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9월호

도심 속 시니어타운

호텔형 주거공간, 고급 의료서비스, 문화적 혜택 … 경제적 여유 없으면 입주 불가능

  • 김지은│신동아 객원기자 likepoolggot@empal.com │

    입력2010-08-31 13:5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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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나이 들면 물 좋고 공기 맑은 시골에서 살고 싶다던 노인들의 꿈은 옛말이 되어버린 걸까. 최근 도심에서 황혼을 누리려는 노년층이 늘고 있다.
    • 최고급 의료시설과 호텔형 주거 공간, 다양한 여가 프로그램까지 갖춘 도심 속 시니어타운은 편리한 교통 환경과 도심 접근성을 무기로 신개념 실버 주거 공간에 관심을 둔 노인들을 유혹한다.
    도심 속 시니어타운

    서울 광진구 건대병원 건너편에 위치한 도심형 실버타운 ‘더클래식500’

    “시골이요? 어휴, 나는 시골에서 못 살아요. 도시에서 나고 자랐는데 어떻게 살아….”

    서울 서대문구 세란병원 옆 시니어타운 ‘골든팰리스’에서 만난 이영(81)씨는 일흔, 아니 예순이라 해도 믿을 만큼 젊고 건강해 보였다. 꼿꼿한 허리와 정정한 걸음걸이 때문만은 아니다. 또렷한 말투와 현대적인 어휘 구사, 세련된 옷차림까지 어느 모로 보나 ‘할머니’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와는 달랐다.

    가족과 함께 오랫동안 외국에서 생활했다는 그는 모시고 살겠다는 자식들의 만류를 뿌리치고 홀로 한국에 들어왔다고 했다. 며느리 시집살이 시키며 불편하게 살기 싫은 마음, 노랑머리 이방인보다는 또래의 한국인 친구들과 즐거이 지내고픈 마음 때문이었다. 처음에는 “절대 그럴 수 없다”며 반대하던 자식들도 시니어타운을 직접 방문한 뒤 “우리와 계시는 것보다 오히려 편안히 보내실 수 있을 것 같다”며 이씨의 결정에 동의했다.

    서울 광진구 건대병원 건너편 ‘더클래식500’에 사는 조영숙(63)씨 역시 나이보다 훨씬 젊어 보였다. 하얀 야구모자를 쓰고 티셔츠를 입은 그는 부모를 만나러 온 딸처럼 보일 정도였다. 그는 현재 문화센터 강사로 일하는 커리어 우먼이다.

    이씨나 조씨뿐만이 아니다. 취재를 하며 만난 서울 곳곳의 시니어타운 입주자들은 대부분 외모나 스타일로는 나이를 가늠하기 어려웠다. 젊고 싱싱한 모습으로 핑크빛 황혼을 살아가는 사람들, 그들에게 지금의 삶은 결코 얼마 남지 않은 ‘여생’이 아닌 것으로 보였다.



    실버타운 문화의 확산

    도심 속 시니어타운

    ‘시니어스타워’ 동호회룸에서 서예 연습 중인 입주자.

    노년 인구가 증가하면서 노인을 위한 전문 서비스를 제공하는 종합 유료복지주택을 뜻하는 ‘실버타운’이 각광받고 있다. 미국에서는 1960년대부터 남부지방을 중심으로 실버타운이 형성되기 시작해, 노인을 대상으로 하는 유료 거주시설과 휴양시설, 스포츠시설을 갖추고 문화 서비스, 의료 서비스 등을 제공하는 주거 형태가 널리 확산됐다. 유럽과 일본 등에서도 실버타운이 하나의 주거 형태로 자리 잡은 지 오래. 우리나라에서도 경기도 분당이나 영통, 화성 등지에 대규모 실버타운이 건설된 것을 시작으로 곳곳에 이런 형태의 주거단지가 건설 중이다.

    과거의 노인요양시설은 대부분 양로원처럼 거동이 불편하거나 건강이 좋지 않은 노인들이 모여 있는 시설이었다. 부모를 직접 돌볼 수 없는 자식들이 무거운 마음으로 부모를 시설에 입주시켰다. 실버타운은 노인들이 자발적으로 주거지를 선택하고, 적지 않은 비용을 내고 입주하는 곳이라는 점에서 이런 요양시설과 근본적으로 다르다. 최초 입주할 때 주택구입비나 임차료 못지않은 비용을 내고, 이후에도 매달 최소 100만~200만원의 유지관리비를 지급해야 하기 때문에 경제적으로 충분한 뒷받침이 되지 않으면 입주 자체가 불가능하다. 집에서 부모를 모실 형편이 못돼 어쩔 수 없이 ‘불효’를 저지르는 자식 세대의 고충과는 거리가 먼 곳인 셈이다.

