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12월호

한 해의 끝에서 생각한 산다는 것은?

  • 장석주| 시인 kafkajs@hanmail.net

    입력2011-11-23 15:5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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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 해의 끝에서 생각한 산다는 것은?
    물은 차고 기온은 떨어졌다. 유실수의 열매는 남아 있지 않고, 노랗고 붉게 물든 나뭇잎들도 다 졌다. 엽록소를 잃은 잎들은 나무에게 아무 쓸모도 없다. 여름 내내 왕성한 광합성 작용을 하며 나무의 성장과 생존에 일조하던 나뭇잎들은 쓸모를 다한 뒤에 나무 밑동으로 떨어져 썩어서 제 자양분이 나무의 뿌리에 돌아가도록 한다. 숭고한 헌신이다. 11월 하순이 지날 무렵부터 몸통과 날개의 푸른빛을 잃고 갈색으로 변해버린 사마귀들이 나타난다. 사마귀의 몸통은 굵고 통통하다. 여름의 날씬한 유선형 몸통을 가진 사마귀가 아니다. 그 움직임 역시 풍을 맞은 노인같이 눈에 띄게 느리다. 살 날이 많이 남아 있지 않다는 증거다. 얼마 지나지 않아 놈들은 마른 풀밭에서 생의 최후를 맞는다. 기온이 영하로 떨어질 무렵 무당벌레들은 살아남기 위해 필사적으로 실내에 들어오려고 한다. 욕조의 물 위에도 무당벌레가 뜨고, 온기가 도는 방바닥에도 무당벌레가 기어 다닌다. 이들은 용케도 살아남은 것들이지만, 많은 무당벌레가 문틈에 끼어 몸통이 으스러지거나 사람의 발밑에 깔려 죽고, 남은 것들은 말라 죽는다. 겨울은 곤충에게 혹독한 시련의 세월이다. 산란을 마친 곤충들은 덧없는 생을 마치고, 여러 해를 사는 뱀이나 곰들은 깊은 동굴을 찾아 동면을 취한다. 살아 있는 것들은 하나도 예외 없이 몸을 움츠려 에너지 손실을 적게 하면서 겨울의 혹독한 환경에서 살아남기 위해 생명의 최소주의에 기꺼이 타협한다.

    경쟁은 생명의 본질

    “생명은 경쟁이다.” 이 문장은 타이베이 출신의 작가 겸 화가인 류융의 책 ‘살아간다는 것, 경쟁한다는 것’을 읽다가 발견한 것이다. 잠시 이 문장을 앞에 두고 숙연해졌다. 경쟁의 궁극은 내가 살기 위해 남을 죽이는 것이다. 사람과 사람은 생명으로서 평등하고, 사람과 사물은 물(物)에 작동하는 중력의 계율 안에서 평등하다. 그러나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는 기어코 경쟁에 뛰어든다. 그게 상생과 상극의 이치 속에 있는 사람의 운명이다. 용케도 살아 있는 동안 모든 경쟁에서 이긴 사람이라도 결국은 자연 수명을 다한 뒤에는 죽는다.

    “우리는 살아가야 하기 때문에 죽인다. 결국 이 우주에서 가장 거대한 살육의 주인공은 바로 나를 낳고, 나를 기르고, 나를 넘어뜨리고, 나를 데려가는 하늘이 아니겠는가!”(류융, ‘살아간다는 것 경쟁한다는 것’)

    경쟁이라는 어휘는 이미 ‘장자’의 ‘제물론(齊物論)’편에 나타난다.



    “쫓음이 있고 다툼이 있다. 有競有爭.”

    먼저 ‘경(競)’은 ‘추구하여 쫓다’라는 뜻이다. 다음에 ‘쟁(爭)’은 ‘승부를 다투다’라는 뜻이다. 개인 간의 다툼은 싸움이고, 나라 간의 다툼은 전쟁으로 이어진다. 경쟁은 더도 아니고 덜도 아닌 생명의 본질이다. 경쟁에서 이겼다는 것은 먹히지 않고 먹었다는 뜻이요, 출세했다는 뜻이다. 그것은 일견 인생의 성공으로 비칠 수도 있다. 그러나 경쟁에 이겨 얻은 승리가 영구한 것은 아니다. 한 번 경쟁에 이긴 사람은 더 큰 경쟁에서 지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러니 지혜로운 사람은 그런 무한경쟁 속에 자신을 몰아넣어 마음을 황폐하게 만들지 않는 법이다. 노자도 도(道)를 깨달은 사람은 생명이 처한 경쟁의 굴레에서 홀연히 벗어난다고 적었다.

