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6월호

지인(知人), 용인(用人), 겸양의 리더십으로 무위이치(無爲而治)를

  • 배병삼│영산대 교수·정치사상 baebs@ysu.ac.kr│

    입력2010-06-04 10:5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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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공자는 요임금과 순임금을 통해 국가경영에 대한 자신의 바람을 표현했다. ‘다만 공손하게 몸을 낮추고 바르게 앉아 있을 뿐’인데도 저절로 잘 다스려지는 정치를 이뤄낸 순임금의 비밀은 국가경영뿐 아니라 기업경영에도 고스란히 적용된다. 오늘날 세계적 명성을 얻은 글로벌기업의 경영철학 핵심도 공자의 사상과 일맥상통한다.
    지인(知人), 용인(用人), 겸양의 리더십으로 무위이치(無爲而治)를
    서양의 기독교 전통은 하느님의 ‘말씀’으로부터 시작된다. 하느님은 인간과 자연을 창조하고 거기에 속성을 부여하는 외부적 존재다. “태초에 말씀이 있었다”는 선언은 세상의 판단기준이 사람의 바깥 혹은 위에 있는 신의 말씀(logos)에서 비롯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이 ‘말씀’은 모세의 십계명으로 계승된다.

    야훼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내가 있는 산으로 올라와서 여기에서 기다려라. 그러면 내가, 백성을 가르치려고 몸소 석판에 기록한 율법과 계명을 너에게 주겠다.”(성경, 24:9-12)

    이 같은 말씀의 전통을 따를 때 인간세상의 갈등과 분쟁을 해결하기란 도리어 쉽다. 하느님이 모세에게 ‘백성을 가르치려고 몸소 석판에 기록한 율법과 계명을’ 주었으니, 그 계명이 갈등과 싸움을 판정하는 기준이 되는 것이다. 십계명에 따라 살고, 그것을 어기면 처벌받는다.

    그러나 동아시아에는 하느님의 전통이 없다. 자연과 인간 바깥에서 따로 생명을 창조하는 야훼(조물주)가 없다. 천도교의 교리로 잘 알려진 ‘인내천(人乃天)’ 속에 동아시아의 신관(神觀)이 잘 들어 있다. 인내천, 곧 “사람이 곧 하늘이다”라는 말을 풀어보면, “모든 사람의 본성 속에 하느님이 깃들었다”는 뜻이다. 세계의 중심이 인간이라니 듣기에는 좋은데, 사람들 사이의 갈등과 분쟁을 해결하기는 오히려 힘들다. 누가 옳은지를 판정할 권위를 사람 속에서 찾아야 하는데, 누구나 제 주장이 옳다고 내세울 테니 말이다.

    폭력을 제외하면, 인간사회의 갈등과 분쟁을 해결할 근거는 두 군데밖에 없다. 저 위에 있는 하느님(상제)이거나 아니면 저 먼 데 있는 전통이다. 동아시아에서는 추상적인 절대적 권위가 부정되므로 전통 즉 ‘역사’에서 권위를 찾을 수밖에 없다. 나이 먹음, 오래된 것, 신화나 설화 같은 해묵은 것들이 힘을 갖는다. 공자가 제 학문방법론을 “옛것을 서술할 뿐 창작하지 않으며, 옛것을 믿고 또 좋아한다”(‘논어’)라고 설명한 것도 역사와 전통에서 학문적 정당성을 찾으려 한 노력의 일환이다.



    요순설화의 핵심은 순(舜)

    동양 고전에 요(堯)와 순(舜)이라는 이름이 자주 출현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요와 순, 곧 요임금과 순임금은 실존한 인물이 아니라 당시 인간사회의 문제들을 해결하고 극복하려고 만든 신화적 장치로 이해하는 것이 맞다. 요와 순은 서양에서 하느님의 말씀이 행했던 역할처럼, 당대의 분쟁을 해결하기 위해 가공된 권위적 인물이다.

