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8월호

계약은 웬만해선 물릴 수 없다

무효·취소·해제 등은 극히 예외적

  • 입력2010-08-02 16:2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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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계약(契約)은 ‘약속을 맺다’라는 뜻이다. 매듭이 지어진 끈을 쉽게 풀 수 없듯이 한번 약속을 하면 그 약속이 불리하든 유리하든 간단하게 물릴 수 없는 게 원칙이다. 사회 구성원들이 기본적인 규칙을 지킨다는 신뢰는 그 사회를 지탱하는 근간을 이루는데, 기본 규칙 중에서도 서로 약속을 지킨다는 것은 으뜸가는 원칙일 것이다. 이를 라틴어로는 ‘Pact sund servanda(약속은 지켜져야 한다)’라고 한다.

    그런데 계약 당사자가 지킬 의무가 있는 계약은 ‘유효하게 성립한 계약’임을 전제로 한다. 만일 계약체결 과정이나 계약 내용에 중대한 하자가 있다면 그 계약은 무효이거나 취소할 수 있고, 상대방이 계약 내용을 지키지 않은 경우와 같이 계약의 이행 과정에서 문제가 발생한 경우에는 그 계약을 해제하거나 해지함으로써 계약의 구속력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이 있다.

    ▼ 계약에 관한 잘못된 상식

    그런데 사람들이 계약에 관해 흔히 알고 있는 상식 중엔 사실과 다른 것이 적지 않다. 잘못된 상식의 몇 가지 사례를 들어본다.

    계약금을 안 줬다면 부담 없이 계약을 무를 수 있다?



    계약을 할 때 계약금을 지급하는 경우가 많다. 계약의 구속력을 높이기 위해 고안된 장치가 계약금이다. 계약금을 준 사람이 약속을 어기면 계약금을 몰수당하고, 계약금을 받은 사람이 약속을 어기면 계약금의 2배를 물어줘야 하므로 계약금을 주고받았을 경우 그렇지 않은 경우보다 계약 당사자가 계약에 구속되는 효과가 훨씬 높다.

    그런데 이렇게 계약 구속력을 높이는 계약금이 계약 당사자들이 계약에서 벗어나기 쉽게 도와주기도 한다는 사실은 흥미롭다. 만일 부득이한 사정으로 계약을 무른다면 계약금을 주지 않은 경우보다 계약금을 수수한 경우가 훨씬 간편하다. 계약금을 포기하거나 2배를 물어주기만 하면 자유롭게 계약에서 벗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는 다시 말해서 계약금을 주고받지 않은 경우에는 계약금이라는 훌륭한 ‘탈출구’가 없다는 뜻이다. 계약금을 수수하지 않았다고 해서 계약의 구속력이 없는 것은 결코 아니다. 오히려 상대방을 옴쭉달싹 못하게 가둬놓고 계약 이행을 압박할 수 있게 된다. 그래서 별로 의미가 없는 액수의 계약금을 받느니 차라리 계약금을 받지 않는 것도 계약을 지킬 수 있는 방법이 될 수 있다. 다시 강조하지만, 계약금을 주고받지 않았기 때문에 부담 없이 계약을 무를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커다란 착각이다.

    계약금을 포기하면 언제라도 계약을 무를 수 있다?

    계약금 이야기가 나왔으니 한 가지만 더 살펴보자. 최근 부동산 경기가 계속 하락하면서 아파트를 분양받은 사람들이 계약금은 물론 그동안 낸 중도금을 포기하고서라도 분양을 포기할 수 있도록 해달라고 상담을 청하는 일이 늘었다. 계약금을 준 사람은 계약금을 포기하면 계약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하니 언제까지나 그렇게 할 수 있는 줄로 안다.

    그러나 중도금 중 일부라도 낸 사람은 지급한 계약금과 중도금을 포기하더라도 계약 상대인 건설회사가 동의하지 않는다면 계약을 무를 수 없다. 계약금을 수수한 경우 당사자 중 한쪽이 ‘계약을 이행하기 위한 행동에 착수하기 전’까지만 계약금을 포기하거나(매수인), 2배를 물어주고(매도인) 계약에서 벗어날 수 있다.

    여기서 ‘계약을 이행하기 위한 행동에 착수하는 것’의 의미는 포괄적인데, 계약의 종류에 따라 계약의 이행에 필요한 행동이 각기 다르기 때문에 이렇게 규정하고 있는 것이다. 예를 들어 부동산 매매(분양)계약에서는 중도금 지급 시기를 계약 이행에 착수하는 시기로 본다. 그러니까 아파트를 분양받은 사람은 중도금을 일부라도 지급했다면 계약금을 포기하더라도 계약에서 벗어날 수 없다. 따라서 꼼짝없이 남은 중도금과 잔금을 모두 지급하고 아파트를 분양받는 수밖에 없다.

    다만 건설회사가 제때 공사를 마치지 못하거나 준공검사를 받지 못하는 상황이 생겼다면 이를 이유로 계약을 해제할 수 있는 것은 다른 문제다.

    계약 당일에는 아무런 손해 없이 계약을 취소할 수 있다?

    얼마 전 중년여성 한 분이 “계약을 체결했다가 마음이 변해 곧바로 계약을 취소하려 했지만 상대방이 거부하고 있다”면서 “계약 체결 후 6시간 이내에는 마음대로 계약을 무를 수 있는 것 아니냐”며 도움을 청해왔다.

