 남작의 정실부인, 대궁을 호령할 사람은 조부인이 아니고 누구였으랴. 더욱이 이인용 남작이 한 집안을 다스릴 건강을 못 가졌으니, 조부인의 손에 이 집안의 실권은 들어가야 할 형세였다. 엄격한 시부 밑에 모든 울분을 가슴 속에 감추고 적막하게 지내던 조부인은 대궁의 여왕으로 호령을 부리기 시작했다. 조부인은 대궁의 젊은 여왕의 자리에 올라앉게 되자 방만한 성격을 드러내며 돈 아까운 줄 모르고 낭비했다.

    “수십만금의 거재는 내 것이다. 사고 싶은 것을 왜 못 사며, 주고 싶은 것을 왜 못 주느냐.”

    시부모의 엄시 하에 압박되었던 심전의 울분은 일시에 폭발되어 이 분풀이를 돈 쓰는 것으로 대신하였다. (‘매일신보’ 1932년 10월27일자)

    조중인의 전횡은 날이 갈수록 심해진다. 그러나 처시하(妻侍下) 이인용은 이 모든 악행을 수수방관할 뿐이었다. 소문이 퍼지자 먼 친척들이 이인용의 뒤를 봐준다며 대궁으로 떼지어 몰려온다. 그러나 뒤를 봐준다는 것은 한낱 명분일 뿐이고, 마음속으로는 모두 그 기회에 땅 마지기나 건지려는 흑심이었다. 조중인이 탕진하는 만큼 친척들이 빼먹을 재산은 줄어든다. 이인용의 주위에 몰려든 친척들은 대궁의 장래를 염려한다며 조중인의 방종한 행동에 사사건건 간섭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친척들이 잔소리를 할 때마다 조중인은 “내 집의 내 돈을 쓰는데 딴 사람이 군소리할 권리가 어디 있느냐”며 노여움을 드러냈다.

    친척들의 간섭이 심해지자 조중인은 그에 대한 반발로 더 많은 돈을 쓰고, 더 많은 사람과 추문을 뿌린다. 하인 이철돌, 외조카 민성기에 이어 개인적으로 고용한 사무원 이팔용과도 추문이 일었다. 딴 사람이 무슨 말을 하면 할수록 조중인의 행동은 더욱 방약무인해졌다.

    “아무리 제 살림이라고 하여도 남편이 있는 이상, 남편과 이렇다는 말 한마디 없이 막대한 돈을 써야 옳은가? 우리는 대궁의 장래를 위하여 이 남작의 명예를 위하여 말하는 것이다.”

    친척들은 이렇듯 조중인에게 반기를 들고 결속한다. 자신들의 힘만으로 조중인의 전횡을 막기 힘들다고 판단한 친척들은 ‘귀족회’에 연대를 제안한다. 돈에 굶주린 귀족들은 연대제안에 쾌재를 부른다. 이로써 조중인 일파와 친척 일파에 이어 귀족 일파까지 이재극이 남긴 ‘백만금 눈먼 돈’을 먹고자 덤벼든다.

    ‘귀족회’는 조중인의 전횡을 빌미삼아 이왕직의 찬동을 얻어 박영효 후작을 위원장으로 하는 재정정리위원회를 출범시킨다. 재정정리위원회는 이인용 가의 재정 일체를 인수하고, 위원장의 결재 없이는 한푼도 지출할 수 없게 하였다. 전대미문의 재정정리위원회가 출범하자 조중인의 실권은 하루아침에 안개같이 사라진다. 조중인의 전성시대는 막을 내리고, 기나긴 투쟁기로 접어든다.

    재정정리위원회의 활약(?)

    박영효 후작이 이끄는 재정정리위원회가 이인용 집안의 재산 정리에 착수하자 조중인의 방탕함이 속속 밝혀진다.

