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2월호

내 마음속 ‘해동네’와 ‘달동네’를 인정하라

정신병 한방치료 전문가의 자살예방론

  • 황웅근│흰구름한의원장, 심성계발연구소장│

    입력2010-02-01 13:4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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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 마음속 ‘해동네’와 ‘달동네’를 인정하라

    전직 대통령의 자살은 우리 사회에 엄청난 충격을 안겼다.

    최근 몇 년간 연예계 대스타와 경제계 대표, 유명 정치인, 심지어 전직 대통령마저 자살하는 사건이 잇달았다. 유명인은 제쳐두고라도 통계청 자료를 살펴보면 우리나라의 자살률은 이미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들 중 수위에 오른 지 오래다. 마치 자살 바이러스에 감염된 나라처럼 조그마한 충격에도 쉽게 생명을 포기하는 풍조가 만연한 대한민국. 어쩌다 이러한 경지에 이르렀는가. 이 글에서는 그 심리적 원인과 기전을 밝혀 예방책을 마련해보고자 한다.

    왜 자살을 하는가. 괴롭기 때문이다. 그러나 단지 괴롭기 때문만은 아니다. 괴로움이 점점 커지면서 고통이 극에 달하고 더는 이 땅에 붙어 있을 곳이 없을 때 인간은 심리적 피난처로서 자살을 떠올린다. 그때부터 머릿속에 자살은 편안한 안식처로 인식되고 결국 한 가지 생각만 남는다. ‘어떻게 자살을 할 것인가.’자살 방법을 다각도로 모색하다가 결국은 자기도 모르는 새 실천하고야 만다.

    그들은 어떻게 하여 극도의 심리적 고통에 처하게 되었을까? 외적 요인과 내적 요인, 두 가지 경우의 수가 존재한다. 각종 사회보장이 잘돼 있는 핀란드나 일본과 같은 선진 복지국가라 하더라도 자살률이 높은 것을 보면 외적 요인보다 내적 요인이 훨씬 중요함을 알 수 있다. 다만 자살률이 높은 선진 국가인 핀란드의 경우 모든 연령대에서 자살률이 비슷하지만, 우리나라의 경우 고령으로 갈수록 자살률이 급속히 높아지는 것을 보면 복지정책에 따른 환경적 요인도 관련이 있어 보인다. 산업화를 거치면서 전체적으로는 경제적 풍요를 이뤘지만, 경제의 양극화에 따른 상대적 소외계층에 대한 배려가 필요함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외적 요인이 강할지라도 개인의 심리가 건강하면 이를 잘 극복할 수 있는 반면, 외적 요인이 약할지라도 개인의 심리가 불안하면 극단적 선택을 일삼기 쉬운 점을 보면 역시 궁극적으로는 내적 요인이 중요하다고 말할 수 있다. 내적 요인을 한마디로 표현하면 개인 심리의 불건전성이다. 심리의 불건전성은 각종 정신병을 일으킨다. 우울증, 불안장애, 정신분열증을 앓고 있는 환자의 자살률이 높은 것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나의 패배를 인정하라



    개인 심리의 불건전성이란 병적 심리다. 병적 심리란 무엇인가? 인정하지 않는 심리다. 무엇을 인정하지 않는가? 현실을 인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실제로 현실을 인정하지 않으면 단 하루도 살 수 없다. ‘현실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말은 현실의 한 부분은 인정하되, 또 다른 부분을 인정하지 않음을 뜻한다.

    어떤 부분을 인정하지 않는가? 내 뜻대로 되는 세상은 인정하되 내 뜻대로 되지 않는 세상을 인정하지 않는다. 누구나 그러지 않은가. 아니다. 대부분의 건강한 사람은 내 뜻대로 되는 세상은 당연히 인정하지만, 내 뜻대로 되지 않는 세상도 인정한다. 각종 시험에 합격하면 내 뜻대로 되는 일이지만, 그렇지 않아도 우리는 잘 살아가고 있지 않은가!

    결국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두 가지밖에는 없다. ‘내 뜻대로 되는 세상’과 ‘내 뜻대로 되지 않는 세상’이다. 이 글에서는 전자를 ‘해동네’로 규정하고 후자를 ‘달동네’로 규정해본다. 해동네와 달동네는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의 자연스러운 모습이다. 개인 심리가 건전한 사람들은 해동네와 달동네 그 둘을 모두 인정한다. 그러나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해동네 하나만을 인정하고 집착하면서, 또 다른 세상인 달동네를 부정하고 회피하려고 한다.

