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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윤수의 종횡무진 공간 읽기 ⑥

‘한국 박물관 개관 100주년’ 맞은 국립중앙박물관

찰나의 세계를 떠난 영속의 시공간

  • 정윤수│문화평론가 prague@naver.com│

‘한국 박물관 개관 100주년’ 맞은 국립중앙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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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길이 8m가 넘는 ‘강산무진도’ 앞에 머무는 10여 분 동안 수많은 사람이 이 걸작 앞에 서서 좀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모두가 비속한 세계를 떠나 영원으로 유체이탈을 했다. 국립중앙박물관은 영속의 시간을 빚어내고 있었다.
‘한국 박물관 개관 100주년’ 맞은 국립중앙박물관
여기, 시간을 품은 거대한 공간이 있다. 공간이 거대한 까닭은 그 공간이 품은 오랜 시간의 유물이 신생의 석조 공간보다 훨씬 더 육중하기 때문이다. 공간 속에 정박한 오랜 역사의 흔적은, 전체는 물론이려니와 낱낱의 일개 원소만으로도 거대한 공간의 질량보다 무겁고 둔중한 것들이다. 저 기원전 5세기 이전의 ‘비파형 동검’, 그 청동기 유물 하나만으로도 얼마든지 육중한 공간을 제압할 수 있다. 그런데 그와 같은 유물이 무려 16만점에 달한다. 저 육중한 공간은 바로 이 한반도의 창세 이후 역사를 온전히 담아내려고 존재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공간은 단순히 거대한 것만이 아니라 심각하고 과묵한 인상으로 서 있다. 서울 용산구 서빙고로 135번지. 국립중앙박물관이 바로 그곳이다.

드넓은 연못을 지나 견고한 성벽처럼 우람하게 서 있는 박물관으로 다가가면 서관과 동관 사이, 천장은 있되 기둥과 벽은 없는 시원하게 뚫린 공간을 마주한다. 두 개의 건물을 잇는 지점인 동시에 박물관의 전경과 후경을 구분하는 거대한 석조 프레임 앞에 서면 누구라도 이 거대한 사각의 프레임이 제공하는 남산을 먼저 ‘관람’하게 된다. 그리고 계단을 마저 올라가면 남산과 박물관 사이, 거대한 미군기지를 또한 내려다보게 된다. 그리고 다시 전시관을 향하여 몸을 돌리면 이번에는 거대한 프레임 속으로 서빙고동 일대의 아파트 단지가 들어온다.

전경의 아파트 단지와 후경의 미군기지. 그 사이에 박물관이 서 있는 셈인데, 이 박물관의 거대한 프레임은 오늘날의 국립중앙박물관이 어떠한 역사를 거쳐 이 지형 위에 형성됐는지를 잠시 생각하게 만든다.

경제 군사 요충지

근세 이전 용산은, 도성과 한강 사이에 드넓게 펼쳐진 공간이었다. 숭례문 바깥이긴 했지만 한강 이북이므로 도성 안의 살림이나 그 밖의 밀접한 일들, 그러나 도성 안에서 치르기에는 너무 번잡하거나 자칫 위험할 수도 있는 사안이 숭례문 밖 용산에서 이뤄졌던 것이다. 한강을 바탕으로 한 활발한 상공업과 군사기지의 기능이 그것이다.

지금은 복개돼 차량이 내달리고 아시아 최대라는 전자상가가 포진한 청파로와 원효로 일대는 조선시대 만천(蔓川) 혹은 만초천(蔓草川)으로 한성부 경제생활의 근거지였다. 도성 안에 청계천이 있었고 도성 밖에 만천이 있었다. 무악재에서 발원한 만천은 바닥이 깊었다. 저 멀리 강화만에서 비롯한 밀물의 영향까지 받아 한강 수위가 높아지면 작은 배들이 만천을 따라 거슬러 올라와 오늘의 중림동과 서소문 일대까지 농수산물이 집산해 도소매 장터를 이뤘다.

조선시대 용산은 전국의 조운선(화물선 일종)이 몰려드는 포구였으며 조선 중기 양란 이후 저 멀리 충주 남한강에서 제물포와 강화도까지 이어지는 한강유역권을 확보해 상업을 주도한 경강상인의 본거지가 되었다. 물길을 따라 사람길이 생기는 법. ‘춘향전’에 그런 내용이 나온다. 암행어사가 된 이 도령이 남원으로 내려가는 대목. 판소리가 늘 그렇듯 이 도령은 한달음에 남원까지 직행하는 게 아니라 사설을 늘어놓으며 원행을 떠난다.

“청파역졸 분부하고, 숭례문 밖 내달아서 칠패팔패 이문동, 도제골, 쪽다리 지나 청파 배다리, 돌모루, 밥전거리, 모래톱 지나 동자기 바삐 건너….”

그러니까 암행어사가 된 이 도령은 지금의 도성 밖 첫머리에 있는 역원에서 말을 하나 타고 숭례문을 돌아 지금의 염천교를 지나 복개되기 전의 만천을 따라 삼각지를 거쳐 한강변의 모래톱을 지나 동자기 나루터, 곧 동작 나루터로 가고 있는 것이다.

구한말까지만 해도 이 청파로와 원효로가 용산의 중심이었다. ‘용산’이라는 지명도 지금의 원효로 4가와 마포로 사이에 나지막하게 솟아 있는 산봉우리를 뜻한다. 고종 때 편찬한 것으로 추정하는 인문지리서 ‘동국여지비고’는 “도성의 서산인 인왕산이 서쪽으로 뻗어나가 추모현(追慕峴·무악재)이 되고, 다시 한 산줄기가 남쪽으로 약현(藥峴)과 만리현(萬里峴·만리재)이 되어 용산(龍山)에 이른다”고 적는다. 그 고개와 언덕 아래로 물이 흘러 만천이었고 만천의 양옆으로 도성 밖의 첫 번째 경제 생활터전이 형성됐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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