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6월호

“너희들은 물고기냐, 인간이냐?”

신세계를 ‘발견한’ 유럽이 물었다

  • 김윤경 대구대 전임강사·영어영문학 ykyungkim@gmail.com

    입력2011-05-23 16:2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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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너희들은 물고기냐, 인간이냐?”

    16~17세기 유럽인이 그린 타자의 모습. 좌측 그림은 아메리카를 상징하는 여성으로, 전신에 나뭇잎모양 문신이 있다. 우측은 반인반어 괴물의 상상도다.

    몇년 전 필자는 인터넷에서 여러 사람의 사진을 보고 국적을 맞혀보는 게임을 한 적이 있다. 외국 생활을 좀 했던지라 자신만만하게 게임을 시작했으나 점수는 생각보다 높지 않았다. 사실 우리가 거리 한복판에서 어떤 여성을 보고 ‘중국 사람이네’라고 생각할 때 그 기준은 절대적이지도 정확하지도 않다. 일단 그 여성이 한국인이 아니라고 분류할 때부터 한국 여성의 외양, 제스처 등에 대한 본인의 경험과 생각이 개입된다. 그뿐만 아니라 외국인 중에서 중국인이라고 추측할 때에도 그에 관계된 생각이나 편견이 다시 발동하게 된다.

    낯선 이와 마주쳤을 때

    이 글에서 이야기하려는 것은 이처럼 낯선 얼굴을 ‘낯설다’라고 인식하는 과정과 그 낯섦을 그리는 방식이다. 규모는 다양하지만 전쟁과 여행, 교역을 통해 인간은 다른 세계의 사람을 계속 만나왔고, 이들을 인종적·민족적 ‘타자’로 인식하고 재현해온 역사도 짧지 않다. 일반적으로 타자를 자신과 다른 존재로 인식하고 이들을 형상화하는 과정에는 두 가지가 수반된다. 즉 타자를 그렇게 인식하는 자신은 어떤 존재인지에 대한 생각과 실제로 타자를 그려놓았을 때 그 모습이 자신에게 타자처럼 보이려면 어떻게 해야 할지라는 고민이다.

    17세기 영국 작가들도 이러한 고민을 가지고 있었다. ‘글로벌 르네상스’라고도 할 수 있을 16~17세기에 이르러 유럽은 이전에는 불가능했던 큰 범위로 자기 밖의 세계와 만났다. 항해술을 비롯한 기술의 발전으로 유럽인은 아메리카 대륙에 닿을 수 있었고, 이 지역을 대거 식민화하며 다량의 자원을 수입했다. 물론 오스만튀르크 같은 지중해 권역의 나라나 인도와의 교류도 확대됐다. 신세계의 발견과 식민화, 팽창하는 교역과 함께 다량의 새로운 문물과 지식도 유입됐다. 서구는 이런 ‘수입품’을 자신의 사회와 지식체계 속에 껄끄럽지 않은 형태로 안착시키고자 이런 것들과 지적·문화적 차원에서 협상하려 애썼다.

    다른 세계와의 만남이 확대된 만큼 신세계나 인종적 타자에 대해 보고하는 문헌이나 문화 상품도 대폭 늘었다. 또 몽테뉴의 ‘식인에 대해서’(1580)처럼 신세계 사람들을 어떤 존재로 봐야 할지를 논의한 글도 있었다. 그런데 문화 상품의 경우, 여행기이든 연극이든 그 작품을 만든 사람들이 주장하는 바와는 달리 ‘눈에 보이는 그대로’ 그리는 경우는 많지 않았다. 아니, 사실 ‘객관적’인 보고와 재현은 거의 불가능했다. 문화 상품은 그것을 수용할 사람들의 기대 수준과 이해, 감성의 틀을 무시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타자에 대한 문화적 재현은 타자를 보여주기도 하지만, 그와 같은 정도로 이들을 재현하는 작가 자신과 재현된 타자를 해석하는 사회를 보여준다. 아래에서 논의할 두 작품, 셰익스피어의 ‘태풍’과 아프라 벤(1640~89)의 ‘오루노코’는 신세계, 신세계인과의 만남이라는 재료로 만든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 17세기 영국에선 지중해 연안의 나라를 포함해 외국을 배경으로 하거나 외지인이 주요 인물로 나오는 문학작품이 적지 않았으나, 이 두 작품은 타자의 모습을 더욱 섬세하게 그렸다고 평가돼왔다. 그러면 타자의 모습과 이들과 유럽인 사이의 만남이 어떻게 재현되었는지 주목하면서‘태풍’과 ‘오루노코’를 살펴보자.



    “이 섬은 내 것이오” : 타자의 주장

    “너희들은 물고기냐, 인간이냐?”
    1611년에 상연된 셰익스피어의 희곡 ‘태풍’은 밀라노의 공작 프로스페로의 고초와 복수를 그린다. 간략한 줄거리는 이렇다. 학문만 좋아하며 마법도 공부하던 프로스페로는 야심적인 동생으로 말미암아 쫓겨나서 딸과 함께 이름 없는 작은 섬에 은거한다. 그는 원래 그 섬에 살던 마녀의 아들 칼리반과 정령인 아리엘을 부리며 살았는데, 칼리반과 프로스페로의 관계는 좋지 않았다. 프로스페로는 천운의 힘과 자신의 마법을 이용해 근처 바다를 항해하던 자신의 동생 일행을 난파시켜 그 섬으로 데려오고, 이들을 혼내준 다음 함께 귀향하기로 한다.