    달동네를 부정하면서부터 싸움이 시작된다. 그러나 달동네가 어떤 존재인가. 겨울과 같고, 밤과 같고, 비와 눈과 같이 존재하는 엄연한 세상이다. 거대하게 존재하는 삶의 한 축과 사투를 벌인다면 누가 승자가 되고, 누가 패자가 될지는 자명하다. 존재는 승리하고, 나는 처절히 깨지고 패배한다. 그렇게 패배해도 좋다. 철저히 패배해서 해동네만 인정하는 나의 고집이 꺾인다면, 나는 다시금 유연해지고 새롭게 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의 패배를 인정하지 않고 나의 생각을 계속 고집한다면 어떻게 될까. 고집을 꺾지 않을수록 나와 존재의 싸움은 점점 치열해지고, 그만큼 고통은 가중되며, 그 고통을 회피하기 위해 최후로 가장 불행한 선택을 감행한다. 해동네도 좋지만, 달동네도 괜찮다. 둘 다 인생에 필요한 한 축이며, 서로가 서로를 연결해준다. 고로 괜찮다. 아무렴 괜찮다.

    ‘해동네도 좋지만, 달동네도 괜찮다’라는 사고방식은 존재를 인정함이요, 유연성이요, 믿음이다. 달동네를 부정하고 해동네여야만 한다는 사고방식은 사기와 절도, 강도, 강간, 폭력, 살인과 전쟁, 자살로 이어진다. 이런 사고방식은 총보다, 칼보다, 핵폭탄보다 위험하다. ‘해동네도 좋지만, 달동네도 괜찮다’라고 생각할 줄 안다면 어찌 자살할 수 있겠는가.

    내가 그렇다면 남도 그렇다

    내 마음속 ‘해동네’와 ‘달동네’를 인정하라

    2009년 11월6일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에서 박용오 전 두산그룹 회장의 영결식이 열렸다.

    자살하는 사람은 결국 알고 보면, 자신의 삶이 해동네여야만 한다는 생각을 극복하지 못한 사람이다. 해동네여야만 한다는 생각은 구체적으로 어떤 생각일까? ‘나도 남처럼 잘살아야만 한다’ ‘나도 남처럼 성공해야만 한다’ ‘나도 남처럼 행복해야만 한다’는 생각이다. ‘나는 남보다 특별나야만 한다’ ‘나는 남보다 고결해야만 한다’ ‘나는 남보다 깨끗해야만 한다’는 생각도 모두가 해동네에 집착한 결과다.

    그러나 내가 기준 삼는 남은 실제로 내가 생각하는 것처럼, 잘 살아가지도 못하고, 성공하지도 못하고, 행복하지도 못하다. 단지 그렇게 보일 뿐이다. 그들도 나만큼 못살고, 나만큼 실패하고 나만큼 불행하다. 그 겉모습만 보고 오판했을 뿐이다. 마찬가지로 내가 특별나거나 고결하거나 깨끗하다는 생각 역시 부질없는 생각이다. 내가 그렇다면 남도 그렇다. 이 모두 현실과는 전혀 무관한 망상일 뿐이다.

    한때 국내 굴지의 그룹 회장이었던 박용오씨 경우를 보자. 그룹의 승계과정에서 내부 비리를 검찰에 고발한 후 자신은 그룹에서 퇴출되었고, 자신과 형제들 모두 법적 처벌을 받았다. 이후 모 건설사를 인수해 경영해오던 중 여러 가지 문제로 어려워지게 되었다. 그리고 72세의 나이에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많은 사람이 그의 자살 이유로 형제 간 갈등에 따른 스트레스의 가중, 새로 맡은 건설사의 경영악화 등을 꼽았다. 과연 그랬을까. 물론 어떤 계기는 되었을 것이다.

    1990년대 중반부터 2000년대 중반까지 굴지의 그룹 회장으로 비교적 성공적인 경영실적을 거둔 그였다. 1997년 전국경제인연합회 부회장과 1998년 한국야구위원회 총재를 역임할 정도로 인품도 훌륭했고 신망도 있었다. 한때 수많은 사람의 존경과 부러움의 대상이던 그는 형제 간 갈등과 기업악화로 소외되기 시작했고 혼자가 되었을 때 아마 그 외로움을 견디기 힘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왜 혼자가 되면 안 되는가. 왜 외로우면 안 되는가.

