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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봉관의 옛날 잡지를 보러가다 22

‘독살 미인’ 김정필 신드롬

“죽여라” “살려라”… 장안을 달군 시골아낙 재판 소동

  • 전봉관 한국과학기술원(KAIST) 교수·국문학 junbg@kaist.ac.kr

‘독살 미인’ 김정필 신드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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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신의 이름도 쓸 줄 모르는 함경도 시골마을의 한 아낙이 남편을 살해한 혐의로 체포됐다. 일사천리로 진행된 재판의 결과는 사형. 그러나 재판정에 나온 피고의 아름다운 용모에 반한 사람들은 재판장에게 투서를 날리며 무죄를 호소한다. 진술 번복으로 재개된 2심 공판을 둘러싼 종로 일대의 대혼잡, 오로지 미인이기에 집중됐던 각계각층의 뜨거운 관심. 과연 그는 남편을 죽였을까.
‘독살 미인’ 김정필 신드롬

‘동아일보’ 1925년 10월23일자에 실린 재판 당시의 김정필. 큰 사진은 ‘삼천리’ 1930년 5월호에 실린 ‘법정에 선 독살미인 김정필‘ 기사.

1924년 10월10일, 종로 거리에는 늦가을 새벽추위가 채 가시지 않은 이른 아침부터 인파가 몰려들었다. 새벽잠을 설친 사람들은 말 못할 비밀이나 간직한 듯 입을 굳게 다문 채 앞서거니 뒤서거니 발걸음을 재촉했다. 장에 가는 것도, 회사나 공장으로 출근하는 것도 아니었다. 이른 아침 종로에 출현한 군중은 마법에 걸린 듯 일제히 경성복심법원 정문을 통과해 굳게 닫힌 제7호 법정 앞에 줄지어 늘어섰다.

개정을 한 시간 앞둔 8시30분, 법원 청사 앞에는 이미 500~600명의 군중이 운집해 입추의 여지가 없었다. 제7호 법정이 수용할 수 있는 방청객은 고작 60여 명. 열에 아홉은 몇 시간씩 기다린 보람도 없이 씁쓸히 발길을 돌려야 할 처지였다. 사람에 치여 숨쉬기조차 어려울 지경에 이르자 법원 마당에 모인 군중은 굳게 다물었던 입을 열고 한 마디씩 내뱉었다.

“여보시오. 나는 조반도 거르고 7시부터 줄을 섰다오.”

“예끼 이 사람, 겨우 7시에 온 걸 가지고 웬 생색이우. 나는 5시에 나왔다오.”

“나는 상점문도 걸어 잠그고 왔소.”

“끼여 죽겠소. 그만 미시오.”

장안을 뒤집어놓은 촌색시

개정 시각이 가까워오자 인파는 걷잡을 수 없이 불어났다. 법원 부근에만 2000여 명의 군중이 운집했다. 서른 명씩, 마흔 명씩 떼 지어 몰려온 군중은 제지하는 순사들을 밀치고 제7호 법정 앞 입장 대기행렬에 더덕더덕 엉겨 붙었다.

밀어라 당겨라 비벼라 들어가자 애걔걔 죽겠네 여보 가만있소 소리를 지르며 엉겼다 무너지고 무너졌다 들러붙어 이리밀리고 저리 밀리기를 약 한 시간 반. 그 중에 가관이라 할지 무어라 할지 복판에 끼인 사람 중에는 불시로 키가 자라서 우뚝우뚝 솟아오른다. 나오려니 헤치고 나갈 수 없어 야단. 숨이 막혀 야단. 가슴이 결려 야단. 옷고름이 떨어졌네. 모자가 도망갔네. 발등을 밟네. 허방에 빠졌네. 별별 현상 갖은 일이 다 일어났다. (‘본부독살 미인공판 방청객 수기’, ‘동아일보’ 1924년 10월20일자)


꼭두새벽부터 법원 앞에 모인 2000여 인파는, ‘김정필 본부 독살사건’ 경성복심법원 재개 공판을 구경 나온 사람들이었다. 쥐약으로 남편을 독살한 혐의로 1심에서 사형을 선고받은 스무 살 촌색시 김정필이 그처럼 거대한 인파를 한 곳으로 불러 모은 것이었다. 그날 법원 앞에 모인 2000여 명은 3·1운동 이후 종로에 운집한 최대의 인파였다.

종로경찰서에서는 경관 수십 명이 출동하여 법원 정문과 법정 문 앞에 몇 사람씩 파수를 세우고 장내 장외에 모여든 수천의 군중을 해산시키기에 노력했다. 장내에 쇄도했던 군중은 두어 시간의 사투 끝에 어느 정도 해산시켰으나 장외 즉 종로 일대에 쇄도했던 군중은 좀처럼 해산이 되지 않았다. 경관에게 쫓겨 이리저리 몰려다니며 오후 두 시까지 의연히 재판소문을 바라보며 모여 있었다. 법정 앞 담에는 수십 명의 기생이 매달려서 춘삼월에 고운 꽃이 핀 산 언덕과 흡사했다. (‘종로 일대 인산인해’, ‘조선일보’ 1924년 10월11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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