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1월호

종로 네거리에 해가 저물고 스커트 짧아져 에로 각선미

1920년대 서울

  • 박윤석│unomonoo@gmail.com

    입력2011-12-21 10:5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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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5장)

    종로 네거리에 해가  저물고 스커트 짧아져 에로 각선미

    1929년 즈음 조선총독부와 광화문통 일대.

    신년호 신문은 무사히 나왔다. 새해에 인사이동 하는 총독부 관리와 판사들 명단이 1면에 그득하다. 그 사이사이 조선인 이름도 보인다. 사회면에는 인사동의 조선극장에 격문이 살포된 사건 이후 검거인원이 속속 불어난다는 소식이 눈에 띈다.

    광주학생사건의 진상을 발표하라, 검거 학생들을 무조건 석방하라-이런 내용의 유인물이 극장에 뿌려진 것은 12월13일이었다. 금요일 저녁, 1·2층 객석을 가득 메운 관객은 유니버설사 제작의 할리우드 희극 영화 한편을 보고 나서 가슴이 다 시원해졌다는 표정이 되었다. 그리고 화장실을 다녀와서 다음 차례인 연극에 심각히 빠져들고 있었다. 극단 토월회(土月會)가 공연하는 레프 톨스토이 원작의 ‘부활(復活)’-일명 ‘카튜샤’였다.

    번역 각색 연출을 도맡은 박승희(朴勝喜)는 대한제국의 초대 주미공사 박정양(朴定陽)의 아들이다. 동경 유학시절 김기진·복진 형제와 이서구 등 제각각 전공이 다른 학생들과 어울려 1923년 토월회를 만들었다. 귀국해 이 조선극장에서 첫 공연을 한 것이 6년 전이다. 이후 창립 동인들은 일찌감치 각자의 길로 흩어졌고 학생극단은 직업극단으로 개편해 해산과 재건을 거듭해왔다. 막대한 유산을 쏟아 부으며 부침을 겪어온 박승희의 토월회는 지난달 11월부터 조선극장에 겨우 다시 자리를 잡고 상설 공연을 해오던 참이었다. 흥행을 위해 활동사진 사이에 연극과 무용을 끼워 넣었다. 연극은 일주일 안에 새것으로 교체된다. 토월회의 재기 공연작은 박승희 각본의 ‘아리랑 고개’였다. 토지를 잃고 북간도로 가는 실향민 가족의 궁핍상을 감상적으로 묘사한 이 연극은 배우와 관객이 함께 울음판을 이룰 정도로 큰 반응을 이끌어냈다.

    13일 밤 8시45분, ‘부활’의 무대에 19세기 후반 러시아 복장을 한 배우들 앞으로 조선식 양복을 입은 30세가량의 남자가 튀어나왔다. 그리고 삐라를 뿌리며 일장 연설을 했다. 그는 배우가 아니었고 그가 하는 것이 연기가 아님을 관객은 곧 알게 되었다. 남자는 2층 객석을 향해 고개를 쳐들고 마치 배우처럼 우렁찬 소리로 격렬한 대사를 쏟아내었다. 50전을 주고 2층에 입장한 관객과 30전 내고 1층에 입장한 관객 모두 한마음이 되어 일제히 기립 박수와 함성을 보냈다. 극장에 배치되어 있던 경찰관 몇 명이 달려들어 그를 체포했다. 극장만큼 다중이 집합하는 시설도 드물기 때문에 객석 뒤편 요지에는 경찰이 상주하는 임검석(臨檢席)이 마련돼 있다. 자리를 못 찾은 관객들은 가끔 이곳에 앉아 있다가 혼쭐이 나기도 한다.



    한꺼번에 요동치는 관객들로 극장 출입문이 부서지는 소란이 벌어졌다. 종로경찰서에서 자동차로 출동한 경찰이 극장을 엄중 경계했다. 광주학생사건 발생 40일이 지난 때였다. 그동안 서울에서는 학생들의 가두시위로 1200명 이상의 학생이 체포된 뒤였다. 불합리한 사회구조와 인간애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제기하는 대문호 톨스토이의 사상에 심취해가던 관객은 도중에 자리를 털고 일어서야 했다. 예정대로라면 연극관람 뒤에는 떠오르는 현대무용가 조택원(趙澤元)이 미녀 무용수와 듀엣으로 이뤄내는 댄스를 감상하고 이어서 미국 FBO영화사의 초특작 영화 한 편을 더 보게 되어 있는 프로그램이었다. 이날은 새 프로그램으로 교체된 첫날이었다.

    한 주 전에도 조선극장에는 큰 소동이 있었다. 무대에는 최승희(崔承喜)가 올라와 있었다. 3년간의 일본 유학과 공연을 마치고 이번 여름에 귀국한 이래 처음으로 서는 국내 무대였다. 평소 조선극장의 프로그램에다 ‘무용, 극, 영화의 밤’이라는 타이틀을 붙여 최승희의 무용을 특별공연하는 행사였다. 영화담당 신문기자단이 후원했다. 12월5일 목요일 저녁 일찌감치 매진된 극장 앞에는 몰려드는 손님과 되돌아가는 인파로 대만원을 이뤘다. 금요일까지 이틀간으로 계획되었던 공연은 토요일 하루를 더 연장해 주야 2회를 추가하기에 이르렀다.

    “오랫동안 침묵을 지키고 예술완성에 정력을 쓰던 조선무용계의 총아 최승희 양이 어여쁜 자태로 출연”하고 “조선극단 초유의 환영을 받은 토월회의 아리랑고개 상연에는 많은 팬을 가진 여배우 김연실(金蓮實) 양도 출연한다”는 기사가 미리부터 도하 신문에 실렸다. 신문들은 ‘독자 우대권’이라 해서 관람료 할인 쿠폰도 지면에 발행했다. 입장료는 평소보다 비싸 2층 80전, 1층 50전이었다.

    종로 네거리에 해가  저물고 스커트 짧아져 에로 각선미

    정통극을 국내에 처음 도입한 극단 ‘토월회’ 창립동인들. 맨왼쪽이 박승희다. 무용가 최승희(오른쪽 사진)는 당대 최고의 인기를 누렸다.



    잘 가라 1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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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올 연말 서울에서는 많은 사람이 체포되었다. 그들은 경찰서를 거쳐 서대문형무소로 보내져 경성지방법원의 검사와 판사의 손에 운명이 결정될 것이다. 전국으로 우송된 격문 중 일부가 신문사로 보내진 것도 경찰은 문제 삼고 있다고 한다. ‘조선에 자유 있거라, 조선에 행복 있거라.’ 독자에게 보내는 신년인사가 신문 한 귀퉁이에 실려 있다.

    한림은 편집국 문을 밀고 나가 어두운 복도를 건너 계단 입구에서 멈춰 선다. 그리고 화장실로 들어간다. 나무 격자에 세로 두 줄로 사단씩 끼운 정방형의 창틀 너머로 북악과 북한산이 가득 펼쳐진다. 그 연봉들 위로 습기 가신 겨울의 하늘이 암청색 막판 빛을 떨어뜨리고 그 아래 경복궁, 총독부 그리고 태평통 거리가 인왕산 넘어가는 낙조를 반사하고 있다. 이 건물에서 유일하게 북향인 이 화장실의 시야를 한림은 좋아한다. 거세지는 서북풍에 유리창은 가볍게 떨고 있다. 기온은 이제 떨어지고 있다.

