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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근대를 찾아서

조선은 하루아침에 허물어지지 않았다

1920년대 서울

  • 박윤석│unomonoo@gmail.com

조선은 하루아침에 허물어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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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지난 회 이야기>
  • 신문기자 생활 10년째인 한림은 1929년 12월30일, 그해의 마지막 신문 기사를 마감하고 1930년대 첫날 신문의 기사취재를 위해 청계천변을 걸어간다. 1905년 을사조약의 현장을 증언해줄 노(老)정객을 찾아가는 길이다. 광교를 지나 장교동까지 1㎞를 걸어가면서 한림은 10년 세월에 녹아든 자신의 지난날과 서울의 그간 사정을 떠올린다. 15분간의 걸음 내내 150년간의 흔적들이 냇물처럼 눈앞을 스쳐간다. 사대문 안 서울 도성의 한가운데를 마치 태극문양의 중심선처럼 가로지르는 개천은 시절의 영욕을 상기시키며 흘러간다. 망국의 식민지와 근대의 신세계가 뒤섞인 채로 두 번째 10년을 보냈다. 이제 무엇이 기다리고 있는가.
제2장

조선은 하루아침에 허물어지지 않았다

을사조약 체결 뒤 찍은 한일 수뇌부의 기념사진.

비는 진눈깨비로 바뀌었다. 한림은 행랑채 지붕보다 높은 솟을대문을 올려다보았다. 두꺼운 대문은 가마가 드나들 정도로 높고 넓다. 종2품(從二品) 이상의 벼슬아치만이 탈 수 있는 초헌(?軒)이 25년 전만 해도 매일처럼 이 문간을 조석으로 출입했을 터이다. 초헌은 한 자 지름의 외바퀴 위로 명치께 높이의 줏대가 달렸고 그 위에 의자가 놓인 수레 가마다. 앞뒤에서 두 사람이나 네 사람이 끌고 미는, 일명 목마(木馬)라 불리는 탈것이다.

이 땅에서 바퀴는 기피되었다. 수레를 많이 이용해야 한다는 주장이 줄곧 제기되었으나 잘 실행되지 않았다. 조선의 길은 수레가 구르기에는 부적합한 상태였다. 길은 좁고 울퉁불퉁했으며 끊어진 곳이 많았다. 편리한 수레를 사용하려면 길을 닦는 불편을 치러야만 했다. 그러지 않으면 바퀴는 편리한 수단이기보다 성가신 물건이 되고 만다. 한번 크게 길을 혁신해 영구히 바퀴를 굴릴 것이냐, 큰 노고를 피하고 작은 불편을 감수하며 옛날대로 바퀴 없이 살 것이냐. 선택의 갈림길에서 결정은 항상 미뤄져왔다.

자발적으로 돌리지 못한 바퀴는 결국 긴 시간을 흘려보내고 나서 타율적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이제 사람이 끄는 손수레가 3만대가 넘는다. 바퀴 달린 것들이 어디에나 즐비하다. 인력거(人力車)는 장안에 그득하고 자전거(自轉車)가 그 뒤를 쫓고 있다. 바퀴를 굴리는 원동력은 소나 말의 축력(畜力)과 사람의 인력(人力)뿐인 줄 알았는데 어느 날 갑자기 그 이름도 생소한 전기(電氣)가 바퀴를 굴리는 전차(電車), 증기(蒸氣)가 바퀴를 굴리는 기차(汽車)가 출현했다. 선로도 궤도도 없이 아무데로나 제 스스로 막가는 자동차(自動車)도 이젠 낯설지 않은 모습으로 늘고 있다. 모두가 태평양을 건너 미국에서 오는 신문물이다. 그 경유지는 일본이다.

화륜거 구르는 소리 우레 같고

1929년이 저물어가는 지금 조선 전역에서 하루 평균 6만명이 기차를 탄다. 전국에 12개 노선이 촘촘히 깔려있다. 조선총독부 세입의 30%가량이 철도 수입에서 나온다. 전차는 하루 이용객이 10만명을 넘어섰다. 일본인이 부설한 선로 위로 일본인이 운영하는 미국제 열차가 인천~노량진 33㎞ 구간을 오전 오후 한 차례씩 1시간30분에 오가기 시작한 것이 1899년 9월이었다. 열차를 이끄는 증기기관차의 차종은 모굴(Mogul) 최신형이라 했다. 영어사전을 보면 인도의 무굴제국 혹은 거물(巨物)이란 뜻이라 한다. 인도의 무굴제국은 300년간의 영화를 끝으로 1857년 멸망하고 영국의 식민지로 편입되었다. 조선이 일본에 개항하기 20년 전의 일이다.



경인철도회사에서 개업식을 거행하는데, 인천(仁川)서 화륜거(火輪車)가 떠나 삼개(麻浦) 건너 영등포(永登浦)로 와서 내외국 빈객들을 수레에 영접하여 앉히고 오전 9시에 떠나 인천으로 향하는데, 화륜거 구르는 소리는 우레 같아 천지가 진동하고 기관거(機關車)에서 굴뚝 연기가 솟아올랐다. 수레를 각기 방 한 칸씩 되게 만들어 여러 수레를 머리와 꼬리가 맞붙게 쇠갈고리로 이어 붙였는데(…)

경인선(京仁線) 개통식 광경은 독립신문에 그렇게 실렸다. 이날 이전에도 기차를 타 본 조선인은 있었다. 1876년 일본에 문호를 여는 병자수호조약(丙子修護條約)이 체결되어 수신사(修信使)로 일본에 건너간 김기수(金綺秀)다. 사절단 76명을 이끌고 동경(東京)에 간 조선국의 예조(禮曹) 참의(參議)가 이듬해 남긴 승차기는 22년 뒤 독립신문의 경인선 열차 시승기와 별반 다르지 않다.

칸마다 모두 바퀴가 있어 앞차의 화륜(火輪)이 먼저 구르면 여러 차의 바퀴가 따라 구르는데 소리가 우레 같았다. 번개처럼 달리고 바람과 비처럼 날뛰었다. 한 시간에 3~4백리를 달린다고 하는데 차체는 조금도 흔들리지 않고 편안했다. 좌우의 차창으로 산천과 집, 사람이 보이기는 했으나 앞에서 번쩍 뒤에서 번쩍 하여 도저히 종잡을 수가 없었다.

‘SEOUL ELECTRIC(서울 일렉트릭)’이라 쓰인 원형 마크 선명한 전차가 서대문~청량리 간을 시속 15㎞로 미끄러지듯 달리기 시작한 것도 1899년이었다. 가리개 없는 40인승 전차 8대는 한성의 동서를 물 흐르듯 달렸다. 사람들은 세기말의 괴이한 광경에 놀라 숨을 죽이고, 신기해 눈을 크게 뜨고 떠들썩하니 즐거워했다. 전차는 인파에 막혀 여러 번 멈춰서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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