    이런 점에서 “공자가 쓴 방법은 역사를 이용하는 교묘한 방법이었다. 다른 문명에서 신의 계시가 맡았던 역할을 중국에서는 역사가 행했다”(모우트, ‘중국문명의 철학적 기초’, 인간사랑, 71쪽)는 지적은 정곡을 찌르는 것이다. 서양에서 신의 계시(logos)가 시비(是非)의 기준이라면, 중국에선 역사(history)가 시비를 가리는 정당성의 기초였다. 요와 순은 바로 그 역사의 상징이다. 그러므로 공자나 맹자가 제 주장의 궁극적 근거로 요와 순을 드는 것은, 마치 서양에서 야훼를 권위의 근거로 삼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공자에게 요임금은 최초로 ‘인간사회의 원형’을 만든 존재로 그려진다.

    공자, 말씀하시다. “위대하구나! 요(堯)의 임금 노릇하심이여. 높고 높도다! 오로지 하늘이 큰데, 오직 ‘요’가 이를 법으로 삼았으니.

    넓고 넓도다! 백성들이 뭐라 이름조차 짓지 못하는구나. 높고 높도다! 그가 이룬 공(功)이여. 눈부시도다! 그가 이룬 문명이여.”(‘논어’, 8:19)

    공자가 그린 요임금은 자연법칙을 기준으로 인간사회에 최초로 질서를 부여한 문명창조의 어버이다. 요의 위대성은 도저히 “이름조차 지을 수 없는 것”으로 묘사된다. ‘크고’ ‘우뚝하며’ ‘까마득하고’ ‘눈부신’ 존재이니, 이것들은 내용을 가진 말(言)이 아니라 감탄하는 소리(聲)일 따름이다. 마치 ‘아!’나 ‘억!’처럼. 그렇기에 요의 행적은 “뭐라 이름조차 짓지 못하는” 것이어서, 기껏 “그가 이룬 사업과 문명이 눈부시다”고 표현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요의 역할은 여기까지다. 요의 위상은 말로 나아가지 못하고 소리에 머문다. 소리는 말의 소재요 바탕일 뿐 내용을 갖춘 언어가 아니다. 인간문명은 소리를 벗어나 말(언어)로써 표출될 때라야 가능하다. 소리를 바탕으로 말로 나아간 존재가 바로 순(舜)이다. 즉 인간문명의 실제 건설자는 순임금이다. 요는 순의 출현을 위한 예비적 존재일 뿐, 요순설화의 핵심은 순임금에게 있다는 얘기다.

    텍스트마다 다른 의미

    주의할 것은 ‘논어’를 위시한 동양고전들 속에 그려진 요와 순의 행적이 ‘역사적 사실’이 아니라 후세 해석자들의 희망을 비춘 투영물이라는 점이다. 그러므로 동양고전에서 지겨울 정도로 반복되는 ‘요와 순’‘요순시대’‘요임금, 순임금’ 등의 표현은 겉보기는 같지만 속에 품은 뜻은 텍스트마다 다르다. 독자는 요순이라는 이름을 단일한 역사적 진실로 읽어서는 안 된다. 그 이름 밑에 깔린 각기 다른 서술자의 욕망을 읽어내야 한다.

    가령 ‘격양가’라는 고사에 그려진 ‘요순’이라는 이름은 노자(老子)풍의 자연주의를 내포하고 있다. 다리를 뻗고 앉은 노인이 한 손으로는 배를 두드리고 다른 손으로는 땅바닥을 치며 노래 부른다고 하여 ‘격양가’다. “해가 뜨면 일하고 해가 지면 쉬노라. 우물 파서 물 마시고 밭을 갈아 밥 먹으니, 임금의 힘이 내게 무슨 소용이 있으랴!” 하는 노랫말에는 군주가 누구인지 백성이 알지 못하는 정치야말로 이상적인 정치라는 해석이 깃들어 있다. 일종의 자유방임에 대한 희망이 요순이라는 이름에 투사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조선후기 실학자 다산 정약용이 생각하는 요순은 또 다르다. 정약용은 큰 목소리로 이렇게 강조한다.

