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8월호

이화여전 문창숙 자살사건

‘모던 걸’들의 호사스러운 소비문화가 잉태한 조선 최초의 ‘왕따’

  • 전봉관 한국과학기술원(KAIST) 교수·국문학 junbg@kaist.ac.kr

    입력2006-08-14 14: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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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대 초반의 꽃다운 나이, 검소한 생활태도의 이화여전 모범학생이 바람이 몹시 불던 겨울날 교정 뒷산에 올라 목을 맸다. 발단은 사라진 돈 20원. 유명 시인인 담당교수와 명망 높은 사감 선생의 허술한 일처리에 대해 춘원 이광수는 지면으로 질타하고 나서고, 세간에서는 ‘발견 당시 조금만 서둘렀다면 살릴 수도 있었다’는 차가운 의혹이 쏟아진다. 조선을 대표하는 여학교의 개교 이래 최대 위기 뒤에는 ‘집단 따돌림’이라는 무서운 병폐가 숨어 있었으니….
    이화여전 문창숙 자살사건

    조선 최초의 집단 따돌림 자살자 문창숙을 보도한 1937년 당시의 잡지기사.

    1937년 1월19일, 매서운 대한(大寒) 추위가 맹위를 떨쳤다. 하늘에서 송이송이 흰 눈이 내려 대지를 하얗게 뒤덮었다. 이전한 지 1년 반밖에 되지 않은 이화여전 신촌 캠퍼스 교정에도 흰 눈이 소복이 쌓였다. 영문과 2학년생 문창숙은 1교시 수업을 마친 후 문과학장 김상용 교수와 잠깐 동안 면담했다. 면담을 마치고 학장실을 나서는 문창숙의 얼굴은 핏기 없이 창백했다.

    문창숙은 2교시부터 수업을 빠지고 기숙사로 돌아왔다. 깔끔하게 정돈된 기숙사에서 문창숙은 눈 내리는 창 밖을 우두커니 내다보았다. 한참 지나 문창숙은 결심을 굳힌 듯, 책상 앞에 앉아 무엇인가 열심히 써 내려갔다. 한 장, 두 장, 석 장…. ‘레미제라블’과 ‘여자의 일생’을 좋아하던 문학소녀 문창숙의 펜촉은 거침이 없었다. 편지지 위에는 가끔씩 눈물방울이 떨어졌다. 다섯 통의 편지를 쓰고 나니 어느덧 점심시간이었다.

    문창숙은 기숙사 식당으로 가는 대신 우산도 없이 뒷산으로 뛰어올랐다. 눈물 젖은 문창숙의 두 뺨에 매서운 칼바람이 사정없이 휘몰아쳤다. 눈밭에 찍힌 문창숙의 발자국은 쏟아지는 눈에 덮여 이내 사라졌다.

    다섯 통의 유서

    1교시 수업이 끝난 후 김상용 교수를 만나러 학장실에 간다던 문창숙은 오전 일과가 끝날 때까지 교실로 돌아오지 않았다. 문창숙의 책상 위에는 1교시에 펼쳐놓은 교과서가 그대로 놓여 있었고 책가방도 등교할 때 그대로 책상 옆에 놓여 있었다. 같은 반 학생들은 문창숙의 빈 책상을 바라보며 오전 일과 내내 안절부절못했다.



    점심시간이 되자 영문과 동급생들은 문창숙의 행방을 찾아 교정을 뒤졌다. 그러나 문창숙은 학장실에도, 교정에도, 식당에도, 기숙사에도 없었다. 문창숙이 사라졌다는 소식을 듣고 김상용 교수는 문창숙의 소지품을 뒤지게 했다.

    ‘끝내 일이 이렇게 되는 것인가.’

    김상용 교수는 때늦게 후회가 밀려옴을 느꼈다. 아니나다를까 문창숙의 기숙사 책상서랍에서 기숙사 사감 박은혜 선생, 아버지, 오빠, 동생, 1학년 학우일동 앞으로 보내는 다섯 통의 편지 형식의 유서가 발견되었다. 유서에는 구구절절 애끊는 하소연이 적혀 있었다.

    “오빠. 먼저 가는 누이를 용서하세요. 누명을 벗었다고 좋아했는데, 필적이 같다고 다시 누명을 쓰게 되었습니다. 죽음으로써 누명을 벗고 저의 결백을 드러내 보이렵니다.”