    조부인이 빚내 쓴 돈과 마름에게 가져다 쓴 돈은 적지 않았다. 1927년에는 마름 이희문에게 2000원을 소작료 전납비로 받아 소비했고, 1928년에는 죽은 시어머니 신씨의 명의로 있는 양주 토지를 4000원에 팔아 소비했다. 그 외에도 마름 이현춘에게 소작료 전납으로 5000여 원, 고리대금업자 유경운과 박가분 등에게서 수천원을 빚 얻어 썼다. 이 돈은 대개 정리위원회에서 생활비를 받은 외에 조부인이 개인적으로 소비한 것이다. 무엇에 썼는지 돈 쓴 길은 전혀 몽롱하다. 1930~31년까지 재정위원회의 엄중한 제재를 받으면서도 조부인은 전후 3만3000여 원(오늘날로 치면 33억원- 인용자)을 소비했다. 돈 귀한 줄 모르는 귀족 가 젊은 여주인은 부르주아의 방종을 여지없이 발휘했다. (‘매일신보’ 1932년 10월28일자)

    조중인은 그 많은 돈을 어디에다 썼을까. 조중인이 탕진한 돈의 태반은 민성기의 호주머니로 흘러들었다. 민성기는 독립운동을 하는 아버지를 만나려 상하이에 드나들었다. 상하이에서 아버지의 민족정신을 배워 왔으면 좋았으련만, 민성기는 고작 마작을 배워 와서 조중인에게 가르쳐준다. 조중인은 우울한 심사를 마작으로 달랜다. 한번 맛을 본 조중인은 하루도 거르지 않고 판을 벌인다. ‘펑!’ ‘훌라!’(마작 용어) 하는 동안 조중인의 돈은 10원씩, 100원씩 민성기의 호주머니로 빨려들어갔다.

    먹여주고 재워주고 한 달에 월급조로 10원씩 받던 하인 이철돌은 어디서 돈이 생겼는지는 모르나 금시계에 말쑥한 양복을 입어 겉차림은 이인용 남작보다 나아 보였다. 하루는 하인 이철돌이 죽은 이재극의 양복을 입고 다니다가 친척에게 발각됐다.

    “삼년상도 지내기 전에 노남작이 입던 의복을 하인에게 주다니….”

    친척들은 분개했다. 그럴수록 하인 이철돌은 조중인의 총애를 받았다.

    조중인의 손에서 없어진 돈은 약간의 친척과 하인과 민성기 등의 손을 거쳐 어디에 소비되었는지 모르게 자취를 감췄다. 그 와중에도 조중인은 아들의 백일에 400원의 빚을 얻어 호화로운 잔치를 벌였다. 조중인은 말 그대로 생각 없이 돈을 썼다. 조중인과 재정정리위원회는 날이면 날마다 “돈 달라” “못 주겠다” 하며 실랑이를 벌였다.

    하루는 대궁 사랑에 전화가 왔다.

    “이 남작 계십니까?”

    “무슨 일입니까?”

    “이인용 남작이 수형(手形·어음)을 내놓고 돈 1000원을 썼으니 갚아주어야지요.”

    “재정정리위원회는 모르는 일입니다.”

    이인용 남작 부부의 ‘소송 전쟁’

    박영효 후작은 1927년 이인용의 친척들과 연대하여 이재극 남작의 백만금 유산을 갈취할 음모를 꾸민 장본인이었다.

    재정정리위원회는 이인용에게 사연을 묻는 한편 동대문서에 조사를 요청한다. 사건의 원흉은 민성기였다. 어느 날 민성기가 이인용을 백화원으로 데리고 가서 술을 먹으며 돈 1000원이 필요하니 수형에 도장을 찍어달라고 요구했다. 마음 약한 이인용은 간절한 부탁을 거절하기가 어려워 이름만 쓰고 도장은 찍지 않았다. 민성기는 이인용의 인장을 위조하여 이인용이 이름만 쓴 수형에 찍어 김기선에게 1000원을 얻어 썼다. 동대문서의 조사 결과 전모가 밝혀지자 민성기는 인장위조, 사기횡령혐의로 검거된다. 민성기가 검사국으로 송치되자 조중인은 1000원을 변상한 후 정리위원회에 고소를 취하하라고 요구한다. 조중인의 도움으로 간신히 법망을 빠져 나온 민성기는 표연히 상하이로 떠났다.