    “오직 다투지 않으니, 천하에 그와 다툴 자가 없다. 옛날에 이른바 굽히면 온전해진다는 말이 어찌 허튼소리겠는가! 참으로 온전하게 도로 돌아가는구나. 夫唯不爭, 故天下莫能與之爭. 古之所謂曲則全者, 豈虛言哉! 誠全而歸之.”(‘도덕경’ 22장)

    어느 날 작가는 사마귀 한 마리를 포획해서 ‘애완’으로 기르면서 먹이를 주고 병을 고쳐주고 짝을 찾아주면서 그 생태를 낱낱이 기록하기 시작했다. 그 많은 곤충 중에서 하필 사마귀라니! 사마귀는 다른 곤충들을 잔인하게 잡아먹는 ‘킬러’가 아닌가. 어쨌든 류융은 사마귀를 잡아 기른다.

    “번개 같은 속도로 기습하고, 맛을 볼 때는 침착하게 조금씩 음미하고, 날카로운 침을 꽂은 뒤에는 산처럼 움직임이 없다.”(류융, 앞의 책)

    그러면서 생물의 세계에 작동하는 ‘이치’들을 깨닫는다. 그 이치로 가 닿은 핵심이 “상생과 상극의 이치, 강한 자와 약한 자의 운명, 그리고 어쩔 수 없는 삶의 모습”(류융, 앞의 책)이다. 날이 갈수록 사는 일이 팍팍하다. 하루하루가 생존의 몸부림이라고 할 만한 고투(苦鬪)다. 그 고투는 대부분 경쟁의 형식을 취한다. 살아간다는 건 그런 경쟁 속에 내던져져 있다는 뜻이다. 그 경쟁이 늘 공정하게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더 많은 불공정한 경쟁 속에서 삶을 이어간다.

    “사회는 겉으로는 대단히 점잖게 예교(禮敎)를 요구하지만, 그 밑바닥을 보면 정도(正道)를 벗어난 일들이 층층이 깔려 있다.”(류융, 앞의 책)

    우리 삶이 팍팍하고 사는 게 고달픈 것은 바로 그런 까닭이다.

    작은 것들의 정치

    한 해의 끝에서 생각한 산다는 것은?

    반값 등록금을 촉구하는 대학생들의 촛불집회.

    한 해를 살아냈다는 것은 한 해 동안 있었던 크고 작은 경쟁에서 나를 지켜냈다는 뜻이기도 하다. 겨우 나를 지켜냈으나, 가슴은 공허하고 마음은 황폐하다. 왜 그럴까? 자기동일성을 떠받치는 것은 경쟁에서의 이김이고, 그것은 필연적으로 피로를 낳는다. 나도 모르게 존재하는 것의 피로함이 누적된 탓에 나는 그토록 공허하고 황폐했던 것이다. 경쟁보다 우리 삶을 제약하고 규정하는 것은 ‘정치들’이다. ‘정치들’은 우리를 어딘가에 귀속시키며 그 대가로 안정된 자아를 보장한다. 국가 권력이 정치 지형을 바꾸고 우리 삶을 더 나은 것으로 혁신시켰던가? 변화의 미시적 기원은 ‘작은 것들의 정치’에 있다. 그 거점 공간은 공적 영역이 아니라 부엌 식탁과 같은 일상생활이 이루어지는 곳이다. 비(非)이데올로기적 프레임 안에 있는 부엌 식탁은 ‘대화’를 하기에 좋은 공간이고, 여기에서 이루어지는 대화와 토론으로 힘없는 사람들은 정치적인 자율성을 얻고 거시적인 정치에 대안을 만들어냈다. 그 움직임은 자살 폭탄이나 테러와 견주어서 정말 작고 미미해서 밖으로는 잘 드러나지 않는다. 큰 정치와 격절된 식탁 주변에서 일어나는 ‘작은 것들의 정치’는 작은 것들이 모여 힘을 만들고 결국은 정치의 장에서 변화를 일궈낸다. 제프리 골드파브는 한국의 촛불 시위를 ‘작은 것들의 정치’의 한 예로 이해한다.

