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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봉관의 ‘옛날 잡지를 보러가다’⑥

경성제대 입시 대소동

‘일본인을 위한 조선 대학’ 첫 시험, 불공정 시비로 얼룩지다

  • 전봉관 한국과학기술원(KAIST) 교수·국문학 junbg@kaist.ac.kr

경성제대 입시 대소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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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4년 식민지 조선에 첫 ‘대학’이 들어섰다. 그러나 당초 목표가 ‘조선인의 고등교육’이 아니라 ‘조선 거주 일본인의 교육권 보장’이었던 대학은 첫 입학시험부터 갈등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 불공정한 시험과목, 지원자에 대한 경찰의 신분조사 등 우여곡절 끝에 선발된 첫 신입생 가운데 조선인은 불과 4분의 1. 그나마 조선인 합격자가 상위권에만 몰린 성적분포는 민족차별의 혐의를 짙게 드리우는데….
경성제대 입시 대소동

청량리에 세워진 경성제대 예과(위)와 법문학부(아래) 건물. 경성제대는 일본의 여섯번째 제국대학이었으나, 당시 조선에는 고등학교가 없었기 때문에 대학에 진학하려면 예과 2년을 수료해야 했다.

해마다이맘때면 귀가 아프게 들리는 소리. 입학난, 구직난! 해마다 듣는 이 소리가 안 들리게 될 날은 과연 언제일까? 배우겠다는 정성은 극진하건만 배움을 얻을 기회가 거부되어 있는 허다한 아동들. 그리고 또 그 어려운 입학 난관을 겨우 돌파하고 없는 돈 있는 돈 다 긁어모아 허덕허덕 공부를 마치고 나면 또 다시 배운 바 지식과 기능을 발휘할 기회가 거부되는 수많은 지식 청년들!

‘신동아’ 1933년 4월호 권두언은 이렇듯 애절한 어조로 극심한 입학난과 취업난을 개탄한다. 대학진학과 취업이 어려운 일임은 지금이나 1920~30년대나 마찬가지였던 듯하다. 오히려 당시 청년들이 혹독한 입학난과 취업난에 훨씬 더 시달렸다. 요즘은 대학에 진학할 때만 입학시험을 치르지만 당시는 전문학교나 대학은 물론 초등학교와 중등학교에 진학할 때도 입학시험을 치렀다. 경쟁도 사뭇 치열해서 평균적으로 초등학교는 2대 1, 중등학교는 10대 1, 전문학교와 대학은 학교에 따라 3대 1에서 20대 1의 경쟁률을 보였다.

그 가운데서도 세계 유일, 전대미문의 초등학교 입학시험은 말 그대로 ‘어린이 지옥’이었다. 태어나서 한번도 학교를 다닌 적이 없는 7~8세의 아동에게 시험부터 치르게 한 이 제도는 ‘유전(有錢)입학 무전(無錢)낙제’라는 유행어를 남겼다.

인천공립보통학교에서는 지난 26일부터 사흘동안 신입아동의 ‘자격검정’을 하였는데 그 소위 검정한 내용을 보면 기가 막힐 지경이다. 우선 아이들의 정신과 지혜를 헤아리기 위한 시험문제로 말하자면 너무 정도에 지나치게 어려운 것이 많았다. 이는 정원을 초과한 지원아동을 억지로 떨어내자는 의도임을 짐작할 수 있다.

또한 학부형의 자격에 대하여 “학교에 기부를 많이 하였느냐?” “가산이 넉넉하냐?”는 등 문답을 하여 필경은 재산도 넉넉하고 학교에 기부도 많이 한 사람의 자제는 무조건 합격시키고 가난한 사람의 자제는 물어볼 것도 없이 낙제시켰다 한다. 일전에 인천부 내무과장은 “돈 없는 사람의 자제를 공부는 시켜 무엇 하느냐”는 말을 하여 물의를 일으킨 바 있다. 윗물부터가 이러하니 아랫물인 학교당국이 이러한 태도를 갖게 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부자 전유의 교육’, ‘동아일보’ 1924년 3월30일자)

오늘날 수능시험처럼 거국적인 차원으로 치러지는 시험은 중등학교 입학시험이었다. 경쟁률이 워낙 높다 보니 시험장은 흡사 전쟁터를 방불케 했다.

비참한 입학시험이 얼마나 어린 사람의 가슴을 태우는지 알아보고자, 26일에 거행한 보성고등보통학교의 시험장을 구경했다. 모자 쓴 1000여 명의 학생들이 이른 아침부터 떼를 지어 몰려들었다. 학교의 넓은 운동장에 수험생이 가득 차서 와글거리고 소란한 모양은 동원령을 받은 군인이 영문(營門)에 모여들 때를 방불케 했다.

입학 정원이 200명밖에 안 되는데 지원한 생도는 1200여 명이라니까, 누구든지 1000명을 제치는 재주가 없으면 입학할 가망이 없다. 수험표를 타는 그네의 얼굴은 모두 불안해 보였다. 1000여 명의 수험생을 수용하기 위해 학교의 교실 전부와 맞은편에 있는 중동학교 교실 전부를 사용하는 것으로도 모자라 근처에 있는 종로소학교까지 빌리게 되었다.

수험표를 받아 든 학생들은 대열을 지어 지정된 시험장에 들어갔다. 시험지를 돌린 후 한참동안 시험지에 번호와 성명 쓰기에 분주하더니 다시 시험장이 적막해졌다. 전장(戰場)에 임한 그들의 얼굴에는 모두 큰 불안감이 감돌았다. 괴로운 빛으로 몸을 비틀고 손가락도 잡아 뽑고 애를 쓰는 모양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애석한 마음을 견디지 못하게 한다. 책상 위에는 그들의 병기인 두어 자루의 연필이 날카롭게 깎여 있다.

선전을 포고하는 종소리가 울리자 그들의 눈은 일시에 빛나며 시험문제 붙이는 곳을 향했다. 시험문제가 붙자 그들의 격렬한 백병전이 일어나고 연필소리만 처참히 들릴 뿐이다. (‘처참한 입학시험 광경’, ‘동아일보’ 1921년 3월27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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