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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석주의 크로스(CROSS) 인문학 ④

이수현과 체 게바라를 추억하며 진정한 이타주의 세상을 기다린다

  • 장석주| 시인 kafkajs@hanmail.net

이수현과 체 게바라를 추억하며 진정한 이타주의 세상을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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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인간을 포함한 모든 생물은 자기 생존의 이익에 부합하는 행동 원칙을 따른다. 생명을 보존하고 자기 닮은 후손들을 퍼뜨리는 데 유리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꼭 그런 것만은 아니다. 타인을 위해 자기를 희생한, 청년 이수현이나 혁명가 체 게바라 같은 사람도 있다. 이들은 자기를 죽여 남을 고통과 죽음에서 해방시켰다. 인간의 본성으로 알려진 이기주의와는 정반대의 길을 갔다. 전우의 목숨을 살리려고 자신을 희생하는 것도 이타적 행동의 전형적인 사례라 할 수 있다. 미래의 세계는 이타주의자들이 지배할 것이다. 더 많은 이타주의자와 더불어 사는 삶이 기다려진다.
이수현과 체 게바라를 추억하며 진정한 이타주의 세상을 기다린다
늑대는 변해서 개가 되고, 들소는 변해서 소가 되었다. 거세하거나 길들이기 같은 인위적 방법으로 야생동물의 본성을 바꿔 가축으로 만들 수 있었다. 이렇듯 자연은 가공과 변형이 가능하다. 오스트랄로피테쿠스에서 호모 하빌리스, 그 다음 호모 에렉투스, 그 다음 호모 사피엔스를 거쳐 오늘의 인류에 이른 뒤, 사람은 항상 사람이다. 사람 하나하나는 우주에 버금갈 만한 복잡함을 머금은 존재들이다. 사람은 하나의 유적(類的) 동일성에 묶어둘 수 없는 까닭에 하나의 본성론에 귀속되지 않는다. 뇌라는 ‘수억 광년의 우주를 이해할 수 있는 1.5㎏짜리 작은 덩어리’(매리언 다이아몬드)를 가진 자연의 종(種)이면서 항상적으로 그것을 넘어서는 게 사람이다. 사람은 사람 일반이 아니라 고유한 성, 나이, 문화, 인격을 가진 개별자로 엄연하고, 제 인격의 현실태(現實態)이며 미래 가능태(可能態)로 살아간다. 우리가 산다는 것은 주어진 환경에서 삶을 향유한다는 뜻이다. 철학자 레비나스는 이 향유에 관해 이렇게 말한다.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이 땅으로 나는 충분하다. 나를 떠받쳐주는 땅은, 무엇으로 나를 떠받쳐주는가를 알려고 하지 않아도 나를 떠받쳐주고 있다. 내가 살고 있는 세계의 한 모퉁이, 일상적 처신의 세계, 이 도시, 이 지역 또는 이 거리, 내가 살고 있는 이 지평, 이들이 보여주는 외모에 나는 만족한다. 이들에게 나는 폭넓은 체계 속에 설 땅을 제공하지 않는다. 나에게 설 땅을 주는 것은 오히려 이들이다. 이들을 생각하지 않은 채 나는 이들을 영접한다. 나는 이 사물들의 세계를 순수한 요소처럼, 떠받쳐주는 이 없는, 실체 없는 성질처럼 즐기고 향유한다.” (레비나스, ‘전체성과 무한’, 여기서는 강영안의 ‘타인의 얼굴’에서 재인용)

이 향유의 개별성을 통해 우리 각자는 사람 일반에서 쪼개져서 ‘나’로서 살아간다. ‘나’와 다른 이질성을 구현하는 타자들의 세계를 자신의 세계로 변환시킨다. 그래서 레비나스는 “나에게 터전을 주고 나를 떠받쳐주던 세계의 이질성은, 욕구를 충족시키는 가운데, 자신의 타자성을 상실한다.……다른 것에 속했던 힘은, 포만(飽滿) 가운데……나의 힘, 내 자신이 된다.”(레비나스, 여기서는 강영안의 앞의 책에서 재인용)라고 말한다.

