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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애국주의’로 무장한 88만원 세대의 초상

“불평등에 대한 분노를 외국 출신 연예인에게 투사”

  • 송화선│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spring@donga.com│

‘애국주의’로 무장한 88만원 세대의 초상

  • 독일인 베라 홀라이터씨의 ‘한국 비판 에세이’ 출판 해프닝과 2PM 박재범씨의 퇴출 파문이 이어진 8, 9월. 젊은층의 ‘애국주의’는 우리 사회의 뜨거운 화두였다. ‘애국’을 빌미로 한 파시즘에 대한 비판이 쏟아져 나왔고, 젊은이들이 왜 ‘애국주의’에 빠져드는지에 대한 분석도 이어졌다. 이들을 뭉치게 한 건‘애국심’이 아니라 ‘열패감’이라는 의견이 힘을 얻고 있다.
‘애국주의’로 무장한 88만원 세대의 초상
장면1

“나쁜 의도는 전혀 없었습니다.”

10월7일 서울 프레스센터에서 열린 ‘서울의 잠 못 이루는 밤’ 한국어판 출간 기념회에서 베라 홀라이터(30)씨는 이렇게 말했다. 홀라이터씨는 KBS ‘미녀들의 수다’에 출연하는 독일인 패널. 지난 8월 자국에서 한국을 소개하는 동명의 에세이를 발간했다가 ‘한국 문화와 한국인을 비하했다’는 이유로 네티즌의 뭇매를 맞았다.‘한국 지하철을 보면 동생이 키우던 쥐가 생각난다’ ‘매너 있고 배운 유럽인으로서 한국에 살면서 노력해도 이해 불가능한 상황이 매일 생긴다’ 등의 부분이 문제가 됐다. 이번 기자회견은 그가 “에세이 내용이 잘못 소개됐다. 전문을 번역 출간해 오해를 풀겠다”며 마련한 자리. TV 프로그램에서 능숙한 우리말을 구사하는 홀라이터씨는 “부족한 한국어 실력 때문에 또 다른 오해가 생길 수 있다”며 전문 통역사까지 대동했다. 그리고 기자회견 내내 강조한 것이 ‘의도의 순수함’이다. 그는 “책 속의 ‘쥐’는 ‘들쥐’가 아니라 애완용으로 키우는 귀여운 쥐다” “‘매너 있고 배운 유럽인’이라는 표현은 나 자신을 풍자적으로 설명한 것에 불과하다”며 일일이 해명했다.

장면2

10월10일 서울 상암동 월드컵경기장에서 열린 드림콘서트 현장. 아이돌그룹 2PM이 무대에 오르자 경기장을 가득 메운 4만여 명의 관객이 일제히 ‘박재범 돌아와’를 외쳤다. 9월 초 탈퇴한 전 멤버 박재범(22)씨를 연호하는 목소리였다. 재미교포 출신인 박씨는 4년여 전 미국판 싸이월드 ‘마이스페이스’에 ‘한국이 싫다. 한국인을 증오한다(Korea is gay. I hate koreans)’ 등의 글을 올린 사실이 뒤늦게 알려지면서 논란을 일으킨 인물. 당시 포털사이트에는 ‘군대도 안 가는 미국 시민권자는 빨리 집으로 돌아가라’ ‘돈은 돈대로 벌면서 재수없다’ 등의 댓글이 쏟아졌고, 다음 ‘아고라’에서는 ‘재범을 추방하자’는 주제의 서명운동이 진행됐다. 결국 박씨는 “미국에 태어나서 자랐기 때문에…한국 문화에 대해서 잘 몰랐고 이해도 못했다. 철도 없었고 어리고 너무 힘들어서…앞으로 이런 실수가 다시는 없도록 하겠다”는 사과문을 발표한 뒤 4일 만에 그룹 활동을 포기하고 가족이 있는 미국으로 돌아갔다.

‘애국주의’로 무장한 88만원 세대의 초상
그들은 과연 애국자인가

8, 9월 한국 사회를 뜨겁게 달궜던 ‘애국주의’ 논란이 2라운드를 맞고 있다. 애국주의란 개인보다 조국을 강조하고, 조국을 위해 몸 바쳐 헌신하려는 사상을 가리키는 말. 홀라이터씨와 박씨가 한국과 한국인을 비하했다는 이유로 네티즌의 집중포화를 맞으며 ‘퇴출’된 뒤 우리 사회의 애국주의가 위험 수위를 넘어섰다는 지적이 쏟아져 나왔다. 그러나 두 주인공이 ‘복권’을 준비하고 있는 지금, 분위기는 사뭇 다르다. 홀라이터씨가 기자회견과 더불어 에세이 작가로 데뷔하고, 박씨도 국내 복귀가 초읽기에 들어갔다는 분석이 나오고 있지만 네티즌들은 잠잠하기 때문이다. 심지어 박씨의 경우 “한국을 떠나라”고 했던 것과 비슷한 열기로 “돌아오라”는 운동이 벌어지고 있다.