    어디로 갈까. 실내에도 거리에도 발길이 분주하다. 남이 자는 시각 밤을 새웠지만 한림은 해 기울어도 남들처럼 서둘러 가야 할 어디가 없다. 어두운 하숙집 골방 낮은 미닫이문 드륵 소리 내고 들어가 냉기 가득한 허공에 팔 저어 십 촉 전구 켜는 일은 오늘 싫다. 식구란 무엇인가…. 이웃은 무엇이며 민족은 또 무엇인가. 결혼하고 가정 꾸려 줄줄이 자식 생산하는 사람들이 대단해 보인다. 독립운동 하러 떠난 사람들은 가족도 버리고 가는 용기가 우러러 보이고, 여기서 식구와 엎드려 사는 사람들은 그 끈기가 존경스럽다.

    창문 아래 태평통 네거리 비각(碑閣) 앞길에 한림 또래의 남자가 고개를 숙이고 어깻죽지 늘어뜨린 채 망연히 서 있다. 땅바닥에 쓰러진 쌀 봉지를 바라보는 그의 낯빛은 불콰한 듯 흙빛이다. 일찌감치 취한 석양 술에 쌀 한 봉지 사들고 귀갓길에 오르다 그만 놓쳐버린 모양이다. 흩어진 쌀알들이 칙칙한 포장도로 위에 희게 빛나고 옆으로 행인들이 종종걸음으로 지나친다.

    계단을 내려서며 한림은 처음 이 계단을 올라오던 3년 전을 떠올린다. 이전에 신문사는 저 경복궁 동쪽 북촌 구석에 단층 한옥 두어 채를 이어붙인 집이었다.

    현관을 나서는데 수위가 쪽지를 건넨다.

    - adiau 1929

    만년필 펜촉에 남색 잉크로 씌어 있는 낯익은 글씨다. 잘 가라 1929년. 그런 뜻이다. 유행이 식지 않는 에스페란토다. 아듀, 혹은 아디오스 같은 유럽어의 변형인데 아디아우-라 발음한다. 언제 또 만날지 모르는 막연하고 긴 이별, 사전 풀이는 그렇게 전한다.

    얻은 것은 이데올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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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20년대 사진기자들. 경성지방법원에서 독립운동 인사들을 촬영하기 위해 기다리고 있다.

    “옛것은 멸하고 시대는 변했다. 내 생명은 폐허로부터 온다,”

    독일 고전주의 문학의 양대 거성인 프리드리히 실러의 시구에서 따왔다는 폐허(廢墟)라는 이름의 동인지에 안서(岸曙) 김억(金億)이 자작시 폐허(Ruino)를 에스페란토로 써 발표한 것이 1920년이다. 10년 가까운 보급으로 이제 에스페란토를 모르는 사람도 아디아우, 한 번씩은 들어보았을 정도가 되었다. 에스페란토 강습소를 만든 기자 김억 외에도 편집국장 이광수와 기자 박헌영은 신문의 에스페란토 강좌란에 기여했고, 옛 편집국장 홍명희는 자기 호를 에스페란토의 선구라는 의미를 담아 벽초(碧初)라 지었다 한다.

    한때 이 만국어를 구국운동의 진보적 수단으로 여기는 경향이 있었다. 에스페란토를 제2 국어로 하자는 여론이 일본 일각에서 일어났을 정도였다. 조선의 신문과 방송은 새로운 문화로서 에스페란토 강좌를 실시해왔다. 일어와 영어와 한어가 비슷한 세력 균형을 보이는 조선에서 에스페란토는 새 희망과도 같은 신비한 색채로 다가왔다. 마치 마르크스주의와 레닌주의가 그러했듯이.

    한 10년 위력을 발휘한 사회주의운동이 정점을 지나는 듯 보이는 것처럼 에스페란토의 인기도 전만은 못해 보인다. 에스페란토 이니셜을 따 카프(Korea Artista Proleta Federatio)라 부르는 조선 프롤레타리아 예술가 동맹이 힘을 잃어가는 모습도 에스페란토와 닮았다. 조선공산당이 창건되던 1925년 카프 결성을 주도한 박영희(朴英熙)는 프롤레타리아 문학운동의 지도적 지위에서 내려서면서 요즘 카프 활동에 회의를 보이고 있다는 소식이 들린다. 올해 카프의 동경(東京)지부에서는 임화(林和)가 주동이 되어 ‘당(黨)의 문학’이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조선 프롤레타리아 예술의 주도권을 거둬갔다.

    “항상 프로예술운동에 대해서 비관과 탄식만 하고 앉았을 따름입니다.”

    지난해 이맘때 서대문 밖 그의 천연동(天然洞) 집을 방문한 부인기자 최의순(崔義順)을 냉기 사르르 도는 문간방 서재에 앉혀놓고 박영희는 그렇게 심정을 토로했다.

    “아주 냉방이올시다. 하루에 한 번씩은 땝니다만…. 이 방석이나 깔고 앉으십시오.”

    그는 방 아랫목 쪽에 외따로 놓인 책상 앞 하나뿐인 방석을 내주며 그렇게 말했다. 회월(懷月) 박영희의 명성 앞에 다소곳이 앉아 그의 다정한 어조와 태도에 감격하면서 최의순은 “아-과연 정신이 나는 방이다. 그러나 좀 컴컴해서 너무 침울한 기분에 싸이게 되는구나” 그런 생각을 했다고 한다. 이 방에서 훗날 무용가 최승희는 배필이 될 안막(安漠)을 대면하게 된다. 박영희가 중매를 선 것이다.

    지금 조선에서 문학가의 위상은 지성의 봉우리 격이다. 그것도 대중적 지성이다. 음악이나 그림이나 연극 영화와 같은 대중예술이 꽃을 피우고 있는 구미와 일본에서도 그러한데, 시청각을 자극하는 대중문화라 할 게 달리 없는 조선에서 문학은 고급예술이자 대중문화다. 따라서 문학가는 지성인이자 유명인이자 인기인이다. 최소한 지난 10년 문학과 문인은 그렇게 대접받아왔다. 경제적으로는 어떤지 몰라도 최소한 정신적으로는. 그 대중의 시선을 한몸에 받는 유명 지성인이 어두운 창 아래 불 꺼진 구들장 위에서 전망의 부재를 온몸으로 드러내 보이고 있다.

    “조선에 사실 착실히 서재생활을 계속하고 있는 분이 몇이나 될까요. 너나 할 것 없이 생활난이 앞을 서니 자기 즐기는 연구에 맘과 정신을 기울일 여지가 어디 있습니까. 나 역시 그러한 불행한 처지에 있는 한 사람입니다. 더욱이 나의 연구하는 프로문학을 이 조선 땅에서는 아직 실현해볼 수 없는 경우에 있으므로 과연 기막힐 따름입니다. 근일에는 전연 쓰는 것을 정지하고 있습니다. 써야 소용이 없고 또 그 무슨 힘이 쓰게 두지도 않습니다그려. 옛 강태공이 시절 낚고 안았듯이 요사이 나는 때만 기다리고 있습니다. 주야 읽는 것이 경제에 관한 서적입니다.”

    이날로부터 만 5년 뒤 그는 “얻은 것은 이데올로기며 상실한 것은 예술 자신이었다”는 고백을 담은 평론을 신문에 쓰게 된다.

    생활의 문학

    3년 전 카프의 이론과 입장을 대변해 프로문학을 신흥문예로 규정한 홍명희(洪命憙) 역시 이즈음 별반 다르지 않은 처지였다.

    항상 복작복작하는 종로 4정목 네거리 일대에서도 더욱 빽빽이 들어선 상점들 틈에 있는 듯 없는 듯 끼어 있는 집을 최의순이 지난해 연말 찾았을 때 홍명희는 “아무 값없는 사람으로서 날마다 되는대로 생활하고 있을 뿐”이라 말했다.

