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10월호

삼성전자 홍일점 임원 이현정 상무의 일침

“한국은 한 꺼풀 벗기면 농경사회, 비보이 뛰어넘어 구글을 보라”

  • 이현정 삼성전자 글로벌 마케팅실 상무

    입력2007-10-08 13:2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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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성전자 홍일점 임원 이현정 상무의 일침
    ‘삼성전자 글로벌 마케팅실’이라는 부서 특성상 우리 팀에는 한국인 직원과 외국인 직원이 섞여 있다. 문화행사 체험은 외국인 직원들에게 한국 문화를 이해시키는 가장 좋은 방법이 다. 한번은 이들과 함께 비보이(b-boy) 공연을 보러 갔다. 특별히 비보이 공연을 택한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한국 비보이의 성공을 이해하면 ‘한강의 기적’을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5년 전 한국에 온 나는 비보이 현상을 유심히 살펴봤다. 미국에서는 브레이크댄싱을 길거리 문화 정도로 이해한다. 원래 브레이크댄싱 무용수는 완벽한 체력을 바탕으로 고도의 테크닉을 소화해야 하기 때문에 연예인이라기보다는 올림픽에 출전하는 운동선수에 가깝다. 그런데 한국의 젊은이들이 여기에 예술성을 추가했다. 미국에서는 동네의 재주 있는 아이 몇몇이 모여서 취미로 시작한 길거리 문화가, 한국에 전해진 다음엔 세계 최고의 한류(韓流) 문화상품이 됐다. 한강의 기적과 같은 맥락이다.

    우리는 50여 년이라는 짧은 기간에 세계 최하위권에서 10대 경제대국으로 올라섰다. 이렇다 할 자원 하나 없이 말이다. 우리가 발명한 것도 거의 없다. 하지만 어디서 누가 발명했든 우리는 피나는 노력으로 원산지보다 한술 더 떠 완벽의 단계로 끌어올렸다. 반도체가 그렇고, 평판TV가 그렇고, 휴대전화가 그렇다. 철강업이 그렇고 조선업도 그렇다.

    골프도 마찬가지다. 최근 몇 년 사이 국제대회마다 베스트 10에 한국 선수가 빠지는 일이 거의 없다. 세계 음악 콩쿠르에서 한국인이 두각을 나타내는 것도 어제오늘의 이야기가 아니다. 어느 날 갑자기 신이 내린 것도 아니고, 하루아침에 한국 젊은이의 DNA가 바뀐 것도 아니다. 예나 지금이나 일단 목표를 정하면 오로지 그것 하나에 매진하는 피땀의 결과다.

    그러나 하루 10시간씩 그림 연습을 한다고 누구나 피카소 같은 위대한 화가가 되는 건 아니다. 명화는 죽기 아니면 살기 식 붓놀림이 아니라 깊숙이 내재된 감성과 영감에서 우러나오기 때문이다. 한강의 기적이라는 성장방식으로 비보이는 가능하지만, 피카소는 어렵다는 이야기다.



    요즘 한국 경제의 미래를 걱정하는 사람이 많다. 특히 제조업 공동화(空洞化)를 우려한다. 갖가지 원인 분석과 진단, 처방이 제시된다. 보수언론이나 재계에서는 좌파정부의 경제정책과 지나친 규제, 강성 노조를 비판하고, 진보언론이나 시민단체는 기업 투명성 문제와 균형 없는 산업구조를 문제 삼는다.

    그러나 이런 원인들이 다 시정된다 해도 상황은 크게 바뀌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걱정하는 제조업 공동화 추세가 다소 완만한 곡선을 그리며 지연될지 몰라도, 방향 자체를 바꿀 수는 없기 때문이다. 제조업 공동화는 어쩔 수 없는 현실이다. GNP가 어느 수준에 다다르면 임금은 당연히 올라간다. 세계시장이 치열한 가격경쟁을 벌이는 단계에서, 제조업이 한국에 고스란히 남아 있을 가능성이 얼마나 되겠는가. 더구나 우리처럼 수출 의존도가 높은 나라는 소비자가 밀집한 곳에서 공장을 돌리는 것이 합리적이다.