    도심 속 시니어타운

    시니어타운 입주자들이 친분을 쌓을 수 있는 공간인 ‘골드팰리스’의 북카페.

    또 대부분의 실버타운에서는 독립적인 생활이 불가능한 노인은 아예 입주를 허락하지 않는다. 늙고 병든 노인을 위한 요양시설과는 기본 개념 자체가 다른 것이다. 실버타운은 개별 시설마다 조금씩 기준이 다르긴 하지만 대부분 ‘만 60세 이상의 거동이 가능한 사람’으로 입주 자격을 제한하고 있다. 실버타운 입주자들은 대부분 경제적인 여유가 있으면서, 자식들과 불편하게 부대끼며 사느니 마음 편하게 홀로, 혹은 부부끼리 살고 싶다는 바람을 가진 이들이다.

    평화냐 활력이냐

    불과 5~6년 전만 해도 이들을 위한 실버타운은 전원생활을 꿈꾸는 노년층의 욕구에 맞게 도시 외곽, 혹은 한적한 시골 마을에 조성됐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입주자들 사이에서 불만의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도시 밖에 조성된 실버타운은 전원생활의 평화로움을 만끽할 수 있게 하는 장점이 있는 반면, 노년층이 심리적으로 가장 고통스럽게 느끼는 소외와 고독의 감정을 더해주는 단점도 있다는 지적이었다. 복잡하고 시끄러운 환경에서 벗어나 자연을 벗할 것인가, 힘들어도 도시에 남아 활기찬 노년을 꾸려갈 것인가. 이는 점차 늘어나는 ‘경제적 여유와 신체적 건강함을 갖춘 노인’들에게 새로운 딜레마가 됐다.

    최근 문을 연 도심 속 ‘시니어타운’은 후자 쪽에 무게 중심을 두는 노인들을 위한 주거 시설이다. ‘시니어타운’이라는 말 자체가 도심 한가운데 조성된 실버타운을 뜻하는 신조어다.

    나이가 들면 복잡하고 계산적인 것이 싫다고들 한다. 그런데도 몸과 마음의 평온을 가져다주는 전원생활 대신 복잡하고 공기 탁한 도심 한복판을 거주지로 선택한 이들은 어떤 사람들일까. 앞서 언급한 이영씨처럼 젊은 시절부터 도시에서 살아왔기 때문에 전원생활이 오히려 낯설고 힘겨운 사람들이 한 그룹일 수 있다. 아는 사람 하나 없는 시골에서 무슨 재미로 살아가느냐는 것이 이들의 주장이다. 도시에서 누릴 수 있는 다양하고 편리한 삶의 혜택을 포기하면서까지 ‘고독’을 즐기고 싶지 않다는 이도 많다.

    도시에 사는 자식들이 부담없이 자주 찾아올 수 있다는 점도 실버타운에 비해 시니어타운이 가진 장점이다. ‘골든팰리스’는 심지어 지하철 3호선 독립문역 바로 앞에 위치해 있고, ‘더클래식500’은 2호선과 7호선이 만나는 건대입구역 바로 앞에 있어 대중교통 이용도 편리하다. 또 하나의 유명 시니어타운 ‘서울시니어스가양타워’는 지하철 9호선 증미역과 가깝다.

    도심 속 시니어타운의 또 다른 특징은 종합병원과 연계해 고급 의료 서비스를 제공하거나 그에 준하는 의료 시설을 갖추고 있다는 점. 24시간 비상 대기 시스템이 마련돼 노인 입주자에게 응급 의료 상황이 발생할 경우 신속하게 대처할 수 있다.

    초특급 의료 서비스

    ‘골든팰리스’ 입주자 김정기(76)씨는 시니어타운에 들어온 뒤부터 남 신세 지지 않고 건강관리를 할 수 있는 것에 크게 만족한다고 말했다. 과거엔 몸살감기라도 걸리면 식구들과 함께 병원에 가야 해 마음이 불편했는데, 지금은 시설 내에서 모든 의료 서비스를 제공해주니 번거로울 게 없다는 설명이다. ‘골든팰리스’의 모기업은 종합병원인 세란병원. 입주자들은 세란병원 전문의들의 진료를 받는다. 인근의 서울대병원과 세브란스병원 등과도 협력관계를 맺어 복합적인 의료서비스도 제공된다.