    “평시에 너무 어지러운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요사이는 더욱 그렇습니다. 유행하는 말로 ‘타락’했다고 할는지요. 도무지가 여의치가 못해서 순전히 돈 한 가지에 즉 생활난에 오로지 정신을 뺏기고 있으니 기막힙니다. 전일과 같이 규율 있게 독서도 못할 뿐 아니라 오랫동안 내 품에 두었던 좋은 책도 무수히 팔아먹었습니다. 요사이 신문에 기재되는 임꺽정전도 내 취미와 특별한 목적이 있어서 쓴다는 것보다 먹기 위해서 매일 쓴다는 것이 솔직한 고백입니다. 과연 한심한 세태를 만났지요. 너나 할 것 없이….”

    근대 조선 삼대 천재의 하나라 불리는 벽초는 그렇게 말하며 고개를 푹 숙였다. 그 감개무량한 표정을 본 최의순은 그가 현 조선인 학자의 설움을 철저히 맛보고 있는 것으로 느꼈노라 기사에 썼다. 배오개시장의 시끄러운 소리가 그의 집을 둘러싸고 있었다. 시장의 주역은 배오개의 거상 박승직 같은 사람이지 홍명희는 아닌 것 같았다.

    박승직을 비롯한 종로상인들이 이곳을 동대문시장으로 개편하고 광장주식회사를 세워 시장 경영을 시작한 것은 을사조약 무렵이었다. 보부상을 거쳐 포목상으로 축적한 자본으로 광장시장의 경영권을 확보한 이들은 토지가옥 매매와 금전신탁으로 사업을 확장했다. 적어도 종로 바닥에서 집이나 돈에 관한 문제라면 예지동(禮智洞) 4번지 시장 내에 위치한 광장주식회사 사람들이 최고 권위자들이다.

    “신흥문학은 유산계급문학에 대항한 문학일 것이며, 생활을 떠난 문예에 대항한 생활의 문학일 것이며, 구 계급에 대항한 신흥계급의 사회변혁의 문학일 것이다.”

    벽초가 카프의 준(準)기관지 ‘문예운동’의 권두평론에서 이처럼 호언한 것이 1926년 벽두였다. 그리고 만 1년 뒤 그는 신간회의 출범을 앞두고 그 주도자의 입장에서 ‘현대평론’ 창간호에 다음과 같이 썼다. 조선의 고질화된 적전분열 풍속이 식민지 해방과 봉건잔재 청산의 이중 과제 앞에서 좌우익의 새로운 갈등으로 인해 재연되고 있음을 경계한 발언이었다.

    “신간회의 나갈 길은 민족운동만으로 보면 가장 왼편 길이나 사회주의운동까지 아울러 생각하면 중간 길이 될 것이다. 중간 길이라고 반드시 평탄한 길이란 법이 없을 뿐 아니라 이 중간 길은 도리어 험할 것이 사실이요, 또 이 길의 첫머리는 갈래가 많을 것도 같다.”

    연하장 주고받는 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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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극영

    하나코의 쪽지를 접어 가슴 포켓에 넣는 한림의 곁으로 최의순이 지나간다. 곱슬한 머리에 앙증스러운 체구에 큰 눈이 역대 여기자 중 가장 모범생 타입이다. 붙임성 있고 반가운 눈빛에 말소리가 고와서 만나는 사람마다 호감을 산다고들 한다. 배우 복혜숙은 그를 가리켜, “원체 바탕이 미인인데다가 걸음걸이 곱고 뒷맵시 고와서 양장도 어울리고 검정치마 흰저고리 받쳐 입으면 여학생풍으로도 어울리고, 머리 쪽찌고 긴치마 발뒤꿈치에 질질 흘리며 노랑갓신 받쳐 신은 고전적 아씨 되어도 어울리고, 아마 역대 여기자 중 넘버 원”이라 평한 바 있다. 잰 발걸음으로 현관을 나서는 그는 전차를 타고 청량리에 내려 부군이 아이와 함께 기다리는 가정으로 아마 직행할 것이다. 휘문고보 교사인 남편은 동경 유학 중 방정환(方定煥) 윤극영(尹克榮) 등과 함께 어린이 문화운동단체 색동회를 발족하고 어린이날을 제정한 진장섭(秦長燮)이다. 동화도 쓰는 남편과 그녀는 둘 다 아담한 몸집이어서 병아리 부부로 불린다. 일찍이 일본으로 건너가 고등여학교와 동경여자고등사범을 졸업한 최의순이 귀국했을 때 조선여자로서 화학을 전공한 첫 사람이라고 신문에 인터뷰 기사가 났다. 몸이 너무도 약하니까 좀 쉬고 나서 일을 해보겠다고 한 그 때가 23세였으니 지금 25세다.

    학교라고는 소학교 하나만 졸업하고 동경에는 가보지도 못한 하나코는 상냥하지 않고 약하지도 않다. 한림이 알기로는 사요나라~같은 인사말도 하지 않는다. 일본말도 그렇지만 조선말 역시 참 인사말이 적고 단순하고 멋없다며 안녕히 가셔요, 오셔요도 잘 안한다. 어쩌다 얻어들은 대로 아디아우-장난스레 한마디 하곤 한다. 그렇게 연하장 대신 쪽지 한 장 놓고 갔나보다. 아마 몇 사람 앞으로 보내는 외상값 내역을 현관에 맡기고 가는 길이었을 게다. 얼마 전 하나코는 난생처음 만년필을 갖게 되었다. 조지아(丁子屋) 백화점의 계절말 대매출 행사 때 경품으로 받은 것이라 한다. 유행하는 파이로트 만년필이다.

    요 몇 년 사이 조선인 사이에도 연하장(年賀狀) 주고받는 것이 퍽 늘었다. 나라가 망하기 전에는 없던 풍속이다. 회사나 관청에 다니거나 그런 사람들과 접촉하는 사람들 위주로 시작되더니 이젠 여기저기 ‘근하신년(謹賀新年)’이다. 몇 십 장 받는 것은 보통이고 몇 백 장 받는 사람도 있다 한다. 유명인사나 기업인들은 수천 장씩 받기도 하는 모양이다. 풍속이 한 해가 다르다.

    아디아우…잘 가라 1929년. 속으로 중얼거리며 한림은 정문을 밀고 나섰다.

    광화문 없는 광화문

    황토현(黃土峴)이던 곳, 태평통 네거리에 전차가 십자로 교차한다. 종로를 지나 서대문정(西大門町) 높아지는 길을 따라 지는 해를 바라보며 올라가던 전차는 서대문 언덕을 향해 꺾이면서 시야에서 벗어난다. 서대문은 14년 전에 사라졌다. 전차가 사라진 자리에 흥화문(興化門)이 경희궁 빈터를 지키고 서 있다. 궁의 전각들은 뜯기어 여기저기로 흩어져 사라졌다. 경희궁의 뒤편, 사직(社稷)을 품은 인왕산의 능선 위로 해가 기운다. 훗날 흥화문은 뜯기어 장충단(奬忠壇) 옆 이등박문의 추모사찰인 박문사(博文寺)의 정문으로 옮겨간다. 마치 임진왜란 때 조선 땅에서 베어진 코들이 바다 건너 일본에 옮겨졌듯.

    태평통 네거리 혹은 광화문 네거리, 여기서 광화문(光化門)은 보이지 않는다. 광화문은 뜯기어 경복궁 건춘문(建春門) 위로 옮겨간 지 2년이 넘었다. 마치 코를 떼어 귀에다 갖다 붙이듯. 네거리의 모서리, 종로가 시작되는 초입에 비각이 서 있다. 고종 즉위 40주년을 축하하기 위해 1902년 세워진 기념비전(紀念碑殿)이다. 전각의 편액은 당시 황태자인 순종이 썼다.

