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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마(釜馬)민주항쟁 투입 해병대의 ‘아름다운 휴가’

“시민들이 때리면 그냥 맞아라, 절대 시민에게 손대지 말라”

  • 서정근 군사전문지 D&D Focus 기자 scrapor@hanmail.net

부마(釜馬)민주항쟁 투입 해병대의 ‘아름다운 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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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똑같은 계엄군이지만 진압방식은 너무도 달랐다. 1980년 5월 광주의 비극은 공수부대의 무자비한 폭력에서 비롯됐다. 반면 그보다 7개월 전인 1979년 10월 부마민주항쟁을 진압하기 위해 부산과 마산에 진주한 해병대는 비폭력으로 일관해 시민들의 호응을 얻었다. 군사기밀로 묶여 있는 부마항쟁 당시 해병대의 ‘활약상’을 처음 공개한다.
부마(釜馬)민주항쟁 투입 해병대의 ‘아름다운 휴가’

부마항쟁 당시 부산에 진주한 계엄군.

5·18민주화운동을 그린 영화 ‘화려한 휴가’에서 관객의 정서를 가장 자극하는 장면은 공수부대의 유혈진압 장면이다. 비록 발포 경위와 희생자 수를 둘러싼 논란이 있긴 하지만, 육군 특전사 소속 공수부대원들의 잔혹한 폭력과 집단 발포로 많은 시민이 죽은 것은 논란의 여지가 없는 역사적 사실이다. 각종 자료와 기록이 이를 뒷받침하며, 김영삼 정부 시절 진행된 이 사건에 대한 검찰 수사와 재판을 통해서도 확인된 바 있다.

이렇듯 5·18은 국민의 가슴에 군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을 심어놓은, 창군(創軍) 이래 가장 비극적인 사건이다. 그런데 그보다 약 7개월 전인 1979년 10월에 발생한 부마민주항쟁 당시 시위진압군이던 해병대가 보인 태도는 그와는 딴판이었다. 부산과 마산에 투입된 해병대원들은 철저하게 비폭력 노선을 지켰다.

그간 해병대의 부마항쟁 시위진압 실태는 일반에 알려지지 않았다. 뒷날 광주의 비극을 일으킨 공수부대는 부마항쟁 때도 투입됐는데, 그때도 시위진압 방식에서 해병대와 달리 폭력적인 양태를 보였던 것으로 전해진다. 해병대와 공수부대는 왜 그토록 달랐던 걸까.

‘건방지다’고 개머리판으로 때려 뇌수술

널리 알려졌다시피 부마항쟁은 10·26사태의 도화선이었다. 이 사건에 대한 처리를 놓고 온건론을 내세운 김재규와 강경론을 주장한 차지철 사이에 불신의 골이 깊어진 가운데 차지철을 두둔하는 박정희 대통령을 김재규가 총으로 시해했기 때문이다.

1979년 10월16일부터 20일까지 전개된 부마항쟁의 신호탄은 1979년 8월11일 경찰이 신민당사에서 농성하던 YH무역회사의 여공들을 강제 해산시킨, 이른바 YH사건이었다. 이어 9월8일 김영삼 당시 신민당 총재에 대한 총재직 정지 가처분 결정과 10월4일 김 총재의 의원직 박탈로 정부에 대한 국민의 불신과 분노는 극에 달했다.

10월15일 ‘독재타도’ ‘유신철폐’를 골자로 한 민주선언문이 부산대학교에 배포되고, 16일엔 이에 동조한 부산대생 5000여 명이 경찰의 저지선을 뚫고 교문을 뛰쳐나온다. 이후 동아대학생 1000여 명과 시민들까지 가세해 시위대는 순식간에 도심을 장악하고, 시위대를 막기 위해 경찰 3400여 명이 최루가스를 뿌리며 진압에 나섰지만 속수무책이었다.

그날 밤 시위인파는 5만여 명으로 불어났고, 폭발한 민심(民心)은 파출소와 공화당 지부 사무실 등 공공건물에 방화하며 이튿날인 17일까지 시위를 계속했다. 정부는 긴급히 육군 2관구사령부(현 53사단) 병력을 투입했지만, 정상만 사령관의 지프와 호위차마저 습격을 당할 정도로 시위는 격렬했다. ‘단 한 방울의 물도 새나가서는 안 된다’고 할 정도로 완벽한 통제를 자랑하던 유신체제였기에 부마항쟁의 충격은 대단한 것이었다.

박정희 정권은 18일 새벽 0시를 기해 부산지역에 비상계엄을 선포하고 박희도 준장이 지휘하던 1공수여단과 최세창 준장의 3공수여단, 박구일 대령이 지휘하는 해병대 1사단 7연대를 투입한다. 마산에는 20일 정오를 기해 위수령을 선포한다.

이후 시청과 역 등 주요시설을 장악한 1여단과 3여단은 탱크와 장갑차를 앞세워 시위대를 진압한다. 특히 이들 공수부대 장병들은 이후에도 총기에 착검을 하고 트럭을 이용해 부산대와 동아대를 하루 종일 오가며 학생들과 시민들을 위협한다. 단순히 심리전 차원만은 아니었다는 게 당시 목격자들의 증언이다.

당시 현장에 있었다는 송기석(56)씨는 “얼굴에 시커멓게 위장 크림을 바른 공수부대원들이 참나무를 깎아 만든 몽둥이로 시민들을 구타했다. 20, 30대 청년들은 길을 걷다가 그들과 마주치면 아무 이유도 모른 채 맞아야 했다”고 당시 상황을 설명했다. 실제로 당시 31세이던 전병진씨는 서면 한독병원 앞을 지나다가 ‘건방지다’는 이유로 공수부대 장교가 휘두른 M16 소총 개머리판에 머리를 맞아 뇌수술까지 받아야 했다. 이 사건은 당시 지역 언론사에도 제보됐지만, 계엄령하에서 철저히 덮여 있다가 김영삼 정부 출범 후 진상조사를 통해 밝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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