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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견공무원 ‘오한심’씨의 한심한 일상

오늘 지각, 내일 결근, 모레 휴가…

  • 이설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snow@donga.com

파견공무원 ‘오한심’씨의 한심한 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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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번에도 승진에서 밀렸다. 교육 받을래, 파견 갈래? 하릴없이 붙잡혀 있기 싫어 우격다짐으로 시작한 파견 생활. 그런데 지내다 보니 이곳도 나쁘지 않다. 건강도 돌보고 공부도 하고 눈치 볼 사람도 없고. 몸을 낮추니 자존심은 좀 상해도 이렇게 편할 데가 없다. 고위 파견공무원을 가까이에서 지켜본 이들의 목격담을 바탕으로 ‘오한심’이라는 가상인물의 하루를 재구성했다.
파견공무원 ‘오한심’씨의 한심한 일상
팀장이 또 자리를 비웠다. 오늘은 곧장 집으로 가려나 보다. 그건 옷걸이를 보면 알 수 있다. 겉옷이 걸려 있으면 ‘마실(마을)’을 나갔겠거니, 옷이 없으면 집에 갔겠거니 하면 빙고다. 하긴, 그게 그거지만.

이곳은 ‘국제외톨이애완동물지원단’. 국제업무를 하는 만큼 종종 각 부처의 협력이 필요하다. 그래서 중앙부처 공무원들이 비정기적으로 파견된다. 내가 모시는 오한심 팀장도 파견공무원 중 하나. 52세, 3급 공무원, 장점 유연한 혀, 단점 뻣뻣한 목. 이곳에 온 지 벌써 1년 반이 지났다.

“내가 오기 전에 출근해서 대기하고, 사무실 문 열어서 환기시키고, 불도 다 켜놓고, 가습기 물도 갈고….”

이름과 달리 우락부락한 외모의 오 팀장은 출근 첫날 대수롭지 않은 요구사항을 줄줄 읊어대며 군기를 잡았다. ‘깐깐한 상사가 왔구나….’ 직원들은 앞으로 펼쳐질 고달픈 삶을 떠올리며 휘휘 고개를 저었다. 그러나 하루도 지나지 않아 그는 으름장이 무색할 기행을 보이기 시작했다. 이를테면 그의 일과는 이렇다.

휴가 다녀오고도 연가보상비 신청

오전 9시 반. 팀장 자리는 아직 비어 있다. 오전 10시. 여전히 ‘자리비움’이다. 돌아온 점심시간. 역시 연락이 없다. ‘오늘은 무단결근이로군’ 하면서 동료 기범씨와 마음 편히 점심을 먹으러 나가려는 찰나, 띠리링~띠리링~ 전화벨이 울린다. 벨소리가 한심스러운 걸 보니 팀장이 틀림없다.

“오늘 애가 아파서 못 나가겠어. 알아서들 하고. 뚝.”

애가 지금 고등학생인데 아프기는 무슨…. 팀장의 결근 레퍼토리는 단순하다. 집안에 일이 생기거나, 몸이 아프거나, 애가 아프거나 가운데 하나다. 남보다 집안에 우환이 많다. 변명을 하는 데도 창의성이 빵점이다. 아침에 전화로 “오늘 사정이 있어 휴가를 낸다”고 통보하기도 한다. 이런 휴가는 물론 여름휴가까지 다녀오고도 휴가신청서는 작성하지 않는다. 원 소속부처에 휴가현황을 제출할 때는 다녀온 휴가를 안 다녀온 것처럼 거짓 기록해 연가보상비를 타낸다.

사실 팀장이 결근해도 일하는 데는 전혀 지장이 없다. 팀장의 유일한 공식 업무는 전자결재. 부하직원 또는 타 부서의 협조 요청에 결재를 하는 일은 손가락 하나 까딱 하는 힘만 들이면 된다. 회사에 나오는 날도 오전시간은 온통 신문 읽기로 흘려보낸다. 매일같이 종합지 두 개와 경제지 하나를 꼼꼼히 정독한다. 정부 정책을 숙지해야 한단다. 그러면서 우편함에서 신문을 가져오는 일은 창피하다고 다른 직원에게 시킨다.

나 : “우리 팀장말고도 파견공무원이 몇몇 더 있잖아. 합해서 한 다섯 명 되나?”

기범씨 : “음… 좀 더 될 거야. 근데 다들 꽁꽁 숨었대, 우리 실장처럼. 아무리 파견직이지만 적게는 둘에서 많게는 열 명의 직원을 거느리고 있는 조직의 장인데, 직원들한테 어쩜 다들 그리 무심한지….”

수경씨 : “우리 단체에 온 다른 파견공무원들도 일이 없기는 매한가지인가 봐. 옆팀 팀장은 그 나이에 비행기 오락하느라 클릭 한 번 하면 되는 결재조차 미룬대. 그러고도 월급 다 받아가니 뻔뻔하지. 대놓고 쉬러 왔다 그러고 말이야.”

나 : “사실 실무선의 일도 그리 많진 않은 것 같아. 2년간 외국계 기업에서 근무했던 나로서는, 조직을 절반으로 줄여도 근무 시간 안에 충분히 맡은 일을 소화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이런 건의 했다간 머리에 정 맞겠지? 암튼 오늘 팀장 없어서 일할 맛 난다.”

팀장 없는 사무실에서 평온한 오전을 보낸 뒤 점심 메이트들과 부대찌개를 먹으며 실컷 그의 흉을 봤다. 부원들인 기범씨, 수경씨가 내 점심 메이트. 오 팀장은 직원들과 점심을 함께하는 일이 없다. 1년 동안 식사를 같이한 적이 다섯 손가락에 꼽힐 정도. 그렇다고 서운하다는 건 아니다. 근무 태도가 엉망이면서도 큰소리치는 상사와 그 상사를 무시하는 부하직원이 마주 앉아봐야 서로 불편하기밖에 더하랴. 그가 지능적으로 부하직원들을 괴롭히는 상사는 아니다. 마땅한 일이란 게 없으니 괴롭힐 사정도 못 된다. 하지만 그의 존재만으로 사무실 공기가 무겁다. 지난 1년 반 동안 ‘쿡’ 찌르면 터질 만큼 쌓인 크고작은 불만 때문일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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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설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snow@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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