    결국 그는 존재부정, 현실부정의 심리에 사로잡혔다. ‘내 뜻대로 안 되는 세상’은 엄연히 존재한다. 기업승계가 내 뜻대로 되지 않는 것도 삶의 한 흐름이다. 사업에서 실패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삶에서 실패를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어찌 내 삶에 해동네만 존재할 수 있겠는가. 달동네는 자연스러운 것이다. 안 되는 세상도 내가 보기에 안 될 뿐이지, 사실은 되는 세상이다. 내 뜻대로 되지 않아도 이를 흐름으로 인정한다면 어찌 상대를 적대할 수 있으며, 어찌 나 자신을 학대할 수 있겠는가.

    해동네여야만 한다는 마음에 사로잡히면 좀처럼 그 굴레에서 벗어나기 힘들다. 현실을 인정하지 않는 마음은 오만불손하다. 그 누가 그런 마음을 받아주겠는가. 결국 현실의 존재를 부정하는 심리는 나를 공격한다. 그 결과 내 마음은 날로 황폐해지고 극한 고통에 처하게 된다. 결국 극단의 선택을 한다.

    그런데 왜 내가 꼭 회장이어야만 하는가. 아주 평범한 평사원이 되면 안 될까. 백수건달이 되면 안 될까. 불행하게도 그에게는 이러한 사유체계가 없었다. 하나만을 선택하는 마음이 그를 찬란한 삶의 잔치에서 멀어지게 했다.

    세상에 비리 없는 사람은 없다

    내 마음속 ‘해동네’와 ‘달동네’를 인정하라

    대중에게 꿈과 희망을 주던 인기스타의 자살은 많은 사람에게 좌절감을 안겼다.

    1년여 전 최고의 인기를 누리던 탤런트이자 배우 최진실씨가 자살했다. 나름대로 열심히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준 그녀였다. 이혼의 아픔을 딛고 일어섰고 전성기의 인기를 찾아가던 그녀였다. 스타가 되기 전 지독한 가난을 딛고 일어난 그녀였기에 많은 이가 그녀를 보고 희망을 얻었다. 그런 그녀의 자살 소식은 우리에게 충격 그 자체였다. 우울증도 앓았고, 억울한 누명도 썼고, 과음 후에 충동적인 생각을 떨쳐버리지 못했기에 일어난 일이라고도 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그녀의 자살을 설명하기에는 부족하다.

    ‘사람들이 나를 칭찬해도 좋지만, 비방해도 괜찮다’는 생각을 갖지 못한 그녀는 각종 루머와 비난에 관심을 두기 시작했다. 그러한 관심은 어느새 그녀의 머리 전체를 지배했다. ‘사람들이 왜 그럴까? 왜 이토록 심하게 나를 공격하는 것일까?’ 처음에는 작았던 이런 생각이 눈덩이처럼 커져 점차 부정적인 색안경을 끼고 세상을 바라보게 만들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자기를 사랑하는 눈길은 보이지 않고, 자신을 무시하는 이야기만 들리기 시작했다. 그것은 환청이 되어 커져만 갔다. 그녀는 견딜 수 없는 심적 고통과 극심한 외로움, 억울함에 시달리다가 그만 생명에 대한 범죄를 저질렀다.

    A도 좋지만, B도 괜찮다. 해동네도 좋지만, 달동네도 괜찮다. 이런 사고방식은 현실에 대한 인정이요, 믿음이요, 유연함이요, 배짱이다. 그러나 ‘A여야만 한다. 해동네여야만 한다’는 사고에 사로잡히면 부정이요, 불신이요, 강박이요, 나만의 고집이다. 전자는 생명이지만 후자는 죽음이다. 그녀를 지배했던 사고방식은 후자였다.

    노무현 전 대통령도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대체로 대통령 퇴임 후에는 국가의 원로로 남아 특사가 되거나 직간접으로 정치적 행보를 했지만, 그는 한 사람의 촌로가 되어 평범한 소시민으로 살아갔다. 그 자신은 대통령 재임시 어느 정도 만족스러운 평가를 내리고 있었다. ‘내가 참 잘했죠? 이만큼 끌고 온 것도 대견하지 않습니까?’라는 말로 스스로 만족스럽게 평가했다. 그렇기에 그는 퇴임 후 홀가분하게 고향마을에 내려가 소박하고 행복하게 살아가고 있었다.

    그런 그가 측근과 가족, 자신에 대한 검찰 수사가 진행되면서 아무도 예측할 수 없었던 극단적 선택을 했다. 유서에 따르면 자신이 신세진 여러 사람에게 고통을 주었고 여생도 남에게 고통을 주고 짐이 된다는 자책을 하고 있다. 그러기에 자기가 삶을 접어야 하는 것이 운명이며, 삶도 죽음도 하나이니 슬퍼하지도, 원망하지도, 미안해하지도 말라고 말한다. 그렇다 하더라도 자살 외에는 대안이 없었을까?

