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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대세를 통해 본 재일 코리안 100년

일본에 동화돼가는 재일교포 사회 희박해져가는 민족적 동일성

  • 이종각| 전 동아일보 기자 · 일본 주오대학 겸임강사 |

정대세를 통해 본 재일 코리안 10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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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남아공월드컵에 북한대표로 나선 한국 국적의 정대세는 북한 국가를 들으며 눈물을 흘렸다. 그가 흘린 눈물은 재일 코리안의 존재와 아픔을 전세계에 알리는 계기가 됐다. 1910년, 한일강제합병 당시 수백명에 불과했던 재일 조선인은 1945년 광복 당시 240만명으로 늘었고, 이들 중 상당수는 여전히 일본에 남아 차별과 편견 속에서 모진 삶을 살아냈다.
  • 한일강제합병 100년인 올해는 재일 코리안 100년이 되는 해이기도 하다. 그러나 민단과 총련으로 나뉘어 두 조국을 섬겨온 60만 재일 코리안은 이제 귀화 등으로 서서히 일본에 동화돼가고 있고, 그들의 후손인 재일 3~4세의 민족적 동일성은 점점 엷어져가고 있다.
정대세를 통해 본 재일 코리안 100년
한국, 북한, 일본 3개국이 사상 처음 월드컵에 동반 출전한 남아공대회에서 북한팀은 예선 전패로 탈락했다. 하지만 걸출한 스타가 한 명 탄생했다. 바로 재일교포 3세인 정대세(鄭大世)다. 그는 이번 남아공월드컵에 출전한 아시아 선수 중 가장 유명해진 선수 중 한 사람이 됐다. 이번 대회를 계기로 정대세는 축구선수로서의 위상을 높였을 뿐만 아니라, 한국 근·현대사의 비극을 상징하는 재일 코리안의 존재를 세계에 널리 알리는 메신저 역할도 톡톡히 했다.

대회 기간 중 북한팀의 주공격수로 뛴 정대세의 플레이와 북한 국가를 들으며 펑펑 우는 까까머리 정대세의 모습은 남북한은 물론 일본 언론에도 대대적으로 보도됐다. 일본 신문 중 최대 발행부수(1000만부)를 자랑하는 보수 우익 성향의 요미우리(讀賣)신문은 대회 전부터 시작한 정대세의 ‘一騎當千(일기당천)’이란 축구칼럼(주 1회)을 지금까지 계속 게재하고 있을 정도다.

일본에선 북한을 정식 국명인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아닌 ‘기타초센(북조선, 北朝鮮)’으로 부른다. 현재의 일본인들에게 이 ‘기타초센’이란 나라는 일본인 납치와 핵문제 등으로 가장 혐오하는 나라이자 공포의 대상이다. 그런 이유 등으로 일본 언론의 대북 비판과 악의적인 비난은 거의 일상화, 또 당연시돼 있다. 이 같은 상황에서 정대세에 대한 일본 사회의 관심과 평가는 운동선수라는 특수성을 감안하더라도 매우 이례적인 것이라 할 수 있다. 참고로 일본 언론은 ‘정대세’가 아닌 ‘정태세’로 표기, 발음한다.

정대세가 많은 사람으로부터 관심을 받는 이유는 물론 북한이 44년 만에 월드컵에 출전하는 데 크게 기여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만큼이나 관심을 끄는 것은 바로 그의 특이한 가족사다. 정대세의 가족사에는 복잡다단했던 재일 코리안 100년의 역사가 그대로 투영돼 있다.

13세 때 來日한 91세 외할머니

정대세 가족의 재일(在日)의 뿌리는 그의 외할머니인 김홍선(金弘善·91)씨로부터 시작된다. 김홍선은 13세이던 1932년, 고향인 경북 안동에서 동생 둘을 데리고 일본으로 건너갔고 아이치(愛知)현의 방적공장에서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일해 생계를 이었다. 그 후 동포와 결혼해 아이 둘을 낳았다. 일본이 중일전쟁(1937)을 일으키는 등 전쟁이 확대되면서 일본 거주 조선인들의 생활은 더욱 열악해졌고, 김홍선의 식구들 또한 입에 풀칠하기도 힘든 시간을 견뎌야 했다.

태평양전쟁 말기, 미 공군의 일본 본토 공습이 심해지던 어느 날, 김홍선의 남편은 미군이 투하한 폭탄의 영향으로 고열에 시달렸는데, 얼마 후 일본헌병대 지프가 와서 그를 데려갔다. 그리고 며칠 후 김홍선에게는 남편의 유골이 담긴 흰 상자가 전해졌다. 그녀는 남편의 죽음에 대해 아무런 설명도 듣지 못했다. 얼마 후 김홍선은 조선인과 재혼해 히로시마(廣島)현의 오다케(大竹)에 있는 조선인 밀집부락으로 이주해 생계를 꾸려나갔다.

1945년 8월15일 일본이 패전한 후 오다케의 조선인들은 자녀들에게 일본어 대신 조선어를 가르치기 위해 국어 교습소를 열었다. 이 무렵 김홍선의 두 번째 남편도 병으로 사망했다. 이 남편과의 사이에 3명의 자녀가 태어나 그녀는 5남매를 두게 됐다.

1946년 4월 오다케조선초등학원이 개설됐지만 1948년 연합국 군사령부의 조선학교 폐쇄령에 의해 학교는 문을 닫게 됐다.

김홍선은 동포의 손으로 중등학교를 만들자는 운동의 발기인이 돼 젖먹이를 업은 채 모래를 나르고 삽질을 하며 학교 건설 작업에 열성적으로 참여했다. 전후의 극심한 혼란 속에 당시 재일 조선인들은 일본 정부로부터 아무런 지원이나 보호도 받지 못한 채 일본 사회의 멸시와 차별 속에 생계를 해결해야 하는 가혹한 상황에 처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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