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4월호

“압록강 건넌 지 사흘, 이 문에 한 발자국 옮기면 중국 땅이다”

  • 허세욱 전 고려대 교수·중문학

    입력2007-04-11 15:3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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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압록강 건넌 지 사흘, 이 문에 한 발자국 옮기면  중국 땅이다”

    허세욱 교수가 뒤쫓게 될 연암 박지원의 연행도.

    마침내 압록강 푸른 물을 베고 자리에 누웠다. 오리 대가리처럼 퍼런 물이라서 압록(鴨綠)이라는 강. 한 걸음이라도 더 가까운 자리에서 강 건너 내 조국 땅의 닭 우는 소릴 듣고자 압록강 철교에서 가장 가까운 주막집에 여장을 풀었다.

    거기 9층의 동쪽 다락방, 밤이 내리자 동창 아래로 압록강 철교와 단교, 그 두 다리가 휘황한 불빛에 내달리는 열차를 방불케 한다. 저 철교를 건너면 내 반쪽 몸뚱이 같은 조국이 있다. 거기 내 겨레 내 형제가 사는 신의주가 곤히 잠들어 있는데, 커튼을 젖히고 또 젖혀도 그곳은 칠흑이다. 난생 처음 북한 땅을 굽어보는 잠자리에서 나는 심신의 착란은 물론 시간과 공간의 도착(倒錯) 현상으로 애를 먹고 있다.

    내가 압록강 하구에 있는 단둥(丹東)에 온 것은, 1780년 청나라 건융의 고희(古稀) 경축 사절을 수행한 연암(燕岩) 박지원(朴趾源)의 연행(燕行) 전 코스를 220여 년 만에 뒤쫓기 위해서다. 연암은 1780년 6월24일, 용만(龍滿·지금의 의주)의 구룡정을 떠나 압록강을 건너고, 그 해 8월20일까지 중국 열하에 다녀와 ‘열하일기’를 남겼다.

    기왕에 ‘열하일기’ 전 코스를 답사키로 목적했으니 나는 비록 대한민국 국민으로 2006년 11월19일을 살고 있지만 시계를 226년 뒤로 돌려 연암과 동행키로 한다. 그때 연암은 8촌 형인 사은겸진하정사(謝恩兼進賀正使) 박명원(朴明源)의 수행원 자격으로 중국 여행길에 올랐고, 마부 창대와 하인 장복을 대동했는데 내가 그 무리에 끼어들기로 한 것이다.

    출국 전야인 6월23일 밤, 연암은 통군정이 있는 의주에서 잠을 설칠 수밖에 없었으리라. 동경하던 청나라에 내일이면 들어간다는 설렘과, 의주에서 열흘이나 장마와 홍수에 갇혀 있었던 지루함이 이제 끝난다는 흥분 때문이리라. 지금쯤 창대와 장복을 곁에 두고 행장을 챙기며 시시콜콜 야단을 칠 게고, 벼루와 석경, 붓 두 자루에 먹, 그리고 공책 네 권과 한 축의 이정표는 따로 꽁꽁 챙겨놓았겠지.



    그날의 연암과 나의 생각은 엇갈린다. 당시 연암은 당쟁의 나라이자 정체의 나라인 조선을 홀가분하게 탈출해 요동벌로 북진하는 격정 속에 있었고, 나는 압록강변서 머리를 남쪽으로 두고 동강난 조국의 문턱을 못내 아쉬운 마음으로 조망하고 있다.