    도심 속 시니어타운

    최근 완공된 시니어타운은 쾌적한 실내 공간과 다양한 여가 프로그램을 갖추고 노년의 입주자들을 유혹한다. 서울 ‘더클래식500’의 모습.

    건국대학교가 운영하는 ‘더클래식500’ 입주자들은 건대병원의 의료서비스를 제공받는다. 이곳에는 시니어타운 입주자뿐 아니라 일반 멤버십 회원들까지 이용할 수 있는 대규모 의료시설과 운동시설, 재활치료시설, 스파 등이 마련돼 있어 건강관리에 관심 있는 노인층에게 인기가 높다. 서울시내 5성급 호텔에서 회원들에게 제공하는 메디컬 서비스와 피트니스 서비스 못지않은 서비스를 제공하며, 운동처방실에서는 맞춤식 운동처방을 통한 재활프로그램을 운영한다.

    서울 강서구 가양동과 경기도 분당 등 4곳에서 시니어타운을 운영 중인 ‘서울시니어스타워’는 송도병원과 연계한 의료 서비스를 마련했다. 이곳은 거동이 자유로운 입주자와 그렇지 않은 고령의 입주자를 A동과 B동에 나눠서 관리하면서, 각 동의 입주자 수준에 맞는 의료서비스를 제공하는 게 특징. B동 입주자는 기본적인 의료서비스 외에도 장기 간병에 필요한 다양한 서비스를 제공받으며, 개인 간병인을 입주시키는 것도 가능하다. A동 입주자도 건강이 악화되면 B동으로 옮겨 집중 치료를 받을 수 있다.

    경기도 분당에 있는 시니어타운 ‘더헤리티지’는 CCRC(Continuing Care Retirement Community·지속적 은퇴 관리 커뮤니티)를 지향한다. 노인질환과 뇌손상 전문 병원인 보바스기념병원, 주거공간인 ‘헤리티지’, 노인요양원인 ‘헤리티지 너싱홈’과 단지 내 커뮤니티 시설이 결합돼 입주자들이 나이와 건강상태별로 시설을 이용하도록 돼 있다.

    다이내믹한 일상

    시니어타운은 대부분 기존의 양로원이나 요양시설과 달리 철저히 개인 프라이버시가 보장되는 아파트형으로 설계돼 있다. 이 때문에 노인 입주자가 집안에서 불의의 사고를 당할 때 즉시 파악하기 어려운 단점이 있다. 시니어타운들은 이 문제를 보완하기 위해 실내 곳곳에 열 감지 시스템을 설치하고 입주자가 24시간 동안 움직이지 않을 경우 즉시 방문해 대처하도록 하는 등의 관리 체계를 갖추고 있다. 또 입주자에게 제공하는 스마트키에 응급 버튼을 부착해 긴급 상황 발생시 버튼을 누르면 바로 입주자의 위치가 파악되고 의료진이 출동할 수 있도록 준비하고 있다.

    시니어타운 입주자들이 의료서비스 못지않게 만족감을 표시하는 것은 도심 속 편의시설을 편안하게 이용할 수 있다는 점. ‘더클래식500’ 인근에는 롯데백화점과 이마트, 극장, 광진문화예술회관 등 다양한 편의공간이 있어 입주자들끼리, 혹은 가족이 방문했을 때 함께 즐길 거리가 충분하다. 입주자에게 건국대 도서관을 이용할 수 있는 자격을 부여한 것도 특징적이다. ‘더클래식500’은 건물 내에 도서관과 북카페를 마련해 다양한 분야의 서적을 비치하는 등 언제 어디서나 책을 접할 수 있는 환경도 조성했다. 이 공간은 입주자는 물론 입주자를 방문한 가족과 친지들도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다.

    ‘더클래식500’ 관계자는 “입주자 중 우리나라에서 손꼽히는 대형 서점 전직 CEO가 있는데, 그분이 수시로 신간을 제공한다. 다른 입주자들은 더없이 큰 혜택을 누리는 셈”이라고 소개했다. 그에 따르면 ‘더클래식500’ 입주자 가운데 전직 대학 총장, 전직 CEO 등 책을 즐겨 읽는 직업군 출신이 많다. 그들이 처음 입주할 때는 평소 읽던 책을 모두 들고 왔다가, 원하는 책은 얼마든지 읽을 수 있는 환경에 반해 자신들의 소장 도서를 다른 곳에 기증하는 경우도 많다고 한다.