    “외부인으로서 그리고 비전문가로서 촛불 시위에 대한 나의 일반적인 이해는 다음과 같다. 대중적인 인터넷 공적 포럼인 아고라를 통해, 한 열네 살 중학생 소녀가 2008년 4월 초에 미국산 쇠고기의 수입을 재개하려는 정부의 조치를 막기 위해 서울시청 광장에서 촛불 집회를 열 것을 요청했다. 초기의 시위에 참여한 사람들은 대체로 열네 살에서 열일곱 살 사이의 중학교와 고등학교의 청소년이었다. 이들은 문자 메시지를 통해 광우병의 위험과 미국산 쇠고기 수입 재개 문제에 대해 논의하고 있었고, 이후 행위의 필요성에 대해 느끼게 되었다. 그들은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관심과 우려를 보여주기 위해 처음에는 상대적으로 작은 집단에서 만났지만, 이들이 제기하는 문제에 대한 관심이 좀 더 커다란 사회집단들에서 가시적이게 됨에 따라 그 시위들에 대한 강한 반응이 나타났다. 광장에서, 도시와 전국에 걸쳐 좀 더 커다란 일련의 촛불 시위가 뒤따라 일어났고, 이는 6월10일에 전국적으로 100만 명이 참가했던 대규모의 촛불 시위를 이끌어냈던 것이다.”(제프리 골드파브, ‘작은 것들의 정치’)

    이제 ‘작은 것들의 정치’는 세계적인 현상이다. 1989년에 동유럽 ‘식탁과 불법 서점, 시낭송회’와 같은 작은 공간을 거점으로 삼은 ‘작은 것들의 정치’는 마침내 공산주의 체제를 무너뜨리고 거대한 정치적 전환을 이뤄냈다. 2011년 튀니지, 예멘, 바레인, 리비아, 이집트 등 중동에서 일어난 힘없는 사람들을 중심으로 하는 ‘작은 것들의 정치’는 새로운 변화를 이끌어내는 중이다. 2011년 10월, 시민연대의 대표로 서울시장선거에 나선 박원순이 기존 정치권력의 지원을 받은 여당 후보를 물리치고 서울시장에 당선함으로써 기존 정치의 역학구도를 요동치게 만든다. 이것도 ‘작은 것들의 정치’가 일군 혁신의 좋은 예다.

    이집트, 리비아… 그리고 박원순

    우리는 정치들의 작은 틈새에서 겨우 자아를 보존하고 살아간다. 그러나 앞으로는 이 힘없는 것들이 정치적 대안 세력으로 주목받을 것이다. 정치들의 작은 틈새에서 겨우 존재하는 작은 것들이 일으키는 변화와 혁신은 21세기의 중요한 정치적 대안이 될 것임을 이미 증명해 보인 바 있다. 20세기의 뛰어난 사회학자인 어빙 고프먼은 이렇게 적는다.

    “어딘가에 속해 있지 않다면, 우리에게는 그 어떤 안정된 자아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사회적 단위에 대한 완전한 헌신과 애착은 자아 없음을 의미한다. 한 명의 개인이 되었다는 의식은 좀 더 넓은 사회적 단위로의 끌어당김이 있을 때 나타날 수 있다. 우리의 자의식은 그런 끌어당김에 저항하는 작은 방식들을 통해 생길 수도 있다. 우리의 지위는 세상이라는 단단한 건축물들에 의해 뒷받침되지만, 개인적 정체성에 대한 우리의 의식은 종종 갈라진 틈새 사이에 존재한다.”(어빙 고프먼, ‘공적 제도의 숨겨진 세계’, 여기서는 제프리 골드파브, 앞의 책에서 재인용.)