    홀딱 반해 두 손 들다

    내가 연암을 처음 만난 것은 1950년대 초, 대학 입학 시험을 준비할 때 ‘허생전’ ‘호질전’ ‘열하일기’ 등을 외우면서다. 그러나 혀끝에 오르다 만 정도였다. 두 번째는 1970년대 초, 이가원 선생이 번역하고 주석한 ‘국역 열하일기’(민족문화추진회, 1968)를 읽으면서다. 그때 연암의 사상과 문장, 그 재주에 탄복했지만 여전히 먼 거리감이 있었다. 그로부터 30년이 훨씬 지난 금세기 초, 홀로 ‘열하일기’를 정독했다. 글의 구성과 문장력, 중국 고전을 인용하는 방대한 지식, 그 모든 것에 흠뻑 심취했다. 시쳇말로 홀딱 반해 두 손을 들고 말았다. 나 또한 중국의 고전과 현대문학을 업으로 삼은 지 오래고, 내 나이 연암보다 많은데 말이다.

    연암은 나이 마흔넷에 연행(燕行)했고, 그 이듬해부터 3년에 걸쳐 ‘열하일기’를 완성하고, 예순아홉 되던 해 세상을 떠났으니 그 재주에 하늘이 몹시 인색했다. 더구나 내 나이 마흔네 살 때, 예순아홉 살 때와 견주면 땀이 날 만큼 부끄럽다. 나는 이토록 편리한 세상에 온갖 혜택을 죄 누리며 기껏해야 바늘구멍만큼 작은 주제를 맴돌다 마는데 연암은 건축, 토목, 의약으로부터 천문, 종교, 음악에 이르기까지 종횡무진했다.

    “압록강 건넌 지 사흘, 이 문에 한 발자국 옮기면  중국 땅이다”

    중국이 만리장성의 끝이라며 쌓은 호산장성이 멀리 보인다.

    나는 소년시절부터 서당에서 공부하고 현대 교육에다 중국 유학까지 늘어지게 끌다가 석사니 박사니 모자도 둘러쓰고, 중국 글을 쓴답시고 끄적거리기 40년이 훨씬 지났음에도 고문(古文)은 고문답지 못하고 현대문 또한 끙끙거린다. 그런데 연암은 행운유수(行雲流水), 유려한 필체로 한문 일기에 그치지 않고 시, 소설, 수필, 장르를 자유자재 넘나들 뿐 아니라 적시적소에 중국 현지 사람들에게서 얻어들은 백화(白話·중국 구어체)를 혼용하기도 했다. 그 글솜씨에 나는 혀를 몇 번이나 내둘렀다.

    지금껏 ‘열하일기’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그리고 사색당쟁(四色黨爭)에 짓눌렸던 조선 중기를 치유하려는 실학의 대표 주자로 부각되면서 연암의 정치적 평등주의, 경제적 이용후생, 사회적 풍자·비평의식, 문학적 사실주의, 과학적 반(反)미신 사상들이 집중 조명을 받았다. 2004년 11월에 국내에서 출간된 북한판 ‘열하일기’ 또한 연암의 이러한 성향을 높이 평가하고 있다. 이가원 역주의 ‘국역 열하일기’를 찾아보기 어려운 상황에서 1955년 북한에서 국역된 ‘열하일기’를 남한에서도 만나볼 수 있게 된 건 다행스러운 일이다.

    利用厚生과 시인의 가슴

    북한판 ‘열하일기’는 그 해설에서 ‘열하일기’를 세계적인 장편 기행문이자 철학·정치·경제·천문·지리·풍속·여가·고적·문화 등을 망라한 계몽서요 백과전서적 방대한 저술이라고 치켜세우면서 신분 평등과 소유의 제한 등의 포부를 편다. 그런데 그 이론의 근거가 지나치게 변증법적 유물론과 무신론에 바탕을 두고, 실천방법 또한 계급투쟁적인 사회주의 시각을 노출하고 있다.

    내가 보기에도 연암에겐 두 가지 명제가 뚜렷했다. 하나는 평등이요 다른 하나는 풍요였다. 그것은 이제까지의 상하(上下)·빈부(貧富)·적서(嫡庶)·관민(官民)의 차별을 타파하겠다는 이상이자, 가난·봉건·미신 등을 몰아내고 물질과 생명이 함께 넉넉히 아우러지는 풍요, 곧 ‘이용후생(利用厚生)’의 실천이었다.