    그 후 계속해서 이남작 모르게 얻어 쓴 조부인의 빚이 자꾸 드러나 재정위원회는 여간 머리 아픈 게 아니었다. 하루는 민성기가 봉산군에 있는 땅을 이남작 모르게 6만원에 팔았던 사실이 박영효 후작의 귀에 들어왔다. 후작은 깜짝 놀라 이 일을 중지시키는 동시에 나머지 부동산 전부는 팔아 현금으로 만들어 가지고 재정위원회에서 보관하게 되었다. (‘매일신보’ 1932년 10월29일자)

    재정정리위원회라고 깨끗하지만은 않았다. 사실상 재정정리위원회 자체가 이인용 남작의 재산을 갈취하기 위해 박영효 후작이 꾸민 음모였다.

    총 지휘격인 박영효 후작은 이남작의 십여촌이나 되는 먼 일가들을 추켜세워서 모든 책동을 뒤에서 조종하였다. 조중인의 낭비와 방종을 핑계 삼아 재정정리에 착수하여 박영효 후작은 자기의 지위와 권세 있는 것을 기회로 삼아 가지고 남작의 일족과 같이 이왕직의 찬동을 얻는다, 귀족회를 연다 하야 대궁의 재정정리위원회를 조직하고 정리위원장이 된 후 이남작 가에는 일본인과 조선인의 두 사무원을 두어서 일체 살림을 간섭케 하였다.

    그리고 재정을 정리한다는 명목하에 전후 4, 5년간 은행회사의 주권(株券) 토지가옥 등을 똥오줌이나 같이 헐가에 팔아서 24만원이라는 대금을 소비하였다. 말로는 대토를 한다하고 기실 행방을 알지 못하게 되었으며 자기의 처남 되는 박모에게 아무런 담보도 없이 수만 원을 대부하는 등 실로 ‘검은 손’의 활약은 그칠 줄을 몰랐다. (‘사설검사국, 이남작 가의 부부전과 배후책동의 대흑막’, ‘별건곤’ 1932년 11월호)

    재정정리위원회의 전횡은 아래의 기사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이남작을 걸어 그 부인 조중인 여사가 목하 경성지방법원에 준금치산선고 신청을 제기한 중인데 윤남작이 1927년부터 1931년까지 팔아서 없앤 재산은 24만6000여 원으로 이를 다시 연도와 팔린 재산을 나누어보면 다음과 같다. 금강산전기 주식 1만4000여 원(1927), 한성은행 주식 7700원(1928), 양주군 토지 4000원(1928), 부내 이화동 토지 7000원(1928), 부내 연남동 가옥 6만원(1929), 포천군 임야 9만원(1930), 안성군 토지 10만500원(1931), 백천군 토지 1만500원(1931), 익산군 토지 2만원 (1931), 광양군 토지 1500여 원(1931), 의정부 토지 3000여 원(1931), 이천군 토지 4000여 원(1931), 상속현금 5000~6000원. 1927년부터 1931년까지 약 4년간에 이인용 남작이 24만6000원의 거대한 재산을 무엇에 낭비하였는가? 이인용 남작 자신이 이 재산을 자기의 손으로 없애지 않았다면 이 돈은 누구의 손을 거쳐 흔적 없이 사라졌는가. 멀지 아니하여 법관의 날카로운 메스에 해부를 당할 이 사실에 대하여 세간의 의혹은 더 한층 깊어졌다. (‘동아일보’ 1932년 8월15일자)

    안주인이 들어먹고, 십여 촌 친척들이 들어먹고, 남의 집 재산을 관리한답시고 들어앉은 재정정리위원회가 들어먹으니, 백만금 재산인들 몇 년이나 버티겠는가. 이재극 사후 5년에 세 패의 무리는 갖은 술책을 부려가며 재산을 빼먹고, 서로의 비리를 캐내고, 따지기를 반복하면서 이전투구, 아귀다툼을 벌였다.

    조중인은 음모와 술책이 판치는 대궁의 혼탁한 분위기 속에서 심병(心病)을 얻는다. 병원에 입원해 치료를 받았지만 약으로 나을 병이 아니었다. 몸에 좋다면 값을 따지지 않고 약을 지어 먹었지만 병세는 날로 악화됐다. 병원 치료에 염증이 난 조중인은 요양치료를 결심하고 1931년 여름, 민성기, 여자하인, 유모, 간호부 등 종자를 대동하고 물 좋고 공기 좋은 석왕사로 떠난다. 조중인 일행은 석왕사 스님들의 환대 속에서 석왕사 앞채 전부를 얻어 사용한다.