    공동화는 제조업에서만 일어나는 현상이 아니다. 지식산업이나 서비스산업에서도 일어난다. 내가 일하던 벨 연구소, 세계 통신시장을 주름잡던 루슨트 테크놀로지 같은 회사는 2000년 초부터 몇몇 첨단 개발업무까지 인도로 내보냈다. 현재 미국의 회계회사들은 단순 회계업무를 인도로 보낸다. 몇몇 미국 병원은 X-레이나 MRI 판독을 인도에서 해온다. 기업의 실시간 소비자 전화 상담은 영어권인 인도나 필리핀에서 맡아 하고, 미국 지방자치단체들은 과속차량이나 주차위반과 같은 행정처리를 영어권의 아프리카 국가에 외주를 주고 있다. 이런 일이 가능한 건 전 세계에 깔린 초고속통신망 덕분이다.

    비보이와 피카소

    요즘 위기의식을 불러일으키는 제조업 공동화는 더 큰 변화의 시작일 뿐이다. 이게 다 신자유주의 때문이라며 세계화에 반대하는 이들도 있다. 하지만 달나라로 이민 가서 딴살림 차리지 않는 이상, 문을 닫는 것은 대안이 될 수 없다. 대륙의 유럽 국가들이 자국 제조업과 노동자 보호를 위해 사회주의적 정책을 고수한 결과가 무엇인가. 그들의 현주소를 보라.

    미국이 IT, 하이테크, 인터넷과 같은 미래지향적 산업의 주도권을 장악하고 대처 총리가 대대적인 구조조정으로 ‘영국병’을 치유하는 동안, 대륙 유럽의 위상은 점점 추락했다. 이제야 그들도 코스 변경을 시도하고 있다. 독일의 메르켈 총리가 그 일을 시작했고, 프랑스 국민은 이런 변화를 주도할 것으로 기대되는 사르코지를 대통령으로 뽑았다. 미국, 영국식 자유자본주의가 유럽식 사회주의에 판정승을 거둔 것이다.

    삼성전자 홍일점 임원 이현정 상무의 일침

    한편 구글의 창조적 환경은 우리 기업 문화가 지향해야 할 바다. 오른쪽 사진은 구글 R&D센터 한국지사.

    제조업, 나아가서 다른 산업에서도 공동화가 피치 못할 추세라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 제조업 공동화 현상을 성공적으로 극복한 미국의 예를 살펴보자. 미국의 경우 1970~80년대에 이미 제조업 공동화를 경험했다. 많은 공장이 해외로 빠져나갔고, 공장만 없어진 것이 아니라 제조업에 기반을 둔 기업 자체가 없어진 경우도 많았다. 1950~60년대 세계 가전업계를 주도하던 미국 기업들은 하나도 남지 않았다.

    지식산업의 부상

    제조업 공동화는 산업 기반뿐만 아니라 사회 전체에 커다란 변화를 가져왔다. 지금 우리가 걱정하는 대로라면, 미국은 그때 주저앉았어야 했다. 하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제조업 공동화 현상이 일어날 무렵, 미국엔 또 하나의 괄목할 만한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기 때문이다.

    다름 아닌 미래주도형 지식산업의 부상이다. 빌 게이츠의 마이크로 소프트(1975), 스티브 잡스의 애플(1976), 스콧 맥넬리의 선 마이크로시스템(1982), 시스코(1984) 등 세계적인 IT 하이테크 기업들이 이 시기에 창업했다. 고도의 혁신기술을 바탕으로 한 미래지향적 지식산업의 확장이 제조업 공동화의 공백을 메워줬다. 이 시기에 본격화한 미국의 지식산업은 1990년대에는 인터넷 혁명을 주도했고, 1990년대 말에서 2000년대 들어 야후, 이베이, 구글, 유튜브로 이어진다. 오늘날 혁신적 인터넷 사업의 세계 주도권을 미국이 갖고 있다는 말은 결코 과장이 아니다.