    그러나 내가 그를 좋아하는 까닭은 따로 있다. 연암의 뜨거운 가슴, 시인(詩人)의 가슴으로 사회와 나라, 겨레와 생활 그 모든 것을 사랑하는 그 격정을 좋아한다. 오로지 사회적이거나 정치적이지만은 않은 균형 잡힌 시각으로 마흔 살 중년의 따뜻한 인문적 정회를 말고삐처럼 잡고 있는 연암이 좋다. 그래서 어렵게 시계를 226년이나 뒤로 돌리고 감히 연암과 동행키로 결심했다.

    연암은 양반의 아들로 태어났지만 벼슬을 마다하고 과거에 응시하지 않았다. 어쩌다 할 수 없이 시험장에 나가더라도 답안지를 내지 않거나 노송이나 괴송을 큼직하게 그려내던 반골이었다. 연행에 앞서 금강산, 송도, 평양, 천마산, 묘향산, 속리산, 가야산, 단양 등지를 유람하고, 연암(燕巖)골(황해도 금천)에 은둔하기도 했는데, 여행은 독왕독재를 즐겼다. ‘열하일기’에도 그런 행적이 여러 차례 드러난다. 슬며시 아무도 몰래 이탈했다가 밤새워 구경하고, 맨 먼저 일어나 말안장을 씌우고 김삿갓처럼 혼자 길을 떠나기도 했다. 가다가 사람을 집어 삼킬 듯 흉용한 물살을 만나면 무서워 뒷걸음치기보다 철퍼덕 뛰어들어 밤을 꼴깍 뒤집어쓰기도 했다.

    그는 정이 넘쳤다. 6월24일, 의주 땅 구룡성을 하직할 때, 하인 장복이가 동전 스물여섯 닢을 털어 술 한 병을 사왔기로 그 술을 혼자 마시기에 앞서 술 한 잔을 문루(門樓)의 첫째 기둥에 뿌려 도강(渡江)이 무사하길 빌었고, 또 한 잔을 둘째 기둥에 뿌려 창대와 장복을 위해 빌었다. 그리고 마지막 한 잔을 땅에 뿌려 애마를 위해 빌었다.

    “참 좋은 울음 터로다”

    그로부터 사흘 뒤, 오늘날의 출입국관리소에 상당하는 중국의 책문(柵門)을 통과하곤 중국의 선진적인 풍물과 처음 맞닥뜨렸을 때, 그토록 동경하던 곳이건만 연암은 “그만 여기서 발길을 돌리고 싶다”며 “온몸에 불을 끼얹는” 느낌이라고 했다. 가난한 조국을 생각하며 얼마나 기가 꺾였기에….

    “압록강 건넌 지 사흘, 이 문에 한 발자국 옮기면  중국 땅이다”

    압록강 철교와 단교 저편이 단둥이다.

    그로부터 며칠 뒤 연암은 요동벌로 들어섰다. 요동벌은 ‘요양에서 산해관까지 1200리 길이 들과 하늘이 맞붙은 땅’이다. 7월8일 그는 냉정(冷井)을 지나 어느 산기슭을 돌아서면서 일망무제의 요동벌이 시야에 들어오자 “아! 참 좋은 울음 터로다. 한번 소리쳐 울 만하구나” 하고 소리쳤다. 말을 세우고 사방을 휘돌아보면서 본시 사람이 하늘을 이고 땅을 밟은 채 떠돌아다니는 존재임을 확인했다.

