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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봉관의 옛날 잡지를 보러가다 ⑪

조선 최초 스웨덴 경제학사 최영숙 애사(哀史)

명예·사랑 버리고 조국 택한 女인텔리, 고국에 버림받고 가난으로 죽다

  • 전봉관 한국과학기술원(KAIST) 교수·국문학 junbg@kaist.ac.kr

조선 최초 스웨덴 경제학사 최영숙 애사(哀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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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노동’과 ‘여성’에 대한 개념조차 없던 1930년대. 26세의 최영숙은 핍박받는 조선의 노동자와 여성을 위해 일하겠다는 일념으로 5년간의 스웨덴 유학생활을 청산하고 귀국길에 오른다. 하지만 5개 국어를 능란하게 구사하는 인텔리 여성에게 고국이 허락한 일자리는 고작 콩나물장수. 가난과 질병에 시달리던 그녀는 결국 귀국 5개월 만에 숨을 거둔다. 그녀가 죽고 난 뒤 그녀의 뱃속에 인도인의 피가 흐르는 ‘혼혈 사생아’가 있었음이 알려지면서 구구한 소문이 도는데….
조선 최초 스웨덴 경제학사 최영숙 애사(哀史)

‘제일선’ 1932년 5월호에 실린 ‘청춘에 요절한 최영숙 애사’와 최영숙의 스톡홀름대학 졸업 사진.

1926년 10월, 구스타프 아돌프(1882~1973) 스웨덴 황태자가 조선을 방문했다. 아돌프 황태자는 중국, 그리스, 이탈리아, 키프로스 등지의 고고학 발굴 현장에 참여한 고고학자였다. 열흘 남짓한 일정으로 조선을 방문해서도 경주, 서울, 평양 일대의 고분 발굴 현장과 유적을 돌아보느라 바빴다. 10월9일, 부산항에 도착한 황태자 일행은 곧장 경주로 이동해 다음날부터 고분 발굴 현장을 참관했다.

교토제국대 고고학과 하마다 주임교수는 황태자 일행을 발굴 작업이 한창 진행 중이던 노서동 제129호 고분으로 안내했다. 아돌프 황태자는 학자적 호기심이 발동, 몸소 연장을 들고 발굴에 참여했다. 얼마 후 그는 허물어진 목관 아래에서 봉황 문양이 장식된 금관을 발굴했다. 금관총금관, 금령총금관에 이어 세 번째로 발견된 신라금관이었다. 하마다 교수는 스웨덴 황태자가 발굴에 참가한 것을 기념해 금관이 나온 제129호 고분을 ‘서봉총(瑞鳳?)’으로 명명했다. 스웨덴의 음역어 ‘서전(瑞典)’에서 ‘서’자를 따고, 봉황(鳳凰)에서 ‘봉’자를 따서 붙인 이름이다. 아돌프 황태자는 조선, 일본, 중국의 유적지를 순회하고 고고학과 미술사 관계 자료를 수집해 스웨덴으로 돌아갔다. 그는 1950년 제위에 올라 구스타프 6세가 됐다.

스웨덴의 조선 여성

아돌프 황태자가 조선을 방문하기 한 달 전, 스웨덴 수도 스톡홀름에 소녀티를 갓 벗은 동양 여성 한 명이 나타났다. 사회과학을 공부하겠다는 생각으로 무작정 스웨덴을 찾아간 21세의 조선 여성 최영숙이었다. 스웨덴에는 아는 사람 한 명 없었고, 스웨덴어는 간단한 인사 한마디조차 할 줄 몰랐다. 집안이 유학경비를 대줄 만큼 넉넉하지도 않았고, 장학금을 대줄 후원자도 없었다. 천신만고 끝에 스톡홀름에 도착했을 때, 최영숙이 가진 것이라고는 사회주의 관련 서적 몇 권과 큼지막한 가방 하나가 전부였다.

최영숙은 그로부터 5년이 지난 1931년 11월, 스톡홀름대학 경제학사가 되어 금의환향했다. 귀국길에 덴마크, 러시아, 독일, 프랑스, 스위스, 이탈리아, 그리스, 터키, 이집트, 인도, 베트남 등 세계 20여 개국을 여행했다. 인도에서는 4개월간 머물면서 간디, 나이두 같은 저명한 독립운동가들을 만났다.

최영숙이 조선으로 돌아온 것은 스웨덴에서 살기가 고단했기 때문이 아니다. 식민지 조선에 비하면 스웨덴은 천국이었다. 최영숙은 스웨덴 생활을 묻는 질문에 다음과 같이 답했다.

“스웨덴은 나의 제2 고향입니다. 그곳 사람들은 외국인 대접을 극진하게 합니다. 더욱이 나는 동양 여자로 처음이었기 때문에 후대를 한몸에 받았더랬어요. 아이들과 여성들이 자유롭고 힘 있게 뻗어나가는 것이 부러웠습니다. 특히 연초 전매국이나 성냥공장 같은 데서 노동하는 여공들까지도 정신상으로나 경제상으로나 풍요로운 생활을 하는 것이 정말이지 부러웠습니다. 그들에겐 일정한 노동시간과 휴가가 있을 뿐 아니라 임금도 넉넉해 생활비를 빼고도 반은 남습니다. 그들은 노동복만 벗어놓으면 유복한 숙녀들입니다. 더욱이 체육을 즐겨 날마다의 사는 재미가 더없이 호강스러워 보였습니다.”(동아일보, 1931년 11월29일자)

최영숙이 풍요로운 생활을 포기하고 귀국한 것은 사회과학을 공부해 조선의 노동자와 여성을 위해 일하겠다는 초심을 잃지 않은 까닭이었다. 최영숙은 귀국 후 계획을 묻는 질문에 이렇게 대답했다.

“조선으로 돌아올 결심을 했을 때, 경제운동과 노동운동에 몸을 던져 살아 있는 과학인 경제학을 현실에서 실천해 보려했습니다. 공장 직공이 되어 그들과 같이 노동운동을 할 마음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집에 와 보니 형편이 어려워 당장에 취직이 걱정입니다. 스웨덴에 있을 때, 그 나라 신문에 투고하여 조선을 다소 소개도 해보았고, 동무 중에도 신문기자가 많았습니다. 신문기자 생활에 관심이 많습니다. 조선의 실정을 아는 데도 제일일까 합니다.”(조선일보, 1931년 12월22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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