    ‘태풍’은 프로스페로의 동생 일행이 튀니지로 시집가게 된 나폴리 공주의 결혼식에 참석했던 것으로 설명하는 등 한층 교류가 활발해진 세계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버뮤다 제도에 난파했다가 기적적으로 살아난 사람들의 경험담이 ‘태풍’의 소재라는 추측도 있으나 확실하지는 않다). 멀리 떨어진 섬에 가서 그 섬의 ‘원주민’이라고 할 수 있는 칼리반과 아리엘의 노고에 의지해 사는 프로스페로 부녀의 모습은 일견 신세계에 건너간 이 시대의 유럽인처럼 보일 여지가 크다. 그런데 프로스페로를 식민주의자, 칼리반을 착취당하는 원주민으로만 보면 지나치게 단순한 독해라는 생각이 든다. 구체적으로 지명을 언급한 다른 작품들과는 달리 ‘태풍’은 배경의 이름이 없다. 그저 신비로운 느낌이 강한 섬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그리고 아리엘은 초자연적인 능력을 가진 정령이고 칼리반은 알제리 마녀가 악마와 사통(私通)해 낳은 아들로 설명되고 있어서, 칼리반을 신세계 원주민들과 완전히 동일시하기 어려운 점도 있다. 선후와 비중을 정확하게 따지자면 셰익스피어는 프로스페로가 이국적이고도 신비로운 공간에서 겪는 사건을 원한 것이고, 그 공간에 살던 존재인 칼리반을 설명할 때 신세계 사람들과의 관계에 대한 고민이 일부분 들어갔다고 보는 것이 더 적절할 것이다.

    “너희들은 물고기냐, 인간이냐?”

    칼리반의 모습들. 왼쪽과 가운데 그림은 18세기 삽화이고, 오른쪽 그림은 20세기 공연에서 칼리반을 연기하고 있는 배우다.

    그렇다 해도 셰익스피어가 프로스페로나 ‘태풍’을 관람한 영국인 같은 유럽인과는 사뭇 다른 칼리반을 어떻게 그렸는지는 주목해볼 여지가 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타자’로 분류될 수 있는 다른 존재를 어떻게 대하는지, 타자에 대한 대응이 그렇게 대응하는 자들의 어떤 점을 보여주는지 생각하게 해주기 때문이다. 프로스페로뿐 아니라 이 섬에 도착하는 유럽인이 칼리반을 대하는 공통적인 태도는 칼리반의 ‘인간’됨을 부정하는 것이다. 마녀와 악마의 아들이라면 절반 정도는 인간이라고 볼 수도 있고, 어쩌면 인간과 대단히 다르게 보이지 않을 가능성도 있다. 그러나 유럽인들은 칼리반을 보는 첫 순간부터 “물고기냐 인간이냐”고 외치며 그를 인간의 대열에서 제외시킨다(칼리반의 외양이 인간과 혹은 유럽인과 어떻게 다른지는 불분명하나, 대사로 미루어보건대 다른 인물과 확연히 구분되는 것은 확실하다). 프로스페로는 외양 때문에 칼리반을 차별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의 악한 성품과 행동에 치를 떨면서 “이 암흑의 것” “타고난 악마”라고 한다.

    또한 ‘태풍’에서 재미있는 점은 칼리반을 만나는 유럽인 모두는 그가 자신과 같은 인간일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지만, 실제로 작품에서는 칼리반이 ‘인간’과 완전히 다르지 않은 면모도 드러난다는 것이다. 극중 인물로서 칼리반은 보통의 사람이 이해할 수 있는 감정과 지성의 폭을 지녔고, 자신의 개인사, 경험, 주장을 프로스페로와 청중 모두가 알아들을 수 있고 혹자는 공감할 수도 있는 방식으로 전달한다. 이는 프로스페로의 딸을 강간하려다 실패하고 그 후로도 끊임없이 프로스페로를 살해하려 시도하는 칼리반이 악한이 아니라는 것이 아니다. 프로스페로의 딸을 취할 수 있었다면 “이 섬을 칼리반들로 채울 수 있었을 것이다”라고 말하는 칼리반은 만만치 않은 철면피이며, 지극히 단순하고 자기중심적인 본능에 빠져 있는 자다. 프로스페로를 살해하는 장면을 상상할 때 칼리반은 무서울 정도로 가학적이고 폭력적이다.

    칼리반이 외양도 이질적인데다 악한임은 분명하나, 무시할 수 없는 점은 그는 이 희곡에 나오는 다른 악한보다 사연이 있고, 흥미로운 악한이라는 것이다. 셰익스피어는 칼리반으로 하여금 제법 많은 말을 하게 해주었고, 그의 대사는 청중으로 하여금 경멸과 지탄을 한 몸에 받는 그를 주목하게 만든다. 프로스페로에게 말을 배워 욕하는 데에 잘 쓰고 있다고 빈정대는 칼리반은 보기보다 언어를 효과적으로 이용하는 인물이고, 그만큼 말하는 동물인 인간에 가깝게 느껴진다. 칼리반의 대사는 대개 외국인의 말처럼 어딘지 단순하고 모자란 듯 들리지만, 그는 자신의 능력 한에서 말의 힘을 십분 이용하고 있다. 칼리반이 프로스페로에게 따지는 장면 중 하나를 보자.