    공자가 말씀하기를 “요순시대는 희희호호하였다”고 했다. 요즘 사람들은 이걸 순박하고 태평스럽다는 뜻으로 보고 있는데 절대로 그렇지 않다. 희희(熙熙)는 ‘밝다’는 뜻이고 호호( )는 ‘희다’는 뜻이니 희희호호하다는 말은 모든 일이 두루 잘 다스려져서 밝고 환하여 티끌 하나, 터럭 하나라도 악이나 더러움을 숨길 수 없다는 뜻이다. 요사이 속담에서 말하는 “밤이 낮과 같은 세상”이라는 게 참으로 요순의 세상을 말하는 것이다. (‘유배지에서 보낸 편지’)

    정약용이 묘사한 요순시대를 한밤중에도 감시 카메라가 눈을 밝히고 있어 감히 범죄를 저지르지 못하는 오늘날의 사회풍경에 비유할 수 있을까? 정약용이 요순시대를 ‘밤이 낮과 같이 투명한 세상’으로 읽고 또 요순을 엄격한 통치자로 읽은 까닭은, 조선후기의 이완되고 부패한 사회분위기를 일신할 필요성을 절박하게 느꼈기 때문이다. ‘격양가’의 자유방임적 상태에 대한 욕망과, 정약용의 법치사회 동경 사이의 간격은 결코 요순이라는 말로 한데 아우를 수 없는 것이다. 동아시아 지성사에 반복되는 ‘요순’이라는 이름 밑에는 전혀 다른 꿈들이 아로새겨져 있음에 주의해야 하는 이유다.

    무위이치, 소유와 경영 분리

    그러면 순이라는 이름에 투영한 공자의 욕망과 바람은 무엇이었을까. 순은 우선 국가경영자로 등장한다.

    공자, 말씀하시다. “무위이치, 즉 억지로 하지 않고도 잘 다스린 이는 순(舜)일진저! 도대체 어떻게 하셨던 걸까? 다만 공손하게 몸을 낮추고 바르게 남쪽을 향해 앉아있을 뿐이던 것을.”(子曰, “無爲而治者其舜也與! 夫何爲哉? 恭己正南面而已矣.”) (‘논어’, 15:4)

    지인(知人), 용인(用人), 겸양의 리더십으로 무위이치(無爲而治)를

    질레트의 CEO였던 콜먼 모클러는 순임금의 무위이치론을 몸소 실천한 현대경영인이다.

    공자가 지적한 무위이치, 곧 ‘억지로 하지 않고도 잘 다스려진 정치’란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는데도 다스려지지 않는 것이 없다”(‘도덕경’)는 신비주의적 정치를 뜻하지 않는다. ‘논어’에서 말하는 무위이치란 이른바 유교정치의 이상인 덕치(德治)의 다른 표현으로 이해해야 한다.

    첫째, 순의 무위정치는 공기(恭己), 즉 군주의 ‘공손하게 몸을 낮춤’에서 비롯된다고 하였다. 이것은 자기 몸을 낮추고 상대방을 높이는 겸양의 리더십을 뜻한다. 공자가 ‘덕치’를 두고 “가까운 사람들이 기뻐하고 먼 데 사람들이 몰려드는 것”(近者悅, 遠者來. ‘논어’)으로 규정한 것은 바로 스스로를 낮추는 겸양의 리더십에서 비롯된다.

    둘째 남면(南面), 즉 “남쪽을 향하다”란 군주의 옥좌가 남쪽으로 향해 있는 데서 연유한 표현이다. ‘논어’에서 “정치는 덕(德)으로 한다. 천체에 비유하자면 북극성이 움직이지 않고 제자리에 가만히 있는데도 많은 별들이 그것을 중심으로 도는 것과 같다.”(‘논어’, 2:1)라고 논한 데서부터 임금의 지위는 북극성에 비유된다. 북극성은 붙박이별이므로 항해하는 선박들과 길 가는 수레들이 방위를 잡는 표준이다. 실제로 중국의 자금성에 위치한 천자의 자리든, 서울의 경복궁에 있는 조선시대 임금의 자리든, 일본 교토의 어소(御所)이든 옥좌들이 모두 궁궐의 북쪽 끝에서 남향으로 놓여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러므로 “바르게 남쪽을 향해 앉아 있기만 했을 뿐”이란 말은 순임금이 인간사회의 옳고 그름의 근거가 되고 또 행위 정당성의 표준이 되었다는 뜻이다. 나아가 국가경영의 실무는 각 분야의 인재를 선발하여 그들에게 맡겼다는 것이다. “순임금이 익(益)에게 불을 맡겨 산과 들의 초목을 불태우게 하고, 우(禹)에게 아홉 강물을 뚫게 하니 드디어 땅 위에 사람이 살 수 있게 되었다”라는 맹자의 전언이 그 내력을 말해준다. 겸양과 위탁의 리더십이 무위이치를 구성한다. 여기서 ‘순임금의 무위정치=겸양의 리더십=북극성=덕치사상’ 같은 일련의 등식이 성립된다.