    결론은 제조업의 공동화로 하늘이 무너지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미국은 건재하다. 한국도 그럴 수 있다. 산업구조 피라미드에서 다음 단계로 올라가야 한다. 제조, 생산, 단순 개발이 아닌 부가가치 높은 지식산업으로 방향을 전환해야 한다. 다른 사람이 하고 있는 일을 더 잘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 하지 않고 있는 일을 찾아내야 한다.

    그러기 위해 무엇이 필요한지 살펴보자. 먼저, 제조업에서 지식산업으로의 진화는 일직선의 진화가 아님을 인정해야 한다. 이러한 변화는 지금까지와는 다른 새로운 축으로 방향타를 놓아야 가능한 일이다. 즉 새로운 DNA가 필요하다. 기존의 위계질서에서 벗어날 수 있는 마인드, 획일적인 가치관이 아닌 다양한 가치관의 수용, 조직의 기존 틀이 허용하는 수준 이상으로 개인의 창의성 존중, 이런 것들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변화는 기대하기 어렵다.

    미국에서는 제조업 공동화가 일어나기 전부터 이런 DNA가 사회·문화 전반에 잠재했다. 1950년대 소수민족 인권운동은 단지 흑인의 인권신장이라는 결과뿐 아니라, 기존 사회질서의 재정립을 초래했고, 이러한 전통적 위계질서에 대한 도전은 1960년대 히피문화운동으로 연결됐다. 흔히 히피라고 하면 탈사회적 건달이라고 생각하지만 이 시대의 젊은이들이 1970년대와 1980년대에 사회 주류로 편입되면서 기존 위계질서에 얽매이지 않은 이들의 세계관과 가치관은 새로운 실험과 창조를 수용할 수 있는 사회 분위기를 조성했다. 제조업 공동화의 공백을 메운 미래지향적인 지식산업이라는 배는 이런 환경에서 발주됐다.

    지금 한국의 사회·문화 코드에 새로운 축으로 방향타를 돌릴 만한 DNA가 있는가. 기존 질서에 도전장을 던졌던 386세대가 있다지만, 이미 사회 각 분야에서 기득권을 행사하는 그들의 모습은 이전 세대와 별반 다르지 않아 보인다.

    한국 생활 5년 만에 내린 결론

    지난 5년 동안 나는 한국 사회를 이해하려고 노력했다. 그래서 매일 신문이란 신문은 죄다 샅샅이 읽고, 각종 인터넷 게시판을 곁눈질하고, 내 주위 사람들을 유심히 관찰하고, 틈만 나면 지방도로 양 옆에 숨어 있는 군, 면, 읍, 리를 찾았다. 그리고 내린 결론은 이렇다.

    “양파 껍질 한 겹만 벗기면 한국은 여전히 농경사회다.”

    겉보기엔 인터넷 시대의 최첨단을 걷는 것 같지만, 의식구조와 가치관은 농경사회와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여전히 집단 공동체 의식과 수직적 위계질서가 사회문화 코드의 핵을 이룬다.

    농업은 노동집약적 산업이다. 구성원 하나하나의 근면성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주기적으로 돌아오는 계절에 맞춰 파종과 수확을 해야 한다. 그러려면 개개인의 일탈을 막아야 한다. 수렵사회와 달리 한 곳에 정착해 서로를 보호하고 도와주는 공동체의식이 발전한다. 공동체의식은 획일적 가치관을 구심으로 집단구성원의 결속을 요구하고, 공동체 밖의 외부인에 대한 배타성을 불러온다. 내 편, 네 편을 분명히 하지 않으면 구성원의 내부 충성에 혼란이 개입하기 때문이다. 개인의 특성보다는 공동체의 이익이 주된 가치관으로 정립된다.

