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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년 만에 빛 본 1980년 ‘신동아’ 계엄검열 삭제 기사 ‘4·19에서 10·26까지 학생운동이 걸어온 발자취’

“학생운동은 ‘살풀이’이자 미학적 생존양식”

  • 김도현 영남일보사 논설위원(1980년 당시)

27년 만에 빛 본 1980년 ‘신동아’ 계엄검열 삭제 기사 ‘4·19에서 10·26까지 학생운동이 걸어온 발자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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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1964년 한일굴욕수교 반대운동의 주역이자, ‘6·3세대’의 대표인물로 꼽히는 김도현 서울 강서구청장이 27년 전인 1980년 3월 ‘신동아’에 투고한 원고다. 원고는 1차 교열과 2차 교열을 거치고 최종 인쇄만 남겨둔 지형(紙型, 가인쇄본) 상태에서 ‘신동아’ 4월호에 게재되지 못한 채 필자 김도현씨에게 전해졌다. 지형에는 ‘新東亞 1980년 4월號 紙型’이라는 표시와 2차 교열이 끝났음을 표시하는 도장이 찍혀 있으며 담당기자가 최종 교열을 본 흔적도 남아 있다. 원고의 제목은 ‘4·19에서 10·26까지 학생운동이 걸어온 발자취’이고, 분량은 200자 원고지 100매였다. 김도현씨는 “계엄검열로 빠졌다는 이야기를 담당기자에게 들은 것 같은데 정확한 기억은 없다. 원고를 청탁한 기자가 누구였는지도 잘 생각나지 않는다”고 기억을 더듬었다.

당시 ‘신동아’ 기자 10명에게 확인한 결과, 이 원고는 신군부의 계엄검열과정에서 누락됐을 가능성이 큰 것으로 밝혀졌다. 1980년 3월은 그 4개월 전인 1979년 12·12 쿠데타로 권력을 장악한 신군부가 서울시청에서 모든 인쇄매체에 대해 검열을 하던 때다. 1980년 3월 ‘신동아’ 차장이던 김종심(전 간행물윤리위원장)씨와 진행 기자이던 노용욱(전 동아일보 출판부장)씨는 “당시 시청에서 최종 인쇄 직전의 원고를 검열해 그 자리에서 빼는 일이 비일비재했는데, 2차 교열을 마친 상태라면 ‘신동아’에서 내부적으로 뺐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했다.

1980년 이전부터 김도현씨와 친분관계를 가져온 당시 ‘신동아’ 기자 윤무한(전 대통령 통치사료비서관), 윤재걸(전 ‘일요서울신문’ 편집인), 서중석(성균관대 사학과 교수)씨는 “우리 중 한 사람이 원고를 청탁했을 가능성이 높지만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그 무렵 ‘신동아’는 매년 4월이면 4·19 관련 특집물을 넣는 게 관행이었다. 하지만 원고의 내용으로 미뤄볼 때, 또 계엄군의 서슬이 퍼렇던 당시 사정을 고려할 때 계엄군의 검열로 빠졌을 가능성이 가장 크다”고 말했다. 특히 “당시 신문사 논설위원이던 김도현씨의 글이 좋았기 때문에 최종 교열을 마친 상태에서 원고가 빠질 이유가 없다”는 것.‘신동아’는 1980년에 게재되지 못한 김도현씨의 글을 4·19혁명 47주년을 맞는 2007년 4월호에 싣기로 했다. 원고에서 한자로 표현된 부분은 모두 한글로 바꿨으며, 일부 오탈자와 현행 맞춤법에 맞지 않은 부분에 한해 최소한의 수정을 가했다. 필자는 이 글에서 4·19에서 10·26까지 20년간의 학생운동사(史)를 비교평가하고 연도별로 주요 사건을 요약, 정리했다. 치밀하고 날카로운 분석이 눈에 띈다. 문장 곳곳에는 신군부의 탄압과 검열을 의식한 듯, 표현의 수위를 조절하기 위해 고심한 흔적이 역력하다. 〈 편집자 〉


27년 만에 빛 본 1980년 ‘신동아’ 계엄검열 삭제 기사 ‘4·19에서 10·26까지 학생운동이 걸어온 발자취’
1960년부터 올해(1980년)까지 20년간의 한국 학생운동사는 눈물 없이는 회상할 수 없는, 또 혹독한 시련 속에서 세계사에서 유례를 찾을 수 없는 강인한 행동으로 우리 사회의 핵심적인 과제에 부딪혀왔다.

이러한 말은 결코 수사(修辭)나 독단이 아니다. 지난 20년간 한국 학생운동은 60년 4월부터 61년 5월까지를 제외하고는 의사의 발표, 출판·집회나 시위가 전면적으로 제약된 상황에 있었기 때문에 온갖 규제를 감수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규제 가운데는 집회·시위·출판물 발표 금지, 정학·자퇴·제적 등 학원추방, 연행·구류·구속·징역형 등 형사적 처벌이 광범하게 적용되었으며, 일시적인 폭행과 모욕은 가벼운 규제로 인식될 정도였다.

학생운동이 당한 이러한 시련에 대하여 학생들 자신의 표현을 빌리지 않더라도 학교 당국자조차 이렇게 말했다. 즉 고려대 김상협(金相浹) 총장은 71년 11월11일 27일간의 데모사태로 인한 휴강을 끝내면서 휴교조치의 이유가 되었던 10·15사태를 이렇게 회고했다.

“우리 고려대학교는 지난 27일 동안 불명예스럽게도 거의 사(死)와 멸(滅)에 가까운 질식 상태에 빠져 있었습니다. …나를 위시한 우리 교직원 일동은 지난 ‘마(魔)의 날’ 10월15일에, 우리 고려대학교 66년 역사상 전무후무한 최악의 그날에 바로 우리 캠퍼스 안에서 벌어진 일련의 불행한 사태들에 관해서 그 세부를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습니다. 사람의 눈으로는 차마 볼 수 없고 사람의 말로는 차마 옮길 수 없는 그 비참한 광경들, 그리고 학생제군들이 그 속에서 불의에 당한 모진 곤욕들에 대해서 우리는 아무리 애써보아도 도저히 망각의 미덕을 발휘할 수 없습니다. 하늘을 쳐다보고 묻습니다. 차마 이럴 수가 있습니까? 땅을 치고 울어봅시다. 차마 이럴 수가 있습니까? 목을 매고 통곡해봅시다. 차마 이럴 수가 있습니까?”

지난 20년간 정부는 학생운동을 제약하기 위해 제1·4·7·9호의 긴급조치,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 내란음모, 내란, 소요, 반공법·국가보안법 등의 법률을 적용하는 외에 위수령과 계엄령을 발동했다. 정부의 태도가 어느 정도 강경했던가에 대해서는 65년 8월25일 대통령담화 뒤 월간 ‘新東亞’(65년 10월호)에 이렇게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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