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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세욱 교수의 新열하일기 4

성을 쌓아도 정치가 무너지고 인화가 바스러지면…

  • 허세욱 전 고려대 교수·중문학

성을 쌓아도 정치가 무너지고 인화가 바스러지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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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연암은 계속 남하했다. 1780년 7월17일부터 23일까지. 석산(石山)에서부터 홍화포(紅花鋪), 그 호리병 같은 요서(遼西)회랑 500릿길은 지난번 요양에서 석산까지 600릿길과 크게 다르다. ‘열하일기’ 중 요양에서 석산까지가 ‘성경의 이모저모(盛京雜識)’라면, 석산부터 홍화포는 온전히 ‘일신수필(馹迅隨筆)’에 속한다. ‘성경의 이모저모’가 요동 대평원에 대한 전율과 성경 문물에 대한 경이라면 ‘일신수필’은 왼편에 발해, 오른편에 의무려산맥을 두고 한쪽은 바다, 다른 한쪽은 산맥으로 평행하는 길쭉한 허리등뼈 같은 땅, 거기에 널려 있는 격전의 비화를 더듬는 순례다. 허세욱 교수가 지난해 11월과 지난 5월, 두 차례 그곳을 찾았다.
성을 쌓아도 정치가  무너지고 인화가 바스러지면…

허세욱 교수가 뒤쫓는 연암의 연행도.

붕붕 고동을 울리며 부산 앞바다를 나올 때 왼편에 떠 있는 오륙도가 다섯 개로도 보이고 여섯 개로도 보이듯, 열 개로도 보이고 열하나, 열두 개로도 보이는 십삼산(十三山, 지금은 石山으로 불림)을 떠나 다시 16km 남하, 강폭 2km의 대릉해교(大凌海橋)를 건너 능해(凌海)시에 이르기까지 아직도 망망대해의 평원이었다.

능해는 우리의 꿈이 서린 곳이다. 언젠가 이 지역에서 출토된 비파 모양의 동검(銅劍)이 우리나라 대동강 유역의 그것과 같다 하여 석기시대 문화의 판도가 여기까지 미치지 않았나 추정하는 시각이 있었는가 하면 고구려의 속령이 요동반도의 해성(海城)이 아니라 더 서쪽으로 나아가 여기까지 넓히지 않았나 가설하는 사람도 있었다.

집요한 대금(大金)의 야심

능해로부터 금주(錦州)·송산(松山)·행산(杏山)·고교(高橋)·탑산(塔山)·영원(寧遠·지금의 興城) 등지를 거쳐 만리장성의 기점인 산해관(山海關)에 이르기까지 그 길 요서회랑은 핏빛으로 물든 격전지였다. 그 길은 중원의 세력-주·한·당·송·명-이 판도를 넓히려 만주벌을 북벌하는 인후지지(咽喉之地)였고, 만주벌에서 일어난 비(非)한족 정권인 거란, 여진족의 요·금이 남침하던 통로였다. 요의 야율아보기가 거란국을 세우고 서기 916년 이래 중원으로 남하할 때 이 길을 택했고, 1125년 여진이 요를 멸하고 여세를 몰아 이듬해 중원을 공략할 때도 이 길을 밟았다.

그러나 요서 회랑에 북벌과 남침의 불꽃이 가장 뜨겁게 작열했던 것은 누르하치가 허투아라(지금의 新賓)에서 자신을 칸이라 칭하고 국호를 대금(大金)이라 공포한 지 2년 만인 1618년부터다. 누르하치는 무고하게 참살당한 아버지와 할아버지를 비롯 ‘일곱 가지 한(七恨)’을 내세우고 그 한풀이로 명나라를 공략하기 시작했다. 1626년, 누르하치는 성경과 광령(廣寧·지금의 北寧)을 공략하고, 그 여세를 타고 남하해 명나라의 북방 성벽인 영원(寧遠·지금의 興城)을 침공했으나 명장 원숭환(袁崇煥)의 포격에 부상당해 성경으로 퇴각했다가 그해 8월 병사함으로써 명나라가 ‘영원대첩’을 기록케 했다.

그러나 대금의 야심은 집요했다. 이듬해 1627년, 누르하치의 여덟째 아들 홍타이치(皇太極)가 조선의 친명 정책을 차단하러 정묘호란을 도발하는 한편 다시 금주와 영원을 공격했지만 이번에도 명군의 홍이(紅夷)대포에 눌려 명나라가 또 한번 ‘금령대첩’을 기록하도록 했다.

그로부터 10년 뒤인 1636년, 홍타이치는 국호를 대청(大淸)으로 바꾸고 침략과 패권의 의지를 굳혔다. 그해 겨울, 다시 조선을 침공하는 병자호란을 도발해 1637년 인조로부터 삼배구고두(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림)라는 치욕적인 항복을 받아냈다. 북으로도 소수민족의 귀복을 추스른 뒤, 능해·금주·송산·행산·고교·탑산·영원 등지를 점령하고 나아가 산해관을 넘어 연경(지금의 북경)에 청나라 깃발을 꽂는 데 온 힘을 쏟았다. 1641년과 1642년에 걸쳐 위의 요서 회랑을 강공한 결과, 명장 조대수(祖大壽)가 청군에 항복했고 명장 홍승주(洪承疇)는 성경으로 압송됐다. 1643년 홍타이치는 산해관을 압박, 영원성을 사수하고 있는 명나라 총사령 오삼계(吳三桂)에게 투항을 권고했다. 1644년 때마침 농민군을 끌고 북경을 함락한 이자성(李自成)이 북경에서 오삼계의 저택을 점거하고 그의 애첩을 탈취하는가 하면 그의 아버지를 고문치사하는 등 횡포를 자행하자 오삼계는 그 통한을 안고 차라리 청군과 연합해 농민군을 북경에서 쫓기로 했다. 끝내 오삼계는 산해관 관문을 열고 청군의 무혈입성을 도왔고 그해 5월2일 홍타이치는 북경을 진압, 9월19일 북경에 대청제국을 세웠던 것이다.

명·청의 어육지장(魚肉之場)

연암이 여기 요서 회랑을 달린 것은 요서지방에서 명·청의 치열한 격전(1618~44)이 그친 지 어언 136년 만이다. 그럼에도 상처가 아물지 않아 눈 닿는 곳마다 무너진 담벼락이요, 부락마다 점포들이 연이었지만 메마르고 빈약했다고 묘사했다. 연암은 송산과 행산, 행산과 탑산까지 최대 격전지를 지나면서 ‘슬프다(嗚呼)’를 연발했다. 그리고 여기는 경진년(1640)과 신사년(1641) 사이 명·청의 ‘어육지장(魚肉之場)’이라고 표현했다. 오죽했으면 생선이나 짐승들이 참살당하는 그런 현장이라 했을까. 그때 명군의 시체가 기러기나 따오기떼처럼 둥둥 떠 있음에도 청군은 겨우 여덟 명이 부상당할 뿐 나머지는 피 한 방울 흘리지 않았노라고 적힌 기록을 들추어내기도 했다. 그때 명나라의 13만 대군이 2000명도 안 되는 홍타이치 군사에게 포위되어 썩은 가랑잎 부스러지듯, 지푸라기 재 되듯 무너졌노라고 안타까워했다. 그것은 피할 수 없는 운수라고도 했다. 홍승주, 오삼계 같은 천하무적의 지략과 용맹도 아무 쓸모가 없는 물거품이었다고 술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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