    종로 네거리에 해가 저물어

    엿장사 영감님 지나가누나

    가위소리 딱딱딱딱 엿목판 메고

    설렁설렁 다니는 늙은 엿장사

    종로 네거리에 해가  저물고 스커트 짧아져 에로 각선미

    1920년대 서울 종로 경찰서

    외딴 오두막처럼 선 비각을 길 건너로 바라보며 한림은 광화문 우편국을 지난다. 지은 지 3년 된 2층 청사다. 매년 최신식 건물이 올라가고 있다. 우편물을 부쳤는지 돈을 부쳤는지 점원 풍의 소년 하나가 홀가분한 표정으로 흥얼대며 우편국을 나선다. 요사이는 오나가나 ‘종로 네거리’ 이 노래다. 일본노래 ‘남경정(南京町)’에 조선말을 붙인 번안 가요라 한다. 조선인은 참 노래를 부르기 좋아하고 그 솜씨도 좋다고 일본인들은 칭찬한다.

    벽돌에 타일을 장식한 현대식 건물 안에서 우편국 직원들은 정리에 분주하다. 연하장 접수를 마감한 어저께는 군중이 쇄도해 대혼잡을 빚었다. 오늘은 특별히 집무시간도 6시까지 연장하고 임시 직원까지 늘려 우편물을 접수했다. 아마 저이들도 어제의 나처럼 오늘 밤을 새워야 할는지 모른다. 저들보다 더 고생하는 사람들은 전화교환수들이다. 같은 건물 안 광화문 전화국에는 연말 전화통화 급증으로 하루 평균 8만 회 이상이 호출되고 있다. 평상시보다 40%가량 많은 통화다. 지난해 연말에 비해 24% 늘어났다. 본정의 중앙전화국은 11만 통이 넘는다.

    신정이 설이냐 구력 정월이 설이지, 그런 관념은 여전하지만 조선인의 시가지인 종로거리는 몇 해 전보다 확실히 양력 설 기분이 농후해졌다. 연말 대매출도 있다. 남촌과는 비교가 되지 않지만 그 영향을 받아가는 것이다. 남촌의 일본인 상가는 내일 정초에는 완전 철시하지만 조선인 상가는 평일과 다름없이 문을 열 것이다. 남산 조선신궁에서 4시부터 제야제(除夜祭) 행사가 시작되었다고 한다. 좀 있다 밤 8시가 되면 전통 의식에 따라 1년의 은혜에 감사하는 제를 올린다고 한다.

    종로네거리에는 크고 작은 상점들 문이 평시와 다름없이 열려 있다. 그 입구에 보신각이 몰락한 양반의 사랑채 모양 풀죽은 듯 퇴락해가고 있다. 그 뒤에 압도적 덩치로 버티고 선 한일은행에는 오늘 하루 통장 든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안전지대를 찾아서

    경찰도 오늘 밤을 새울 작정인가. 보신각과 대각선으로 마주 보고 있는 종로경찰서로 들어간다. 길 하나 사이의 종로 2정목 기독청년회관(YMCA) 옆 건물에서 이리로 이번 가을 이전했다. 경성법원이 1년 전 정동의 신축 청사로 옮겨가고 비어 있던 건물이다. 숱한 시국사건의 재판이 여기서 이루어졌다. 이리로 들어온 사람들의 다음 행선지는 대개 서대문형무소였다. 이곳 서쪽 담장을 타고 들어가는 청진동과 공평동을 경계 짓는 샛길은 유독 바람이 드세고 끊이지 않는다. 몽고사막에서 만주의 먼지를 몰고 압록강을 건너 북한산을 넘어오는 바람이라 한다.

    종로경찰서 고등계는 맹렬히 활동 중이다. 얼마 전부터 삼청동 권모의 집에서 중앙청년동맹 소속 사상운동자들을 중심으로 20여 명이 모여 일대 시위운동을 일으키기로 의논하고 오는 4일을 기하여 시행하려고 한 것이 사전에 발각이 되어 검거를 시작했다. 현재 검거된 사람은 모두 12명. 그중 권모는 30일 결혼식을 마치자마자 검거되었다.

    새해를 맞는 날이라고 남들은 즐거워하는 이날에 경찰서 유치장 안에 들어앉아서 묵은 해를 보내고 이날을 맞이하는 사람은 경기도경찰부 20명 종로서 63명 동대문서 15명 서대문서 26명 본정서 29명 용산서 16명 합 169명이다.

    권모라고만 하고 신원을 밝히지 않은 것은 일당의 체포에 방해가 되지 않게 경찰이 신문사에 요청하는 사항이다. 동지들이 신문을 보고 체포망을 벗어나는 사례가 많이 있었다. 사상운동자라 함은 사회주의자들을 뜻한다. 연말의 밤을 지새울 야근 기자가 일찌감치 나와 취재 메모를 정리하고 있다. 그는 오늘 밤 여기 오래 머물러야 할 것 같다며 배달된 설렁탕을 옆에 두고 있다. 뚝배기를 덮은 신문지 귀퉁이의 영화 광고를 한림은 무심히 바라본다.

    종로 네거리에 해가  저물고 스커트 짧아져 에로 각선미

    1920년대 할리우드의 ‘여신’그레타 가르보.

    그레타 가르보 주연의 ‘육체의 악마’. 미녀를 둘러싸고 두 사람의 벗이 애욕의 심연에 빠지려고 한다. 로맨스 무비의 걸작. 유나이티드 아티스트 회사 초 특작. 관철동 우미관.

    가르보는 을사조약 두 달 전, 그러니까 한규설 이완용 내각이 구성되고 관부연락선이 운행을 개시하던 즈음 스웨덴에서 태어났다. 기미년 만세운동이 일어나던 해 가출해 백화점에서 모자 판매원 생활을 하다 어느 날 대표 모델로 발탁됐다. 어느 모자를 써도 잘 어울리는 가르보는 백화점을 들른 영화감독에게 스카우트되었다. 조선의 신여성과 모던걸은 서양의 패션은 거의 다 시도해보고 있는데 끝내 난관에 부딪히는 것 중 하나가 모자다.

    한림은 경찰서를 나선다. 정문 앞에서 종로 길을 횡단해 길 가운데 전차 정류장을 지난다. 안전지대 위에서 많은 사람이 전차를 기다린다. 아마 한강 인도교까지 가보는 이도 있을 것이다. 올가을 용산선(龍山線) 전차는 신용산 종점에서 한강인도교까지 선로가 연장되었다. 그러잖아도 한강인도교는 경성부민에게 새로 떠오른 유람지인데 이제 전차에서 내리면 바로 한강다리 위에서 한강과 주변 경관을 동서남북으로 조망할 수 있게 되었다. 원산(元山)에 생긴 스키장에 사람들이 몰린다고 아까 그 설렁탕 덮은 신문지에 써 있었다.

    부근 산야에 1척의 백설이 쌓여 있는 원산부(元山府) 교외 신풍리 스키장은 윈터 스포츠맨들로 연일 대성황을 이루는 중이다. 스키 동호자들로 조직된 원산 스키구락부에서는 28일부터 스키 강습회를 개최하고 목하 열심히 연습 중이다. 강습을 종료한 뒤에는 1월11일과 12일 이틀간 인근에 스키 원정을 할 계획이며 1월 하순이나 2월 상순에는 전조선 스키대회를 최초로 개최하려는 중이다.