    이 섬은 내 어머니 시코락스에 의해 내 것이오.

    당신이 내게서 섬을 뺏었지만. 당신이 처음 왔을 땐

    나를 쓰다듬고 소중히 여겼었소. 내게 들딸기 섞인 물을 주었고,

    밤과 낮에 빛나는 저 더 큰 빛과 작은 빛의 이름도 알려주었소.

    그래서 난 당신을 사랑하게 되어 당신에게

    이 섬의 특성을 전부 가르쳐주었지 (중략)

    그랬던 것이 저주스럽구나! 시코락스의 모든 저주가

    당신에게 떨어지기를!

    여기서 칼리반은 (서구의 부계적 상속권과 대비되는) 모계적 상속권을 주장하고 있다. 이에 더해 그는 자기 기억을 바탕으로 자신이 영토를 선점했다는 사실뿐 아니라 프로스페로가 섬을 속속들이 잘 알고 있는 자신의 덕을 봤다는 것도 날카롭게 지적한다. 프로스페로의 힘 중에서 주요한 요소인 마법을 의식한 듯이 자신의 어머니인 마녀 사이코락스의 마법을 들먹이는 것도 칼리반이 상황을 그런 대로 잘 파악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논리적인 언변 외에도 청중이 칼리반을 ‘인간적인’ 존재로 느낄 수 있는 요소로 그가 섬의 자연 환경에 대해 그 나름대로 감성적인 반응을 보인다는 것을 들 수 있다. 섬의 낯선 소리에 놀라는 유럽인들에게 칼리반은 자신의 섬이 본디 매우 신비로운 소리로 가득 차 있다고 설명한다. 그리고 그 소리의 아름다움에 젖어 있노라면 행복하고, 소리가 멈추었을 때 행복한 꿈에서 깬 사람 모양 울고 싶어진다는 말도 덧붙인다. 이렇듯 아름다운 것에 둔감하지도 않고, 자신의 감성을 알맞은 비유로 표현할 줄 아는 칼리반의 모습은 그를 인간에 못 미치는 기형의 생물로만 보기 힘들게 한다.

    ‘태풍’에서 셰익스피어는 칼리반의 여러 모습과 목소리를 섬에 도착한 유럽인들의 반응과 함께 들려준 셈이다. 그런 면에서 셰익스피어가 적어도 이 희곡에 등장했던 여러 유럽인보다는 타자라는 존재를 제대로 인식하고 정의하는 것이 쉽지 않은 일임을 알고 있었고, 이들을 재현하는 일에서 유연성을 확보하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돈으로 살 수 있겠지” : 타자라는 거울

    ‘태풍’에서 셰익스피어는 칼리반뿐 아니라 그와 새로운 세계를 만난 유럽인들의 모습도 자세하게 보여주고 있다. 기존 사회의 제약이 존재하지 않는 낯선 섬에 와서 여러 유럽인은 자신의 성품이나 신념을 마음껏 표현한다. 일례로 난파한 유럽인 중 하나인 노(老)대신 곤잘로는 이 섬에 교역도, 정치가도, 돈도, 문자도 없는 세상을 만들겠다는 꿈같은 계획을 펼친다. 이런 발언은 당연히 이들 유럽인이 새로 도착한 섬이나 17세기의 신세계를 정확히 파악해서 나온 것이 아니다. 이들은 이런 낯선 세계를 ‘백지’로 보고 이 ‘백지’를 자신들의 세계인 유럽의 문제가 부재하는 뒤집힌 이미지의 공간으로 해석하고 싶었을 뿐이다.

    칼리반과의 만남을 통해 드러나는 유럽인들의 모습을 좀 더 살펴보자. 앞서 말했듯이 프로스페로를 비롯해 유럽인 모두가 칼리반을 ‘인간’으로 동등하게 대접하지 않으나, 이들의 반응에는 약간의 차이가 있다. 프로스페로로 말하자면, 적어도 칼리반과의 관계가 틀어지기 이전에는, 그나마 타자인 칼리반에게 좋은 영향을 끼치려 했다. 이런 점에서 그는 ‘태풍’에 나온 다른 인물보다 세련되고 양심적이라고 할 수 있다.

    프로스페로가 언어를 비롯한 각종 지식을 가르쳐준 반면 칼리반도 섬에 대한 정보와 노동력을 제공해주었으니, 칼리반이 이 관계에서 일방적인 수혜자라고 할 수는 없을 것 같다. 그런데 다른 무엇보다 학문을 좋아하고 마법까지 공부하다가 권좌를 잃은 프로스페로에게 지식은 최고의 가치이자 재산이었음이 분명하다. 프로스페로도 한때는 자신이 처음에는 자신의 딸에게 그랬듯이 칼리반을 인간적으로 배려하며 가르치려 했다고 회고하고 있다. 이런 것을 보면 프로스페로는 칼리반에게 자신이 줄 수 있는 최고의 것을 가장 좋은 방식으로 주려 했던 것일 수도 있다. 한계가 있다 해도 칼리반을 교육하겠다는 프로스페로의 시도는 신세계인의 야만성과 무지함을 떠들어댔던 당대 사람들의 태도에 비하면 훨씬 선의를 지닌 것이다.