    한편 공자는 무위이치의 핵심 요건으로 ‘소유와 경영의 분리’를 든다.

    공자 말씀하시다. “높고 높구나. 순(舜)과 우(禹)는 천하를 소유하고서도 간여하지 않았으니!” (‘논어’, 8:18)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점은, 순임금이 이상적 리더로 추앙되는 까닭이 “천하를 소유하였는데도 간여하지 않았다”는 데 있다는 지적이다. 이것은 곧 천하를 사유(私有)하지 않고 관리했다는 의미를 포함한다. ‘천하를 소유하였지만, 이에 간여하지 않았다’는 대목은 오늘날 숭상하는 기업경영론, 즉 ‘소유와 경영의 분리’와 다를 바 없다.

    득인(得人)의 어려움

    그러면 공자경영학에 있어 리더의 역할은 영국의 ‘군림하되 통치하지 않는’ 상징적인 존재와 같은 것일까? 그렇지는 않다. 공자 경영학이 법치가 아니라 인치(人治)를 지향하는 한, 리더는 매우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는데, 그 요체는 ‘사람을 아는 안목’ 곧 ‘지인(知人)’과 ‘사람을 적재적소에 배치하기’ 즉 ‘용인(用人)’에 있다. 리더는 경영의 마당(場)을 마련하고 또 전문경영자(CEO)를 선발하는 존재로서 눈앞에 드러나지 않지만, ‘보이지 않는 손’의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다. 순임금이 행한 지인과 용인의 측면을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순(舜)은 신하 다섯 사람을 두었는데도 천하가 잘 다스려졌다. 무왕(武王)은 말하였다. ‘내 유능한 신하 열 사람을 두었노라’고.

    공자가 평론하였다. “재주 있는 이를 얻기가 어렵다고 하더니 정말 그렇지 않으냐? 요순시절부터 무왕 때까지가 흥성하였는데, 그 열 사람 가운데 그의 부인이 끼어 있으니 아홉 사람에 불과하구나.”(‘논어’, 8:20)

    여기서 공자가 인식한 국가경영의 요체가 리더의 사람 보는 안목과 용인술에 있음이 잘 드러난다. 순임금으로서는 5명의 신하만으로 이상 정치를 실현할 수 있었으나, 뒷날 주나라를 건설한 무왕(武王)은 그 두 배인 10명으로써야 혁명을 이룰 수 있었다. 그중에 그의 부인을 끼워 넣어서야 겨우 수를 채웠다니 적재적소에 인재를 등용하기가 쉽지 않았던 것이다. 그만큼 사람을 제대로 알고 쓰기가 어렵다는 뜻이다.

    공자가 성주가 된 제자 자유(子游)에게 던진 질문에서도 사람 구하기의 중요성이 잘 드러난다. 공자가 사람 얻는 것을 경영의 요체로 삼고 있다는 표지이기도 하다.

    공자제자, 자유가 무성(武城)의 성주가 되었다.

    공자: “자넨 ‘사람을 얻었는가’(得人)?”

    자유: “‘담대멸명’이라는 자가 있습니다. 업무를 처리함에 편법을 쓰지 않고, 공무가 아니고선 여태 저희 집에 온 적이 없습니다.” (‘논어’, 6:12)

    이 대화의 핵심어는 득인(得人)이다. 거듭 말하지만 공자의 사상은 법치가 아닌 ‘인치’를 지향한다. 법치가 제도나 규범, 성문법에 의거해 질서를 잡는 경직된 체제라면, 인치는 적재적소에 바른 사람을 선발하는, 인사(人事)에 사활이 걸렸다. 그러므로 인치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람 구하기다. 경영학 용어로 하자면 인사경영이 그 핵심이다. 그렇다면 공자가 성읍의 책임자가 된 제자에게 “사람을 얻었는지”를 질문한 것은 경영의 핵심을 찌른 것이다.