    ‘골든팰리스’ 역시 강남까지 30분이면 닿는 교통 편의성과 인근 광화문의 다양한 문화시설을 이용할 수 있는 점을 강점으로 내세운다. 바로 앞에 독립문공원, 뒤에는 인왕산이 있어 도심에서는 보기 드물게 쾌적한 자연환경을 누릴 수 있는 것도 장점으로 꼽힌다.

    ‘골든팰리스’의 북카페에서 만난 한 무리의 입주자들은 “우리는 모두 한 교회에 다니는 친구들”이라고 서로를 소개했다. 그들은 같은 집에 살면서 종교 문화 생활까지 공유하는 돈독한 식구처럼 보였다. 평생 도시인으로 살아온 노년층에게 도심 속에서 이웃과 벗하며 즐기는 다이내믹한 삶을 이어갈 수 있게 해주는 점이 시니어타운의 인기 요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시니어타운 시행사들은 입주자 대부분이 은퇴 전 사회적으로 명망 있는 직업 출신이라고 말한다. 공무원과 교수, CEO, 예술인이 많다. 거주자들이 함께 참여하는 프로그램이 다양하게 운영되는 만큼 기존 입주자들의 추천을 받고 알음알음 비슷한 직업군의 사람들이 모이게 된 것. 이럴 경우 시니어타운은 새로운 커뮤니티가 된다.

    인생 2막 커뮤니티

    ‘서울시니어스타워’에 사는 김종수(74)씨는 음대 교수 출신이다. 같은 시니어타운에 입주한 동료 예술가들과 교분을 나누며 지금도 예술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고 밝힌 그가 현재 가장 몰두하고 있는 작업은 9월17일 송도아트홀 무대에서 공연될 서울시니어스타워 음악회 준비. 서울시니어스타워에는 40여 명의 입주민으로 구성된 여성 합창단과 남성 입주자 10여 명이 참여하는 남성 중창단, 별도의 혼성합창단이 운영되고 있다. 그만큼 음악 커뮤니티 활동이 활발하다. 올해로 4회째를 맞는 서울시니어스타워 음악회에는 입주자뿐 아니라 이 음악회를 노인들을 위한 새로운 축제의 장으로 만들겠다는 취지에 공감하는 저명한 음악인들까지 참여해 나날이 규모가 커지고 있다고 한다.

    서울시니어스타워 동호회룸에서는 입주자가 교사를 맡고, 다른 입주자가 배우는 다양한 형태의 프로그램도 진행된다. 기자가 찾아갔을 때는 마침 일본어 강의가 한창이었다. 일본어 교사 김덕자(81)씨가 새로 나온 단어를 하나하나 또랑또랑한 어조로 설명하자 학생들이 진지한 자세로 받아 적었다. 과목에 따라 외부 교사를 초청하기도 하고, 어느 정도 성과가 이뤄지면 발표회나 전시회를 열기도 한다. 여기서 생긴 수익금은 커뮤니티의 발전을 위해 사용하거나 불우이웃에게 기부한다.

    ‘더클래식500’ 입주자들에게는 건국대가 운영하는 평생교육원 ‘미래지식교육원’의 프로그램 등록시 50% 할인 혜택이 제공된다. 이 때문에 미래지식교육원 강의 수강생을 중심으로 다양한 커뮤니티가 만들어져 있다고 한다. 최근에는 이곳에서 도자기 공예를 배운 입주자 다섯 명이 직접 만든 공예품을 건물 로비에 전시한 뒤, 판매 수익금을 건국대에 장학금으로 기부하기도 했다. 시니어타운에서 다양한 커뮤니티 활동을 하는 이들이 입을 모아 말하는 것은, 배우고 즐기면서 그를 통해 얻은 수익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도움까지 줄 수 있는 선순환의 행복감이다.

    물론 모든 노년층이 이들과 같은 고품격 서비스와 특별한 혜택을 누리며 인생을 즐길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시니어타운이 계층 간의 위화감을 조장한다는 곱지 않은 시선이 생겨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하지만 정당하게 번 돈과 인생 전반에 걸쳐 쌓은 자신의 커리어를 이용해 삶의 마지막 순간까지 행복하고 활동적으로 살겠다는 노년층의 인생 설계를 비난할 수는 없다. 날이 갈수록 증가하는 노인 인구를 감안한다면 노년의 삶을 좀 더 밝고 활동적으로 살 수 있게 이끌어주는 시니어타운의 등장은 반가운 일임에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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