    석왕사 요양 중에도 조중인은 돈을 절조 있게 쓰지 않았다. 조중인은 석왕사 요양비로 박영효 후작에게 200원을 받았으나, 이를 적다고 일축한 후 자신이 빚을 얻어 700원을 만들었다. 조중인은 봉급쟁이 1년치 연봉보다 많은 이 거액을 열흘이 되기도 전에 다 쓰고 또다시 돈을 청구한다. 박영효 후작은 조중인의 돈 청구에 응하지 않는다. 그러나 여기서 물러설 조중인이 아니었다. 그는 서울에 올라와 또다시 빚을 얻어 석왕사로 내려갔다. 조중인 일행은 석왕사에서 정양하는 70여 일 동안 4500원을 탕진했다. 석왕사에서 민성기는 조중인과 수시로 드라이브를 다니고, 간호를 구실로 한방에서 묵었다.

    “내 집에서 나가라”

    조중인이 가산을 탕진하고, 민성기, 이팔용, 이철돌 등과 추문을 일으키는 동안 도대체 남편 이인용은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이인용은 재산을 노리는 십여 촌 친척들의 꼬임에 빠져 주색으로 세월을 보내고 있었다.

    이남작의 재산을 노리는 일가들은 이남작을 끌고 유람을 시킨다는 명목 하에 조선각지와 만주의 각 도시로 데리고 다니며 돈을 쓰게 하였다. 이목을 넓히니 아무 멋모르고 자랐던 대궁 안 젊은 서방님이 비로소 세상맛을 알게 되어 술도 배우고, 계집도 사고, 첩도 얻고, 기생도 데리고 놀 줄 알았다. 제법 있는 돈이요, 이남작도 돈 쓰는 맛도 조금은 깨닫고, 옆에서 꼬드기는 바람에 노는 맛이 싫지는 않았다. (‘별건곤’ 1932년 11월호)

    요양에서 돌아온 조중인은 여주인의 권리를 주장하여 친척들, 재정정리위원회와 또다시 충돌을 일으킨다. 참다 못한 친척들은 조중인을 대궁에서 내쫓을 음모를 꾸민다. 1932년 2월, 이인용에게 투서 한 장이 날아든다.

    “조 부인은 아름답지 못한 일을 할 뿐 아니라 재산을 낭비하니 남작은 세심히 주의하여 집안 처리를 옳게 하시오.”

    마음 약한 이인용은 이 편지를 받고 몇몇 친척에게 조사를 명한다. 편지는 끝끝내 누가 썼는지 밝혀지지 않았지만, 조사 결과 그 내용은 사실임이 드러났다. 조사보고를 받은 이인용은 격노했다.

    이남작은 온몸이 부르르 떨리고 이가 갈렸다. 이남작은 대궁의 명예와 자기의 지위를 돌보지 않고 최후의 언명을 조부인 앞에 내놓으려고 생각하고 또 생각하였다.

    “집안의 평화를 어지럽히는 아내에게 내 어찌 남편의 권리를 행사치 못하랴. 주저할 때가 아니다.”

    이남작의 심중에는 일대 결전을 하려는 전사와 같이 단호한 결심이 일어났다. 이남작은 그 부인에게 대궁을 나가라는 명령을 내렸다. 조부인은 죄 없는 사람을 내쫓는 것은 부당하다고 항거하였다. 이남작의 선전포고에 기세를 얻은 친척들은 연합세력으로 조부인을 공격했다.

    “네 죄를 네가 몰라 대궁의 가운(家運)이 너 때문에 일그러진 것을 너는 모르느냐.”

    이남작의 얼굴에는 살기가 등등하였다. 비장한 결심은 얼굴을 창백케 하였다.

    “……”

    어린 딸과 아들을 부둥켜안은 조부인은 두 눈에 굵다란 이슬방울이 어리었다. 두 어깨는 울음소리와 함께 춤추었다. (‘매일신보’ 1932년 10월31일자)

    이 다음부터는 조중인과 이인용의 주장이 엇갈린다. 조종인은 악배들이 구타·협박·공갈해 내쫓았다고 주장하고, 이인용은 조중인이 잘못을 시인하고 자가용을 타고 조용히 떠났다 한다. 진실을 가리는 것은 법원의 몫으로 돌아갔다. 이제 잠시 미뤄뒀던 법정 공방으로 돌아가자.