이에 대해 이동연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는 “네티즌의 흐름을 살펴보면 당시 박씨를 비난하던 사람과 최근 그의 상황에 동정을 표시하는 사람이 구분돼 있지 않다는 걸 알게 된다. 박씨에게 욕설을 퍼부은 이들이 실은 그를 증오한 게 아니라, 단지 희생양 삼아 자신들의 억압된 분노를 푼 것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이 때문에 사건 당시 두 명의 ‘국외인’을 몰아내자고 외쳤던 이들이 과연 애국주의자였는지에 대한 논란도 일고 있다. 당시 각종 포털사이트에는 ‘외국인은 너희 나라로 돌아가라’와 같은 댓글이 쏟아졌다. 이 때문에 한국 젊은이들 사이에서 외국인과 타문화 출신자를 배척하는 파시즘이 발호하고 있다는 우려가 컸다. 이택광 경희대 영미문화과 교수는 “당시 두 사람이 한 얘기는 사실 우리끼리도 얼마든지 할 수 있는 수준의 비판”이라며 “한국인은 할 수 있는 말을 외국인은 하면 안 된다고 하는 건 빗나간 애국주의”라고 지적했다.

김성일 문화사회연구소장도 당시 네티즌의 목소리가 ‘애국주의적인 방식’으로 표출됐다는 점에는 동의한다. 하지만 밑바닥에 깔린 정서는 ‘애국심’ 보다 ‘박탈감’에 가깝다는 게 그의 분석이다. 당시 댓글에 “재범은 한국에 돈 벌러 온 미국인일 뿐이다” “군대 가면 용서해준다” 등 국적과 병역 문제를 결부시키는 내용이 유난히 많았던 것은 이런 맥락에서라고 한다.

“우리 젊은이들이 가장 고민하는 주제인 외국어와 병역 문제에서 자유로운 존재, 그러니까 외국인이거나 재미교포, 그리고 우리 사회의 일부 상류층을 보며 ‘88만원’ 세대들은 상대적인 박탈감을 느낍니다. ‘우리’와 똑같은 사회에서 살아가면서 아무 의무도 지지 않는 그들이 심지어 ‘우리’를 비판하기까지 하니 집단적인 분노가 폭발한 거지요.”

김 소장은 “빼앗긴 자가 느끼는 열등감을 정당화하려 할 때 가장 쉽게 갖다 쓸 수 있는 논리가 ‘애국주의’”라며 “넓게 보면 스타벅스 커피를 마시는 여성을 ‘된장녀’라고 공격하는 것도 이 범주에 속한다”고 설명했다.

차우진 대중음악웹진 ‘weiv’(www.weiv.co.kr) 에디터 역시 “한국 사람들은 외국인에 대한 피해 의식이 있다. 이번 사건은 고소득층 자녀의 이중국적 문제나 조기 유학 등을 보며 쌓여가던 불만을 만만한 연예인에게 쏟아붓는 과정에서 생긴 해프닝”이라고 했다.

이들이 이런 분석을 내놓는 것은 네티즌의 집단 분노에서 ‘조국에 대한 긍지나 사랑’이 읽히지 않기 때문이다. 오히려 “왜 우리를 무시하느냐” 같은 ‘집단적인 열패감’이 배어 있다는 분석이다. 폭발적으로 터져 나왔던 분노의 목소리가 단시간에 흔적 없이 사라진 것도 이들의 뒤에 ‘애국주의 네티즌 무리’와 같은 든든한 동력이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김성윤 미디어스 편집위원은 “이번 사건은 우리 사회 젊은이들 사이에서 ‘평등에 대한 요구’가 폭발하고 있다는 증거일 수 있다. 누구든 ‘걸리면’집단 분노의 대상이 될 수 있는 상황”이라고 했다.

이병훈 중앙대 사회학과 교수는 “프랑스에서는 취업 등에서 소외된 젊은이들이 집단 폭동을 일으켜 사회문제가 된 적이 있다”며 “최근 젊은 네티즌의 집단행동이 소외감과 상대적인 박탈감에서 야기된 것이라면, 원인을 철저히 분석하고 이를 해결할 수 있는 사회적 지원과 정책을 펴는 게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박재범씨는 한국 비하 발언이 알려진 지 불과 4일 만에 2PM을 탈퇴하고 미국행 비행기에 올랐다.

신동아 2009년 11월 호

송화선│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spri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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