    그리고 심양(瀋陽·선양)과 산해관(山海關·산하이관)을 거쳐 마침내 북경(北京·베이징)에 입성했다. 8월4일, 연암은 그토록 그리던 유리창(琉璃廠), 그 27만칸이나 되는 빽빽한 골동품 점포들을 보면서 “세상에 한 사람이라도 자기를 알아주는 사람을 얻는 것은 여한이 없는 일”이라고 감탄했다. 그러나 이튿날, 건륭의 부름을 받아 사절단 일행이 열하로 떠나게 되었을 때, 인원 제한으로 그만 장복이를 떨어뜨려야 하는 상황이 왔다. 열하로 가는 말 위에서 연암은 “인간으로 가장 괴로운 것은 이별이요, 이별 중에 괴로운 것은 생이별”이라며 울부짖었다.

    연암의 뜨거운 가슴은 식을 줄 몰랐다. 8월7일, 벌써 사흘이나 뜬눈으로 달리면서 고북구(古北口)를 밤중에 통과하는데, 불현듯 거기 만리장성의 벽면에다 자기 이름 석 자를 남기고 싶었던 것이다. 흔히 사람들이 북한산 백운대에 올라 거기 하얀 바위에 이름을 새기듯. 연암은 칼을 뽑아 벽돌에 낀 이끼를 긁고 벼루에 술을 부어 찬 이슬 내리는 첫새벽에 먹을 듬뿍 찍어 발랐다.

    다시 재를 넘어 아슬아슬 백하(白河)를 아홉 번이나 건너는 이른바 ‘일야구도하(一夜九渡河)’ 대장정을 펼칠 때, 그 미끄러운 이끼에 말 배때기까지 물이 넘실거렸다. 이때 연암은 말을 모는 데 여덟 가지 위험이 있노라 경고했다. 그 내용이란 모두 말과 마부, 그리고 말을 탄 이의 안전을 위한 사랑의 연결이요 실천이었다.

    이튿날, 드디어 열하를 눈앞에 둔 합라하(哈喇河)를 건넜다. 모두 기진맥진이다. 창대는 잠꼬대를 했다. 춥고 배가 고팠던 게다. 연암은 흰 담요를 꺼내 창대의 전신을 감싸고 다시 띠로 꽁꽁 동여매 먼저 호송시켰다. 연암은 이러했다. 어찌 안 좋아할 수 있나. 먼저 그 마음이 뜨거웠기에 평등과 풍요가 눈에 보였던 것이다. 나는 그렇게 믿는다.

    서둘러 凍土를 찾은 까닭

    만주(滿洲)는 벌써 겨울이었다. 이 추위에 ‘열하일기’의 기점인 중국 구련성(九連城)으로 달려온 데는 미룰 수 없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요즘 우리나라 학계와 언론엔 ‘열하일기’ 붐이 일고 있다. 일찍이 창강 김택영(金澤榮)이 ‘5000년째 최고의 문장가’로 추앙한 데 이어 요즘 논자는 연암을 ‘한국의 셰익스피어’로 치켜세운다. 적어도 ‘열하일기’가 ‘한국 최고의 기행문학’임에는 의견을 달리하지 않는다. 다만 기행문학의 문화적 가치나 연암의 천재적 문장력이 재평가됨은 바람직하지만 그것이 터무니없이 부풀려지거나 사실과 달리 굴절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리고 중국은 상전벽해가 되고 있다. 산업화에 따라 어제의 중국이 매일같이 허물을 벗고, 패권화에 따라 어제의 외국이 소수민족으로 편입되면서 역사조차 새로 씌어지고 있다. ‘서북공정’이니 ‘동북공정’이니 하는 국토 개발에, 역사 통일의 작업이 개혁 개방의 획기적인 물결을 타고 전략적으로 전개되고 있다. 그러니 지금이야말로 220여 년 전 연암의 역사 인식과 영토 의식을 통해 조선 중엽 우리 조상의 인식을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 그것은 오늘을 위한 재점검일 수도 있다.