    오전까지만 해도 교실에 앉아 수업을 듣던 학생이 유서를 써놓고 사라지자 학교 전체가 발칵 뒤집혔다. 김활란 부교장 이하 전 교직원과 학생, 사환까지 거센 눈발을 헤치며 문창숙을 찾아나섰다.

    한 시간쯤 지난 오후 2시경, 학교 사환이 뒷산 송림에서 나뭇가지에 목을 맨 문창숙을 발견했다. 열서너 살 먹은 어린 여사환은 공포에 절어 울먹이며 비명을 질렀다. 사환의 비명을 듣고 근방에서 문창숙을 찾아 헤매던 여학생들이 속속 모여들었다. 가는 동아줄 하나에 의지해 나뭇가지에 매달린 문창숙의 육신에는 소복이 눈이 쌓여 얼어붙어 있었다. 스무 살 전후 여학생들은 사시나무 떨듯 몸을 떨며 흐느껴 울었다.

    자살현장을 처음 보는 어린 여학생 중 어느 누구도 나뭇가지에 매달린 문창숙을 풀어주기 위해 선뜻 나서지 못했다. 심약한 여학생에게 나뭇가지에 매달린 것은 몇 시간 전까지 한 교실에 앉아 공부하던 친구가 아니라 딱딱하게 굳은 시체일 뿐이었다. 발만 동동 구르던 여학생들은 궁여지책으로 인근에서 문창숙을 찾아다니던 김인영 목사를 불러왔다. 현장에 나타난 김인영 목사는 문창숙의 목을 조이고 있는 동아줄을 황급히 풀고 육신을 끌어내렸다.

    그러나 놀라지 마라. 김인영 목사가 문창숙을 끌어내릴 때까지 문창숙의 몸에는 따뜻한 체온이 남아 있었다. 만약 내 학교 학생과 내 학교 동료를 위해 일각이라도 빨리 문창숙의 목을 끌어내린 이가 있었다면 문창숙은 죽음의 길을 밟지 않았을는지 몰랐던 것이다. 더구나 김인영 목사가 문창숙의 목을 끌어내린 후에도 신속한 처치를 하지 못하고 시내로 전화를 걸어 오랜 시간 후에야 겨우 의사가 와서 응급처치를 했으나 회생시키지 못했다. 다시 의전(醫專)병원으로 떠메고 가서 치료를 받았으나 그날 오후 4시 20분경 문창숙은 마침내 돌아오지 못하는 암흑의 길을 밟게 되었다. (‘이화여전 문창숙의 자살사건’, ‘조광’ 1937년 3월호)


    그날 오전 학장실에서는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문창숙이 자리를 비웠다고 동급생들이 안절부절못한 것은 왜일까. 문창숙의 유서에 적힌 누명이란 어떤 것이었을까. 대체 이화여전에서는 그해 겨울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감쪽같이 사라진 20원

    문창숙은 1915년 제주읍에서 관물상(官物商)을 하는 문수복의 장녀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성격이 명랑하고 쾌활해 부모와 오빠들의 사랑을 한몸에 받았다. 제주도에서 보통학교를 졸업한 후 집안일을 돕다가 열일곱 살 되던 해에 서울에 올라와 진명여고보에 입학했다. 진명여고보에 다니는 동안 성적도 우수했고, 교사와 친구들의 신임도 두터웠다. 1935년 문창숙은 4년 만에 진명여고보를 졸업하고 이화여전 영문과에 입학했다.

    문창숙은 매우 명랑하고 쾌활한 처녀였다. 그의 남동생 문창남을 보고 늘 “사람은 한순간이라도 우울하게 살 필요가 없다. 비관과 우울은 금물이다”하고 격려했고, “너는 부디 평범한 사람이 되지 말고 조선을 등지고 굳세게 일하는 사업가가 되라”고 훈계했다. 문창숙은 한 번도 얼굴을 찡그리는 일이 없었고 괴롭다는 말을 한 번도 한 적이 없었다. 언제나 흰 저고리에 검은 치마만 입고 조금도 사치한 일이 없었다. 어머니가 좋은 옷을 해주겠다고 하면 문창숙은 “사람은 겉보다 속을 곱게 단장해야 해요”하고 언제나 거절했다. (‘문창숙의 인물과 일화’, ‘조광’ 1937년 3월호)


    이화여전 문창숙 자살사건

    사감의 훈계를 듣는 여학생의 모습을 담은 당대 잡지 삽화.

