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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봉관의 옛날 잡지를 보러가다 ⑭

이화여전 문창숙 자살사건

‘모던 걸’들의 호사스러운 소비문화가 잉태한 조선 최초의 ‘왕따’

  • 전봉관 한국과학기술원(KAIST) 교수·국문학 junbg@kaist.ac.kr

이화여전 문창숙 자살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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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살현장을 처음 보는 어린 여학생 중 어느 누구도 나뭇가지에 매달린 문창숙을 풀어주기 위해 선뜻 나서지 못했다. 심약한 여학생에게 나뭇가지에 매달린 것은 몇 시간 전까지 한 교실에 앉아 공부하던 친구가 아니라 딱딱하게 굳은 시체일 뿐이었다. 발만 동동 구르던 여학생들은 궁여지책으로 인근에서 문창숙을 찾아다니던 김인영 목사를 불러왔다. 현장에 나타난 김인영 목사는 문창숙의 목을 조이고 있는 동아줄을 황급히 풀고 육신을 끌어내렸다.

그러나 놀라지 마라. 김인영 목사가 문창숙을 끌어내릴 때까지 문창숙의 몸에는 따뜻한 체온이 남아 있었다. 만약 내 학교 학생과 내 학교 동료를 위해 일각이라도 빨리 문창숙의 목을 끌어내린 이가 있었다면 문창숙은 죽음의 길을 밟지 않았을는지 몰랐던 것이다. 더구나 김인영 목사가 문창숙의 목을 끌어내린 후에도 신속한 처치를 하지 못하고 시내로 전화를 걸어 오랜 시간 후에야 겨우 의사가 와서 응급처치를 했으나 회생시키지 못했다. 다시 의전(醫專)병원으로 떠메고 가서 치료를 받았으나 그날 오후 4시 20분경 문창숙은 마침내 돌아오지 못하는 암흑의 길을 밟게 되었다. (‘이화여전 문창숙의 자살사건’, ‘조광’ 1937년 3월호)


그날 오전 학장실에서는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문창숙이 자리를 비웠다고 동급생들이 안절부절못한 것은 왜일까. 문창숙의 유서에 적힌 누명이란 어떤 것이었을까. 대체 이화여전에서는 그해 겨울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감쪽같이 사라진 20원

문창숙은 1915년 제주읍에서 관물상(官物商)을 하는 문수복의 장녀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성격이 명랑하고 쾌활해 부모와 오빠들의 사랑을 한몸에 받았다. 제주도에서 보통학교를 졸업한 후 집안일을 돕다가 열일곱 살 되던 해에 서울에 올라와 진명여고보에 입학했다. 진명여고보에 다니는 동안 성적도 우수했고, 교사와 친구들의 신임도 두터웠다. 1935년 문창숙은 4년 만에 진명여고보를 졸업하고 이화여전 영문과에 입학했다.



문창숙은 매우 명랑하고 쾌활한 처녀였다. 그의 남동생 문창남을 보고 늘 “사람은 한순간이라도 우울하게 살 필요가 없다. 비관과 우울은 금물이다”하고 격려했고, “너는 부디 평범한 사람이 되지 말고 조선을 등지고 굳세게 일하는 사업가가 되라”고 훈계했다. 문창숙은 한 번도 얼굴을 찡그리는 일이 없었고 괴롭다는 말을 한 번도 한 적이 없었다. 언제나 흰 저고리에 검은 치마만 입고 조금도 사치한 일이 없었다. 어머니가 좋은 옷을 해주겠다고 하면 문창숙은 “사람은 겉보다 속을 곱게 단장해야 해요”하고 언제나 거절했다. (‘문창숙의 인물과 일화’, ‘조광’ 1937년 3월호)


이화여전 문창숙 자살사건

사감의 훈계를 듣는 여학생의 모습을 담은 당대 잡지 삽화.

이화여전에 입학한 후 문창숙은 “자기 일은 자기 손으로 처리해야 한다”며 집에서 보내주는 학비를 거절하고 고학을 시작했다. 학비를 대줄 수 없을 만큼 집안이 빈한한 것은 아니었지만, 사회에 나가면 어떤 어려운 일이 닥칠지 모르니 학창시절부터 고생을 경험해보고자 문창숙이 자진한 고학이었다.

문창숙은 아침 일찍 일어나 기상과 등교 시간을 알리는 종을 치고 교실 마루를 닦으며 학비를 벌었다. 고단한 고학 생활이었지만 언제나 웃으면서 즐겁게 지냈다. 그렇게 한 학기를 지낸 후 문창숙은 교수들의 신임을 받아 기숙사의 금전출납부를 맡아보게 되었다. 그다지 많은 시간과 노력을 들이지 않고도 학비를 벌 수 있는 좋은 부업자리였다. 적어도 일을 맡던 순간까지는 그랬다.

1936년 봄 학기 기숙사 사생 주덕순이 문창숙을 찾아와 40원을 맡겼다. 주덕순은 얼마 후 20원을 찾아 쓰고 20원을 남겨두었다. 그런데 어찌된 노릇인지 그해 가을 학기 주덕순이 남은 돈 20원을 찾아쓰려고 보니 장부에는 주덕순이 이미 그 돈을 찾아간 것으로 기록돼 있었다. 여기서 비극은 시작되었다. 주덕순은 펄펄 뛰면서 결단코 자기는 20원밖에 찾아 쓰지 않았고, 장부상의 필적이 문창숙의 글씨가 분명하니 문창숙이 범인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문창숙은 자기가 한 일이 아니라고 끝까지 항변했다.

아무 죄 없이 이런 억울한 누명을 쓴 문창숙은 얼마나 원통하고 분할 것인가? 활발하고 씩씩하던 문창숙은 갑자기 서리를 맞은 사람처럼 풀이 죽었다. 행복과 희열이 흐르던 문창숙의 가슴은 원통과 슬픔의 검은 구름으로 가득 찼다. 아무 죄 없이 이런 누명을 짊어진 하나의 순진한 비둘기는 날개를 부시며 얼마나 울며 떨었을까? 그러나 문창숙은 호소하려 해도 호소할 길이 없었고 변명하려 해도 변명할 길이 없었다. 태산 같은 죄의 중압을 짊어진 문창숙은 혹은 만주로 도망하려고 애도 써보았고 혹은 자취 없이 사라지려고 시도도 해보았다. (‘이화여전 문창숙의 자살사건’, ‘조광’ 1937년 3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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