    요컨대 그때 연암이 앞에는 창대, 뒤로는 장복을 거느리고 성큼성큼, 껑충껑충 지나던 ‘열하 여행 노정’ 3000리 연행길이 아직 건재할까. 연암의 눈에 그토록 신선했던 풍물들이 지금은 어떻게 변했을까. 연암뿐 아니라 홍대용, 유득공, 박제가, 이덕무 등 실학파 거장들의 발자국이 찍힌 길, 그 길은 우리 역사의 숨통이 트인 길이자 고구려의 빨간 깃발이 펄럭이던 곳이다. 그래서 나는 서둘러 동토(凍土)를 찾기로 했다.

    천혜의 요새, 호산장성

    “압록강 건넌 지 사흘, 이 문에 한 발자국 옮기면  중국 땅이다”

    평북 의주의 통군정. 단둥의 호산장성에 오르면 통군정 처마가 보인다.

    2006년 11월20일 이른 아침, 1780년 6월24일에 평안도 구룡정을 출발해 압록강을 건너오는 연암과 구련성에서 만나기로 했다. ‘열하일기’에 조선의 출발지점은 소상하게 나와 있지만, 중국 측 상륙지점은 모호하다. 나는 이른 아침 택시를 탔다. 숙소에서 출발해 30분 남짓 달리니 의주 건너편, 최근 보수공사를 마친 호산장성(虎山長城)에 닿았다. 단둥(丹東) 동북쪽 20km, 해발 146m로 우리나라 진안 마이산과 비슷한 산이다. 중국은 명나라 성화 5년(1469)에 축조한 성이라면서 애써 그 연혁을 늘려 얘기하지만 1990년대에 이르러서야 만리장성의 기점을 산하이관으로부터 단둥까지 최소 1000km 연장 발표했고, 장성을 보수·증축한 것은 불과 2~3년 전 일이다. 물론 ‘열하일기’에는 호산에 관한 어떤 기록도 보이지 않는다.

    나는 가파른 비탈을 쏜살같이 올랐다. 거기 정상에 오르면 연암이 출발했던 내 나라 의주땅 통군정이 보인다기에. 베이징의 만리장성에서 보아 눈에 익은 성문, 성로, 성각, 적루를 따라 반 시간쯤 올랐을 때 나는 마치 이동 카메라인 양 사방을 둘러보았다. 발 아래 압록강을 건너 있는 높은 병풍자락이 의주인 듯 가물가물 통군정 처마가 희끗거렸다. 그 아래로 가파른 언덕, 다시 언덕 아래 나루터가 있겠지. 그것들은 보이지 않았다. 지금쯤 연암이 거기서 의주부윤(府尹)의 출국 검사와 환송 인사를 받으며 나룻배를 기다렸겠지.

    호산장성과 의주 산자락 사이에는 잔잔한 파도처럼 샛강이 줄 지어 있었다. 바로 내 코앞에 있는 것은 우적도(于赤島), 그 서쪽으로 다지도(多智島), 그리고 위화도(威化島). 여기서 굽어보는 지형으로 보면 연암 일행이 잠시 기착했던 섬은 우적도나 다지도가 아닐까? ‘열하일기’의 기록대로라면 도강한 뒤 10리를 더 가서 삼강(三江·오늘의 아이허(愛河))을 만났다니까.

    조망은 일품이다. 동쪽으로는 의주의 통군정, 남쪽으로는 가깝게 압록강과 아이허의 합수점, 멀리 위화도를 넘어 단둥의 압록강 철교와 단교…. 그러니까 압록강과 아이허가 이루는 모서리에 솟은지라 한눈에 두 나라의 산천을 굽어볼 수 있는 천혜의 요새다.

    예나 지금이나 까다로운 출국심사

    나는 이 좋은 전망대에서 건너편 의주를 바라보면서 지금쯤 나루터에서 서성이고 있을 연암을 상상했다. ‘자줏빛 몸통에 흰 정수리, 날씬한 정강이에 높은 발굽, 날카로운 머리에 짧은 허리, 그리고 쫑긋한 두 귀’의 애마를 몰고 서 있을 사람. 그는 그 말이 1만리를 달릴 명마라고 했다.

