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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동아·서울대 HK문명연구사업단 공동기획 - 문명의 교차로에서 ⑤

이슬람-십자군-기독교 전쟁할 것인가, 교류할 것인가

  • 박용진 서울대 HK교수·서양중세사 parktoan@snu.ac.kr

이슬람-십자군-기독교 전쟁할 것인가, 교류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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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군의 원인

이슬람-십자군-기독교 전쟁할 것인가, 교류할 것인가
사실 이러한 요청은 이례적인 것으로 보일 수 있다. 왜냐면 오래전부터 로마 교황과 비잔티움 황제가 소원했기 때문이다. 과거 로마의 황제는 제사장이기도 했으므로 황제는 행정조직의 우두머리임과 동시에 종교조직의 우두머리였다. 종교조직만을 놓고 본다면 황제 바로 아래 5명의 총대주교(總大主敎·Patriarch)가 있었으며, 후일 교황이라고 불리는 로마 총대주교 역시 그중 한 명이었다. 이러한 체계는 서로마 제국이 멸망한 다음에도 한동안 지속됐는데, 로마 총대주교는 다른 총대주교들과 마찬가지로 비잔티움 황제의 보호를 받았다. 따라서 서로마 교회(로마 가톨릭 교회)와 동로마 교회(비잔티움 교회)는 원래 단일한 교회 조직에 속했으며, 모두 비잔티움 황제의 지휘 아래 있었다. 그런데 726년 성상(聖像)파괴령을 기점으로 두 교회가 분열하기 시작했다. 비잔티움 황제 레온 3세(Leon III)는 모든 성상을 우상(偶像)으로 간주해 금지했으나, 게르만족에게 지속적으로 포교해야 하는 로마 교황은 성상 유지를 주장했다. 결국 로마 가톨릭 교회와 비잔티움 교회는 서로 다른 길을 가기 시작했고, 1054년 로마 교황의 특사가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를 파문함으로써 두 교회는 완전히 결별했다. 오늘날 서유럽의 로마 가톨릭과 동유럽의 정교회는 이때부터 같은 기독교이면서도 별개의 조직을 갖게 된 것이다.

이처럼 분열돼 있었으나 로마 교황도 비잔티움 황제도 기독교라는 이름 아래 화해해야 할 필요를 느끼고 있는 가운데 비잔티움 황제가 원조를 요청한 것인데, 황제가 예상했던 원조는 대규모 십자군 파병이 아니라 제국 군대를 보조할 소규모의 용병 기사들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교황의 생각은 달랐다. 교황은 비잔티움 제국에 대한 원조보다는 성지 회복에 방점을 찍었다.

성지 순례는 참회의 수단이었다. 중세에는 예전에 성인들이 머문 곳을 방문하면 그 영향력의 일부가 순례자의 것이 된다거나, 성유골(聖遺骨)을 찾아가면 질병 치유와 같은 기적이 일어나기도 한다는 믿음이 널리 퍼져 있었다. 또한 중죄를 저지른 자에게 교회가 순례를 명령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처럼 순례가 널리 퍼져 있던 중세 시대의 3대 순례지는 에스파냐 북부의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Santiago de Compostella), 로마 그리고 예루살렘이었다. 순례지 중 하나인 예루살렘의 회복이야말로 기독교인으로서 반드시 해야 할 의무였던 것이다.

그렇지만 교황이 원한다고 해서 기사들이 순순히 십자군에 나설 리는 만무하다. 기사들은 기사들 나름대로 참전 이유가 있었다. 서유럽은 게르만족의 침입, 서로마 제국의 멸망, 그리고 바이킹의 침입 등으로 혼란에 빠져 있다가 10세기경부터 안정되기 시작했다. 봉건제가 성립돼 기사들 사이에서는 위계질서가 생겼으나 이들의 폭력성은 사라지지 않았다. 교회로서는 이들이 호전성을 분출할 출구를 마련해줄 필요가 있었다. 또한 이슬람을 정복함으로써 자신들의 토지를 획득할 수 있다는 점이 기사들에게 매력으로 작용했다. 더욱이 성지 회복과 성지 순례라는 명분까지 더해졌으므로 십자군이야말로 기사들에게 매력적인 기회였던 것이다.



그러나 좀 더 넓은 시각에서 바라본다면 앞서 언급했듯 십자군은 서유럽 사회의 팽창이 원인이었다고 할 수 있다. 서유럽이 안정되면서 인구가 증가하고 새로운 토지 개간이 이뤄졌지만, 토지는 여전히 부족했고, 장자상속제가 시행돼 둘째 아들부터는 영지를 상속받을 기회가 없었다. 즉 인구 압력이 높아지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상황은 서유럽 밖으로의 인구 배출을 유도했다. 따라서 십자군의 발생 원인을 성지 탈환이나 호전성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다. 유럽의 팽창이라는 시각으로 십자군을 들여다봐야 온전하게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십자군의 경과

십자군은 11세기 말부터 거의 200년 동안 지속됐는데, 대규모 군사원정이 여덟 차례 시도됐고 소규모 원정은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으며, 14세기에도 십자군 원정에 대한 열망은 이어졌다. 제1차 십자군은 1096년 시작됐는데, 1099년 예루살렘을 정복하는 데 성공했으며, 팔레스타인 지역에 4개의 십자군 영지(領地)를 건설했다. 기사들은 성당기사단, 병원기사단 같은 조직을 구축해 예루살렘을 지키고 순례자를 보호했다. 이들 기사단은 예루살렘이 이슬람에 함락된 뒤 유럽으로 돌아와서도 사회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특히 이들이 예수가 최후의 만찬 때 사용했다고 하는 성배를 가져왔다거나, 예수의 장례를 지낼 때 몸을 감쌌다고 전해지는 성의(聖衣)를 가져왔다는 이야기는 유럽인의 상상력을 자극했다.

이후 4개 십자군 국가 중 하나이던 에데사 백작령이 이슬람 수중에 들어가자 제2차 십자군이 결성됐다. 그리고 1187년 이슬람의 지배자 살라딘(Saladin)이 하틴(Hattin)의 전투에서 승리하고 예루살렘과 그 일대를 정복하자 제3차 십자군이 구축됐다. 그러나 두 차례 모두 성지 회복에 성공하지는 못했다. 특히 제3차 십자군은 프랑스 국왕 필리프 2세와 영국 국왕 리처드 1세가 힘을 모았으나, 두 군대 사이의 갈등으로 인해 항구도시 아크레를 획득하는 데 그쳤다. 이즈음 십자군은 점차 변질돼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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