    매년 새로운 문물이 생겨나고 계속 기록이 경신되고 있다. 길을 건너 뒤돌아보니 섬처럼 고립된 안전지대와 경찰서 정문이 일직선으로 겹친다. 전차를 기다리는 나를 자동차의 행렬 속에서 지켜주는 안전지대. 이는 도로 한가운데 선로 가에 한 뼘가량 높이로 둔덕을 쌓은 것에 불과한 사실상 무방비 지역이다. 멀리서 보면 흐르는 강물의 뗏목 위에 서 있는 것 같기도 한 안전지대는 실은 언제 자동차가 뛰어들지 모르는 위험 지대다. 달리는 전차를 자동차가 들이받는 일이 다반사다. 경기도 경찰부는 올해부터 경성 교통의 최대 위험물인 자동차에 준열한 제재를 가하기 시작했다. 속도계를 일본에서 들여와 과속을 단속해 택시회사 운전사들에게 영업정지 처분을 내리기 시작했다. 전국에서 하루 평균 13건의 교통사고가 발생해 하루 한 명꼴로 사망하고 있다.

    그래도 서울은 안전한 편이다. 만주에 있는 동포들은 이번 가을부터 전쟁 난리를 겪었다. 러시아 수중에 넘어가 있던 동북삼성(東北三省) 지역의 철도 관리권을 중국이 무력으로 회수하려다 빚어진 충돌이었다.

    양국 국경 송화강 상류에 양군의 충돌이 점점 악화되고 포성이 맹렬하여 일대 주민은 불안 공포에 싸여 하얼빈 기타 안전지대에 피란하였다. 하얼빈은 피란민으로 대혼잡을 이루어 한 집에 몇 살림씩 있게 되었다. 가장 곤란한 사람들은 흑룡강성을 중심으로 길림성 동북 국경지대에 거주하는 40만 동포다. 이들 조선 농민은 안전지대를 찾아 피란을 하려 하나 어디 갈 여비도 없으려니와 설혹 여비가 있다 하더라도 어디 가서 안전히 있을 곳이 없는 형편이라 한다. 중러 관계가 만약 더욱 험악하게 된다면 그들의 장래가 적잖이 염려된다.

    고래 싸움에 새우등 터지는 난리는 마침내 이번 달 상순에 조선 국경 부근까지 파급되었다. 대대로 살던 따뜻한 고향을 떠나 낯설고 추운 북쪽 땅으로 국경을 넘어 피난민처럼 간도에 정착한 사람들이 이제 다시 피란 보따리를 싼다. 간도(間島)발 기사는 이렇게 전해왔다.

    요사이 훈춘(琿春) 국경 방면에 러시아군 진출설이 전하므로 훈춘에 거주하는 주민들은 안전지대를 찾아 조선 및 간도 지방으로 피난하는 중이다. 연길 현(縣)정부에서는 피난민 수용소를 설치하고 곡식을 공급하기로 했다.

    간도에서 오는 이 같은 기사는 주로 길림성 장춘(長春)지국에 주재하는 최형우(崔衡宇)가 보내는 것이다. 최형우는 신문지국 일을 보는 한편으로 간도지역 공산무장단체인 길흑(吉黑)농민동맹에 가입되어 있다. 그 리더는 이 지역 항일무장운동 단체인 조선혁명당의 실력자 이종락(李鍾洛)이었다. 중학생이던 만 17세의 김성주(金成柱)가 공산주의 청년 서클에 가담한 뒤에 찾아갔다는 곳이 이종락 부대다. 훗날 최형우는 김성주에게 일성(一星)이란 호를 지어주었다고 전한다. 나중 김성주는 운동가들이 으레 하듯이 김일성(金日成)이란 변명(變名)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재즈가 춤을 추는 종로 한복판

    어둠이 내리는 종로 네거리에 전차 자동차 버스가 연이어 경종(警鐘)과 경적(警笛)을 울리며 지나간다. 십자로 한가운데는 푸른 완장을 팔에 두른 교통 순사가 손을 이편으로 저편으로 들었다 올렸다 한다. 한림은 파출소 앞을 지난다. 안에 순사가 난로를 끼고 앉았다. 길 건너 종각 모퉁이에 어린 걸인들이 주인 없는 강아지처럼 떨고 앉았다. 호객꾼들이 바늘 사려, 실 사려, 싸구려, 어쩌고 떠들며 본격 야간 영업에 나섰다.

    집에서 저녁을 먹고 난 무료한 사람들은 살 것이 있건 없건 일단 이 거리로 나와 한번 거닌다. 일을 파한 사람들도 바로 귀가하지 않고 이곳을 들른다. 사람을 만나도 여기서 만나고 새로 월부로 사 입은 옷 자랑을 하려 해도 여기로 나온다. 그리하여 사람의 물결을 이루고 서로가 서로를 구경하며 헤치고 다닌다. 그 사이로 쓰리꾼이, 기생을 참칭하는 매춘부가 암약한다. 희망에 불타는 남녀학생이 지나가는 한편에 교활하고 방탕한 부랑학생이 지나친다. 단란한 가족과 여염집 부녀와 단정한 여학생이 한쪽에서 물건을 사고, 저 쪽에선 으슥한 골목으로 쓱 사라지는 사람이 있다.

    어둠이 내리기 무섭게 ‘히야까시(희롱)’ 걸려고 1정목 2정목을 수차례씩 왕복하는 청춘들이 도처에 그득하다. 에도 시대 아사쿠사(淺草) 재생지 공장 직공들이 끓는 물에 낡은 종이를 녹여 식히는 동안 근처 유곽 거리 유녀들을 희롱하고 다니던 데서 유래한 말이라는 설이 있다. 그냥 무료함을 달래려 실없이 값만 물어보고 다닌 것이 그때의 ‘히야까시’라면 지금은 실제로 거래하는, 혹은 돈을 거론하지 않고 곧잘 연결되기도 하는 진지한 탐색전이다. 모든 사람이 모여드는 종로는 모던 인종의 집산지요 신유행의 발상지며 연애거래소다. 종로는 어느새 긴자(銀座)라는 별칭까지 얻었다. 2정목을 동 은좌, 1정목을 서 은좌라 부르곤 한다. 쓰리군은 노점과 인파로 번잡한 동 은좌를 좋아하고 거리의 천사, 혹은 스트리트 걸은 서 은좌를 좋아한다는 말도 있다.

    재즈가 춤을 추는 종로 한복판

    스커트 짧아져서 에로 각선미

    황금의 무덤 속에 순정을 묻고

    싸구려 장사치가 사랑을 파네

    순 국산 가요 ‘종로’가 김능인 작사, 문호월 작곡, 서상석 노래로 3년 뒤에 출현한다.

    경찰서 옆 바람골을 타고 내려오는 북서풍에 떠밀리듯 한림은 종로 네거리를 벗어나 남으로 내려간다. 청계천에서 올라오는 밤의 냉기가 가까워진다. 광교를 넘어선다. 남대문 1정목의 시작점이다. 북촌과 남촌의 경계지대 개천가에 하나코의 카페는 외따로 있다.

    유모레스크 멜로디, 찰스턴 춤곡

    현대문명의 행진곡이라 할는지 인간생활의 퇴폐적 경향이라 할는지 요새 경성을 비롯하여 웬만한 도시에는 새빨간 등불에서 파란 술을 따라주는(紅燈綠酒) 웨-트레스의 요염한 교태가 어린거리는 카페가 점점 흥왕하여가는 반면으로, 향락을 쫓아다니는 젊은 여자와 남자가 서로 어울리는 곳이라 여러 가지 풍기상 좋지 않은 일도 많으며 그대로 방임하면 수습치 못할 결과를 빚어낼 염려가 있어…

    총독부 경무국이 카페의 단속방안을 연구 중이라 한다. ‘풍기문란의 대본영(大本營) 카페를 엄중단속’이라는 제목의 기사가 석 달 전에 있었다. 조선의 카페 역사가 일천한 관계상 일본의 사례를 조회해 최선의 종합대책을 수립하리라는 당국의 의지가 천명되었다 한다. ‘웨이트레스 공포시대가 올 터’라는 인상적인 부제도 붙었다. 하나코는 박장대소했다.

