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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상왕 장보고 고향은 완도 아닌 변산반도”

작가 최홍의 역사 추적

  • 최 홍 작가 doksuri-ch@hanmail.net

“해상왕 장보고 고향은 완도 아닌 변산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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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해상왕 장보고의 고향은 전남 완도라는 게 정설처럼 알려져 있지만, 정작 완도에는 이를 뒷받침할 만한 기록은 물론 설화, 지명의 흔적조차 없다. 반면 변산반도 서쪽 끝 죽막동의 수성당 유물과 ‘대막골 철마설화’, 인근 지명 등에서 이곳이 장보고의 고향이라는 선조들의 메시지를 발견할 수 있다.
“해상왕 장보고 고향은 완도 아닌 변산반도”
몇해 전 인기리에 방영된 TV드라마 ‘불멸의 이순신’의 촬영지 변산. 그 변산반도의 서쪽 돌출 부분, 즉 격포항과 채석강 북쪽에 죽막동(竹幕洞)이란 마을이 있다. 원래 명칭은 대막골인데, 한자 표기로 바꿔 죽막동으로 부르게 됐다고 전해진다. 죽막동에서 고추처럼 불거져나간 서쪽 끝부분에 수성당(水聖堂 또는 水城堂)이란 당집이 있다. 서해를 관장했다는 해신(海神) 개양할미를 모신 당집으로 알려져 있다.

13.2m2(4평) 정도의 목조 단칸 기와집으로 안에는 무신도(巫神圖)가 모셔져 있다. 무신도는 개양할미와 8명의 딸 그림, 용왕도, 산신도, 장군도, 칠성도 등으로 이뤄져 있다. 1996년 당집을 새로 건립할 때 봉안된 것으로, 원래 무신도는 불타 없어져 어떤 형태였는지 알 길이 없다.

이곳은 바다 위로 솟아오른 20m 정도의 절벽이어서 인근 해역이 한눈에 바라다보인다. 날씨가 맑을 때는 가까운 위도(蝟島)는 물론 멀리 북쪽의 고군산군도까지 볼 수 있다. 이런 입지 여건으로 일찍부터 연안 항로의 주요 기점, 또는 군사적 요충지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예부터 선조들은 이런 지역에서 바다 신에게 제사를 지내곤 했다. 특히 이곳은 해류의 흐름이 복잡하고 바람도 강해 해난사고 위험이 상존한 곳이라 제의의 필요성이 더욱 절실했을 것이다. 수성당은 그러한 유산이며, 그 오른쪽에 위치한 당굴(堂窟)도 그 흔적이라 할 수 있다. 원형으로 거대하게 파여 바닷물이 찰랑거리는 바위굴은 여울굴이라 하는데, 오래전부터 주민들 사이에 당굴로도 불리는 것은 이 굴이 민속신앙의 대상이었음을 알려준다.

1992년 전주박물관에서는 이 일대를 조사해 제사 유물들을 발굴했다. 대부분 5세기 중반에서 6세기 전반의 것으로 보이는 유물이었는데, 그 다양성과 규모가 백제나 가야의 지도자급 고분과 맞먹을 정도다. 이 유물들로 옛적 이 지역이 동북아시아 무역에서 중요한 기능을 담당했거나, 별도의 군사세력이 존재했을 것이라는 게 공식적으로 입증된 셈이다.

대막골 철마 설화

수성당의 개양할미는 수성할미라고도 하는데 딸 8명을 위도, 영광, 고창 등 칠산바다 요소요소에 배치하고(혹은 각 道에 나누어 보냈다고도 함), 자신은 막내딸과 구랑사(九?祠)에 머물며 서해를 총괄했다고 한다. 서해를 다스리던 여신이었던 셈. 여신은 수성당 옆 여울굴에서 나와 바다를 열고(開洋), 풍랑과 깊이를 조절해 어부들을 보호하고 풍어를 관장했다고 한다. 이를 나타내듯 수성당 옆에는 별도의 단을 마련해 나무로 된 긴 자(尺)를 모셔두고 있다.