    TV를 켜도 라디오를 틀어도 신문을 보아도 온통 자신에 대한 이야기로 넘쳐났다. 지인들이 겪는 고통도 훤히 보였고, 아픔으로 다가왔다. 스스로 상당한 책임의식을 가진 그였기에, 극적인 돌파구를 마련하려고 꽤나 고심했을 것이다. 그리고 검찰 스스로 언론을 통해서 수사의 최종 목적지는 자신이라고 하는 말을 들었다.

    그는 더는 굳센 마음을 지키기 어려웠다. 그리고 가장 비극적이고 엄청난 결론을 내렸다. ‘나 하나 없어지면 모든 것은 해결된다’고…. 불행하게도 그의 바람대로 되었다. 수사는 종결되었고 측근에 대한 더 이상의 추궁도 없었다. 사람이 죽어야 비리를 캐는 수사가 종결되는 것도 슬픈 일이지만, 죽음이 아니고선 해결할 줄 모르는 유연성 부족은 더 큰 문제다. 해동네도 좋지만, 달동네도 괜찮다. 살다보면 본의든 본의가 아니든 비리가 존재한다. 비리란 뱃속의 똥과 같아서 필자를 비롯해서 이 세상에는 비리 없는 사람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어차피 나를 둘러싼 많은 사람은 나에 대해 오해할 수 있으며 비방할 수 있다. 어떻게 수많은 비방에 일일이 대응하고 신경을 쓰며 살아갈 수 있겠는가. 만일 단점이 있다면 겸허한 마음을 일으켜 반성하고 새롭게 출발할 바다. 내 잘못이 아니라면, 옛 율곡 선생이 말씀하셨듯이 허공을 구름이 가는 일이라 여기고 대응하지 않고 내 생활에 충실함이 마땅하다. 그러나 우리의 착한 바보는 그렇게 자신에게 관대하지 않았다.

    사는 자가 당당하다

    옛 글 ‘대학(大學)’은 ‘그 근본이 어지러우면서 그 말단이 다스려지는 일이 없다’라고 가르친다. 근본이란 바깥을 다스리기보다 안을 다스리는 자다. 아무리 지위와 신분이 높고 재력이 좋아도 스스로 마음을 다스리는 공부가 되지 않으면 위험에 처하기 쉽다. 또 ‘명심보감’에는 ‘만족을 아는 사람은 가난하고 천해도 즐겁고, 만족을 모르는 사람은 부유하고 귀해도 근심이 많다’고 했다. 만족이란 내 삶의 해동네와 달동네를 모두 인정할 때 생겨난다. 만일 내 삶의 달동네를 거부하면, 거부하는 만큼 불만이 커지기에 외적으로 부유하고 귀해도 근심만 늘어간다.

    어차피 내 안에는 해동네도 있고 달동네도 있다. 내가 잘하든 못하든 나의 아군이 반이요, 나의 적군이 반이다. 잘하든 못하든 칭찬받을 수도 있고 비난받을 수 있다. 성공할 수도 있고, 실패할 수도 있다. 깨끗한 점도 있고, 비루한 점도 있다. 누구라도 이 점을 인정하고 그저 내가 맡은 일에 충실하면서 양심껏 예절을 지키고 살아간다면 거칠 것 없이 자유롭고 당당해진다. 그러니 어찌 자살욕구에 시달리겠는가. 최고의 사업가요, 연예인이요, 정치가라 할지라도 자신의 마음을 다스릴 수 없다면 모든 지위가 한낱 모래성에 불과하다.

    산다는 것은 신의 소명이요, 내 삶에 대한 책임이다. ‘논어’는 ‘우리의 몸은 부모와 천지자연으로부터 받은 것이니 감히 훼손치 않음이 효의 근본이다’라고 하였다. 내가 어디서부터 와서 어떻게 현존하는지를 제대로 파악하는 것이 정체성이다. 자기의 정체성을 알면 결코 내 몸을 함부로 훼손할 수 없다. 이러한 마음이 정신건강의 극치다. 이러한 마음공부가 되지 않을 때, 우리는 자신에 대해서 함부로 행동한다. 해동네와 달동네를 인정하는 마음이 곧 지혜요, 유연함이요, 믿음이요, 배짱이요, 평화다. 비록 온갖 어려움에 둘러싸여 있더라도 결국 살아남는 자, 살아가는 자만이 당당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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