    반면에 칼리반에 대해서 다른 유럽인이 보이는 반응은 실로 눈살을 찌푸리게 만드는 것이다. 칼리반은 극 중반에 술 취한 집사인 스테파노와 광대 트링큘로와 만나 제법 긴 시간을 이들과 같이 보내고, 프로스페로의 동생과 나폴리 왕의 동생도 칼리반을 목격하게 된다. 이들 네 명의 유럽인은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칼리반에 대해 매우 거친 반응을 보인다. 이들은 칼리반을 보자마자 물고기에 비교하며 면전에서 그의 이상한 외양과 악취를 비웃을 뿐 아니라, 단박에 칼리반을 돈으로 산 뒤 유럽으로 데려가 구경거리로 만들면 짭짤한 벌이가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실제로 이 시대에는 신세계에서 원주민을 데려와 장터 같은 곳에서 전시하기도 했고, 트링큘로가 말하듯 보통 사람은 굶고 있는 거지한테는 돈을 아껴도 인디언 시체는 신기하게 여기며 돈을 내고 구경할 지도 모른다. 그러나 칼리반에 대한 이들의 첫 반응이 하나같이 그들 자신의 일천한 지식과 편견을 드러내고 있다는 점이나, 이들 유럽인이 칼리반을 대하는 방식이 처음이나 끝이나 별로 달라지지 않았다는 것은 안타까운 점이다.

    스테파노와 트링큘로는 이 작품에 나오는 인물 중에서 신분이 낮은 축에 드는 사람으로 희극적인 장면을 연출하는데, 칼리반에 대한 이들의 대응은 유럽인이 자신보다 열등하다고 여기는 신세계 원주민에게 할 수 있는 행동을 희화화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들은 칼리반에게 성경에 입을 맞추게 하는 한편 술병에 대고 충성을 맹세하라고 요구하기도 하고, 유럽의 사회적 위계가 이 섬에서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이용해 왕 혹은 귀족 노릇을 하려든다(물론 이때 칼리반은 스테파노가 왕 노릇을 하는 데 꼭 필요한 신민이다). 또한 스테파노와 트링큘로에게 풍요로운 섬과 프로스페로의 아름다운 딸은 자신들의 정복욕을 충족시키는 대상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태풍’의 끝부분에서 프로스페로와 다른 유럽인은 자신들의 문제가 일단락되자 섬을 떠난다. 이들이 칼리반을 데려간다는 언급은 없다. 프로스페로만이 칼리반 교육이라는 프로젝트가 끝내 실패했다는 것에 씁쓸함을 느낄 뿐, 나머지 사람은 잠시 만났던 칼리반에 대해 무심하다. 칼리반 자신도 프로스페로를 제외한 유럽인과의 만남을 통해서 그다지 변하지 않았고, 어쩌면 그는 유럽인들이 모두 떠난 섬에서 예전에 살던 그대로 살았을 것도 같다. 이 희곡에서 칼리반과 유럽인 사이의 관계를 통해 서로에게 생긴 변화는 그다지 크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들의 만남을 본 청중은 적어도 자신들이 타자와 만났을 때 어떤 태도를 보이는지, 그러한 자신에 대해 스스로는 어떻게 평가하는지 되짚어볼 기회를 가졌을 것이다. 이것은 ‘태풍’에서 셰익스피어가 거둔 수확이다.

    “피부색만 아니라면” : 타자의 재현

    “너희들은 물고기냐, 인간이냐?”

    17세기 삼각무역 경로와 교역품. 별표가 가리키는 곳이 수리남이다.

    이제 두 번째 작품인 ‘오루노코’를 보자. 여성 작가인 아프라 벤은 ‘태풍’이 상연된 후 약 70년이 지난 1688년 이 작품을 발표했는데, 그동안 영국은 대외관계에서 적지 않은 변화를 겪었다. 16세기에는 스페인이 남미를 지배했지만, 17세기에 이르러서는 영국이 점차 해상 영향력을 키우게 됐다. 영국은 아메리카 대륙에도 진출해 식민지를 세우기 시작했다. 특히 1640년대에 들어서는 중남미에서 사탕수수를 재배했는데, 이를 위해 대규모 노동력이 필요하자, 아프리카에서 노예를 사 아메리카 대륙으로 데려가 일을 시켰다. ‘오루노코’의 배경이 된 남미 북부의 수리남에도 다수의 영국인과 그보다 훨씬 많은 수의 아프리카인 노예가 있었으며, 아프라 벤 자신도 수리남을 실제로 방문한 적이 있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17세기 영국인들은 이전보다 신세계를 훨씬 더 가깝게 여겼을 것이다. 아메리카 대륙에 대한 보고서뿐 아니라 남미 원주민에 대한 악행을 비판하는 문헌도 있었다. 또한 ‘오루노코’ 초반부에 언급된 ‘인디안 여왕’처럼 아메리카 대륙의 원주민이 등장하는 연극도 상연됐다.