    이에 제자인 자유는 담대멸명(澹臺滅明)을 거론하면서, 그가 업무를 추진함에 있어 편법을 쓰지 않는 원칙주의자이자 공과 사의 구별이 분명한 원리주의자라고 예시한다. 담대멸명은 절제와 성찰이 생활 속에 녹아 있었기에 “업무를 처리하는 데 편법을 쓰지 않고”, “공무가 아니고서는 상관의 사택을 찾지 않을” 수 있었으리라. 이에 대해 공자가 뭐라고 응답한 기록은 없으나, 사마천의 ‘사기’에 담대멸명이 공자의 제자로 기록되어 있는 것을 볼 때 이를 기화로 공자가 그를 제자로 받아들였을 가능성도 있다. 공자가 담대멸명의 경영자로서의 자질을 허여한 것으로 봐도 좋을 듯하다.

    겉은 군주이되 속은 성인

    ‘논어’에는 노나라 총리 지위에 있으면서 유하혜(柳下惠) 같은 현인을 천거하지 않은 장문중(臧文仲)에 대해 공자가 저주에 가까운 비난을 퍼붓는 대목이 있다(‘논어’, 15:13). 그 까닭은 장문중이 유능한 인재를 알면서도(지인) 그를 적재적소에 등용하지(용인) 않았기 때문이다. 사적 감정이나 개인의 호오(好惡)를 넘어 객관적인 ‘득인’의 역할을 수행해야 할 경영자의 본분을 망각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공자 경영학의 주인공은 소유자(군주)가 아니라 경영자(군자)다. 공자가 꿈꾼 이상적 체제는 소유자 독재체제가 아니라 과도기적으로는 소유자-경영자 협의체이거나, 궁극적으로는 소유-경영의 분리를 통한 전문경영체제로 볼 수 있다. 여기서 공자 경영학의 요체는 사람을 바로 볼 줄 알고, 또 바른 사람을 쓸 줄 아는 데로 귀결한다. 이점은 다시 맹자에게 계승되어 사람 중심의 국가경영을 뜻하는 인정(仁政)의 핵심요소가 된다.

    흥미롭게도 노자 역시 “좋은 무사는 용맹을 드러내지 않고, 잘 싸우는 사람은 성내지 않으며, 적을 잘 싸워 이기는 자는 개입하지 않는다. 그리고 ‘사람을 잘 부리는 사람’은 사람들의 밑에 위치한다. 이것이 사람 부리는 힘이다”(‘도덕경’, 68장) 라고 지적한 바 있다. 노자도 경영자의 미덕을 스스로를 낮춤으로써 유능한 인재를 모으고, 또 인재들이 마음껏 재능을 발휘할 수 있는 마당을 마련해주는 데 있다고 본 것이다.

    한편 ‘논어’에는 순의 경영원리를 좀 더 구체적으로 “순임금이 천하를 소유하고서 인민들 가운데서 고요(皐陶)를 뽑아 재상에 임용하니, 불인한 자들이 사라졌다.”(논어, 12:22)고 묘사하기도 한다.

    이 예화는 순임금의 용인술을 좀 더 구체적으로 그리고 극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국가 소유자인 순이 ‘고요’라는 CEO를 발탁해 전권을 위임하니 부정직한 사람들이 모두 정직한 사람으로 바뀌어 조정이 맑아지고 부정이 사라져버렸다는 것이다. 순에게 사람의 재능을 아는 눈, 곧 지인(知人)의 능력이 있기에 숨어 있는 현인을 발탁할 수 있었고, 또 그에게 경영권을 맡김으로써 부정을 저지르던 이들도 바른 구성원이 되었다는 설명이다. 무위정치의 효과를 말하고 있는 셈이다.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이 맑아지는” 경영의 원리를 순임금은 너무나 조용히 실천해낸 것이다.

    이러한 ‘무위이치’의 놀라운 경지를 따로 성(聖)이라고도 부르며, 이를 실현한 임금을 성왕(聖王)이라고 부른다. 즉 요나 순과 같이 소유하되 경영에 개입하지 않은 이들이 모두 성왕이다. 동양인이 꿈꾸는 정치적 리더십의 이상이 바로 ‘겉은 군주이면서 속은 성인’이라는 내성외왕(內聖外王) 속에 함축돼 있다. 순임금이야말로 이런 내성외왕의 모델인 것이다.

