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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지 취재

필리핀 미군기지 반환사례로 본 의정부·동두천의 미래

현실 무시한‘장밋빛 비전’ 무참히 붕괴된 지역사회

  • 차두현 한국국방연구원 연구위원, 동아시아연구원 객원연구위원 lancer@kida.re.kr

필리핀 미군기지 반환사례로 본 의정부·동두천의 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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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3년 미래한미동맹정책구상(FOTA) 합의에 따라, 경기 북부에 주둔한 2사단 등 미군기지 대부분이 한강 이남으로 재배치된다. 평택기지 조성작업이 본격화함에 따라 파주·의정부·동두천의 미군기지 반환도 가시화했다. 상당수 주민이 생계를 의지하던 미군기지가 빠져나감에 따라 지역경제 침체와 공동화(空洞化) 현상에 대한 우려도 서서히 증폭되고 있다. 이와 관련, 1992년 미군이 철수한 필리핀의 경우는 의미심장한 선례를 보여준다. 중앙정부의 개발계획과 마스터플랜에도 불구하고 피폐해진 지역주민들의 삶은 현실에 근거하지 않은 대책의 한계를 드러낸다. 의정부와 동두천이 클라크와 수비크만의 전철을 피해갈 방법은 없을까.
필리핀 미군기지 반환사례로 본 의정부·동두천의 미래

필리핀의 주요 미군기지였던 수비크만의 항구. 지금도 미·필리핀 합동기동훈련 기간에는 미군 전함이 입항한다.

‘민주화와 동맹조정의 긍정적 결합’ ‘아직은 미숙하지만 희망과 비전이 있는 기지전환’ ‘한국에도 응용될 만한 사례’…. 1월7일 필리핀에 도착하면서 가슴에 품었던 생각이다. 이미 2006년 4월 현지 방문을 통해 필리핀의 기지전환 사례를 개괄적으로 접할 수 있었던 필자는 안식년 특별연수 기간을 활용해 필리핀 수비크만(Subic Bay) 지역에 한 달여 체류하면서 필리핀이 미군으로부터 돌려받은 기지들을 어떻게 민간 용도로 전환해 나갔는지를 보다 심층적으로 파악해볼 생각이었다.

물론 기지반환이 미군의 완전철수와 맞물려 진행된 필리핀의 사례를 우리의 기지전환에 수평적으로 적용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필자는 미국의 기지반환 이후 15년가량의 시간이 지난 필리핀이 상당한 노하우와 잠재력을 축적하고 있을 것으로 믿어 의심치 않았다.

미국과 필리핀은 1898년 미-스페인 전쟁 이후 미국이 사실상의 새로운 점령자로 등장하면서 양자 관계를 형성했다. 1946년 필리핀공화국이 수립된 이후 양국은 1947년 군사지원협정을 체결하면서 안보협력을 제도화했고, 이와 함께 군사기지협정(Military Bases Agreement·MBA)도 체결했다. MBA에 따라 필리핀 내에는 다수의 미군기지가 구축됐다. 대표적인 것이 앙헬레스 지역의 클라크 공군기지와 바기오 지역의 존헤이 공군기지, 수비크만의 해군기지였다. 기지 제공과 동맹 유지에 대한 보상으로 미국의 대규모 경제군사지원을 받은 필리핀은 1950~60년대 동아시아의 중견 국가로 발돋움한다.

그러나 미국과 필리핀 간의 MBA는 필리핀 내 미군기지의 무상임대를 기본으로 사실상 미국에 무제한적인 군사작전을 허용하는 권한을 부여한 것이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필리핀 국내에서 자주성 논란이 심각하게 제기되자, 양국은 1966년 ‘러스크-라모스 합의’를 통해 기지 사용기간을 (1966년부터) 25년으로 단축했다. 이에 따라 필리핀 내의 미군기지 사용은 1991년에 만료되게 됐고, 어느 한쪽이 기한만료 1년 전에 기지폐쇄 의사를 밝히면 해당 기지는 그 기능을 상실하게 됐다.

이후 양국의 제반 여건은 1970년대와는 많이 달라졌다. 필리핀 정부는 미국의 경제원조 규모가 만족스럽지 않았고, 1987년의 민주화로 만들어진 필리핀의 새 헌법에선 기지사용 협정이 연장되려면 상원의 승인(3분의 2 동의)이 있어야 한다고 규정했다. 민주화 진전에 따라 고양된 필리핀 내의 민족주의 분위기는 미군 주둔을 부정적으로 보는 시각을 점차 증폭시켰다. 필리핀이 여전히 중요한 기지였지만 미국 역시 원조 중심의 지원정책에 점차 부담을 느끼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에 1991년 9월16일 기지협정 연장안이 상원에서 부결되는 의외의 사태가 벌어졌다. 이는 부정적 여론이 팽배하긴 했으나 여전히 일정 수준의 미군 주둔을 필요로 하는 필리핀 정부로서도 당혹스러운 일이었다. 민주화 과정에서 집권한 아키노 정부가 의회를 완전히 통제하지 못한데다, 필리핀 정치인들이 ‘국민의 힘(People’s Power)’ 혁명 이후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던 민족주의적 지식인층과 학생운동 세력의 반핵(反核) 기지운동 요구를 무시하기 어려웠던 게 주요 이유였다.

여기에다 1991년 6월의 클라크 공군기지 인근 피나투보 화산 폭발은 미국의 결심을 촉발했다. 화산재가 클라크 공군기지와 수비크 해군기지의 상당부분을 오염시켜 상당한 액수의 복구비용 지출이 불가피해진 것. 결국 미국은 연장안 부결을 계기로 최소 2년은 사용이 어려울 듯 보인 클라크 기지를 포기하기로 결정한다.

미국은 상대적으로 피해가 적었던 수비크 해군기지는 잠정적으로 유지되기를 희망한 것으로 보인다. 하와이에서 아태 지역으로 전개되는 7함대 전력의 중간 기항지로서, 괌을 제외하면 수비크 이외의 대안이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협정 연장안 부결과 동시에 필리핀 정치권과 시민단체들은 미군기지의 전면적인 폐쇄를 강력히 요구했고, 마침내 1992년 11월24일 수비크만에서 미군이 철수하면서 미합중국 군대의 필리핀 주둔은 막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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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두현 한국국방연구원 연구위원, 동아시아연구원 객원연구위원 lancer@kida.re.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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