    “너희들은 물고기냐, 인간이냐?”

    신세계의 두 모습. 좌측은 신세계인이 식인을 하는 광경을 상상한 그림, 우측은 신세계의 동식물을 기록한 것이다.

    아프라 벤은 아프리카의 코라만틴 왕국의 왕자인 오루노코의 비극을 여성 화자의 회고담이라는 방식으로 들려주고 있다. 오루노코는 뛰어난 능력에도 불구하고 질투에 찬 할아버지에 의해 아름다운 연인과 헤어지고, 그 후 영국인 선장의 속임수에 빠져 노예가 된 뒤 수리남으로 이송된다. 그곳에서 헤어졌던 연인을 천운으로 만나고 몇몇 영국인과 친밀한 관계를 맺는다. 연인이 임신한 후 오루노코는 노예 상태에서 해방되기를 더욱 간절히 원하게 되어 다른 노예들과 함께 탈출을 시도했으나 실패한다. 절망에 빠진 오루노코는 목숨을 걸고 자신을 괴롭힌 백인에게 복수하려 하나 성공하지 못하고, 결국 끔찍하게 처형당한다.

    ‘오루노코’는 신세계와 영국이 이전보다 더 큰 범위로 교류하게 된 시기에 발표됐고 아프리카인 노예를 주인공으로 삼았다는 점에서 상당히 흥미로운 텍스트다. 아래에서 이 작품에 대해 논하려 하는 점 중 하나는 이 이야기가 결코 아프라 벤이나 다른 동시대인들이 만났다는 아프리카인 혹은 남미 원주민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사실 작가가 문학적으로 인물을 창조할 때 역사적 현실을 그대로 따를 필요는 없다. 다만, 현실감 있는 인물과 배경 설정은 작품을 더욱 설득력 있고, 흥미롭게 만들기 때문에 작가들은 자신이 아는 ‘있는 그대로’의 현실과 어느 정도 타협하게 마련이다.

    ‘오루노코’도 예외는 아니다. 이 작품에는 아프라 벤 자신이 수리남에서 경험한 바나 수리남에 대해 들은 이야기가 반영돼 있다. 동시에 아프라 벤은 작가로서 자신이 원하는 작품의 분위기에 맞게끔 기구한 운명을 지닌 영웅 오루노코와 그가 활동했던 공간인 이국적인 아프리카와 수리남을 재창조하고자 했다. 예를 들어, 이야기의 앞부분에 나오는 오루노코의 고향 코라만틴 왕국의 묘사는 17세기 현실의 아프리카가 아니라 하렘이나 폭군 같은 모티프가 등장하는 근동지역을 배경으로 하는 이야기처럼 들린다. 오루노코에 대한 묘사도 무예, 교양, 외모 등 상상할 수 있는 좋은 자질을 모두 갖춘 훌륭한 왕자로 설정되다 보니 과장된 찬사가 연달아 등장한다.

    그런데 문제는 아프라 벤이 위대한 영웅과 왕자라는 이상을 지극히 유럽 중심적으로 설정했다는 것이다. 즉 최고의 왕자가 갖출 교양은 유럽의 교양과 학식이고, 위대한 영웅은 서구 영웅의 예를 통해서만 재구성된다. 그래서 오루노코는 얼굴만 검을 뿐 서구의 영웅 로맨스의 주인공이 되기에 부족함이 없는 인물로 묘사되고 있다. 오루노코의 뛰어남에 대해 설명하자면, 그는 탁월한 무용(武勇)을 갖춘 것은 물론이고, 유럽의 교양을 쌓았으며, 영국·스페인 상인과 즐겨 이야기하다 그 나라의 언어에도 능통하게 됐다. 서구 역사에도 관심을 가졌는데, 오루노코는 로마 영웅의 이야기를 즐겨 들었을 뿐 아니라 17세기 영국 내전의 이야기에도 흥미를 보인다. 이러한 오루노코를 두고 화자는 “성품에 야만스러운 구석이 없었고 모든 점에서 유럽 궁정에서 교육받은 듯 행동했다”라고 평가하며 오루노코가 뛰어나다는 사실을 서구적 가치 기준과 노골적으로 연결한다.