    질레트사의 성공 비밀

    주목할 것은 순임금의 무위이치론이 결코 케케묵은 수천년 전의 일화가 아니라 오늘날 기업경영에서도 핵심적 사안으로 부각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미국의 짐 콜린스(Jim Collins)는 평범한 기업을 위대한 기업으로 전환시킨 리더십을 연구하면서 질레트사의 경영자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서술했다.

    나는 홍콩의 이사회에 참석한 질레트의 한 고위직 이사 부부와 함께 며칠간을 보낸 적이 있다. 대화 중에 나는 그들에게 질레트를 평범한 회사에서 위대한 회사로 전환시키는 데 가장 큰 역할을 맡았던 CEO, 콜먼 모클러가 멋진 삶을 살았다고 생각하는지 물었다.

    콜먼의 삶은 세 가지 큰 사랑, 즉 자신의 가족과 하버드대, 질레트를 축으로 움직였다고 그들은 말했다. 심지어는 회사가 인수당할 위기에 처해 있던 1980년대의 가장 암울하고 엄혹한 시절에도, 또 질레트의 사업이 점점 더 전세계로 힘차게 뻗어나가고 있을 때에도 모클러는 삶의 균형을 훌륭하게 유지했다. 그는 가족과 함께 보내는 시간을 눈에 띄게 줄인 적이 없었고, 밤이나 주말에 일을 한 적도 거의 없었다. 예배에도 규칙적으로 참석했다. 하버드대의 이사회에서도 능동적인 활동을 계속했다.

    모클러가 이 모든 일을 어떻게 성공적으로 수행했는지를 묻자, 이사는 말했다.

    “아, 그건 사실 그에게 힘든 일이 아니었어요. 그는 적합한 사람들을 주위에서 모으고 사람들을 적재적소에 앉히는 데 능했기 때문에 밤낮없이 줄곧 회사에 있을 필요가 없었던 것뿐입니다. 그것이 콜먼의 성공과 균형의 비밀의 전부입니다.”(짐 콜린스, ‘위대한 기업으로’, 김영사, 109쪽)

    인용문의 끝 문단 가운데, 질레트사의 경영자가 “적합한 사람들을 주위에서 모으고 사람들을 적재적소에 앉히는 데 능했기 때문에 밤낮없이 줄곧 회사에 있을 필요가 없었던 것뿐”이라는 대목은 고스란히 ‘논어’에 기술된 순임금의 무위이치론, 즉 “공손하게 몸을 낮추고 임금 자리에 바로 앉아있기만 했을 뿐”이라는 지적과 더불어 “순임금이 천하를 소유함에 인민들 속에서 ‘고요’를 뽑아 재상에 임용하니, 불인한 자들이 사라졌다”는 대목과 겹친다.

    그렇다면 예나 지금이나 최상의 리더십의 요건은 같다. 첫째 인재를 파악하는 안목을 갖추고, 둘째 스스로를 낮춰 각 분야의 인재를 받아들이며, 셋째 이들을 적재적소에 배치해 자기 기량을 발휘하게 만드는 마당을 마련하는 데 있음을 추출할 수 있겠다.

    소통과 유대의 사회

    최근 일본의 도요타자동차 사태에서 보듯, 소통문화의 건설은 조직의 사활이 걸린 중대한 문제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상하 간 의사소통은 물론이고 횡적인 소통조차 쉽지 않다. 상명하복의 전제적 조직문화를 가진 동아시아는 물론 서양의 조직에도 별반 다르지 않다.

    연구를 통해서 우리는 최고 리더가 매우 강력한 힘으로 회사를 이끌며 공포감을 조성하다보니, 사람들이 외부의 현실을 걱정하며 그것이 회사에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가를 염려하기보다는 오히려 리더가 무슨 말을 할지, 그가 어떻게 생각할지, 그가 무슨 일을 할지에 대해 더 속을 태우는 기업들을 발견했다. (짐 콜린스, 앞의 책, 127쪽)

    그렇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강력한 카리스마적 리더십이 이끄는 집단은 상부의 지시에 부응하는 데 골머리를 앓는 반면 외부(시장)의 문제에 대해서는 소홀히 여기는 경향을 보이는 점에서는 동일하다. 조직의 위기는 이 틈새를 파고든다. 도요타 사태의 원인도 이것이었다.