    이화여전에 입학한 후 문창숙은 “자기 일은 자기 손으로 처리해야 한다”며 집에서 보내주는 학비를 거절하고 고학을 시작했다. 학비를 대줄 수 없을 만큼 집안이 빈한한 것은 아니었지만, 사회에 나가면 어떤 어려운 일이 닥칠지 모르니 학창시절부터 고생을 경험해보고자 문창숙이 자진한 고학이었다.

    문창숙은 아침 일찍 일어나 기상과 등교 시간을 알리는 종을 치고 교실 마루를 닦으며 학비를 벌었다. 고단한 고학 생활이었지만 언제나 웃으면서 즐겁게 지냈다. 그렇게 한 학기를 지낸 후 문창숙은 교수들의 신임을 받아 기숙사의 금전출납부를 맡아보게 되었다. 그다지 많은 시간과 노력을 들이지 않고도 학비를 벌 수 있는 좋은 부업자리였다. 적어도 일을 맡던 순간까지는 그랬다.

    1936년 봄 학기 기숙사 사생 주덕순이 문창숙을 찾아와 40원을 맡겼다. 주덕순은 얼마 후 20원을 찾아 쓰고 20원을 남겨두었다. 그런데 어찌된 노릇인지 그해 가을 학기 주덕순이 남은 돈 20원을 찾아쓰려고 보니 장부에는 주덕순이 이미 그 돈을 찾아간 것으로 기록돼 있었다. 여기서 비극은 시작되었다. 주덕순은 펄펄 뛰면서 결단코 자기는 20원밖에 찾아 쓰지 않았고, 장부상의 필적이 문창숙의 글씨가 분명하니 문창숙이 범인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문창숙은 자기가 한 일이 아니라고 끝까지 항변했다.

    아무 죄 없이 이런 억울한 누명을 쓴 문창숙은 얼마나 원통하고 분할 것인가? 활발하고 씩씩하던 문창숙은 갑자기 서리를 맞은 사람처럼 풀이 죽었다. 행복과 희열이 흐르던 문창숙의 가슴은 원통과 슬픔의 검은 구름으로 가득 찼다. 아무 죄 없이 이런 누명을 짊어진 하나의 순진한 비둘기는 날개를 부시며 얼마나 울며 떨었을까? 그러나 문창숙은 호소하려 해도 호소할 길이 없었고 변명하려 해도 변명할 길이 없었다. 태산 같은 죄의 중압을 짊어진 문창숙은 혹은 만주로 도망하려고 애도 써보았고 혹은 자취 없이 사라지려고 시도도 해보았다. (‘이화여전 문창숙의 자살사건’, ‘조광’ 1937년 3월호)


    문창숙이 주덕순의 돈을 횡령했다는 소문은 전교에 급속히 퍼지더니 급기야 기숙사 사감 박은혜 선생의 귀에까지 들어갔다. 박은혜 선생은 이화여전 영문과를 졸업하고 미국에서 종교학 석사학위를 취득한 후, 1934년부터 모교에서 기숙사 사감으로 있으면서 종교학을 강의했다. 목사의 딸로 태어나 종교학을 연구한 만큼 정직을 최고의 덕목으로 삼고 있었다. 다른 곳도 아니고 자신이 맡고 있는 기숙사에서 도난사고가 일어났으니 그대로 두고만 보고 있을 수 없었다.

    이화여전 문창숙 자살사건

    1930년대 당시 이화여전 신촌캠퍼스. 문창숙 자살사건은 이화여전이 정동캠퍼스에서 신촌으로 이전한 후 터진 역사상 최악의 사건이었다.

    박은혜 사감은 문창숙을 여러 번 사감실로 불러 돈이 사라진 경위를 캐물었다. 드러내놓고 의심하지는 않았지만 정황상 실수든 고의든 문창숙이 한 일이라고 믿고 있었다. 사감은 문창숙이 사실을 말하고 용서를 구하길 바랐다. 그렇게만 한다면 아무도 상처받지 않고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문창숙은 자기가 한 일이 아니라고 한사코 부인했다. 그 바람에 조용히 해결할 수 있었던 문제가 일파만파로 확대되었다.