그런데 죽막동에는 개양할미 설화와는 전혀 다른 내용의 또 다른 설화가 전해진다. 흔히 ‘대막골 철마(鐵馬)’라 하는 설화가 그것이다. 부안군지(扶安郡誌)에 수록된 내용을 옮겨보기로 한다.

먼 옛날 대막골에 마음 착한 고기잡이 형제가 앞 못 보는 늙은 어머니와 살고 있었다. 형은 바다에 나가 고기를 잡고, 아우는 밭을 일구고 농사를 지었다. 비록 가난하지만 두 형제는 어머니를 지성으로 봉양하며 의좋게 살고 있었다.

어느 날 고기를 많이 잡는 꿈을 꾸고 부푼 기대를 안고 바다로 나간 형이 날이 저물도록 돌아오지 않았다. 이튿날 형을 찾아 바닷가로 나간 동생마저 돌아오지 않았다. 홀로 남은 어머니는 미칠 지경이었다. 모두 죽었는지 살았는지 알 수 없어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며 더듬더듬 바닷가로 나간 곳이 수성당 옆 여울굴 절벽이었다.

어머니는 바다를 향해 소리 높여 두 아들을 불렀으나 아무 대답이 없었다. 그래도 부르고 또 부르자 그 소리가 깊은 여울굴에 메아리져 돌아오는데, 두 아들의 대답 소리처럼 들렸다. 반가움에 어쩔 줄 몰라 어머니는 계속 부르며 한 발 한 발 떼어놓다 그만 절벽 아래 여울굴 속으로 떨어져 죽고 말았다.

세월이 흘러 어느 날, 하얀 돛단배 한 척이 대막골에 멈췄다. 화려한 배에는 잘 생긴 두 청년이 아름다운 두 여인과 함께 타고 있었다. 바로 그 고기잡이 형제였다. 형제는 배에서 내려 여울굴 절벽 위에 섰다. 이윽고 여울굴 밑 푸른 물이 점점 차오르더니 백발노인이 물속으로부터 나왔다. 노인은 두 형제에게 말했다.

“수고 많았다. 이제 마지막으로 너희들에게 황금부채 한 개씩을 줄 것이니, 하나로는 나라를 구하고, 또 하나로는 고장을 구하여라. 너희 모친은 잘 모시고 있으니 그리 알거라.”

말을 마친 노인은 연기처럼 사라졌다. 형이 가진 황금부채로 바다를 향해 부치자 갑자기 큰 바람이 일며 성난 파도가 바다를 뒤집었다. 다음에는 동생이 가진 부채를 부쳐봤더니 그 거센 풍파가 잠잠해졌다. 두 형제는 노인의 큰 은덕을 잊지 않기 위해 여울굴 옆에 수성당을 세우고 받들어 모셨다.

그 후 여울굴에서 철마(鐵馬) 한 마리가 나왔는데, 이 철마는 두 형제만이 탈 수 있었다. 평소에는 작았다가 형제가 타기만 하면 큰 말이 됐다. 형은 왜구(倭寇)가 침입하면 이 말을 타고 달려가 황금부채로 적을 침몰시켰고, 동생은 바다로 나간 사람들이 풍랑을 만나게 되면 역시 부채로 부쳐 목숨을 구했다.

세월이 흘러 형제가 죽은 뒤 철마만이 여울굴에 남아 있었는데, 어느 못된 사람이 철마를 훔쳐다 깊숙한 곳에 감추고 자물쇠를 채워놓았다. 그런데 후에 열어 보니 철마가 오간 데 없었다. 그래서 여울굴에 와보니 그곳에 있는 것이었다. 그런 식으로 여러 차례 훔치자 철마는 여울굴 속 깊이 들어간 후 다시는 나오지 않았다고 한다.

처음 이들 형제가 바다에서 없어진 것은 봉래도(蓬萊島)라는 섬에 사는 성인(聖人)들이 데려다 도술을 가르친 것이라 하며, 황금부채를 준 노인도 바로 이 형제들을 가르친 도인이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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