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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세욱 교수의 新열하일기 11

“춘추대의 밝아도 깊이 묻고 넓게 못 배웠으면 성인이랴”

  • 허세욱 전 고려대 교수·중문학

“춘추대의 밝아도 깊이 묻고 넓게 못 배웠으면 성인이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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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마침내 연경으로 돌아왔다. 대국 청나라의 소인배다움에 울화통을 터뜨린 연암이지만, 조선과 청나라의 습속을 비교할 땐 치우침이 없다. 중국에서 거들먹거리는 조선 선비의 소행을 가차없이 비난하고, 중국 지식인의 비현실성과 교활함을 꼬집는다. 우리에게도 익숙한 ‘관우’가 사후에 더 위풍당당해진 사연도 알아본다.
“춘추대의 밝아도 깊이 묻고 넓게 못 배웠으면 성인이랴”
이제 저만치 종착점이 보인다. 1780년 8월18일 이른 아침 고북구를 떠나 일로 남하하니, 평지 아니면 야산이요, 탄탄대로 아니면 백하 같은 강물이라, 이틀 뒤면 연경 덕승문(德勝門)이고, 곧 황경이다.

지난 8월15일, 아쉬움을 삼키며 열하를 떠났다. 그후 사흘 동안 연경으로 돌아가는 귀로에 본 황족의 사냥 행렬과 숫돌 같은 치도, 거기에 더해 한 마리 토끼를 잡으려 100명의 총잡이가 짐승의 씨를 말려버릴 듯 달려드는 현장이 뇌꼴스러웠다.

그런데 밀운(密雲)에서 속이 왈칵 뒤집힐 만한 일이 또 벌어졌다. 백하(白河)에 당도했을 때 나룻목은 수라장이었다. 강을 건널 사람이 바글대는데 사람 실을 배는 한 척뿐이었다. 문제는 그게 아니었다. 연암이 열하로 향하던 8월6일 밤, 그러니까 열이틀 전만 해도 사정이 이렇진 않았다. 그날 밤 조선사절 일행이 지나갈 때에는 청나라 황실의 군기·낭중·황문·제독·통역 한 떼거리가 나와 마중하고 감독, 지휘하느라 산천이 시끌벅적했다. 이번에도 그들이 백하 건널목에 서 있긴 한데, 눈짓과 손짓이 영 딴판이다. 제독은 못 본 척 입을 다물고 통역은 머리를 숙인 채 딴전이다.

연암은 이를 두고 ‘염량지이(炎凉之異)’요 ‘전면지경(轉眄之頃)’의 ‘시이사랭(時移事冷)’이라고 탄식했다. 세간 인정의 뜨겁고 차가움, 눈 깜짝할 사이의 세태 변이와 인정의 냉각을 말한 것이다. 나라와 나라 간 이해에 따른 세태의 무상을 말한 것이다. 연암은 또 한 번 그 천재성을 발휘했다. 세태의 염량을 이렇게 탄식했다.

汨然如泥牛之入海, 渙然如氷山之遇日, 千古滔滔, 豈不哀哉!(풍덩 진흙으로 만든 황소가 바다에 뛰어들어 푸시시 풀어지고, 피익 빙산이 해를 만나 당장 녹아버리듯 천고가 이렇듯 둥둥 떠내려가거늘 어찌 슬프지 않겠는가.)

말과 글이 다르니 정곡을 잃어

뾰로통하다 못해 세상이 잔뜩 무상한데 연암의 눈앞에 아니꼬운 일이 또 한 번 벌어졌다. 때마침 기마병 40~50명이 선풍처럼 들이닥쳤다. 이들도 백하를 건너려던 참이다. 조선 사절의 하인들을 힐끔 보더니만 우쭐해하며 배에 올랐다. 그런데 맨 뒤의 기마병 하나가 팔뚝에 매 한 마리를 앉히고 채찍을 휘두르면서 푸드렁 승선하던 중 말이 뒷발을 잘못 디디는 바람에 낙화유수가 된 것이다. 원숭이가 나무에서 떨어진 꼴이었다. 물속에서 허비적거리다 기진맥진 배에 올랐다. 까불다가 꼬락서니를 망친 것이다. 연암은 그 물귀신 될 뻔했던 광경을 이렇게 그렸다.

鷹也如投之蛾, 馬也如落?之鼠, 錦衣繡鞭, 可憐淋溜, 置身無所, 公然鞭馬, 鷹益驚·#55181;.(매는 등잔불에 걸린 나방이요, 말은 오줌에 빠진 쥐새끼였다. 비단 옷에 수놓은 채찍은 흠뻑 젖어서 둘 바를 몰랐다. 그래도 훨훨 채찍을 휘두르니 매가 놀라서 푸드럭 하늘로 솟구쳤다.)

연암의 붓에는 정과 한이 묻어 있다. 이른바 청나라라는 대국의 좁은 속마음과 기마대의 방자한 풍모가 손에 잡힐 듯하다. 신분을 상징하는 비단 옷과 채찍, 그리고 기백이 생동한 매가 그만 단숨에 물에 빠진 생쥐가 되었거나 푸드렁 하늘로 사라지고 말았다. 통쾌하다.

조선 사절이 귀로의 백하에서 이토록 냉대받은 까닭을 연암은 이렇게 짐작했다. 우리 사절이 열하에 있을 때 건륭의 분부를 고분고분 듣지 않은 탓이라고. 티베트의 반첸을 찾아보라는 명을 받고도 뭉그적거리다가 마지못해 시늉으로 갔던 것을 이제 와 앙갚음하는 것이 아닐까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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