    문창숙이 사감실에 불려갔다 나올 때마다 그를 대하는 친구들의 시선은 따가워졌다. 그렇게 몇 달이 흐르자 문창숙은 친구들 사이에서 철저히 따돌림 받아 더는 학업을 계속하기 어려운 지경에 이르렀다. 고통과 번민 속에 지옥 같은 나날을 보내고 있을 때, 장마 중 잠깐 개는 하늘처럼 문창숙에게 구원의 손길이 찾아왔다.

    사감 앞으로 날아온 투서

    1937년 1월15일, 박은혜 사감에게 시내 서대문우편국 소인이 찍힌 편지 한 장이 날아왔다.

    “박은혜 선생님, 주덕순의 돈 20원을 쓴 것은 문창숙이 아니고 다른 사람이니 문창숙은 말하자면 애매한 누명을 쓰고 있는 것입니다.”

    문창숙의 결백을 주장하는 익명의 투서였다. 그러나 투서에는 문창숙이 관리하던 기숙사 금전출납부에 주덕순의 서명을 하고 돈을 찾아간 사람이 누구인지에 대해서는 적혀 있지 않았다. 박은혜 사감은 며칠 동안 고심한 끝에 1월18일, 전 사생을 강당에 모아놓고 문창숙은 전혀 혐의가 없다고 익명의 투서자를 대신해 변명해주었다.

    이 선언으로 인해 문창숙은 뛸 듯이 기뻐했고 비로소 맑은 하늘을 본 듯했다. 문창숙은 자기 남동생과 함께 시내구경도 다니고 초콜릿과 시루꼬(汁粉·새알심을 넣은 일본팥죽)도 사먹으며 즐거워했다. 그러나 잠깐 갰던 하늘은 다시 흐리고 몽몽한 검은 구름이 문창숙을 둘러싸게 되었다. (‘이화여전 문창숙의 자살사건’, ‘조광’ 1937년 3월호)


    외출을 마치고 돌아오니 기숙사 분위기는 기대했던 것과는 딴판이었다. 밝게 맞으며 지난 시간의 오해를 사과할 줄 알았던 친구들은 사감이 결백을 변명해주기 전보다 문창숙을 더 싸늘히 대했다. 박은혜 사감은 무슨 영문인지 저녁시간 이후 사생 전원을 강당에 다시 불러 모았다. 사감의 조치를 의아하게 여긴 것은 문창숙뿐이었다. 다른 사생들은 예상했다는 듯, 태연히 강당에 모였다. 문창숙을 스치고 지나가는 사생들은 힐긋힐긋 쳐다보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사생이 한 명의 열외 없이 모두 모이자 박은혜 사감은 노트와 필기도구를 꺼내라고 지시했다. 문창숙을 제외한 사생들은 역시 예상하고 있었다는 듯 주저 없이 노트와 필기도구를 꺼냈다. 준비가 끝나자 박은혜 사감은 지금부터 자신이 읽어주는 내용을 받아써서 두 통씩 제출하라고 지시했다.

    “박은혜 선생님, 주덕순의 돈 20원을 쓴 것은 문창숙이 아니고 다른 사람이니 문창숙은 말하자면 애매한 누명을 쓰고 있는 것입니다.”

    사생들의 필적을 조사하기 위한 소집이었던 것이다. 문창숙으로서는 마른하늘에 날벼락 같은 일이었다. 친구의 돈을 횡령한 혐의를 받는 것도 억울한 일이었는데, 이번엔 투서자라는 누명까지 쓰게 된 것이었다. 박은혜 사감은 밤새 사생들의 필적을 조사했고 다음날 아침 조사 결과를 문과학장 김상용 교수에게 보고했다. 김상용 교수는 사환을 시켜 문창숙에게 1교시 수업이 끝나는 즉시 학장실로 오라고 전달했다. 1교시 수업이 끝나고 문창숙이 교실문을 나서자 같은 반 학생들은 일제히 숙덕거렸다. 김상용 교수는 학장실로 찾아온 문창숙을 조용히 타일렀다.

    “만약 네가 그런 짓을 했다고 하더라도 큰일이 아니니까 나한테만 바른대로 말해라. 돈은 선생님이 채워버리면 그만 아니냐.”

    문창숙은 “그 대답은 오후 한 시에 하겠습니다” 하는 한 마디 말을 남겨놓고 학장실을 나섰다. (‘이화여전 문창숙의 비참한 최후’, ‘여성’ 1937년 3월호)


    학장실을 나온 문창숙은 교실로 돌아가지 않고 기숙사로 향했다. 약속한 오후 1시, 문창숙은 쏟아지는 눈발을 맞으며 뒷산으로 뛰어올랐다. 그것이 문창숙의 대답이었다.