    그분은 6시간으로 알고 있었지만, 또 어떤 사람들은 ‘계약 당일’에는 마음대로 계약을 취소할 수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도대체 당일 또는 6시간이라는 기준이 어디서 나왔는지 궁금하다.

    아무튼 결론부터 말하자면 위 사례의 여성에겐 어떤 변호사도 시원한 도움을 드리지 못한다. 양쪽 당사자가 계약서에 도장을 찍는 순간 ‘게임 끝!’이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계약서에 도장을 찍기 전에 숙고에 숙고를 거듭해야 하는 것이다. 일단 도장을 찍고 난 다음엔 후회해봐야 소용이 없다.

    섣불리 계약서에 도장 찍는 것을 막으려면 즉석 계약은 가능하면 피하는 게 좋다. 도장을 찍는 순간 ‘게임’이 끝난다는 것을 너무 잘 아는 이른바 ‘선수’들은 ‘일단 도장부터 찍고 보자’며 집요하게 덤벼드는데, 이런 상황에서 너무 빨리 결정했다간 상대방에게 제물이 되기 십상이다. ‘말하기 선수’인 상대방의 현란한 말솜씨에 정신을 빼앗겨 제대로 판단하지 못한 채 결론을 내릴 가능성이 매우 높기 때문이다.

    부디 도장을 찍기 전에 계약서를 집이나 사무실로 들고 와서 한 번 더 따져보고 주위에도 물어보시길 당부드린다. 그렇게 해도 절대 늦지 않다. 무턱대고 도장을 찍었다가는 순식간에 표정과 태도를 완전히 바꾼 상대방의 얼굴, 그리고 어느새 처지가 뒤바뀌어 아쉬운 부탁을 하고 있는 자신의 처량한 모습을 보게 될 수 있다.

    ▼ 계약을 무를 수 있는 방법

    계약은 웬만해서는 무를 수 없지만, 예외적인 경우가 몇 가지 있다. 다음과 같은 경우다.

    무효와 취소

    우리는 흔히 스스로 한 말이나 행동이 잘못됐거나 불리하게 여겨질 경우 취소 혹은 무효로 하겠다는 말을 하곤 한다. 그러나 법률 세계에서 취소는 그렇게 쉽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무효는 더더욱 엄격한 요건을 갖춰야만 인정될 수 있다.

    법률행위의 무효는 법률행위가 효력요건을 갖추지 못해 처음부터 효과가 발생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 반사회적 법률행위(매매춘 계약이나 노예 계약 등, 민법 103조), 불공정행위(민법 104조), 의사무능력자의 행위가 대표적인 무효 법률행위 사례다.

    법률행위의 취소는 일단 유효하게 효력을 발생한 법률행위의 효력을 처음으로 소급해 무효가 되도록 하는 것을 말한다. 미성년자의 법률행위, 착오 또는 사기에 의한 법률행위가 취소할 수 있는 법률행위의 사례다.

    무효인 법률행위를 한 사람은 자신이 굳이 주장하지 않아도 당연히 무효가 되지만, 취소할 수 있는 법률행위는 일정기간 내에 취소권을 행사하지 않으면 취소할 수 없고 결국 유효한 법률행위가 된다는 점에서 큰 차이가 있다.

    해제와 해지

    일정한 사유로 인해 한쪽 당사자가 일방적으로 계약을 해제하면 계약은 없었던 것으로 되고 계약 당사자는 더 이상 계약에 얽매이지 않게 된다. 계약을 해제할 수 있는 일정한 사유에는 약정해제권을 갖는 경우와 법정해제권을 갖는 경우가 있다. 계약 내용에 해제할 수 있는 요건이 규정된 경우를 약정해제라고 하고, 이행지체·이행불능·불완전이행 등 민법상의 채무불이행이 있는 경우를 법정해제라고 한다. 계약이 해제되면 계약은 계약 체결시로 소급해 효력을 상실한다. 즉, 처음부터 없었던 계약이 된다.

    해지는 계약 당사자 한쪽의 일방적인 의사표시에 의해 계약의 효력이 없어지는 것으로, 해제와 유사하지만 소급효과가 없고 장래에 대한 효력만 있다는 점이 해제와 가장 큰 차이점이다.

    철회

    철회는 이미 이뤄진 계약에 별다른 법적인 문제가 없는데도 일방적인 의사표시로 계약의 효력이 발생하지 않은 것으로 할 수 있는 조치다(이에 비해 취소는 일단 효력이 발생한 계약에 대해 그 계약을 처음부터 없던 것으로 하는 효력, 즉 소급효과가 있다는 점에서 철회와 다르다). 할부거래, TV 홈쇼핑 판매, 인터넷 전자상거래에서는 계약서를 교부받은 날 또는 물건을 받은 날로부터 7일 이내에는 ‘이유를 묻지도 않고 따지지도 않고’ 계약을 철회할 수 있도록 법률이 보장하고 있다. 바로 할부거래법, 전자상거래법이 그 근거법률이다.

    계약은 웬만해선 물릴 수 없다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계약의 무효나 취소, 철회를 주장하는 방법과 같이 계약을 무를 수 있는 방법이 없지는 않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은 계약에 관한 모든 고민은 계약서에 도장을 찍기 전에 해야 한다는 점이다. 아무쪼록 도장 찍고 나서 뒤늦은 후회를 하지 말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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