    문득 분통이 터졌다. 도대체 관청과 관리는 왜 생겨나서 모처럼 출국하는 선비나 아전들을 그토록 못살게 잡아두고 있는지, 예나 지금이나. 연암의 기록에 따르면 출국 검사는 쥐 잡듯했다. 우선 출국 신고가 철저했다. 사람은 성명, 주소, 연령은 물론 신장과 수염이나 흉터가 있는지도 적어야 했다. 말의 털빛도 적어야 했다. 특히 금물(禁物) 검사가 까다로웠다. 황금, 진주, 인삼, 초피와 외환 허용치 외의 불법 은화들이 그 대상이다. 신분에 따라 검사 방식이 달랐다. 하인은 옷을 벗겨 사타구니까지 만져보고, 무관이나 통역관은 행장을 풀어헤치게 했다. 그러니 이불 보따리와 옷 꾸러미가 강 언덕에 너울거리고 가죽 상자와 종이 상자들이 낭자하게 뒹굴었다. 그것만이 아니었다. 깃발을 세 개 세워놓고 통관의 문을 삼았는데 첫 번째 깃발에 걸린 사람에겐 곤장을 치고 물건까지 몰수했고, 두 번째 깃발에 걸리면 귀양을 보냈다. 세 번째 깃발에 걸리면 목을 베어 뭇 사람에게 보이게 했다.

    정나미 떨어지도록 혹독하게 조국을 떠나온 연암은 겨우 압록강을 절반쯤 건넌 어느 샛강에서 의주 쪽을 뒤돌아보며 “거기 한 조각의 성이 마치 한 필의 베를 펼쳐놓은 듯, 성문은 흡사 바늘구멍처럼 빤히 뚫려서 거기를 비추는 햇살이 한 점의 샛별처럼 보인다”며 그리워했다. 연암은 조국을 그렇게 미워했고, 또 그렇게 사랑했다.

    나는 서둘러 하산했다. 다시 단둥으로 되돌아가는 길이다. 동북쪽으로 더 올라가면 학창시절 공부했던 수풍댐이 멀지 않다지만 포기하고 남쪽으로 향했다. 남쪽으로 7~8km쯤 왔을 때 길가에서 ‘九連城’이란 표석을 발견했다. 반가웠다. 연암의 상륙지점을 정확히 알기는 어렵지만 그가 중국에서 최초의 밤을 보낸 곳은 분명 구련성이기 때문이다.

    “압록강 건넌 지 사흘, 이 문에 한 발자국 옮기면  중국 땅이다”

    단둥 시내 정경.

    나처럼 중국어를 좀 씨부렁거릴 줄 아는 사람에겐 어디나 불쑥 들어가 시끌벅적 떠드는 장기가 있다. 나는 구련성 읍사무소를 찾았다. 이쪽저쪽을 물어도 나무아미타불이다. 마침내 문화담당관을 찾았다. 이 사람도 진땀을 뺀다. 내가 “요 근방 어느 강가 언덕에 226년 전 조선의 사절단 300여 명이 잤을 법한 곳이 있지 않으냐”고 물었기 때문이다. 담당관은 여러 정황으로 미루어 읍내 작은 산에 토성이 많은데 혹시 그곳 어디쯤 아니겠냐며 앞장을 섰다.

    토성은 주롄(九連) 안쪽 30~40m 높이의 구릉에 축조되어 있었다. 멀리 압록강이 굽이치고, 위화도 길다란 샛강에 누런 숲이 아득했다. 토성은 거의 무너졌다. 까만 벽돌이 촘촘하게 쌓여 있었다. 금나라, 원나라 때는 여기에 순검소(巡檢所)를 설치했고, 명나라 때는 진강부(鎭江府)를 두었던 만큼 성장(城墻)의 유적말고도 요·금·원의 질그릇 파편들이 나뒹굴었다.

