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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세욱 교수의 新열하일기 7

나는 말을 믿고, 말은 제 말굽을 믿고

  • 허세욱 전 고려대 교수·중문학

나는 말을 믿고, 말은 제 말굽을 믿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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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70년 8월5일 연암은 나흘 뒤 열하에서 열리는 건륭의 고희연에 참석하라는 통보를 받는다. 행사에 참가하기 위해 닷새 동안 밤낮없이 500리를 이동하는 강행군을 한다. 힘겹게 강을 건너면 더 큰 강이 떡 버티고 있는 험난한 여정. 북경에서 열하까지 이동하면서 겪은 감상을 기록한 열하일기 다섯째 장 ‘막북행정록’에는 연암의 인간적인 면모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필자는 2004년 12월과 2007년 5월, 그리고 2007년 8월 세 차례에 걸쳐 연암이 간 길을 되밟았다.
나는 말을 믿고, 말은 제 말굽을 믿고

허세욱 교수가 뒤쫓는 연암의 연행도.

북경은 연암 인생 43년 사상의 중심지요, 그가 중년 들어 추구했던 실학의 쇼윈도다. 그는 북경에서 두 가지 충격을 받았다. 하나는 다민족으로 이뤄진 중국을 3000년간 한 문 한 길로 통일시킨 것이 요·순으로부터 시작한 ‘유정유일(惟精唯一)’이라는 중심적·통일적인 중화주의란 사실이고, 또 하나는 부와 선진을 상징하는 27만 칸의 유리창(琉璃廠) 다락 난간에서 ‘천하의 지기 한 사람 있으면 한이 없겠노라’는 절대 고독론에 몸서리를 친 기억이다.

새로운 세상, 새로운 삶에 사로잡혀 붕붕 떠다닌 지 닷새째, 그는 또 다른 충격으로 한동안 파멸할 수밖에 없었다. 북경 거리를 구경 나갔다 술 몇 잔 걸치고 꼬꾸라져 잠든 8월4일, 정사(正使)의 마두(馬頭)인 시대로부터 내일 새벽이면 열하로 먼 길을 떠나야 한다는 청나라 예부의 급보를 받은 것이다. 그로부터 다시 밤낮 나흘 동안 북경에서 열하까지 224km를 불가의 ‘404병(病)’ ‘81난(難)’과 같은 고행을 하는 심정으로 뛰었다. 그보다 더 큰 아픔은 경축 사절의 인원 제한으로 수족과 다름없던 장복이를 북경에 떨어뜨린 것이었다.

열하로 가는 북녘땅 500리

‘열하일기’의 다섯째 장(章)인 ‘막북행정록(漠北行程錄)’은 8월5일부터 8월9일 아침까지 북경 이북의 변강을 고행한 기록으로, 정신적·육체적인 고난과 아픔으로 얼룩진 ‘열하장정(熱河長征)’의 마지막 레이스를 담고 있다.

사실 1780년 청나라 고종 고희 경축 사절의 여정은 출발부터 고행이었다. 여름 장마가 시작되는 유월에 도강해 건륭의 생일이라는 사실 외에 경축식이 열리는 시기, 장소 등 정확한 의전 지시가 일절 없었다.

7월2일 통원보에서 장마에 갇힌 지 사흘째, 부사가 문짝과 수레로 뗏목을 만들어 건널 것을 제안할 만큼 상황이 좋지 않았다. 다시 나흘 뒤, 결국 하인 30여 명이 맨몸으로 가마를 메고 세찬 물살을 간신히 건너는 모험을 벌였다. 북경에 입성하던 8월1일, 맨 처음 사절의 표자문을 청나라 예부에 제출한 뒤 나흘을 기다린 것도 정확한 의전 지시를 촉구하기 위함이었다.

8월4일 밤, 정사의 초조는 극에 달했는지 꿈결에 열하 길을 떠났노라고 연암에게 하소연할 정도였다. 그 조울증은 연암에게도 전염된 모양이다. 연암의 꿈결에도 별안간 벽돌 밟는 발자국 소리가 마치 담이 허물어지고 집이 무너지듯 요란스럽게 압박하더라는 것이다.

과연 8월9일 아침까지라는 도착 시기와 사람 74명에 말 55필로 사절의 규모를 제한하라는 요구사항을 통보받았다. 우리 사절은 100시간 내로 산 설고 물 선 500리 남짓 길, 그것도 큰물 큰바람이 개지 않은 북녘 땅을 어여차어여차 가야만 했다.

그해 5월25일 한양을 떠날 때부터 건륭의 고희연을 열하에서 주최하지 않을까 짐짓 예견했지만 그들은 얼른 속내를 보이지 않았다. 한참 지나서야 당시 청나라를 가장 위협했던 양대 변강인 티베트와 몽골, 그중 티베트의 6세(世) 활불이던 얼더니(額爾德尼)의 건륭 경축 사절이 전용할 수 있도록 1년 동안 수미복수(須彌福壽)의 사원을 신축해 건륭의 생일을 맞은 것으로 보아 경축 시기는 짐짓 예정된 것이었다.

연암에게 열하는 아직 낯설었을지 모른다. 강희 42년(1703)에 착공해 건륭 57년(1792)에 완공했으니, 연암이 갔을 때만 해도 피서산장과 궁궐·사원 등 세 곳의 마무리를 서둘렀을 것이다.

열하는 무수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청이 천하를 통일하면서 열하로 이름 지었고, 옹정은 승덕주(承德州)로, 건륭은 승덕부(承德俯)로 승격시켰다. 정치·문화상 지명인 열하와 행정상 지명인 승덕은 오늘에도 함께 쓰인다.

열하의 궁전과 피서 원림(園林)은 통틀어 ‘피서산장’ ‘열하행궁(熱河行宮)’, 또는 ‘승덕리궁(承德離宮)’ 또는 ‘하도(夏都)’ ‘새외경도(塞外京都)’로도 불린다. 열하의 정문에는 1708년 강희가 쓴 ‘避暑山莊’이란 편액이 붙어 있다. ‘더위를 피하는 산장’이라는 소박한 뜻이다. 강희 때부터 매여름 피서와 정무·외교·종교·문화·국방 등의 중요 국사를 집무하던 행궁이요 이궁이었다. 그럼에도 그 표면에는 피서라는 간판을 달고 능청을 떨고 있다. 하긴 궁전의 건축이나 수식에 있어 채색이나 기교를 부리지 않는 것으로 그 품격이 드러났고, 그보다 당시 북경 교외에 삼산오원(三山五園 : 万壽山, 香山, 玉泉山, 暢春園, 圓明園, 靜宜園, 靜明園, 淸·#54582;園) 등 대규모의 황가 원림을 건설했는데, 그 건설 바람이 북경 500리 밖의 막북까지 뻗었던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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