    이전투구 법정공방

    “남편과 시가 사람들이 폭행·협박·공갈했다.” “아니다. 아내가 간통했다.”

    귀족 부부가 맞고소를 하자, 법원은 검사국에 의뢰하여 사건의 진실을 파악한다. 미증유의 대의혹 사건이었기에 경성지방법원 검사국은 검사가 부족하여 개성으로부터 인원을 지원받을 정도였다. 가택수색에서는 털셔츠 44벌이 발견되어 조중인의 사치벽의 유력한 증거로 압수되었다.

    6월22일 증인심문이 열리는 법정에는 귀족부인 200여 명이 몰려들어 일대 소동이 벌어졌다. 이 또한 조중인이 사교계의 여왕이었음을 입증하는 유력한 증거였다. 법정에는 이인용 남작 집 여자하인 조씨, 유모 손씨, 사무원 이희원 등 3명이 증인으로 나왔는데, 그들은 다음과 같이 증언하였다.

    조씨 : 마님이 이팔용, 민성기, 이철돌 등과 간통하는 것을 보지는 못했으나 그런 소문이 있었던 것은 사실입니다. 이팔용은 원래 남작 집 내실에 들어오지 못하던 사람인데, 한번 내실에 출입하기 시작하면서 마님과 가끔 술도 같이 먹었습니다. 석왕사에 가서는 민성기와 마님이 한방에서 자는 것을 보았습니다.

    재판장 : 이남작은 그 사실을 모르느냐?

    조씨 : 그 어른은 원체 얌전한 어른이니까 알지 못합니다.

    재판장 : 조중인의 두 아이는 누구의 자식이냐?

    조씨 : 남작님 자식입니다.

    손씨 : 마님은 간통한 사실이 없습니다. 민성기나 이철돌이와 한방에서 지낸 일은 있지만 간병을 위해서 그런 것이지 다른 일은 없었습니다. 더구나 민성기는 남작님 누이의 아들인데 어찌 그런 흉측한 일이 있겠습니까.

    이희원 : 마님이 이팔용, 민성기, 이철돌과 부적절한 관계를 맺은 것은 확실합니다. 마님은 이팔용과 가끔 비밀전화를 했고 함께 외출하는 일도 자주 있었습니다. 석왕사에 가서는 민성기, 이철돌과 한방에서 지냈는데 눈치가 매우 수상했습니다. 이철돌에게는 월급 외에 옷과 쌀도 함부로 주었습니다. (‘동아일보’ 1932년 6월23일자)

    조중인에게 불리한 증거와 증언이 줄을 이어 등장했지만, 법원은 조중인의 간통사실을 인정하지 않았다. 결국 이인용이 제기한 이혼청구소송은 기각되고, 조중인이 제기한 동거청구소송이 받아들여졌다. 이로써 이인용 남작가 부부싸움은 한낱 해프닝으로 끝나는 듯했다. 그러나 이는 단지 시작에 불과했다.

    백만장자요 귀족인 이인용 남작과 그의 부인 조중인 사이에 일어났던 동거청구소송은 일찍 보도한 바와 같이 원고 조중인이 승소하여 지난 7월 중 이남작의 집으로 들어갔는데 사건은 이로써 낙착이 된 것이 아니라 더 한층 분규를 일으키고 있다. 조중인이 동거청구와 남편이 제기한 이혼소송에서 모두 승소를 하여 별항과 같이 남편의 집에 들어는 갔으나 남편 되는 이남작은 어디로인지 종적을 감추어 버리고 그 집은 단우정길(丹羽正吉)이라는 일본 사람이 빌려 사용하게 되었는데, 그 단우라는 사람은 안방에 조중인이가 있음에 불구하고 대문을 폐쇄하여 조중인과 외부의 연락을 끊어서 불법 감금을 하고 또 조중인의 어머니 곽기현은 딸의 위급을 구하고자 그 집으로 들어가다가 역시 그 집에 세로 들어 있는 소림이라는 사람에게 구타를 당하였다는 고소장이 10일 경성지방법원 검사국에 제출되었다. (‘동아일보’ 1932년 8월13일자)