    이런 모습의 오루노코는 현대적 기준에서 좋게 봐주자면 코스모폴리탄, 혹은 국제인이라고 불릴 수도 있겠다. 그러나 오루노코의 외양 묘사를 보면 그를 유럽 중심적 기준을 충족시키는 영웅으로 만들려 했던 시도가 가끔은 억지스럽고 우스꽝스러운 결과를 낳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얼굴은 그 나라 사람들이 대개 그렇듯이 불그스레한 갈색 기운이 도는 검은색이 아니라 완전히 흑단 내지는 잘 다듬어진 칠흑 같았지요. (중략) 눈자위는 눈같이 흰색이요, 치아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코는 아프리카인들 모양 평평한 것이 아니라, 로마인처럼 솟아 있었습니다. 입 모양도 우리가 볼 수 있는 중 최고로 멋지게 생겼었는데, 흑인들이 흔히 그런 것처럼 위쪽으로 뒤집힌 큰 입술이 아니었답니다. 얼굴 전체의 비율이며 분위기가 어찌나 고귀하고도 정확한지, 피부색만 아니라면 자연에서 그보다 더 아름답고 근사하며 잘생긴 사람을 찾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아프라 벤의 딜레마는 오루노코의 인종적 정체성이 이야기의 중요한 부분이니만큼 그가 아프리카 흑인이라는 사실을 무시할 수는 없으나, 다른 한편 그를 평범한 흑인과는 뭐가 달라도 다른 비범하고도 매력적인 인물로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오루노코는 피부색은 극단적으로 까맣고 치아는 유달리 하얀 부자연스러울 정도로 독특한 외모로 묘사된다. 화자는 아프리카 흑인의 인종적 특성인 코나 입술의 형태마저 유럽인들의 미감에 맞는 형태로 수정해서 제시하며, ‘피부색만 아니라면’ 그보다 더 아름다운 사람이 없을 것이라고 안타까움 섞인 칭찬을 늘어놓고 있다. 이는 오루노코의 이질성을 무마해보려는 몸부림에 가깝게 보인다.

    이야기의 끝부분까지 오루노코는 상당 정도 혼종적인 인물로 남는다. 수리남에서 노예가 됐을 때 그는 로마 영웅의 이름인 ‘시저’로 새로 불리게 된다(노예에게 고전 작품의 인물 이름을 붙이는 것은 종종 발견되는 관행이긴 했다). 이후로 수리남에서 오루노코는 그의 무용과 영웅적 면모에 걸맞긴 하지만 어쨌든 서구인이 붙여준 것임에 틀림없는 이 이름으로 계속 불린다. 또한 그는 작중 화자를 포함한 몇몇 영국인과 매우 친하게 지내면서 이들의 탐험에 동반하거나 기독교를 비롯한 서구 문화에 대해 듣고 관심을 표하기도 한다.

    그런데 이처럼 합성사진 같은 오루노코가 ‘아프리카인’답게 그려진 부분을 찾으려 한다면, 이 경우 고려해야 할 것은 ‘아프리카인다움’이 어떤 기준을 근거로 한 것이냐는 문제다. 예를 들어 이야기 종반부에 나오는 사건 하나를 보자. 오루노코는 극도의 절망과 분노에 사로잡혀 자신을 괴롭힌 자들에게 복수한 후 자살하려는 계획을 세운다. 궁리하던 중 그는 자신이 먼저 죽으면 임신한 연인이 능욕당할 것이라는 데 생각이 미쳐, 복수하기 전에 연인을 미리 죽이는 것이 낫겠다고 결심한다. 그래서 그는 연인과 숲으로 가서 그녀에게 자신의 의도를 설명한 후 연인이 동의하자 그녀를 죽인다. 그러고는 썩어가는 그녀의 시체 옆에서 며칠을 누워 있게 된다. 실종된 오루노코와 그의 연인을 찾던 유럽인들은 악취 가득한 숲에서 오루노코를 발견하고는 연인을 죽였다고 그를 비난한다.

    이런 오루노코는 아프리카인다운가, 아닌가? 이야기 초반에 화자는 남미 원주민 여성이 남편에게 지극히 순종적이라고 설명했고, 영국인들이 만난 부족 중에는 자해(自害)행위로 용맹을 가리는 승부를 벌이는 부족도 있었다. 이런 사실을 고려한다면 오루노코가 임신한 연인을 살해한 사건은 오루노코와 그의 연인을 유럽인과 확연히 다른 존재로 느끼게 해줬다고 할 수 있다. 이 장면을 보고 당대 영국 청중이나 현대 독자가 오루노코를 ‘아프리카인답다’라고 느꼈다고 치자. 그런데 그렇다 하더라도 ‘아프리카인답다’라는 인상을 준 오루노코의 모습이 그의 진정한 아프리카적 정체성을 반영한 것이라고 할 수는 없다. 이런 과격한 행동과 그로테스크한 장면은 애초에 아프라 벤을 포함한 영국인들이 아프리카인을 복수와 명예, 폭력에 대해 서구인과 전혀 다른 감수성과 기준을 지닌 타자로 보았기 때문에 삽입됐을 수 있다. 아프라 벤은 적당한 선에서 ‘진짜’ 아프리카인을 보고 싶어하는 독자의 취향을 고려해 위에서 말한 사건을 그렸을 뿐이고, 영국인들은 이 ‘아프리카인다운’ 오루노코에게서 자신들이 애초에 생각했던 ‘아프리카인다움’만을 확인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말이다.