    전망대 비슷하게 돌올(突兀)한 돈대에 올라 휘휘 둘러보았다. 연암 일행 300여 명이 캠핑했던 곳은 어딜까. ‘열하일기’에 묘사된 바로는, 역관은 한 막사에 세 사람씩, 또는 장막 하나에 다섯 사람씩, 역졸과 마부들은 다섯 혹은 열 명씩 시냇가에 나무를 얽어매고 그 속에서 밤을 보냈다. 밥 짓고 국 끓이느라 취연(炊煙)이 자욱한데 횃불을 30여 군데 피웠으니 그것만으로도 장관이다. 범이 다가오지 못하도록 군뢰가 나팔을 한 번 불면 300명이 일제히 고함을 지르는 ‘경호’는 우리 겨레의 기함이기도 했다. 별안간 몇 년 전 한일월드컵 때 신나게 외쳤던 “대~한민국” 연호성이 들려오는 듯했다.

    황폐해진 토성을 내려오면서 구련성의 몰락도 짐작할 수 있었다. 청나라가 요동을 정벌한 뒤라 했다. 그러니 연암이 이곳을 지났을 때 주인 없는 땅은 황량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허전한 마음으로 뚜벅뚜벅 내려오는데 그 마을 수십채의 집들이 모두 빨간 벽돌로 되어 있다. 오래 전 연암이 첫눈에 반하고, 제일 부러워했던 것이 바로 벽돌 가마가 아니던가.

    나도 그렇지만 연암은 더 조급했다. 중국 땅에 들어선 지 사흘이 지나도록 아직 중국에 들어선 게 아니었기 때문이다. 압록강을 건너 다시 120리를 들어가야 중국의 국경선인 책문(柵門)이다. 압록강으로부터 책문까지는 사람이 살지 않는 이른바 완충지대였던 것이다. 구련성에 도착한 첫날밤 소나기에 흠뻑 젖어 그 이튿날은 쉬고, 6월26일 아침 일찍 30리를 달려 금석산(金石山) 아래서 점심을 때우고, 다시 30리를 가서 총유(蔥푾)에서 노숙해 사실상 중국의 국문(國門) 책문은 6월27일에야 밟았다.

    단동역에서 옛 책문 터인 일면산(一面山)역까진 기찻길로 45km. 책문은 문자 그대로 울짱으로 된 문이다. 그러니까 집과 밭을 가르는 울이 국경으로 발전한 것이다. 우리는 책문이라 부르는 것을 중국 사람은 변문(邊門)·가자문(架子門)·고려문(高麗門) 등으로 불렀다. 지금은 행정구역으로 변문진(邊門鎭)에 속하며 단동으로부터 봉황성시(鳳凰城市)로 가는 국도 304번 그 연도에서 ‘변문진’의 표적을 볼 수 있었다.

    울짱으로 된 문

    책문은 연암의 눈에 불을 지핀 곳이다. 고구려 때 양만춘 장군이 당나라 대군을 격퇴한 안시성(安市城)이 이곳이라는 풍설이 있는가 하면, 명·청 때까지 조선인 가구 수천호가 살아서 ‘가오리먼(高麗門)’으로 불렸던 역사적인 유서지이고, 봉황산의 빼어난 산수에 에워싸인 책문 안 청나라인의 삶의 현장이 질투를 유발할 정도로 풍요로운데다 청인들이 일용하는 도르래나 편담 등 기물이 과학적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가 정작 궁금한 것은 소위 책문의 형상이 어떻고 안시성의 실체가 어디에 있었는가였다. 연암은 책문이 나무 각으로 울을 짜서 겨우 경계를 표시했노라고, 그러니까 버들가지를 꺾어서 채전의 울타리를 만든 격이라 했다. 어쩌면 제주도에서 흔히 보는 정낭이나 다름없는 막대 앞에서 연암은 입국을 기다렸는지 모른다. 이엉이 덮인 널빤지 문이 잠긴 그 앞에서.