    “박열과 후미코는 폭탄 구입하려다 감옥 갔는데 한림과 하나코는 술 마시다 잡혀 가겠네. 박열과 후미코는 천황 암살하러 그랬다는데 한림과 하나코는 무엇하러 술 마셨다 그럴까.”

    박열 부부의 일본 천황 암살 기도 사건은 워낙 충격파가 커서 6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일본과 조선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다.

    “밤이면 이 술집에서 저 카페로 마치 광견(狂犬)과 같이 싸다니는 사이비 인테리겐차의 꼴이란….”

    홍일점 동료 여기자 최의순은 그런 글을 어디다 쓴 적이 있다. 이러한 지탄을 의식하면서도 한림은 가끔 이리로 발길을 옮기곤 한다.

    웨트레스라는 서양 궁전의 시녀 이름 같은 직명을 가지고 애틋한 유모레스크의 멜로디가 흘러나오는 가운데 대리석 테이블과 테이블 사이를 상냥하게 돌아다니는 그들의 걸음걸이는 얼마나 무용적이며 선정적이냐. 레코드에서 흐르는 찰스턴 춤곡에 맞춰 부드러운 어깨와 엉덩이가 뇌쇄적으로 흔들거릴 때 술기운을 띠고 빙그레하는 사나이들의 황홀한 색정은 담배연기를 타고 실내를 원귀(寃鬼)와 같이 헤매인다. 테이블 밑에서 불안한 밀회소를 만들어 번개같이 주고받는 선물, 짜릿한 악수, 꽃봉오리 터지는 듯이 빵긋하는 눈, 회심의 미소. 그 소곤거림의 비밀을 누가 알랴.

    이번 가을 잡지 ‘별건곤’에 실린 글처럼 이쯤은 되어야 보통의 카페라고 할 수 있겠는데 그런 점에서 하나코의 카페는 카페 축에 들지도 못한다. 시설도 음악도 다르고 종업원도 손님도 적다. 오늘은 그나마 종업원 한 명뿐이다.

    밤 열시-그것은 카페에 있어서 황금시각이다. 해 넘어가는 석양의 수면에 나타나는 물고기 떼와도 같이 현대의 젊은이들이 분 냄새 나는 젊은 여자의 값싼 웃음으로부터 부서지는 환락의 부스러기를 찾아서 네 발 빼라, 내 발 데밀자 하고 들이미는 시각이다. 이랏샤이마세! (어서오십시오) - 이 식탁 저 식탁에서 피어오르는 웨-트레쓰(女給仕)들의 육성은 명랑은 할망정 어디까지나 기계적이다. 마치 풀리는 태엽을 따라 소리치는 레코드(축음기판)와도 같이.

    신문 연재소설에까지 자주 등장하는 카페의 대중적 풍경을 여기서는 찾기 힘들다. 이곳은 그저 현대식 주막일 뿐이다. 서서 먹고 후딱 가는 선술집도 아니고 방석 깔고 기생과 노는 요릿집도 아니고 그렇다고 우두커니 허공에 흩어지는 담배 연기와 실없는 소리 속에 시간을 흘리는 찻집도 아닌. 그래서 한림은 한창 유행 중인 일본식 문화주택에 빗대어 이곳을 문화주막이라 스스로 명명했다. 하나코 외에 누구에게 발설한 적은 없고 그냥 혼자 그렇게 여기고 있다. 목로(木?) 나무탁자 하나 두고 서서 간단히 마시는 선술집은 재래식 주막의 계보를 이어가며 여전히 번창하고 있다. 일본인들도 자기네 다치노미와 비슷하다며 애용한다. 서울에서 거의 사라져가는 주막은 또 한 갈래로 흘러 내외주점을 낳았다. 남녀 내외가 엄격하던 시절, 생계가 막연한 여염집 아낙네가 차린 술집이 그 원조다. 내외지간에 마주 대면하지는 못하고 문 사이로 팔뚝만 내밀어 술상을 건네주었다고 팔뚝집이라고도 부른 내외주점은 이제 술 한상 핑계 삼아 골방에서 온 몸을 걷어붙이고 수작을 벌이는 색주가로 변질되었다. 이에 도전장을 내밀 듯 상스러운 업태 경쟁에 불이 붙어 마침내 업종이 무엇이든 육체로 최종 승부를 내는 정체불명의 상행위가 속출했다. 우동 갈보집, 빙수 갈보집이 그 한 보기다. 식당 갈보라는 용어도 나돈 지 오래다. 낯선 체험이 속출하고 있다. 전통에서 튕겨져 나온 사람들은 어리둥절, 모던을 변태적으로 체화하고 있다.

    자정을 기해 동경의 아사쿠사 관음당((淺草 觀音堂)에서 제야(除夜)의 종이 울린다고 한다. 하나코는 주방에 물을 올려놓고 라디오 수신기를 점검한다. 이 행사는 JODK 경성 라디오 방송으로 조선 전역에 70분간 중계된다고 한다. 처음 있는 일이다. 지난해 제야에는 남산 경성신사 아래 일본 절 동본원사의 종소리가 라디오를 타고 나왔다.

    뜨거운 물에 담갔다 꺼내온 일본 청주 도쿠리 하나가 한림 앞에 놓였다. 카페에서 이런 차림은 잘 취급하지 않는다. 맥주 아니면 위스키가 주종이다. 웨이트리스가 그것을 원하기 때문이다. 잡지 ‘별건곤’의 글은 계속된다.

    고달픔 잊게 하는 활동사진

    없는 기교를 다한 오색 전등이 구석구석 위험한 취객을 상대하여 꿈꾸듯이 앉아 있는 술 마신 계집애들을 지키고 있다. 향수와 연기의 키스. 방 안은 연녹색 불빛에 푸르다. 그러나 방안은 묘지와 같이 이상하게도 울적하지 않은가. 테이블 위에 쌓이는 병과 대접의 시체. 영어상표를 허리에다 두른 번지르한 양주병. ‘브랜디를 가져오너라’ ‘벨모트를 따라라’ 박꽃만치 작은 유리잔에는 40전 짜리 파문이 웃고 있다. 폐부를 찌르는 듯 고함치는 계집들의 인사 소리를 따라 연방 갈아들고 나는 객의 물결. 점원, 학생, 중학교선생, 기자, 모뽀, 부랑자…더러는 택시로 더러는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잠자는 밤거리에 흩어진다.

    11시를 지난다. 극장 상영이 끝날 시간이다. 단성사와 조선극장, 그리고 우미관이 토해낸 인파가 종로 3정목에서부터 2정목을 거쳐 종각 너머 1정목까지 종로 바닥에 퍼질 것이다.

    회색광선이 스크린 위에 움직이기 시작할 때 우리는 진종일 격무에 시달린 피곤을 시원스럽게 잊어버린다. 프랑스 풍경이 나오고 영국의 산수가 비치고 대양(大洋)의 고래사냥이 나오고 알프스의 백설이 보이고 러시아 청년들이 이야기를 걸고 구미(歐米)의 귀여운 여배우들이 해수욕복만 입고(…) 활동사진이 우리의 고달픈 넋을 고히 어루만져 준다. (…) 고마운 것이 스크린에서 샘물같이 수없이 우리들을 향하여 흘러나온다.