    이런 사회를 유지하려면 엄격한 위계질서 확립이 필수다. 혼자 튀는 개인의 창조성보다 공동체 리듬에 맞추는 순종이 강조된다. 이런 틀에서 보면 우리 안에서 벌어지고 있는 불합리한 현상들이 설명된다. 학연, 지연, 혈연이 주가 되는 인맥 코드는 누가 내 편이고 누가 네 편인지 가르는 데 아주 유용한 도구다. 상명하복(上命下服)식 조직문화는 개인의 일탈을 막아 내부 질서를 유지하는 데 꼭 필요하다. 문화와 가치관의 다양성을 수용하지 않는 우리의 뿌리 깊은 편견도 이해할 만하다. 비합리적이고 비합법적인 것이 집단이익이라는 명분 아래 용인되는 것도 이런 맥락에서 봐야 한다.

    참으로 무서운 사람들

    제조, 생산업에 필요한 노동 가치관은 농경사회 유지에 필요한 가치관과 다르지 않다. 하루 14시간씩 공장에서 일하며 생산효율을 극대화하는 것이 중요하다. 농업적 근면성이다. 표준편차를 최소화하는 품질관리, 대량생산에 따르는 원가절감, 이런 모든 성공 비결도 농업적 성공비결과 일맥상통한다.

    하지만 환자의 상태에 따라 처방이 달라져야 한다. 우리가 다음 단계로 나아가는 데 이런 사회·문화 코드는 적합하지 않다. 우리의 농경사회적 가치관은 비보이의 성공을 가져다줬지만, 구글처럼 새로운 것을 창조하는 혁신기업을 만들기에는 적합하지 않다.

    1년 전 캘리포니아에 있는 구글사(社)를 방문한 적이 있다. 우리 사회, 우리 기업이 경계하고 통제하려는 모든 것이 그곳에서는 버젓이 행해지고 있었다. 직원들은 자신의 리듬에 따라 움직인다. 근무시간 중에도 사내에 있는 헬스클럽을 이용하는 사람이 많았다. 출퇴근 시간은 개인의 재량과 필요에 따라 결정된다. 사무실에 앉아 업무를 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가정집 거실 같은 장소에 삼삼오오 모여 일하는 무리도 많았다. 건물 곳곳에 당구대가 눈에 띄었다. 건물 밖에는 무선 랜을 사용할 수 있는 카페가 있어서 그곳에서 랩톱컴퓨터(노트북)를 가지고 일하는 사람들도 있고, 회의 중인 사람들도 있었다.

    창조적 자기 파괴

    그뿐만 아니라 일주일에 하루 정도는 회사에서 시키는 일이 아니라 개개인의 흥미를 끄는 프로젝트를 진행할 수 있다. 이렇게 해서 새로운 사업 아이디어가 밑에서부터 발생해 위로 올라간다. 나는, 건물 곳곳을 안내해준 지인(구글 직원)에게 이렇게 말했다.

    “당신들은 참으로 무서운 사람들이다. 차라리 직원들에게 늦게까지 일하라고 강요하면 노동부에 가서 항의나 하지, 당신들처럼 회사에 있는 것이 편하고 좋아서 늦게까지 남아 일하면 노동착취를 당했다고 탄원서를 낼 수도 없다.”

    구글의 창조혁신은 이렇게 일어난다. 회사가 창조적이 되라고 구호를 외치는 것이 아니라 창조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주니, 직원은 하는 척하는 것이 아니라 정말 좋아서 한다.