    들끓는 여론

    오전까지만 해도 수업을 받던 학생이 오후 뒷산에 올라가 목을 맸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여론은 거세게 들끓었다. 스물세 살 꽃다운 나이의 여학생이, 박애와 평화의 낙원으로 알려진 기독교 여학교에서 친구들의 따돌림과 교수들의 강압적 태도에 시달리다 자살하리라고는 누구도 상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목을 맨 문창숙을 나뭇가지에서 끌어내렸을 때 체온이 남아 있었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여론은 걷잡을 수 없이 악화되었다. 아무리 어린 여학생들이기로 ‘징그럽다’고 살릴 수 있는 목숨을 죽였냐는 질타였다.

    정확한 사실 확인을 위해 한 기자가 나뭇가지에 매달린 문창숙을 끌어내린 이화여전 교목 김인영 목사를 찾아가 당시 정황을 물었다. 김인영 목사는 당시의 비참한 광경을 회상하는 듯이 잠깐 동안 어두운 표정을 짓다가 대답했다.

    김 목사 : “참 무참한 죽음이었습니다. 그때 광경을 무엇이라 말로 할 수 없지요. 너무도 황급하여 곧 내가 문창숙 양의 목을 풀어놓았습니다. 몸과 손발을 만져보았더니 아직 따듯한 체온이 있더군요. 그래서 학교 간호부를 시켜서 주사를 놓았습니다. 생전 처음 참혹한 죽음을 지켜보았습니다.”

    기자 : “일반 풍설은 문창숙 양의 죽음을 보고도 흉하고 징그럽다고 하여 그의 목을 끌러놓지 않고 필경은 목사님을 청하여 그의 목을 끌러놓았다고 합니다. 일각이라도 빨리 문창숙 양의 목을 풀어놓았으면 혹시 문창숙 양이 죽지 않았으리라고 말하는 이가 있는데, 이것이 사실입니까?”

    김 목사 : “천만에 그럴 리가 있습니까? 누구나 인정을 가지고서야 그의 목을 아니 끌러놓겠습니까? 나는 그날 마침 점심을 먹는데 김상용 선생이 뛰어 들어오며 문창숙 양이 죽는다는 유서를 써놓고 나갔다고 그러더군요. 그래서 일대 소동을 일으켜 학교에서는 조를 나누어 문창숙 양의 행방을 찾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마침내 학교 뒷산에서 문창숙 양의 죽음을 발견하게 되었지요.”

    기자 : “그래 목사님께서 처음으로 문창숙 양의 죽음을 발견하셨습니까?”

    김 목사 : “다 함께 보았지요. 여러 선생님들이 다 같이 보았습니다.”

    하고 김 목사는 좀 우물쭈물한다. 기자는 좀더 사건을 추궁하려 했으나 김 목사는 말을 다시 계속하며,

    “이렇게 오셨으니 좋은 말씀을 드리지 못해 미안합니다. 우리 학교의 중대사건이지요. 이런 일이 생기기는 처음입니다.”

    하고 방어진을 친다. 기자는 회담을 끊고 이화여전을 나오게 되었다. (‘문창숙 양의 목을 끌러놓은 김 목사의 말’, ‘조광’ 1937년 3월호)


    이화여전 문창숙 자살사건

    문창숙의 죽음을 재촉한 문제의 괴투서(우)와 문창숙의 필적(좌).

    신중하지 못한 투서 처리도 여론의 질타를 받았다. 투서의 필적이 문창숙의 필치와 비슷하다고 문창숙을 죄인 문초하듯 다그친 것도 교육자로서 올바른 조치가 아니었다. 설령 투서가 문창숙의 자작극이었다 해도 한밤중에 기숙사생을 모두 불러 모아놓고 투서를 받아쓰게 한 것은 지나친 처사였다. 문창숙이 투서자라고 해서 그가 친구 돈을 횡령한 사실이 확인되는 것도 아니었다.

    이렇듯 비판 여론이 비등한 가운데, 서화가요 필적 감정의 권위자인 이한복은 문창숙의 필적과 투서의 필적을 감정하겠다고 나섰다. “절대로 같은 사람의 필적이 아니다”라는 그의 단언에 이화여전은 더욱 궁지에 내몰렸다.

