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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봉관의 옛날 잡지를 보러가다 30

최옥희·유영혜·김상한의 ‘사랑과 전쟁’

부잣집 방탕아와 기생, 그 질긴 연정이 부른 비극

  • 전봉관 한국과학기술원(KAIST) 교수·국문학 junbg@kaist.ac.kr

최옥희·유영혜·김상한의 ‘사랑과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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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내가 있다. 집은 부유했으나 의지는 보잘것없었다. 고향에서 이미 두 차례나 결혼해 아들 둘을 둔 그는 권번 기생과 사랑에 빠져 끊임없이 인생을 허비했다. 헤어지겠다고, 목숨을 끊겠다고 몇 번을 다짐해도 달라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가산을 물려받으려는 속셈에 밀어붙인 유학파 신여성과의 사랑 없는 결혼마저 신혼집에 옛 애인을 불러들인 그의 몰지각을 정점으로 무너져 내리는데…. ‘얼굴 반반한’ 사내의 우유부단함 때문에 삶을 망친 여인들의 기구한 운명, 그 질긴 비극의 끝.
최옥희·유영혜·김상한의 ‘사랑과 전쟁’

사진은 유영혜가 ‘중앙’ 1936년 9월호에 기고한‘제2의 노라 : 결혼의 비극’으로 사진 속 인물이 유영혜다.(위) 최옥희(아래 좌) 김상한(아래 우)

1936년 6월27일, 아침부터 장맛비가 내렸다. 오후 3시가 가까워오자 김상한과 유영혜의 결혼식 하객들이 식장인 중국요릿집 ‘봉래각’으로 속속 모여들었다. 신랑 김상한은 경상북도 왜관의 천석꾼 자제로 일본 니혼대학 법학부를 졸업하고 경기도청에서 일하다 사업을 준비하는 엘리트 청년이었고, 신부 유영혜는 도쿄에서 보육학교를 졸업하고 조양유치원 보모로 일한 인텔리 여성이었다. 신부의 아버지 유일선은 목사면서 경기도 지방과 촉탁이었다. 부호와 명문가의 혼사치고는 검소한 결혼식이었다. 하객도 가까운 일가친지 수십명만 초청했다.

식장으로 들어오는 하객들의 상의는 장대비에 흠뻑 젖었고, 하의는 흙탕물이 튀어 여기저기 얼룩이 졌다. 그래도 하객들은 봉래각 입구에 서서 굳은 표정으로 하객을 맞는 신랑에게 싫은 내색 없이 환하게 웃으며 덕담을 건넸다.

“이렇게 좋은 날 신랑 표정이 그게 뭔가. 난처해할 것 없네. 결혼식 날 비가 오면 백년해로한다지 않는가.”

하객들의 덕담이 이어져도 김상한의 굳은 표정은 풀리지 않았다. 표정이 어두운 것은 신부 가족들도 마찬가지였다. 하객을 맞는 내도록 신랑 가족들도, 신부 가족들도 어색한 미소 한번 짓지 않았다.

아수라장이 된 결혼식

오후 3시 정각, 사회자는 곧 식이 시작될 것임을 알렸다. 식장 밖에서 삼삼오오 모여 환담을 나누던 하객들은 식장 안으로 들어가 자리에 앉았고, 신랑은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식장으로 입장할 준비를 했다. 사회자가 신랑 입장을 선언하려 할 때, 오른쪽 다리에 붕대를 두르고 양장을 차려입은 여인이 신랑 얼굴을 빤히 쳐다보며 천천히 식장으로 걸어들어가 자리에 앉았다. 머리 모양과 옷차림새를 보면 누구든 한눈에 기생임을 알 수 있었다. 하객들의 시선은 난데없이 출현한 기생에게 쏠렸다.

불청객의 출현으로 결혼식장은 삽시간에 대혼란에 빠졌다. 신랑은 어쩔 줄 몰라 하다가 급기야 신부 대기실로 몸을 피했고, 양가 가족들도 신랑을 쫓아 신부 대기실로 들어갔다. 하객들은 무슨 영문인지 알아보느라 웅성거렸다. 얼마 후 신부의 오빠 유의탁이 식장으로 들어와 불청객에게 다가갔다.

“그만 나가주시죠.”

“….”

불청객은 대꾸도 하지 않고 버텼다. 유의탁은 기생과 한참 동안 실랑이를 벌이다 장대비가 쏟아지는 식장 밖으로 뛰어나갔다. 얼마 후, 유의탁은 본정(오늘날의 충무로)경찰서 경관과 함께 식장으로 돌아왔다. 서슬 퍼런 경찰이 나가라고 명령해도 기생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완력으로 끌어내려 하자 급기야 기생은 울음을 터뜨렸다. 경찰은 난감한 듯 쳐다보다가 유의탁과 나직이 몇 마디를 주고받은 후 최후통첩을 내렸다.

“좋소. 정 결혼식을 지켜봐야겠거든 자리에 앉아 있어도 좋소. 하지만 만일 결혼식을 조금이라도 방해한다면 그땐 경찰서로 끌고 가 즉결에 넘기겠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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