    미국의 기준으로 보아도 구글의 기업문화는 상당히 튀는 편이다. 그러니 당장 우리 기업문화에 접목시키긴 어렵다. 한국의 교육제도는 아직 이런 식으로 일할 젊은이를 배출하지 못하며, 사회 전반적 가치관도 이를 받쳐주지 않는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 가능한 것은 무엇인가. 간단히 요약하면, ‘일상으로부터의 일탈’이다. 창조적 자기파괴가 필요한 시기다. 표준편차 제로를 지향하는 생산효율성이 경전처럼 받아들여지는 획일적 대량생산의 문화로부터 1000가지 틈새시장을 동시에 공략할 수 있는 유연성이 대세인 문화로 변신해야 한다. 무엇보다 우리에게 익숙지 않은 것들을 수용하는 마음 자세가 필요하다.

    이것은 사회 어느 일부분이 달라진다고 되는 일이 아니다. 기업이 혁신한다고 되는 것도 아니고, 정부가 규제를 풀어준다고 되는 일도 아니다. 노조가 상생(相生)을 외치며 환골탈태를 해도 해결되지 않는 문제다. 궁극적으로 우리 사회 전반의 체질 개선, 유전자 개조가 필요하다. 자신과 이념이 다른 사람들에게 변화를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한 사람 한 사람이 모두 달라져야 한다.

    획일적인 가치관부터 고쳐야 한다. 우리는 왜 모든 사람의 가치를 천편일률적인 잣대로 평가하려 하는가. 청소년 시절 몇 년의 입시준비와 가정환경에 의해 결정되는 학벌이 왜 주홍글씨처럼 일생 동안 그 사람을 따라다녀야 하는가. 그것이 우리의 가치관이기 때문이다. 누구를 탓할 수 없다. 왜 우리 사회에서는 아직도 창조적인 생각을 하는 사람이 존중받지 못하는가. 유치원 아이들부터 시작해서 대기업 임원까지, 우리는 튀는 사람을 수용하지 못하고, 오히려 ‘왕따’시키며 제재를 가하려 한다.

    구글 능가하는 한국 기업

    재계에서는 하루가 멀다 하고 창조와 혁신을 부르짖고 있지만, 막상 창의적인 사람이 나타나면 그를 기존질서에 편입시키기 위한 길들이기에 몰두할 것이다. 정부나 노조만 탓할 것이 아니라, 기업 내 비창조적인 문화부터 개선해야 한다.

    왜 우리는 다양성을 수용하기 어려운가. 편협한 잣대로 모든 것을 재단하기 때문이다. 나와 생각이 다르면 여론몰이로 생매장하고 마는 인터넷 댓글 문화, 엄청나게 배타적인 우리의 인종편견, 인명사고로까지 이어지고 마는 강압적인 신입생 신고식, 앞에서는 창조경영을 외치고 뒤로는 ‘묻지마’식 상명하복을 강요하는 기업….

    삼성전자 홍일점 임원 이현정 상무의 일침
    이현정

    1959년 광주 출생

    서울대 영어교육과 졸업, 미국 일리노이대 어바나 샴페인 박사(통계, 산업역량, 조직성과 등) 펜실베이니아대 와튼스쿨 MBA

    AT&T, 벨 연구소, 루슨트 테크놀로지 근무

    코리 네트웍스 대표

    現 삼성전자 상무


    나는 요즘 위기의식을 느낀다. 암초를 향해 가는 배를 보는 듯하다. 충돌하기 전에 방향타를 돌려야 하는데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것 같다. 암초와 가까워질수록 더 큰 폭의 코스 수정이 필요하고 그만큼 어렵다. 설사 충돌 직전에 가까스로 배가 방향을 튼다 해도 갑작스러운 선회는 많은 사람을 물에 빠뜨릴 것이다. 서서히 우리 사회 전반에 내재한 가치관과 문화코드의 변화를 시도하지 않으면, 제조업 공동화에 따른 공백을 메울 대안을 찾기 어려울 것이다. 그리고 이어질 다른 산업 분야의 공동화도 막을 길이 없다.

    한국 비보이의 성공은 우리의 가능성을 보여준다. 그러나 여기에 머물러선 안 된다. 구글을 능가하는 새로운 지식산업의 주도권을 쥔 한국 기업이 등장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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