    당시 여학생의 자살은 흔하디흔해 사건 축에도 끼지 못했다. 그러나 그 자살의 태반은 실연을 비관해 결행한 정사(情死)였다. 문창숙처럼 친구들의 따돌림과 교수들의 강압적 태도를 못 이겨 목숨을 끊은 경우는 흔치 않았다. 1886년 미국 북감리교 선교사 스크랜튼 부인이 이화학당을 창설한 이래로 최대의 위기였다.

    문단의 질타

    문제의 이화여전 문과학장 김상용 교수는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한번쯤 들어보았을 ‘남으로 창을 내겠소’(1934)를 지은 바로 그 시인이었다. 문창숙의 사건이 사회 문제로 비화되자 김상용은 여론의 뭇매를 맞았다. 가장 먼저 회초리를 빼든 이는 문단의 좌장 이광수였다.

    문창숙이 돈 20원을 횡령한 혐의로 자살했는데, 사감과 문과학장이 문창숙에게 부정한 혐의를 넘겨씌운 것이 자살의 근본 원인이다. 사감은 익명 투서의 필적을 문창숙의 필적이라고 단정하고 문과학장은 사감의 보고대로 문창숙을 불러서 책임을 추궁했다. 그러매 문창숙은 한번의 죽음으로써 김상용 교수와 박은혜 사감의 단죄에 항변한 것이다.그날 1교시 수업 후에 문과학장 김상용 교수는 문창숙을 불러서 무슨 말을 했기에 문창숙으로 하여금 ‘오후 한 시에 회답한다’는 비장한 결심을 하게 만들었는가. 이 점에 대해서는 죽은 이는 말이 없으니 김 교수의 양심에 맡길밖에 없다. (이광수, ‘문창숙 자살 사건에 대한 비판’, ‘조광’ 1937년 3월호)


    이광수는 자살의 원인을 제공한 것도 문제거니와, 자살 후 이화여전의 태도도 무성의하다며 거세게 질타했다. 문창숙의 장례 전에 학교 당국자로부터 사과성명이나 성의 있는 조치가 있을 것으로 예상했지만 미치지 못했다는 것이다. 조의금 40원을 보냈다가 유족에게 퇴짜를 맞은 것, 문창숙의 관 곁에는 겨우 학교 서무원(庶務員) 하나가 와 있었다는 것, 조화(弔花) 한 다발도 보내지 않았다는 것 등에 대해 그는 실망감을 표했다.

    우리는 이에 이르러 이화여전 당국자의 양심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설사 백보 양보하여 문창숙 양이 돈 20원을 횡령한 것이 사실이라 하더라도 당국은 이렇게 느긋할 수는 없을 것이다. 과실치사라 하더라도 생명이 죽은 때에는 책임 관념이 있어야 하거늘 조의금 40원으로 그 책임을 다하려 한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다.

    사제의 정이 추호만큼만 있다고 하더라도 문창숙 양의 죽음에 대한 직접 책임자인 김상용 교수와 박은혜 사감은 적어도 의전병원 영안실에 문창숙 양의 시체가 있는 동안이라도 그 곁을 떠나지 말았어야 옳다. 또 교육자로서 잘못된 처단으로 자녀인 학생을 죽음에 이르게 한 책임을 지고 즉시 그 직을 사임해서 죽은 이와 그 유족, 사회, 특히 학교에 대하여 사과함이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러하거늘 지금껏 학교 당국자로부터 아무 말이 없음은 실로 비의리(非義理), 몰인정한 일이라 아니할 수 없다. 교육자, 게다가 종교학교의 교육자는 좀더 양심적으로 처사할 것이 아닌가. (이광수, ‘문창숙 자살 사건에 대한 비판’, ‘조광’ 1937년 3월호)


    이광수는 박은혜 사감의 잘못도 조목조목 비판했다. 첫째, 마땅히 사감이 맡아야 할 회계사무를 상급생도 아니고 하급생에게 맡겼다는 것. 둘째, 장부상 20원이 부족함을 알게 되었을 때 사건을 비밀에 부치고 문창숙과 단 둘이서 해결해야 했는데 전 사생을 불러놓고 광고했다는 사실. 셋째, 전 사생을 불러놓고 투서를 두 통씩 받아쓰게 함으로써 사생 전체의 인격을 유린했다는 점이었다.