    영웅적인 인물을 그리기 위해 ‘우월한’ 서구적 특성을 억지로 접목해 인종적 특성을 가려버리든, 아니면 역으로 다른 인종, 문화권의 이질성을 듬뿍 강조한 에피소드를 늘어놓든 공통점이 하나 있다. 독자들이 만나는 타자는 작가와 독자가 공유하는 문화적 기준에 맞춰 재구성된 타자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저들도 말할 줄 아는가” : 타자와의 만남과 공존

    사실 ‘오루노코’는 유럽인의 눈을 통해서 아프리카와 수리남을 보여주고, 이 두 곳에서 유럽인이 아프리카인이나 남미 원주민과 교류 및 충돌하는 모습을 그리는 등 다양한 공간과 만남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의미 있는 텍스트다. 이 작품에서 이뤄지는 여러 인종 간의 만남을 대략 꼽아보자면, 여러 나라의 유럽인들이 오루노코의 고향인 코라만틴을 방문하고 있다는 것과 수리남에서 서구인을 만나게 된 아프리카 출신 노예도 있다는 것이다. 또한 수리남에서 서구인은 남미 원주민과 공존했으며, 아프리카 노예 중 오루노코 같은 사람은 남미 원주민을 만날 수 있었다.

    아프리카에서 살던 때의 오루노코를 보자. 아프리카에서 그는 프랑스인에게 유럽 문물을 배우기도 하고 영국·스페인과 교역하기도 하지만, 결국 영국인 선장의 속임수에 넘어가 노예가 되고 만다. ‘오루노코’의 화자는 이 사건에 대해 ‘어떤 이는 선장을 칭찬할지도 모르겠으나 나는 언급을 피하겠다’고 한다. 이 말 자체는 은근한 비판처럼 들릴 수도 있으나, 이야기 앞부분에서 화자는 수리남에 도착한 노예가 팔리는 과정을 아무런 감정도 판단도 없이 그리고 있다. 이를 보면 아프라 벤은 영국의 경제적 이익에 노예가 절실히 필요하다는 데는 근본적으로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 듯하다. 화자는 그저 오루노코처럼 신분이 높은 아프리카인이 노예가 됐을 때 생기는 현실적 문제를 걱정하는 동시에 부조리한 상황에 대한 안타까움을 나타내려고 했는지도 모른다.

    아프리카인 노예가 다수고, 영국인이 소수인 수리남의 상황에서 아프라 벤이 노예 집단과 영국인의 관계에 대해 보이는 태도는 어정쩡하기 짝이 없다. 영국인들보다 거칠다는 네덜란드인이나 출신이 나쁜 잔인한 영국인 몇 명을 비판하고 있다는 점에서 노예들을 비인간적으로 대하는 것에 반대하는 화자의 마음을 엿볼 수는 있다. 그러나 노예들이 반란을 일으켜 영국인들을 죽일지도 모른다는 대사는 의미하는 바가 적지 않다. 실제로 화자를 포함한 여성들은 오루노코가 다른 노예들과 반란을 시도했을 때 멀리 피난 가버리고 그 결과 화자는 오루노코가 곤궁에 처했을 때 도와줄 기회를 놓친다. 뛰어난 아프리카인 개인, 왕족 노예인 오루노코에 대한 동정과 노예에 의존해 경제생활을 영위하며 이들을 통제해야 하는 현실은 별개인 것이다.

    남미 원주민과 서구인의 공존과 만남에서도 영국인들은 수적으로 열세였고 화자가 남미 원주민을 그리는 태도 역시 상당히 혼란스럽다. 이야기의 초반부에서 남미 원주민은 마치 태초의 낙원에 살던 사람들처럼 순수하고 고귀한 것으로 그려지거나 신세계만큼이나 신비하고 낯선 존재로 제시된다. 이들과 유럽인들의 관계도 평화롭고 우호적인 것처럼 설명되고 있다. 그러나 바로 뒷부분에 나오는 우호적으로 지내야만 안전이 위협받지 않을 것이라는 우려의 말을 읽으면 작가가 묘사한 평화 공존 상태를 말 그대로 믿기 어렵게 된다. 그뿐만 아니라 짤막하게나마 선하기만 하다던 남미 원주민들이 그들에게 나쁘게 대한 네덜란드인을 도륙했다는 이야기도 언급된다. 이처럼 ‘오루노코’는 그 시기 아메리카 대륙에서 신세계인과 유럽인의 공존이 아슬아슬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너희들은 물고기냐, 인간이냐?”

    수리남 등의 중남미에서 노예제는 19세기까지 계속됐다. 수리남의 노예제를 비판한 18세기 후반의 삽화.

    그런데 ‘오루노코’는 유럽인과 신세계인의 긴장 관계에 더해 흥미진진하고 호기심에 가득한 양자 사이의 만남도 그리고 있다. 이야기 중반 정도에 오루노코와 영국인들은 농장에서 멀리 떨어진 곳으로 탐험을 나가 이전에는 보지 못했던 원주민 부족을 보게 된다. 이 탐험 장면은 신기한 동식물, 색다른 냄새의 공기로 특징지워지는 낯설고도 매혹적인 신세계, 그리고 신세계인과의 만남을 그리는 막간극처럼도 읽힌다. 재미있는 점은 원주민들이 자신과 다른 유럽인을 보면서 신기해하는 것으로 묘사되고 있다는 것이다. 남미 원주민들은 한눈에 인종적 타자임이 분명한 이들 유럽인이 어떤 존재인지 궁금해하며 “친구여”라고 부르며 접근한다. 이들은 통역해주는 사람에게 유럽인이 말을 할 수 있는지, 지력은 갖추었는지, 전쟁이라는 것을 아는지 등을 연달아 묻고는 자신의 음식을 대접 한다.