    우리는 정당에 소속되지 않고 능동적으로 정치 행위에 가담하지 않더라도, 일상 속에서 작은 정치를 한다. 식탁에서, 거리에서, 생맥주집에서. 누군가 대화를 하거나 혹은 소셜 네트워크에서 상호소통하는 글을 올리면서. 실은 우리가 일상 속에서 행하는 말과 행동은 대부분 미시적 정치행위들이다. 인터넷에 접속하고 대중적인 인터넷 공적 포럼인 ‘아고라’에 올라 있는 글들을 열람하고, 거기에 댓글을 달면서, 우리는 거침없이 정치 속으로 뛰어들어간다. ‘작은 것들의 정치’가 더 큰 정치의 틀을 바꾸고, 새로운 전제정치적 위협에 맞서는 힘이 될 수도 있다. ‘작은 것들의 정치’가 저 리비아에서 오래된 독재자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정치를 이끌어냈다.

    “작은 것들의 정치는 개인적인 인간 존재와 무언가 새로운 것을 세계로 가져오는 역량 사이의 연계를 가능케 하는 사회적 재료다. 사람들은 그들 사이에 존재하는 공간에서, 그들의 상호작용에서, 상황을 재정의하고 그 과정에서 그들의 세계를 바꿀 수 있다.”(제프리 골드파브, 앞의 책)

    아무리 비정치적인 사람이라도 정치인들의 무능과 부패에 대해서는 환멸을 느낀다. 정치의 무능과 부패가 거짓과 괴담이 창궐하게 만드는 근본 요인이다. 거짓과 괴담은 사회의 안정적 토대에 균열을 일으킨다. 거짓과 괴담들, 선동(煽動)의 말들에 지친 나를 위로하는 노래가 있다. 한 해의 끝자락에서 자꾸 이 노래가 나도 모르게 입술을 비집고 흘러나온다.

    “우리는 말 안 하고 살 수가 없나. 날으는 솔개처럼/권태 속에 내뱉어진 소음으로 주위는 가득 차고/푸른 하늘 높이 구름 속에 살아와/수많은 질문과 대답 속에 지쳐버린 나의 부리여//스치고 지나가는 사람들이 어느덧 내게 다가와/헤아릴 수 없는 얘기 속에 나도 우리가 됐소/바로 그때 나를 보면서 날아가 버린 나의 솔개여/수많은 관계와 관계 속에 잃어버린 나의 얼굴아//애드벌룬 같은 미래를 위해 오늘도 의미 있는 하루/준비하고 계획하는 사람 속에서 나도 움직이려나/머리 들어 하늘을 보며 아련한 솔개의 노래/수많은 농담과 진실 속에 멀어져간 나의 솔개여/수많은 농담과 진실 속에 멀어져간 나의 솔개여/멀어져간 나의 솔개여”(이태원 노래, ‘솔개’)

    온전한 ‘나’로 사는 기쁨

    나를 생동하게 하는 ‘의미 있는 하루’는 어디에 있는가? 누가 그것을 내게서 뺏어갔는가? 왜 우리의 삶은 평화롭고 고요하고 충만한 대신에 불안하고 초조하고 분주하기만 한 것인가? 수많은 질문과 대답 속에도 덧나고 찢긴 삶의 문제에 대한 근본적인 해결책은 없다. 우리는 우리가 자초한 소용돌이 속에서 살아간다. 존재의 소모, 숨 막힐 듯한 권태, 바닥을 모르는 추락…, 이것들을 만든 것은 바로 우리 자신이다. 이 세계에서 산다는 것은 수많은 관계와 관계 속에 산다는 뜻이다. 그런데 사람과 사람을 잇는 말들은 소음이 되고, 권태는 자아와 삶의 의지를 갉아먹는다. 내 삶이 빈곤해지고 고갈됨으로써 내 안에 깃들어 있던 ‘솔개’는 저 멀리 날아가버렸다. 우리 내면과 잇닿지 않은 농담과 진실들이 ‘솔개’를 내쫓는다. 이 노래에서 ‘솔개’는 내면의 진실을 전달해주는 메신저다. 그 ‘솔개’가 아득하게 멀어짐으로써 우리는 더 이상 내면의 목소리를 들을 수 없게 되었다. 진실을 담지 않은 말들 속에서 내 삶은 더없이 가볍고 공허해진다. 그때 삶은 피상적이 되고 의미를 머금을 수 없는 상태로 떨어진다.

