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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양대 설립자 김연준 리더십 연구

“나는 두 개의 과녁을 뚫었다”

  • 이정훈 동아일보 신동아 편집위원 hoon@donga.com

한양대 설립자 김연준 리더십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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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대 세운 이용익과 한양대 세운 김연준은 동향

일본인 교사에 强 대 强으로 맞선 소년, 그러나 대가는 혹독했다

호방했던 延專 시절 국내 최초로 바리톤 발표회 열다

巨富 아버지 지원으로 시작한 육영사업

1960년 한양대생 성동경찰서 난입사건 진상

학생들이 주도한 인민재판에 끌려갔다 빠져나온 총장

고비 때마다 도와주는 사람들… 김연준 人福의 비밀은?

박정희와 담판해 의대 설립

대한일보 수재의연금 횡령사건과 윤필용 사건 진실

“남의 사람 빼오지 않고, 내 사람은 절대 뺏기지 않는다”

박정희 대통령이 준 화해의 선물, 한양대 안산캠퍼스

가곡 ‘청산에 살리라’와 ‘悲歌’짓게 된 이유

60대 이후 3800여 곡, 작곡집 16권 펴내다
 


한양대 설립자 김연준 리더십 연구
한양대 의과대학 학장을 지낸 정풍만 교수(丁豊滿·63, 소아외과)는 5·16이 일어난 1961년 서울대 의예과에 입학해 1967년 서울대 의과대학을 수석 졸업했다. 그는 의사 국가고시에서도 전국 1등을 했다.

서울대 재학 시절 그는 육영수 여사를 본 적이 있다. 육 여사의 조카와 동아리를 함께한 인연으로 청와대에 들어가 육 여사의 대접을 받은 것이다.

육 여사는 해마다 수석 졸업자들을 불러 오찬을 함께하는 자리를 마련했다. 의과대를 수석 졸업한 정 교수도 청와대를 방문했다. 청와대 안주인인 육 여사는 조카의 친구인 그를 단박에 알아보았다. 그의 기억에 따르면 육 여사는 성품이 매우 자상했다. 육 여사가 학생들과 격의없는 대화를 하고 있을 때 당시 만 50세이던 박정희 대통령이 들어왔다. 졸업식 때 보고 두 번째 대면이었는데, 그는 숨이 콱 막히는 느낌을 받았다고 한다.

“만 24세이던 나는 정말 무서운 것이 없었다. 그런데 연회장에 들어서는 박 대통령을 보자 와락 겁이 났다. 마른 대춧빛 혈색의 키 작은 사람이 들어서는데, 한마디로 긴장 덩어리였다. ‘저 정도 인물이니까 목숨 걸고 쿠데타를 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가 나를 위압하는 사람을 처음 본 때였다.”

그가 의과대를 졸업한 이듬해(1968) 한양대가 경희대(1967)에 이어 의예과를 신설했다. 이로써 서울에서는 가톨릭의대와 서울대 연세대 우석대(고려대 의대의 전신) 경희대 한양대 의대가 경쟁하는 체제가 형성됐다. 서울대병원에서 인턴과 레지던트 과정을 마친 정 교수는 육 여사가 별세한 1974년까지 군 복무를 대신해 충북도 의료원 과장을 지냈다.

그 무렵 의과대학을 키우겠다는 포부를 갖고 있던 만 60세의 김연준 한양대 설립자가 그를 불렀다. 뒤에서 설명하겠지만 당시 김연준씨에 대한 여론은 좋지 않았다. 정 교수는 한양대 의대로 옮길 생각은 한 번도 한 적이 없었으나 ‘한 번 만나보자’는 생각에 찾아갔다. 그런데 김 설립자를 보는 순간 그는 박 대통령을 만났을 때처럼 압도당하는 느낌을 받았다고 한다.

“박 대통령과 김연준 설립자는 건방지다는 인상을 주지 않으면서 사람을 제압했다. 김 설립자가 ‘훌륭해. 근무해’ 하는 한마디에 나는 그대로 한양대에서 일하게 되었다.”

해방 공간인 1945년과 1948년 사이 이 땅에는 많은 사립대학이 생겨났다. 그 대학들은 최근 줄줄이 개교 60년을 맞거나 앞두고 있다. 한양대는 일제강점기인 1939년 7월1일 김연준이 설립한 ‘동아(東亞)공과학원’을 뿌리로 하므로, 이들 대학보다 6~9년 앞선 역사를 갖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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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훈 동아일보 신동아 편집위원 hoo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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