    반대로 유럽인들도 원주민들 보란 듯이 화려한 옷을 입거나 원주민들 앞에서 피리를 불고, 확대경을 이용한 놀이를 한다. 이는 마치 원주민들이 기대했을 법한 신비로운 재주를 가진 ‘타자’의 모습을 충실히 연기하는 것처럼 보인다. 유럽인의 낯선 모습을 보고 신기해하는 남미 원주민의 모습은 여행기 같은 글에서 흔히 나오던 타자에 대한 유럽인의 경탄이나 다른 세계 사람들을 전시품처럼 그리는 행위를 뒤집어놓은 것으로 보인다. 이 탐험 장면은 보는 자와 보이는 자가 얼마든지 바뀔 수 있고, ‘타자성’이나 ‘이질성’은 상대적이고 쌍방향적임을 보여주고, 다른 글에서 발견되는 유럽인의 자기중심적 시선을 우스꽝스럽게 보이게 만든다.

    이 탐험을 제외하면 ‘오루노코’에서 유럽인과 이들 타자 사이의 만남은 거의 다 비극으로 종결된다. 오루노코가 다른 노예들을 선동해 탈출을 시도함으로써 영국인들의 이익을 침해했을 때 그는 ‘보통 노예처럼’ 채찍질당한 후 능지처참되고, 토막 난 그의 시체는 본보기로 각 농장에 보내진다. 오루노코에게 호의적이던 일부 영국인들은 이런 상황에 무력하기만 하다. 결국 유럽인과 신세계인의 만남과 공존의 결과물은 풍요로웠으나 불안정했던 옛 식민지에 대한 기억과 안타깝게 죽은 오루노코에 대한 추모의 정이다. 참담한 비극으로 끝난 오루노코의 삶과는 달리 그의 이야기는 출판 후 곧 연극으로 만들어져 크게 인기를 얻었으니 수리남과 오루노코를 기리려 했던 아프라 벤의 시도는 성공했다고 볼 수 있겠다. ‘오루노코’를 통해 많은 수의 독자와 관객은 일차적으로 자신들이 직접 보지 못한 신세계나 타자와 마주했을 것이고, 새로운 세계에서 일어날 수 있는 첨예한 갈등을 간접적으로 경험해 볼 수도 있었을 것이다. 나아가 그러한 갈등에서 희생된 오루노코에게 공감하며 갈등의 원인과 그 갈등을 해결할 방안을 고민하게 됐다면, 불완전하게나마 타자와의 만남을 그린 이 이야기가 허무맹랑한 낯선 세상 이야기로 끝나지 않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 후에

    18~20세기 초에 걸쳐 서구세계는 제국주의적 팽창을 적극적으로 추구했고, 영국의 경우 1834년 노예를 해방했지만 인도 등의 나라를 놀라운 속도로 식민화했다. 그 결과 정치적·경제적 갈등이 급증했고, 사회적 차원에서나 문화적 차원에서나 인종적 타자에 대한 인식과 재현은 더욱 첨예한 문제로 떠올랐다. 이와 함께 식민주의 담론이 더욱 정교해지면서 유럽인들이 식민지 시대의 주체로서 자신들을 어떻게 생각하느냐도 계속 변화했다. 이렇듯 역사적·문화적 환경이 변함에 따라 ‘태풍’과‘오루노코’는 끊임없이 재해석됐다. 18세기 삽화에서 프로스페로는 계몽적인 현자, 칼리반은 흉측한 괴물로 묘사됐으나 탈식민주의 담론이 대두된 20세기에 들어서는 프로스페로는 오만하고 교활한 식민주의자, 칼리반은 어떻게든 제 목소리를 내보려는 피식민 주체로 이해되기도 했다. ‘오루노코’는 18~19세기 노예 해방주의자들이 열심히 읽은 텍스트였고, 프랑스나 독일에서 번역되어 읽히거나 연극으로 공연되기도 했다. 특히 이 작품은 20세기 후반 탈식민주의자들과 페미니스트들의 각광을 받게 됐고, 17세기 서구의 신세계 진출이나 노예제의 실상에 대한 연구가 진척됨에 따라 더 널리 읽히고 있다.

    셰익스피어와 아프라 벤은 우리에게 자신과 다른 자, 낯선 이를 만나서 그 다름을 자신의 틀로 인식하고, 자신에게 익숙한 방식으로 재현하는 과정에 대해 다면적으로 생각할 기회를 제공해주었다. 인종적 다양성이 강화되는 추세인 21세기의 다문화 사회에서는 타자와의 관계 맺음에 대해 더 정교하게 생각할 필요가 예전보다 커질 듯하다. 지하철에서 외국인들이 낯선 방식으로 인사하는 것을 보고 신경이 쓰일 때, 맛있다는 인도 음식점을 찾아다닐 때, 이국적인 풍경을 배경으로 한 관광 광고에 설렐 때에 스스로에게 이렇게 물어볼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이 다름을 어떻게 느끼고, 왜 그렇게 느끼고, 그에 대해 어떤 방식으로 반응하고 있는가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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