    한 해는 덧없이 끝난다. 도심의 거리는 쏟아져 나온 인파로 붐빈다. 밤은 인공조명들로 번쩍거리고, 소음은 도심의 거리를 집어삼킨다. 나는 흥청거리는 무리에서 떨어져 차라리 고립을 선택하고 나만의 고독 속으로 걸어 들어가련다.

    “혼자 있는 능력은 귀중한 자원이다. 혼자 있을 때 사람들은 내면 가장 깊은 곳의 느낌과 접촉하고, 상실을 받아들이고, 생각을 정리하고, 태도를 바꾼다.”(앤서니 스토, ‘고독의 위로’)

    나는 고요 속에서 혼자 있고 싶다. 절대로 고독에서 도망치지 않겠다. 그러나 밖이 시끄러우니 애써 힘쓰지 않으면 스스로 고요하기는 힘들다. 밖이 시끄럽고 혼란스러운 것은 내 안이 바로 그렇기 때문이다. 밖이 고요하면 그 고요를 각성하는 내 안의 고요도 홀연히 깨어난다. 내 안의 고요는 우주와 하나 되는 일체감 속에서 충만해진다. 나를 감싼 고요는 나에게 온전한 ‘나’로 살아 있다는 기쁨을 선물로 준다. 저 멀리 날아갔던 ‘솔개’가 내 가슴으로 다시 돌아온다. 내가 찾은 행복, 내가 찾은 충만한 평화는 내면의 고요 속에 오롯하게 있었던 것이다.

    “내면이 고요할 때만 나는 바위, 풀, 동물이 머무르는 고요함의 영역에 다가갈 수 있다. 마음의 소란함이 잦아들 때만 깊은 차원에서 자연과 하나 되어, 지나친 사고 작용이 만들어낸 분리된 존재라는 느낌을 넘을 수 있다. 생각은 생명 진화의 한 단계이다. 자연은 생각이 생겨나기 이전에 존재하는 순진무구한 고요함 속에 머무른다. 나무, 꽃, 새, 바위는 스스로의 아름다움과 성스러움을 알지 못한다. 인간은 고요해지면 생각 저편으로 넘어간다. 생각 저편의 고요함 안에는 앎과 맑은 마음의 차원이 존재한다.”(에크하르트 톨레, ‘고요함의 지혜’)

    한 해의 끝에서 생각한 산다는 것은?
    장석주

    1955년 충남 논산 출생

    1979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 동아일보 신춘문예 문학평론 입선

    동덕여대, 경희사이버대 출강

    저서: ‘느림과 비움의 미학’ ‘지금 어디선가 누군가 울고 있다’ ‘몽해항로’ 등


    헨리 데이비드 소로는 삶의 정수를 빨아들이며 깊이 있는 삶을 살고 싶어서 문명세계를 버리고 숲으로 들어갔다. 소로가 숲에 갔듯이 우리는 고요 속으로 들어간다. 고요 속에 머물며 내면을 들여다보라! 내면에서 울려나오는 목소리를 들어라! 그 목소리에 따라 뜨겁게 살라! 저기가 아니라 여기에서, 과거나 미래가 아니라 바로 지금 이 순간을!

    | 함께 읽으면 좋은 책들

    ● 류융 | ‘살아간다는 것 경쟁한다는 것’ | 유소영 옮김 | 푸른숲, 2006

    ● 제프리 골드파브 | ‘작은 것들의 정치’ | 이충훈 옮김 | 후마니타스, 2011

    ● 앤서니 스토 | ‘고독의 위로’ | 이순영 옮김, | 책읽는수요일, 2011

    ● 에크하르트 톨레 | ‘고요함의 지혜’ | 진우기 옮김 | 김영사,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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