    활동사진에서 사람들은 어디서도 얻기 힘든 위안을 받는다. 그리고 활동사진에서 생활의 지침을 얻기 시작한다. 모던보이 모던걸은 활동사진에서 본 대로 춤을 춘다. 사랑의 수단과 방식을 스크린에서 취한다. 짝을 고를 때도 외국 배우를 떠올린다. 외모도 점점 달라져가고 있다. 무엇보다 신여성들의 걸음걸이가 달라지고 있다. 여간 멋지지 않다. 걸음걸이에 혁명이 있어났는가. 한림의 동료 기자였고 여인에 조예가 남다른 이서구는 분석한다.

    전에 처녀들은 무릎 아래로만 걸었다. 그러나 지금의 처녀들은 넓적다리에서부터 전진을 한다. 그리하여 걸음마다 멋진 타입이 표현된다. 터벅터벅 활보를 할 때마다 그들의 눈동자는 무엇을 그리는 듯 또는 세상을 초개같이 보는 듯 두 가지 중 한 가지 빛을 나타낼 때가 많다. 그들의 걸음걸이에 마음이 쏠려 시선을 기울였던 사람은 다시 그의 동자에 넋을 잃고야 말 것이다.

    영화가 보여주는 대로 행동하는 신세대의 귀에 예절이니 규율이니 하는, 듣기만 하여도 가슴이 막히는 케케묵은 수작은 들어갈 틈이 없다고 전직 기자이자 영화사 극작가인 이서구는 단언한다. 근래 여학생들의 풍기(風紀)가 급변하는 데는 영화 몫이 크다고 자인한다.

    러브신이 한창 달콤할 때 부인석에서 앳된 탄성이 들린다. 여학교 2, 3학년생들이 서로 허리를 꼭 끼고 ‘아이고’ 소리를 연발하는 것을 나는 보았다. 성에 눈뜨는 처녀들이 변사의 달콤한 해설과 스크린에 비치는 사랑의 실연(實演)을 보고 가슴이 조용할 수는 없지 않은가.

    외모는 점점 멋이 들어가고 화장품 값은 날로 올라간다. 박승직 상점의 박가분은 시대를 꿰뚫어본 혜안이었다. 몸을 놀릴 때마다 반드시 활동사진 여배우의 몸짓을 표본으로 삼는 것은 기생이나 웨이트리스나 여학생이나 마찬가지다. 그래서 서로 모습이 비슷해져간다. 요사이 처녀들이 기생보다 사내를 더 잘 후려서 기생들 설 자리가 없다는 말이 나오고 있다. 카페여급들 기승에 기생들이 생계를 위협받는다고 집단행동에 나설 태세인데 이제 웨이트리스들이 모던걸의 추격을 받고 있다. 이들은 서로에게 이질감을 느끼면서도 동질감이 있었다. 할리우드의 세례를 받은 조선의 첫 세대라는 점이다. 1910년생들이 막 10대를 벗어나고 있다. 인구 500명의 농촌 할리우드가 로스앤젤레스에 병합된 그해에 태어난 이들은 조선이 일본에 병합된 경술년생, 즉 ‘병합동이’혹은 ‘합방동이’들이다. 1899년 기해년생인 한림과는 11살 차이지만 체감되는 세대차는 만만치 않다. 심하게 말하면 서로 다른 나라에 태어난 사람들이다.

    종이 울린다. 제야의 종이다. 108번 중 첫 종이다. 태평양 연안 동경에서 울린 음파가 일본 혼슈 땅 중간을 가로질러 바다 너머 독도 위를 지나 반도의 허리를 횡단해 올라 경성에 와 닿는다. 직선거리로 1100㎞ 남짓. 동경에서 규슈 서남단 끝자락이나 홋카이도 북단까지보다 조금 더 가는 거리다. 라디오문화의 혜택이 아닐 수 없다고 관영 매일신보(每日申報)는 어제 신문에 썼다. JOAK 동경방송국이 제야의 종 일본 내 실황 중계를 시작한 것은 2년 전이다. 경성방송국이 호출부호 JODK로 첫 전파를 띄운 해였다. 1929년 연말 현재 약 1만대의 라디오가 조선에 보급돼 있다. 1년 사이 54%가 늘었다.

    종로 네거리에 해가  저물고 스커트 짧아져 에로 각선미

    1920년대 말 경성방송국 전경

    만세전(萬歲前)

    백팔번뇌를 없앤다는 종소리에 맞춰 한림은 천천히 청주의 향을 들이마신다. 도쿠리에서 잔으로, 손에서 목으로 전해지는 온기를 느껴본다. 하나코는 특별 야식이라고 만든 메밀국수를 2인분째 혼자 다 먹고 있다. 섣달 그믐날에 온 가족이 난로 주변에 둘러앉아 자정을 넘기며 먹던 소바라 한다. 아버지는 북해도로 이민한 오사카 출신이고 어머니는 현지 아이누 족이다. 눈이 깊고 코가 오뚝해 얼굴 윤곽이 뚜렷한 어머니를 하나코는 닮았다 한다. 북해도를 개척하기 이전까지 혼슈(本州)의 일본인들은 북해도 원주민을 에조(하이· 蝦夷)라 불렀다. 과거 중국인이 한인을 동이(東夷)라 부른 것처럼. 아이누는 외모나 풍습 모두 홋카이도 이남 혼슈의 화인(和人)과 뚜렷이 구별된다. 눈썹은 길고, 눈과 눈썹 사이는 좁으며, 눈은 사이 간격이 좁고 쌍꺼풀이다.

    저 너머 보신각 종은 울리지 않은 지 오래되었다. 10년 전 기미년 3월1일에 누군가가 한 번 크게 울리고 도망한 일이 있었다 한다. 이전에도 종은 오랫동안 울리지 않았다. 33번 새벽종이 울리면 새 아침이 밝았고 28번 야간 종이 울리면 사대문이 닫히던 시절은 그리 머지않은 과거다. 갑신정변과 청일전쟁의 풍운을 10년 간격으로 겪고 나서 정신이 들기 시작한 사람들이 종각 앞에 모여 만민공동회를 열고 고함치던 때가 30년 저편이다.

    물이 끓고 도쿠리 하나가 더 데워지고 마지막 108번째 종이 울린다. 자정이 넘어갔다. 자동차가 종로를 독주하는 시간이다. 이 시각의 차에는 대개 술집을 나선 남녀가 타고 있다.

    짧았던 한림의 한 해가 길었던 마지막 이틀의 꼬리를 접고 완전히 넘어갔다. 또 꿈을 꾸었다.

    ‘…여객선 부두다. 오륙도 돌아드는 연락선에서 어떤 이는 고개를 푹 숙이고 배를 내린다. 어떤 이는 낙동강과 동남해 사이에 길게 누운 산줄기와 하늘을 번갈아 바라보며 감개무량한 표정을 짓는다. 그 누구든 부둣가에 위엄을 부리고 선 부산세관의 르네상스식 건물을 예외 없이 통과해야 한다. 붉은 벽돌과 화강석의 2층 건물 위에 다시 높다란 망루형 첨탑이 굽어보는 가운데 형사의 따가운 시선도 감내해야 한다. 시모노세키에서 한번 시달리고 여기서 또 한 번. 부산항은 그런 곳이다. 염상섭의 5년 전 신문연재소설의 주인공이 일본 유학 중 아내가 위독하다는 전보를 받고 귀국하는 길이다. 마치 무덤으로 들어가는 심정이다. 기미년 만세운동이 일어나기 직전 겨울이었다….’

    복잡한 사회에 나오니 머리가 어찔

    스탠드에 엎드려 잠이 든 한림을 누군가 깨웠다.

    “원근이한테 안 가볼 텐가.”