    이광수에 이어 문학평론가 김문집이 회초리를 들었다. ‘꽃돼지(花豚)’라는 호를 쓰는 문단의 기인(奇人)답게 김문집은 공손한 듯 신랄한 어조로 문단 선배 김상용을 공격했다.

    하나. 필적을 조사키 위해 받아쓰기를 한 것은 알고 보니 사생 일동의 요청이 있었기 때문이더군요. 박은혜 사감이 문창숙 양을 동정한 나머지 여학생들의 요청을 수락했다는 주장은 박은혜 사감의 ‘아메리카 처녀적 명랑성’(박 사감이 미국 유학파인 것을 비꼰 말)이 과도했기 때문이라고 느껴지는데 형은 어떻게 생각하오.

    둘. 유서에 학교 당국을 원망한 어조가 없음은 그 학교가 하나님의 학교인 탓이요?

    셋. 문창숙 양에게 학비 한 푼 보내지 않았던 그 부친이 학교 당국에 대해 위험한 언행을 보인 것은 크게 동정할 만한 일이요.

    넷. 박은혜 사감의 기질이 꾸민 것이 아니고 실제라면 그는 진정한 조선의 딸이요.

    다섯. 학교에서 100원의 조의금을 지출키로 결정하고 우선 교직원들부터 40원을 냈다는 것은 사회의 오해를 사기 쉬운 일이 아니었소? 금액부터 결정했다는 것이 무엇보다 내 취미에 맞지 않소.

    여섯. 춘원(이광수)이 학교 당국을 공격한 것은 학장과 사감이 사표를 제출한 사실이 보도되지 않은 데서 일어난 재앙이니 당국은 조금도 우리의 춘원을 원망하지 말아야 하오.

    일곱, 사건이 마무리된 이후 신학기 첫 수업에 모두가 출석했는데 유독 문창숙의 자리만 빈 것을 알자 긴장한 침묵을 파괴하고 이상한 한 줄기의 음률(흐느끼는 소리를 말함)이 전파되었는데 그 음률은 틀림없이 교단에 선 인간 김상용의 통곡 독창의 서곡인 것을 직감한 학생 일동은 슬픈 합창으로 이에 화답했다 하니 이 풍경은 세계 교육사상 유례없는 장관이 아니었을까? (김문집, ‘이화여전 비극 문제의 재비판’, ‘백광’ 1937년 5월호)


    이화여전 문창숙 자살사건

    문창숙이 오빠와 동생에게 남긴 유서.

    김상용 교수는 여론의 호된 질타를 받으면서도 태평양전쟁 이후 이화여전의 영문학 강좌가 폐지되는 1943년까지 강단을 지켰다. 생활인으로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겠지만 강단에 서 있는 동안 아마도 끊임없는 죄의식에 시달렸을 것이다. 박은혜 사감은 이후 1960년까지 여성운동가이자 교육행정가로 활동했다.

    문창숙은 자살했다기보다 자살로 내몰렸다. 박은혜 사감이 문창숙을 죽음의 벼랑으로 끌고 왔다면, 김상용 교수는 문창숙을 죽음의 벼랑 끝에 세웠다. 그러나 정작 죽음의 벼랑 아래로 문창숙의 등을 떠민 것은 여론의 뭇매를 맞은 두 교육자가 아니라 이화여전 학생들이었다.

    여학생 자성론

    기숙사 사생들은 20원 분실 사고가 터진 후 문창숙을 철저히 따돌렸다. 박은혜 사감이 투서의 내용을 근거로 전 사생 앞에서 문창숙의 결백을 선언했을 때, 사생들은 박은혜 사감을 찾아가 필적 문제를 제기하고 감정을 요청했다. 목을 매 죽어가는 문창숙을 보고도 누구 하나 동아줄을 풀어주겠다고 나서지 않았다. 신학기 첫 수업 시간 문창숙의 빈자리를 보고 흘린 동급생들의 눈물이 진실해 보이지 않는 것은 그 때문이다.

    물론 진지한 자기반성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문창숙의 동급생 조순이는 잡지 기고를 통해 교육자, 학부모를 신랄하게 비판하고 학생에게는 뼈를 깎는 자성을 촉구했다.

    이화여전 기숙사란 원래가 좀 지나치게 호사스러운 곳이다. 전에 어떤 학생은 남의 돈 36원을 가지고 바로 진고개로 가서 6원짜리 핸드백, 2원50전짜리 비단양말 몇 켤레, 2원30전짜리 코티 화장품 한 곽 이렇게 사치품만 사서 허비한 것을 보았다.

