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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동아·서울대 HK문명연구사업단 공동기획 - 문명의 교차로에서 ⑩

일본 ‘장례식 불교’는 토착문명과의 대충돌 결과물

  • 이미숙│서울대 인문학연구원 HK연구교수·일본고전문학 mslee82@snu.ac.kr

일본 ‘장례식 불교’는 토착문명과의 대충돌 결과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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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587년 4월 병석에 누운 요메이 대왕이 “짐은 삼보(三寶=불교)에 귀의하고자 하니, 신들은 이 문제를 논의하라”며 불교 귀의를 원하면서 불교와 신도는 다시 한 번 정면으로 부딪치게 되었다. 요메이 대왕은 불교를 들여온 긴메이 대왕의 아들이며 일본 최초의 불교신자인 소가 이나메의 손자인 만큼 어릴 때부터 신심이 깊었다. 왕이라는 정치적 입지 때문에 불교와 신도의 균형을 꾀해왔지만, 죽음을 앞에 두고 개인적으로 불교에 귀의하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물론 왕의 바람은 숭불파와 배불파의 갈등만 키운 채 이루어지지 않았고, 그는 즉위한 지 2년도 채 안 되어 숨을 거두었다. 그리고 바로 숭불파와 배불파의 마지막 싸움, 일본 최초의 종교전쟁이 일어난 것이다.

그런데 592년 10월, ‘왕의 살해’라는 희대의 정치사건이 일어났다. 살해된 왕은 587년 종교전쟁 끝에 왕으로 옹립된 스대왕이었다. 어느 날, 스대왕은 조정에 헌상된 멧돼지를 보고 이렇게 말했다.

“언제쯤이면 이 멧돼지가 목이 베인 것처럼 내가 못마땅해하는 사람을 벨까.”

소가 우마코를 살해하겠다는 뜻을 비친 것이다. 이 사실은 바로 소가 우마코에게 전해졌다. 그 다음 달 군신들 앞에서 왕은 자객 손에 살해당했다. 왕이 자신을 즉위시켜준 외삼촌 소가 우마코에게 불만을 갖게 된 배경에는, 그의 세력에 눌려 왕으로서 권력을 발휘하지 못한다는 점도 있었다. 하지만 더 큰 이유는 그의 지원으로 세력을 확대해나가는 불교와 유교 등의 외래문명 탓에 자신의 존재기반이 흔들릴지 모른다는 위협을 느꼈기 때문으로 보인다. 왕으로서의 권위는 신도에 바탕을 두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한 사회평론가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이 시대 일본에 들어온 것은 불교만이 아니었다. 유교와 도교도 들어왔다. 따라서 맹자가 이론화한 역성혁명사상도 들어왔다. 이 시대 중국은 수나라가 건국된 지 10여 년밖에 지나지 않았을 때였다. 왕가가 왕을 계속 낼 수 있는 전제가 되는 것은 아마테라스 신의 후손이라는 신화에 의거한 것이기에, 신도를 부정했을 때 일어날 수 있는 위험을 스대왕은 알아차린 것이다. 그 때문에 그는 숭불파의 추대로 왕이 되었지만, 배불파로 돌아섰고 소가 우마코와도 대립하게 되었다. 왕을 암살할 만큼 이미 숭불파인 소가 우마코의 세력은 단단했다.”

스대왕이 암살당한 뒤 일본 최초의 여왕인 스이코 대왕이 592년에 즉위했다. 여왕의 나이는 39세. 그는 긴메이 대왕의 왕녀로 이복 오빠인 비다쓰 대왕의 비였다. 그녀 또한 소가 우마코의 조카였다. 소가 우마코는 당연히 스이코 대왕 때도 국정의 중심이었고, 이때 여왕의 조카인 열아홉 살의 우마야도 왕자가 섭정으로 정치에 나서게 되었다.

고대 일본 토착문명과 충돌한 불교

소가 우마코가 비다쓰 대왕 이래 4대에 걸쳐 정치적인 실권을 쥘 수 있었던 것은 자매 두 명이 긴메이 대왕의 비였기 때문이다. 결국 그 두 왕비의 소생 가운데서 3명의 조카가 대왕으로 즉위했다. 스이코 대왕이 즉위한 것은 왕가와 소가 우마코 사이의 타협으로 보인다. 여왕이라면 좀 더 쉽게 휘두를 수 있을 거라는 소가 우마코의 계산과 그와 정면으로 대립하고 싶지 않았던 왕가의 계산이 맞아떨어진 것이다. 그리고 실제로 정치의 전면에 나선 게 오늘날 쇼토쿠 태자로 불리는 우마야도 왕자였다.

스이코 대왕 때 불교는 왕의 명령을 받은 소가 우마코와 우마야도 왕자에 의해 융성해졌고, 절도 잇따라 건립되었다. 고대 일본에서 불교가 드디어 시민권을 얻게 된 것이다. 이렇듯 가장 먼저 소가씨가 받아들인 불교는 차츰 왕가와 다른 씨족들에게 수용돼 사원이 건립됐다.

다른 나라와 마찬가지로 일본의 초기 불교는 씨족 불교의 성격을 띠고 있었다. 그러다 645년 다이카 개신(大化改新) 이후부터 중앙집권체제가 진척되면서 씨족들이 세운 절은 차츰 관사(官寺)로 변해갔다. 더불어 사원과 승려 또한 국가기구에 편입되면서 국가 불교로 이행되었다.

불교를 둘러싼 논쟁은 당초부터 정치적 대립 성격이 강했다. 소가씨가 불교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인 것도, 모노노베씨가 배불파로서 맞선 것도, 그리고 비다쓰 대왕의 불교 탄압도, 스대왕이 숭불에서 입장을 바꾼 것도 모두 그들의 정치적인 입장과 얽혀 있었다는 점을 부정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고대 일본에 전래된 불교는 단순히 종교적이며 정치적인 문제에만 영향을 미친 게 아니었다. 불교는 일본열도의 전통적이며 폐쇄적인 사회구조와 의식형태를 변혁시킬 수 있는 힘을 지니고 있었다. 한자로 기술된 교의를 이해하고 사원을 건립하며 금동불을 제작하는 데는 높은 지식과 기술이 필요했다. 즉, 불교에는 ‘문화’가 수반돼 들어왔던 것이다. 불교는 수준 높은 문화복합체였던 만큼 6세기 중반 고대 일본 사회의 토착문명과 충돌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 대륙의 선진국들은 불교를 받아들이고 있었기에, 불교는 선진문화의 상징으로서 동경의 대상이었다고도 볼 수 있다. 따라서 선진문화를 동경해 불교에 귀의하는 사람도 당연히 많았고, 불교 자체보다도 기술 습득 등 현세 이익을 추구해 귀의하는 사람도 많았다.

배불파의 대표로서 수구적일 수밖에 없는 모노노베씨와 숭불파로서 개혁적일 수밖에 없는 소가씨의 불교를 둘러싼 논쟁은 종교 대립이라는 겉모습을 띠고 있었지만, 이 또한 토착문명과 외래문명의 충돌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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