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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봉관의 옛날 잡지를 보러가다 27

윤심덕·김우진 ‘현해탄 정사(情死)’ 미스터리

유서도 시신도 없는 선상(船上) 행방불명, 끊임없이 이어지는 생존설의 진실은?

  • 전봉관 한국과학기술원(KAIST) 교수·국문학 junbg@kaist.ac.kr

윤심덕·김우진 ‘현해탄 정사(情死)’ 미스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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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시간 남짓 이어진 인터뷰가 끝나갈 때 윤성덕은 언니에 대한 세상 사람들의 지나친 관심에 불만을 표시했다. 그가 “남이야 살았든지 죽었든지 무슨 걱정이냐, 죽었으면 죽었고 살았으면 살았지. 도대체 조선사회는 왜 이렇게 남을 칭찬하기도 잘하고 욕하기도 잘하는지 모르겠다”고 되묻자, 김을한 기자는 인터뷰에 응해주어 고맙다는 말로 자리를 물러나야 했다. 윤심덕이 살아 있다는 윤성덕의 확신만 확인했을 뿐 뚜렷한 증거를 얻지 못한 채였다.

윤심덕과 김우진의 생존설은 두 사람이 정사한 직후부터 지속적으로 제기됐다. 두 사람 모두 유서도 시체도 발견되지 않았으니 가족들이 그렇게 믿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정작 두 사람의 생존설을 확대 재생산한 것은 호사가들과 언론이었다. 두 사람의 정사 덕분에 엉뚱한 사람이 돈방석에 앉았으니 호사가들이 입방아를 찧을 만도 했다.

문제의 여성 윤심덕이 현해탄의 사나운 파도 속에 몸을 던져 고기의 밥이 되었다는 소식은 조선사회에 일시 비상한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사람이 둘만 모이면

“윤심덕이 죽었다지?”

“응 죽었대.”



“왜 죽어버렸을까?”

“그야 알 수 있나!”

“그 쾌활한 윤심덕이 자살을 하다니.”

“그러게 사람 일이란 알 수 없지.”

라는 대화가 오갈 만큼 윤심덕 자살에관한 이야기는 전 사회의 관심을 모았다. 윤심덕이 세상을 떠나기 며칠 전 녹음한 ‘사의 찬미’라는 레코드는 수만장이 팔려 음반회사가 갑자기 부자가 되었다는 말만 들어도 전 조선을 풍미하던 비상한 인기를 능히 추측할 수 있지 않은가.

그런데 최근에 이르러 어디서부터 시작된 소문인지 윤심덕이 애인과 현해탄에 몸을 던져 자살했다는 것은 한낱 능청스러운 연극에 지나지 않고, 지금 산자수명(山紫水明)한 이태리 나폴리에 생존해 있다는 풍문이 떠돈다. 그러나 과연 윤심덕이 이태리에 살아 있다 하면 3년이라는 기나긴 세월이 흘렀으니 그 동안 한 번이라도 그의 집에 서신이라도 띄웠을 것이련만 그도 없다 하니 믿을 만한 것이 못 된다. 윤심덕이 이미 저 세상 사람이 되었든지 아직 안 되었든지 어쨌든 거친 인생의 행로를 걸어온 그의 고달픈 영혼에 안일한 행복이 있기를 바라는 바이다. (‘일시 소문 높던 여성의 최근 소식’, ‘조선일보’ 1928년 1월10일자)


윤심덕·김우진 ‘현해탄 정사(情死)’ 미스터리

윤심덕의 삶과 애정사를 전하는 ‘삼천리’ 1938년 11월호 ‘다한한 윤심덕’ 기사.

동반자살한 이후의 상황도 의문이었지만, 자살 동기나 두 사람 사이의 관계는 더 큰 의문이었다. 윤심덕과 김우진은 제각기 아픔과 고민은 있었지만 함께 정사해야 할 뚜렷한 이유는 없었다. 윤심덕에게 김우진은 여러 남자 가운데 하나였을 뿐이고, 김우진 역시 함께 죽어야 할 만큼 윤심덕을 사랑하지는 않았다.

‘왈녀’라 불리던 여인

윤심덕은 1897년 평양 순영리에서 부친 윤석호와 모친 김씨 사이의 1남 3녀 중 둘째딸로 태어났다. 윤심덕이 태어난 직후 그의 가족은 진남포로 이주했다. 부모는 모두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다. 윤석호는 나물장사를 하고 김씨는 병원에서 허드렛일을 하면서 힘겹게 살았지만 네 자녀를 모두 훌륭히 교육시켰다. 맏딸 윤심성은 이화학당을 졸업하고 경상북도 안동으로 출가했고, 막내딸 윤성덕은 이화학당을 졸업한 후 모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윤심덕의 하나뿐인 남동생 윤기정은 연희전문학교 문과를 졸업하고 도쿄음악학교와 오하이오대학에서 성악을 공부했다.

모친 김씨가 윤심덕을 임신했을 때 쌍둥이를 임신한 듯 보일 정도로 배가 불렀다. 윤심덕은 ‘6척(180cm) 장신’이라 불릴 만큼 키가 컸고, 어려서부터 성격이 사내아이같이 활달해 ‘왈녀’라 불렸다. 둘째였지만 4남매의 리더 노릇을 했고 동생을 위해서라면 어떠한 희생도 감수할 만큼 우애가 남달랐다. 여기까지가 학계에 공인된 윤심덕의 가정환경이다. 하지만 이와는 다른 기록도 전해진다.

윤심덕씨는 듣건대 원래 평양 어떤 기생의 따님이라고 합니다. 그 기생은 딸을 낳고 생각다 못해 자기 동네에 사는 어떤 큰 부잣집의 후원 소나무 밭에 갓난애를 눈물 머금고 버렸습니다. 아이 우는 소리를 듣고 그 집 사람이 쫓아 나와 생후 한 달밖에 안 된 여자아이를 거두어 친부모같이 귀애(貴愛)하며 길렀습니다. 친부모같이 주어다가 기른 이가 바로 윤성덕씨의 어머니라 합니다. 그래서 윤성덕씨와 윤심덕씨는 자매가 된 것이라 합니다. (‘가인춘추’, ‘삼천리’ 1932년 7월호)


윤심덕의 집안이 ‘큰 부잣집’이 아니라는 점에서 신빙성이 떨어지는 기록이다. 하지만 서른에 이르도록 윤심덕의 혼사가 번번이 깨어졌고 윤심덕이 가까운 친구들에게 가족들이 자신을 차별한다고 털어놓았음을 미루어볼 때, 윤심덕이 정상적인 딸은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윤심덕은 살뜰한 동무들과 마주 앉았을 때 무슨 의미로 하는 말인지 또 사실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지만 “현재 나의 아버지는 친아버지가 아니란다. 그래서 우리 집에서는 딸 셋 중에 나에게만 제일 박하게 대해. 이런 기막힌 노릇이 있니…”하고 커다란 두 눈에 하염없는 눈물이 그렁그렁하여지며 목이 메는 듯한 목소리로 가끔 말하는 일도 있었다 한다. (‘김윤 양인이 정사하기까지 4’, ‘동아일보’ 1926년 8월9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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