이수현의 죽음

이수현과 체 게바라를 추억하며 진정한 이타주의 세상을 기다린다
사람은 추악하면서도 동시에 숭고한 존재다. 사람 안에 짐승과 신이 함께 있는 까닭에서다. 2001년 1월26일 저녁 도쿄의 한 전철역에서 선로에 떨어진 취객을 구하려고 뛰어든 청년이 전동차에 치여 죽는다. 취객은 그 청년과 아무 관계가 없는 사람이었다. 그 청년은 다른 사람을 구하기 위해 제 생명을 희생하는 행동을 주저하지 않았다. 우리가 똑같은 상황에 있을 때 그와 같이 행동하지 않는 것은 그것이 자기 자신을 향한 살인이고 제 생명과 자유를 빼앗는 폭력이기 때문이다. 자기를 향한 이 살인이자 폭력 행위는 일본 주류사회에 큰 감동과 충격을 불러일으킨다. 그 청년을 추모하면서 눈물을 흘리는 일본인이 많았다. 일본에서 그의 아름다운 행위를 기려 여섯 해 뒤에는 영화가 만들어지기도 했다. 살아 있다는 것만도 충분히 기적이다. 제 생명을 버려 다른 생명을 살리는 것은 그보다 더한 기적이다. 이수현은 그런 기적을 실현한 인간이다. 많은 사람이 그 기적에 놀라고 감동한 것이다. 죽음으로 향하는 유한한 제 삶을 타자를 위해 남김없이 씀으로 그는 타자를 영접한다. 죽음이라는 무의미를 향한 존재를 의미의 존재로, 윤리적 주체로 거듭나게 한 청년 이수현(1974~2001)은 어떻게 그런 행동을 할 수 있었을까? 이것을 심리학에서 말하는 ‘감정이입 이타주의 가설’로 설명할 수 있다. 타인이 고통스러워하는 것을 볼 때 우리 내면의 마음도 반응하고 그 반응은 원형적인 사회적 행동으로 나타난다.

“우리는 자동적으로 그리고 무의식적으로 우리 마음 안의 고통을 흉내 내면서 우리 자신의 기분이 나빠진다는 것이다. 추상적으로가 아니라 문자 그대로 기분 나쁘게. 우리는 타인의 부정적인 느낌에 감염되며 이 상태를 경감시키기 위한 행동을 할 동기를 부여받는다.”(마이클 S. 가자니가, ‘윤리적 뇌’)

타자가 사고를 당해 고통스러워할 때 우리도 타인의 감정 상태를 공유하며 그에 따라 반응한다. 네가 아프면 나도 아픈 것이다. 여러 심리학적 실험이 이 가설을 증명한다.

“타인의 고통에 반응하는 경향은 타고나는 것 같다. 신생아는 태어난 첫날 다른 신생아의 통증에 반응하여 운다는 것이 증명되었다.”(마이클 S. 가자니가, 앞의 책)

청년 이수현의 아름다운 행동은 분명 우리가 공유하는 계통발생론적 유산, 즉 타인의 고통에 자동적으로 반응하고 살인과 근친상간을 금하고 약한 자를 돌보고 거짓말을 하거나 약속을 어겨서는 안 된다는 윤리적 본성보다 더 높은 단계에서 이루어지는 윤리적 섬광의 발현이다. 제 내면의 양심에서 솟구친 즉각적이고 절대적인 윤리적 명령이 그로 하여금 그와 같은 이타적 행위로 이끌었을 것이다. 그것은 그가 맑고 순수한 사람이고, 남보다 훨씬 더 높은 도덕성의 실천자라는 증거다. 물론 모든 이타적 행동에는 이기적 동기가 숨어 있다고 말하는 생물학자도 있지만, 청년 이수현의 이타적 행동은 인간의 본성에 대한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를 던져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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