    노란 바탕에 얼룩얼룩한 뱀 껍질 같은 가죽을 댄 구두를 처음 보는 우리들은 저것이 죄다 미국에서 나오는 것이라 생각했다. 사실 미국 제품은 아니었지만, 어쨌든 이화여전의 몇 학생이 이러한 구두를 몇 켤레씩 사 신은 다음 일류 ‘모던 걸’과 ‘모던 마담’에게로 전파된 것은 적어도 조선 양화계(洋靴界)의 역사적 사실이다.

    십칠팔 세의 시골 여학생이 처음 이화여전에 들어올 때는 아직 솜털이 포시시한 어린애들이다. 집에서야 잘해야 일주일에 한 번 새 저고리를 얻어 입어도 어머님의 잔소리를 듣는 우리들이다. 그러던 것이 침대에 스팀시설을 갖춘 크림색의 환한 기숙사방에서 호화로운 살림을 하게 되면 남들이 하루 세 번씩 가지각색 저고리를 줄줄이 걸어놓고 바꿔 입는 것을 본다.

    “난 이번에 저고리 마흔 벌 해왔단다.”

    고운 옷에 돈 잘 쓰고 과자 잘 사다 먹고 방 잘 꾸미고 구경 잘 다니면 그 학생은 단연 전교적으로 인기를 독점해서 그 세력과 화려함이 여간이 아님을 본다.

    “부럽다. 나도 저렇게 해봤으면.”

    이것이 형세가 넉넉지 못한 학생에게나 특히 신입생에게는 간절한 소망임에 틀림없다. 겨우 한 학기를 참고 집에만 내려가 보아라.

    “어머니 시집 올 때 입던 남색 치마 있수? 그걸 꺼내서 나 저고리 해주. 어머닌 옛날에 노랑저고리 없었수? 있으면 그것도 내가 가지고 갈 테야.”

    “어머니 비녀가 은비녀요? 나 그걸로 숟가락 해 가질 테야. 다른 애들은 죄다 은수저로 먹는데… 응? 어머니.”

    딸을 서울 유학 보낸 어머니는 불한당을 만난 격이 되고 만다. 아름다운 것도 좋으나 불쌍한 어머니를 껍데기까지 벗기려 들어서는 안 될 것이다.

    학생들에게 너무 많은 물질적 욕망을 자극시키는 데 또한 이러한 불상사가 생기는 원인이 숨어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문창숙 양을 생각하면서 이 붓을 놓는다. (조순이, ‘이화여전 명암기’, ‘여성’ 1937년 3월호)


    이화여전 문창숙 자살사건
    전봉관

    1971년 부산 출생

    서울대 국문과 졸업, 동 대학 석·박사(국문학)

    서울대, 아주대, 한신대, 한성대, 덕성여대에서 강의

    現 한국과학기술원 인문사회과학부 교수

    저서 및 논문 : ‘1930년대 한국 도시적 서정시 연구’ ‘황금광시대’ 등


    문창숙은 어쩌면 스스로 고학을 선택한 것이 아니었는지도 모른다. 남들만큼 잘 입고 잘 꾸미고 싶었지만 그럴 만한 여유가 없었고, 순간적으로 가슴속 깊은 곳에서 끓어오르는 물질적 욕망을 억제하지 못하고 주덕순의 돈에 손을 대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문창숙의 자살에 대한 평가가 달라지지는 않는다. 소비문화에 감염된 여학생 기숙사에서 자의에 의해서건 타의에 의해서건 고학생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물질적 고통보다 정신적 고통이 더 컸을 것이다. 감쪽같이 사라진 주덕순의 돈 20원은 집단 따돌림의 촉매가 되었을 뿐 그것이 근본적 원인은 아니었다.

    문창숙은 한동안 고학생의 비애를 상징하는 인물, 학생의 인권을 상징하는 인물로 기억되다가 사람들의 기억에서 사라졌다. 몇 달 사회를 시끄럽게 했을 뿐 그의 자살은 조선사회를 털끝만큼도 변화시키지 못했다. 누구도 문창숙의 죽음으로 인해 징계를 받거나 손해 보지 않았으며, 조순이가 자성을 촉구한 여학교 기숙사 문화도 전혀 바뀌지 않았다. 어쩌면 조순이도 그러한 문화에 동화되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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