    야근기자였다. 오늘 임원근(林元根)이 출소하는 서대문형무소로 가는 길이라 한다. 5년 전 잠시나마 한 회사 밥을 먹으며 지낸 같은 또래들이다. 임원근은 1925년 11월 공산당 검거 때 징역형을 선고받고 만 4년 넘게 감옥생활을 해왔다. 동맹파업으로 신문사를 떠나 한림과 헤어진 것이 그해 5월이었다.

    하나코는 문을 닫고 한림은 택시에 올랐다. 음력 섣달 초하루를 막 지난 새벽의 천변은 달그림자도 없이 적막하다. 밤사이 기온은 급강하했다. 개울은 깡깡 언 듯하다. 사람 그림자 사라진 새벽 5 시의 종로에 인력거 하나가 달려간다.

    동대문에서 뻗어와 서대문정에 연결되는 10리 대로는 고적하다. 가로등만 졸고 있는 인적 드문 새벽 거리는 몽환경처럼 전개된다. 이러다가 곧 아침 해가 돋으면 사람들은 또 부지런히 아침밥을 해서 먹고 무심히 이 거리를 지날 것이고, 해가 지면 다시 어제처럼 수런거릴 것이다.

    경찰에겐 새벽 다섯 시가 가장 맹렬하게 활동할 수 있는 시간이다. 보통 사람으론 가장 고단하게 잠이 어릿어릿할 그때가 찾고 잡기에 영락이 없는 까닭이다. 잡으려는 고통도 여간이 아니다. 이번 여름 늦더위 속에 사회부장 현진건은 신문 연재소설에서 그렇게 썼다.

    차는 독립문을 돌아 현저동(峴底洞)의 조그마한 언덕길을 올라 높고 붉은 벽돌담 앞에 섰다. 아치형의 커다란 형무소 문이 안으로 열렸다. 기자들과 고등계 형사들 앞에서 임원근은 말했다.

    “자유 없이 지루한 독방생활로 아무 접촉이 없는 단조한 생활이었기 때문에 복잡한 사회에 나오니 머리가 어찔할 뿐입니다. 더구나 나와 보니 뜻 맞는 동지들은 거의 감옥에 들어가 있고 더구나 뜻하지 아니 하였던 선생들까지 수감되어 딴 세상 같은 느낌이 없지 않습니다.”

    그는 청진동으로 간다고 한다. 허헌과 그의 딸 허정숙이 사는 집이다. 장인 허헌은 얼마 전 신간회 간부들과 함께 이곳 형무소에 잡혀 들어와 법원을 오가며 검사의 심문을 받고 있다. 처 허정숙도 신간회의 자매단체인 근우회의 간부로서 제2차 경성학생시위운동에 개입해 조만간 아버지의 뒤를 이어 검거된다.

    임원근은 이번이 두 번째 출옥이다. 일찍이 1922년 6월 공산주의 전파를 위해 박헌영과 함께 국내로 잠입하다 검거돼 평양형무소에서 1년 반을 복역하고 풀려난 것이 1924년 1월이었다. 그때 허정숙과 주세죽은 흰옷을 지어 함께 두 낭군을 마중했고 허정숙과 임원근은 곧 결혼했다. 출옥 4개월 뒤 임원근은 박헌영과 나란히 신문사에 입사했다. 허헌이 당시 신문사의 공석 중인 사장 직무대리를 맡고 있었다. 이듬해 4월 조선공산당이 결성된 뒤 두 사람은 신문사를 퇴사하고 그해 11월 조선공산당 검거 선풍으로 다시 함께 투옥된 것이다.

    - 잘 가세.

    한림은 그렇게 마음속으로 인사하며 인파와 갈라섰다. 몇 년 만의 만남이 엄동의 새해 첫새벽에 이렇게 짧게 이루어졌다. 그의 지난 10년은 절반 이상이 감옥에서 지나갔다. 그는 앞으로 계속 사회주의 활동을 할 수 있을까. 한림은 그런 생각을 하면서, 또 원근의 감옥 바깥 생활도 여전히 독방생활인 것에는 변함이 없는 것 아닐까 생각해본다.

    미몽(迷夢)의 시대

    새해 오전이라고 해서 별다를 것도 없이 사회부는 언제나처럼 돌아가고 있다. 신년 가두 스케치 기사가 준비되고 있다. 조선인 거리에는 설 같지도 않은 설-남부 일대에만 신년 기분이 농후해, 그런 제목이 달려 있다.

    새해는 즐거운 날이지만 환경에 따라 오히려 서러워하는 사람도 있다. 새해를 원수같이 눈물과 비탄과 회한과 실망으로 맞이하는 사람이 많다. 서울의 새해 첫날을 보자. 먼저 저 남쪽부터 보자. 집집마다 문 앞에 송죽(松竹)을 꽂았다. 깃발을 달았다. 떡을 쳐서 먹고 악귀를 쫓는 도소(屠蘇)의 술을 마신다. 사람들은 새옷을 입었다. 옷깃을 펄펄 날리며 기운차게 걸어 다닌다. 웃는 낯으로 세배를 한다. 즐겁지 않으냐. 진고개 본정통의 좁은 길이 터질 듯하다. 하늘 닿게 높은 집이 따각따각 나막신 소리에 진동한다. 비단옷깃에 달려가는 강아지 새끼도 기운차게 뛴다. 인축(人畜)이 동경(同慶)이다. 집도 길도 공기도 기뻐한다. 오직 우는 자가 있으니 길가에 떨고 있는 거지 애뿐이다. 종로 네거리엔 등을 꾸부리고 으스러진 조선인이 어정거린다. 상점은 진열상의 칠이 벗겨지고 상품에 먼지가 앉았다. 먼지 털던 점원이 손이 시려서 떨채를 놓고 입김으로 두 손을 녹인다. 호-호(…)

    1월1일은 12월31일의 연장일 뿐임을 새삼 알려주는 기사도 있다.

    (…) 정초인 1일에도 쉬지 않고 사복형사대를 시내 각 학교에 파견해 엄중한 경계를 하였다는바, 그것은 수일 전 사전 발각으로 검거된 제2차 시위운동사건도 있는 동시에 이날은 각 학교가 학생들을 모아가지고 신년축하식을 하는 터이므로 혹 무슨 일이나 있지 않을까 하여 그같이 경계를 한 것이라 한다.

    미몽(迷夢)의 시대가 열리는가. 작취(昨醉)가 미성(未醒)은 아닌 듯한데 부질없는 생각이 스친다. 언젠가 독립이 되는 것이라면 이제 한 해가 지났으니 그날은 그만큼 가까워졌다고 해야 맞을 것이다. 논리적으로는 그럴 것이다. 그런데 독립의 가능성은 점점 멀어져 가는 것처럼 느껴진다. 심정적으로는 그런 것이다. 시절은 점점 혼미(昏迷)해져 가고 인심은 날로 미혹(迷惑)해져 간다. 미망(迷妄)의 시대로 접어드는 것은 아닌가.

    이렇게 해서 1930년대가 되는 것인가. 실감이 나지 않는다.

    한림의 마음은 자꾸만 1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920년 서울의 봄. 처음 신문사 생활을 시작하던 그때의 기억을 더듬어간다.

    만 스물한 살의 한림이 낯선 서울에 올라와 신문사에 출근하게 된 1920년이었다. 북해도를 떠난 열일곱의 하나코가 오사카를 거쳐 부산을 거쳐 서울로 단신 월북한 해이기도 했다.

    동아일보 / 매일신보 / 개벽 / 별건곤 / 삼천리 / 신동아 / 임형택, 우리 고전을 찾아서, 한길사, 2007

    박윤석

    동아시아 삼국의 근대를 탐구하는 연구자. 서울대학교 동양사학과를 졸업하고 동아일보에서 기자로 20년 일했다. 건국대학교 언론정보대학원에서 한국근대와 근대신문에 대해 강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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