    책문 저 안에는 민가가 널려 있었다. 수레와 차들이 북적였고, 다섯 개의 들보가 높이 솟은 민가들은 그 등성마루나 문호가 훤칠하고 가지런하여 연암은 기가 한풀 꺾였다. 그 와중에 책문 밖에선 부채, 먹, 손칼, 장지, 담뱃대, 은장도, 연죽 등의 예단(禮單)을 두고 청나라 관원과 우리 역관 사이에 밀고 당기는 야료가 벌어졌다.

    방생한 한 마리 물고기

    나의 주 관심사인 안시성에 대해 연암은 “여기 책문에서 6, 7리 떨어진 봉황산에 안시성이 있다 하나 멀리서 보더라도 그 성첩이 너무 좁아서 큰 군사가 오랫동안 머물 곳이 못 된다”고 했다. 아마도 고구려 때의 조그마한 보루에 지나지 않을 것이라 덧붙였다.

    내가 단둥에서 국도 304번을 타고 서북진하기 반 시간이 지나자 봉황산 그 가파른 뫼뿌리가 보이기 시작했다. 그것은 한눈에 돌기한 화살과 다름없었다. 화살 아래로 무지개처럼 가로 누운 바위, 나중에 듣자니 그걸 ‘늙은 황소의 등짝(老牛背)’이라 했다. 연암은 봉황산을 삼각산과 도봉산에 견주었다. 봉황산의 빼어남은 도봉이나 삼각보다 지나침이 있지만 왕기(旺氣), 곧 왕기(王氣)는 어림없다 했다.

    봉황산을 멀리 조망하면서 산을 돌고 길을 돌았을 때, 산자락 밑 옥수수들이 마치 논산 훈련소의 ‘세워 총’처럼 서 있는 밭두둑 위로 작은 성냥갑 같은 역사(驛舍)가 보였다. 일면산역이다. 어떤 이는 이 역사가 옛 책문 터에 세워진 것이라 했고, 어떤 이는 그 역사 남쪽의 열차 건널목이 책문이었다고 했다. 지형으로 봐선 건널목이 그럴 법했다.

    내친 김에 나는 봉황산으로 차를 돌렸다. 아닌게아니라 삼각산 어느 골짜기쯤 들어가는 느낌이다. 차는 조양사(朝陽寺) 앞에 머물렀다.

    주봉에는 갑자기 구름이 몰려왔다. 현지 사람 얘기가 주봉 동쪽 능선 저 아래로 고구려 산성이 있긴 하지만 연암이 언급했듯 그리 넓지 않다고 한다. 더군다나 최근 우리 학계에선 안시성을 지금의 봉황성이 아닌 잉청쯔(英城子·하이청(海城) 남동쪽에 있는 산성)로 보는 게 대세라 짙은 안개 속에서 굳이 고구려 산성을 찾을 일이 아니란 생각에 발걸음을 돌렸다.

    “압록강 건넌 지 사흘, 이 문에 한 발자국 옮기면  중국 땅이다”
    허세욱

    1934년 전북 임실 출생

    한국외국어대 중국어과 졸업, 대만 사범대 대학원 석·박사(중국문학)

    한국외국어대 외국어학부장, 고려대 중어중문학과 교수

    現 한국외대 대학원 초빙교수


    “이 문에 한 발자국 옮기면 이제는 중국 땅이다. 고국 소식은 여기서부터 끊길 참이다.”

    연암은 책문 앞에서 감개무량한 한마디를 남기고 마침내 중국 땅에 들어섰다. 모든 길은 끊기는 곳에서 새로 시작된다. 이제 연암은 도강했다. 새로운 물에 방생한 한 마리 물고기다. 요동벌로부터 요서벌, 그리고 성경(盛京), 관내(關內), 막북(漠北)의 벌판을 울고 불고 달리면서 그 오장에 자유와 실용의 바람을 실컷 호흡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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