    흥미롭게도 순임금이 소통문화 건설에 매진했음을 보여주는 사례가 여럿 있다. 오늘날 우리에게 상명하복, 대의멸친, 멸사봉공 등 아랫사람의 희생과 복종을 요구하는 것으로 알려진 동아시아의 조직문화, 특히 유교 전통 가운데 소통사회를 지향하고 또 몸소 실현한 리더십이 존재했다는 사실은 놀랍다. 맹자가 기술하는 순임금의 모습을 보자.



    맹자 말씀하시다. “위대한 순임금은 남과 더불어 함께하기를 잘하였으니, 자기(에고)를 버리고 상대방의 견해를 따르고, 다른 사람들 견해를 즐겁게 취하는 것을 선(善)으로 여겼다. 그는 농사꾼으로 시작하여 옹기장이, 어부를 거쳐 황제에 이르기까지 언제나 남의 견해를 잘 취했을 따름이었다.



    상대방의 견해를 취하기를 잘한다는 것은 곧 무슨 일이든 ‘남과 함께 하기’(與人)를 좋아했다는 뜻이다. 그러니 군자(지도자)에겐 ‘남과 함께 하기’보다 더 핵심적인 가치는 없다.”(大舜有大焉. 善與人同, 舍己從人, 樂取於人, 以爲善. 自耕稼陶漁, 以至爲帝, 無非取於人者. 取諸人以爲善, 是與人爲善者也. 故君子莫大乎與人爲善.) (‘맹자’, 2:8)

    맹자는 순임금의 리더십 핵심어로 ‘여인(與人)’ 즉 ‘상대방과 더불어 하기’를 들고 있다. 쉽게 말해 ‘상대방과 친구 되기’를 뜻한다. 친구 관계란 돈이나 지위가 아닌 의사의 소통(커뮤니케이션)을 통해 나와 네가 ‘우리’로 전환하는 형태를 말한다. 맹자에게 순임금은 의사소통을 통해 동료를 확보한 사람이었던 것이다.

    맹자는 의사소통을 통해 유대관계를 형성한 순임금의 장점이 ‘나를 버리고 남의 좋은 견해를 따름, 즐겨 남에게서 좋은 것을 취하기를 잘한’ 데 있다고 설명한다. 이것이 순을 “농사꾼으로 시작하여 옹기장이, 어부를 거쳐 황제에 이르게” 만든 힘이다.

    순의 별명이 도군(都君)이었다는 점은 이 대목에서 특기할 만하다. “순이 머무는 곳마다 삼 년이 지나면 도회지를 이루므로 그를 도군이라고 불렀다”(舜所居三年成都, 故謂之都君. ‘맹자집주’)는 해설은 그가 스스로 사람을 끌어들인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그의 주변으로 몰려들었다는 뜻이다. 사람들이 몰려들게끔 만든 순의 힘은 자기 자신을 겸양하면서 상대방의 견해를 경청하는 데 있다. 폭력이나 권력으로 남을 지배한 것이 아니라, 겸양과 경청에서 비롯된 도덕적 매력에 사람들이 끌린 것이다. 한마디로 순임금의 힘은 권력이 아니라 매력이었다는 것.

    ‘재미있게 일하면서 돈 벌자’

    나는 인간관계에서 나타나는 매력의 힘을 진공청소기에 자주 비유하곤 한다. 진공 상태로 비우는데도 먼지가 빨려드는 진공청소기의 역설과, 자기 자신을 낮춰 겸양하고 남의 말을 들어주는 데 사람들이 몰려드는 매력의 역설에 상통하는 데가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맹자가 묘사한 순임금의 특징은 두 가지로 요약된다. 첫째, 한낱 농사꾼에서 시작해 황제의 지위에까지 오른 순의 출세기는 그의 인간적 매력에서 비롯된다는 점이다. 그 매력을 구성하는 요소가 자신을 낮추고(겸양), 상대의 말을 들어주며(경청), 그 사정을 해소해주는 실천과정(배려)이다. 즉 이 과정이 순의 리더십을 구성하는 요소들이다.