    조중인은 불법감금혐의로 일본인을 고소함과 동시에 남편 이인용의 준금치산자선고 신청을 제기한다. 격분한 이인용측은 이혼청구소송을 2심에 항소한다. 법정공방이 길어지면서 양측은 체면과 지위를 돌보지 않고 폭로전을 전개했다. 공판이 열릴 때마다 그 ‘재미난 광경’을 목격하고자 수백명의 방청객이 몰려들었다. 9월26일 공판에서는 이인용 남작을 놓고 조중인측과 재정정리위원회측이 쟁탈전을 벌여 법정이 아수라장이 된 일도 있었다.

    수라장이 된 경로를 이야기하면 개정 벽두 이남작이 나타났고 그 다음 조부인이 나타났던 바 조중인 부인은 지금까지 오래도록 남편되는 이남작을 그리워하다가 법정에서 만나게 되어 부인은 정신없이 울면서 그 남편을 끌어안았다. 이 찰라에 남작 측 불량배는 이남작에게 부인을 가까이 못하게 하였다. 이때 조중인 측 사람들이 무리한 처사라고 책한 바 남작 측에서 반항하여 일대 수라장이 된 것이라 한다. 경관들이 여러 무리를 퇴정시키자 법정 밖에서는 다시 일대 격투가 시작되었다. 남작 부부는 몸을 피하여 신문기자실로 피신하였다. 공판은 오는 10월13일로 연기하여 증인신문을 하기로 하고 폐정하였는데, 수백명은 아직도 재판소를 포위하고 부부가 나타나기를 기다리고 있다고 한다. (‘동아일보’ 1932년 9월27일자)

    이 일이 있은 후, 이인용은 박영효 후작 앞에 가 일장 훈시를 들어야 했다.

    “이놈아 그래도 행실 잃은 계집하고 살겠어. 에라 이 못난 자식 그래도 가문의 체면을 좀 생각해야지.”

    그것은 옛날 정객으로 세상에 이름 높고 오늘 이남작 가정전에 총지휘자이신 박영효 후작의 훈시였는데 그래도 미련이 있는지 이에 대한 이남작의 대답이 명구이다.

    “인제 재산도 다 없어지고 했으니까 굶으나 먹으나 그 여자하고 같이 살겠어요.”

    그러나 거룩하신 그 양반은 남작의 그 결심이 깨어지기를 기다리느라고 그러는지 자기 집 깊숙하고 그윽한 뒷산정에다가 감금 비슷하게 하여두고 내놓지 않는다 한다. (‘별건곤’ 1932년 11월호)

    기나긴 법정 공방은 1934년 1월 말 이인용이 승소함으로써 종결된다. 형식적으로 이인용이 이긴 재판이었지만, 사실상 승자 없는 이전투구였을 따름이다.

    탕진한 재산을 되찾겠다?

    친일파 후손의 ‘땅 찾기 소송’이 줄을 잇고 있다. 친일파 재산은 보호할 가치가 없다거니, 친일파 재산을 환수하는 특별법을 제정해야 한다거니 말이 많다. 그러나 ‘보호’고 ‘환수’고 재산이 남아있을 때 이야기다.

    친일파의 후손을 포함한 많은 사람이 친일파가 엄청난 재산을 가지고 광복을 맞았을 것으로 믿고 있지만, 불행인지 다행인지 친일파의 재산은 대부분 일제 때 탕진됐다. 조상이 이미 탕진해버린 땅을 국가가 되돌려줄 이유가 없음은 법적으로만 따져도 두말할 필요가 없다. 특별법을 제정하기 이전에 과연 친일파에게 남은 재산이 있는지부터 확인해야 하리라.



    이재극 남작의 후손이 “이재극이 일제 때 취득한 땅”을 돌려달라고 국가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다. 이재극이 취득한 땅은 조중인과 박영효가 다 팔아 현금화했다는데, 무슨 땅이 남았다고 그러는지 모를 일이다(470쪽 ‘이재극 후손의 땅 찾기 소송 해프닝’ 기사 참조). 이인용 내외가 탕진한 이재극의 재산을 후손이 굳이 돌려받고자 한다면, 국가가 아니라 박영효의 후손에게 소송을 제기하는 것이 옳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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