    둘째, 매력으로서의 리더십을 실현할 동력이 ‘남과 더불어 잘 소통함(善與人同)’에서 나왔다는 사실이다. 맹자는 남과 소통을 잘한 것이야말로 그가 ‘위대한 순(大舜)’으로 불리는 까닭이라고 의미를 부여한다. 상대방 위에 군림하려는 지배욕이 아닌, 상대방과 의사를 소통하는 과정에서 순의 매력적 리더십이 구성된다는 것이다. 농사꾼에서 황제가 되기에 이른 순임금의 영웅적 입신과정을 ‘매력적 덕성’과 ‘소통의지’ 그리고 그 실천과정으로 압축한 맹자의 분석은 유교 리더십의 핵심으로 승화한다. 이를테면 상하 지배-복종관계가 아니라 동료와의 상호 유대관계에 대한 꿈이 맹자의 순에 대한 묘사에 녹아 있다. 결국 공자와 맹자의 새로운 세계에 대한 꿈이 순임금에게 투영된 것이 무위이치요, 더불어 하는 횡적 유대의 비전이었던 셈이다.

    그런데 영국의 경영전략가 게리 해멀(Gary Hamel)이 소개하는 ‘고어텍스 섬유’로 유명한 고어앤드어소시에이트(Gore ·Associaltes)의 경영혁신 사례도 순임금의 소통과 상호유대 사회의 현대판을 보는 듯하다. 이 회사는 연 21억달러의 매출을 올리고 세계 45개 공장에 8000여 명의 직원을 고용하는 글로벌기업이다. 이 회사가 확립한 여러 경영원칙은 현대 기업이론의 정설과 완전히 반대로 움직이고 있다고 한다.

    게리 해멀에 따르면 이 회사의 경영자 빌 고어(B. Gore)의 문제의식은 “회사 전체를 관료주의에서 탈피하도록 계획할 수는 없을까?”에서 출발했다. 그 결과 이 회사는 “마치 팬케이크처럼 수평적 조직이 되었다. 이곳에는 관리계층도 없고, 조직도도 없다. 직함을 가진 사람들은 별로 없고 보스도 없다. 고어의 핵심부서는 스스로 관리하는 소규모 팀으로 구성되어 있고 모든 팀은 다음과 같은 공통목표를 가지고 있다. ‘재미있게 일하면서 돈을 벌자.’”(게리 해멀, ‘경영의 미래’, 세종서적, 104쪽)

    이런 수평적 조직은 정작 현대기업이 아니라 순임금이 제시한 비전과 상통한다. 나아가 고어가 실현한 권력구조의 지형 역시 순임금의 ‘함께, 더불어’ 구조와 합치한다.

    고어에는 계급이나 직함이 없지만 어떤 동료는 단순한 호칭인 ‘리더’라고 불린다. 고어에서 상급 리더는 하급 리더를 임명하지 않는다. 오히려 동료들이 그럴만하다고 판단할 때, 리더를 선출한다. 리더 호칭을 받은 사람은 일을 해내고 팀을 이끌어가는 능력을 행사함으로써 영향력을 발휘한다. 고어에서 팀 성공에 크게 이바지하고 거듭 성과를 이룩하는 사람들은 추종자를 모을 수 있다. 섬유기술 그룹의 제조분야 리더인 리치 버킹엄은 이렇게 말한다. “만약 회의를 소집하는데 사람들이 모여들면, 소집한 사람이 리더가 됩니다.” (게리 해멀, 106쪽)

    지인(知人), 용인(用人), 겸양의 리더십으로 무위이치(無爲而治)를
    裵 柄 三

    1959년 출생

    경희대 정치외교학과 졸업

    경희대 대학원 정치학과(정치학 박사)

    한국사상사연구소 연구원

    現 영산대학교 학부대학 교수

    저서:‘논어, 사람의 길을 열다’‘ 한글세대가 본 논어’ ‘풀숲을 쳐 뱀을 놀라게 하다’ 등


    상하구조가 아니라 동료들이 상호 유대관계를 맺어 단체(나라)를 구성하는 점에서 고어와 순임금의 나라는 닮았다. 그리고 그것이 커뮤니케이션을 통해 획득되는 조직이라는 점에서도 그러하다.

    소통의 궁극적 목표는 언어 교환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사람)에 대한 이해와 그 이해를 통한 관계 형성, 그리고 신뢰 구축에 있다. 공자가 순임금의 경영이념을 무위이치로 개념화하고 또 그 이상으로서 소통을 통한 유대관계를 제시한 것은 그의 국가경영 철학이 궁극적으로 약자들과 함께 더불어 살아가는 사회를 구성하는 데 있음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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