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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략역사 부정하는 특정 학파가 교과서 조사관·심의위원

일본이 매년 교과서를 왜곡하는 이유

  • 이웅현| 국제정치칼럼니스트·도쿄대 박사 zvezda@korea.ac.kr

침략역사 부정하는 특정 학파가 교과서 조사관·심의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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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일 역사 갈등은 일본 역사교과서 검정 때마다 반복된다. 올해 일본 문부과학성 검정을 통과한 사회교과서 39종 가운데 21종(54%)이 독도를 ‘일본 땅’으로 기술했다. 독도 내용이 없던 교과서 3종은 새로 독도 영유권 기술을 넣었다. 일본 역사교과서의 이러한 경향은 일본군위안부 강제연행과 난징(南京)대학살을 부정하는 특정 학파와 그 후학들이 교과서 조사관과 심의위원으로 활동하고 있기 때문으로 분석된다. 이들의 실체는 2007년부터 드러나고 있다. 문부과학성이 제2차 세계대전 말기 일본군의 오키나와 주민 학살을 삭제하거나 수정하는 검정의견을 내놓으면서 오키나와는 분노했고, 이 과정에서 문부과학성 교과서 조사관의 어둠의 계보가 차례로 공개되고 있다.
침략역사 부정하는 특정 학파가 교과서 조사관·심의위원
매년 봄이 되면 서쪽에서 불어오는 뿌연 황사에 심폐가 상하고, 동쪽에서 날아오는 불쾌한 기사에 심기가 흐려진다. 황사는 해에 따라 농담(濃淡)을 달리하지만, 불쾌한 기사는 농도를 더해간다. 일본 문부과학성(이하 문과성)의 역사교과서 검정 결과 발표. 올해도 어김없이 도쿄(東京)에서 날아온 이 소식은 국내 언론을 소연케 했다.

지난 3월 말 “2013년도부터 사용될 일본의 새 고교 역사교과서에 독도영유권 주장이 강화됐다”는 도쿄발(發) 타전이 있었고, 대한민국 외교부는 “근본적인 시정을 촉구한다”고 항의했다. 그러곤 다시 망각의 악순환.

1982년 교과서 파동과 2000년 ‘새로운 역사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이하 새역모) 파동 때도 그랬다. 다만 그 파장이 조금 길었을 뿐이었다. 이후 해마다 번갈아가며 중고교 교과서를 검정하는 제도의 특성상, 그리고 교과서 기술과 지도의 방향을 설정하는 ‘학습지도요령’ 개정이 사이에 끼어들면서 일본의 역사교과서 문제는 주기적인 편두통이 되어왔다. 통증이 만성화되면서 감각도 무뎌졌다. 최근에는 미국 뉴저지에 세워진 일본군위안부 기림비를 놓고 일본 정치인들의 항의와 철거 요구가 이어지고 있다. 이러한 일본인들의 역사인식에도 역사교과서 왜곡 문제가 자리한다.

‘만성 편두통’

제2기 한일역사공동연구위원회 한국 측 위원장 조광은 “이 불쾌한 연례행사를 하루빨리 끝장내야 하고, 역사 문제에 대한 이견과 갈등은 연구와 대화를 통해 극복될 수 있기 때문에 역사공동연구를 재개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그러나 먼 미래를 기약하며 인내심을 가지고 양국의 역사학자들이 공동연구를 하는 것만으로 일본의 역사교과서 왜곡을 바로잡을 수 있을까? 또 학계의 상투적인 방법처럼 자국 정부에 대로 된 역사인식을 요구하는 일본의 양심적 지식인들을 초청해 그들의 아름다운 문장에 카타르시스를 느끼는 것으로 자족할 일일까?

이러한 의문을 갖게 하는 사건이 2007년 일본에서 발생했다. 그리고 이 사건으로 한 해 동안 일본 조야(朝野)가 들끓었다. 그러나 한국 정부와 언론은 거의 관심을 갖지 않았다.

2007년 9월 29일 오후 3시 오키나와 중부 서해안에 위치한 기노완카이힌(宜野灣海浜) 공원은 오키나와 주민 11만 명이 외치는 분노의 함성으로 뒤덮였다. 당시 오키나와 전체 주민이 137만 명이었으니 도민 10명 중 1명이 공원의 함성에 동참한 셈이었다. 주최 측 예상을 훨씬 상회하는 군중의 함성에 일본의 취재기자들도 고무됐다. 비행기를 타고 상공을 돌면서 집회를 취재한 ‘류큐신보(琉球新報)’(이하 신보) 기자는 “1995년 10월 미군병사의 소녀 성폭행 사건에 항의하는 주민대회(9만 명)를 능가하는 오키나와 역사상 최대의 항의집회”라고 타전했다. 지역 출신 국회의원은 물론 자치단체장, 지방의회 지도자들이 대거 참가한 이 대회에서 오키나와 지사 나카이마 히로카즈(仲井眞弘多)는 “(제2차 세계대전 말기 오키나와 주민의) 집단자결에 일본군이 관여했다는 것은 당시 교육을 포함한 시대적 상황, 그리고 (일본군이 주민들에게 자결하라며) 수류탄을 나누어주었다는 증언 등으로 미루어볼 때 감출 수 없는 사실”이라면서 “문부과학성은 검정의견을 조속히 철회하고, (자결이 아니라 일본군의 ‘주민학살’이었다는 점을) 교과서 기술에 부활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교과서검정 의견 철회를 요구하는 현민 대회’에 집약된 주민들의 타깃은 일본 정부, 특히 문과성이었다. 사태의 발단은 2008년부터 사용될 고교 역사교과서 7권에 대해 2007년 3월 30일 문과성이 발표한 검정의견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 말기 일본군의 오키나와 주민 학살(자결 강요)은 이미 1982년부터 고교 역사교과서에 기술돼왔지만, 문과성이 2008년부터 사용할 고교 역사교과서에 대해 기존의 기술을 삭제하거나 대폭 수정하도록 하는 검정의견을 붙였던 것이다. 야마카와(山川)출판사를 비롯한 5개 출판사는 ‘고교일본사’에 “섬 남부에서는 미일(美日) 양군의 사투에 휘말려 주민 다수가 사망했는데, 일본군에 의해서 참호에서 쫓겨나거나 집단자결을 강요당한 주민도 있었다”는 표현을 모두 바꾸어야 했다. 문과성에 의해 ‘오키나와전의 실태에 관해서 오해할 우려가 있는 표현’이라는 검정의견이 붙여졌던 것이다. 당연히 이 검정의견을 제시한 자가 누구인지에 관심이 모아졌고, 그 핵심 인물로 문과성 직원 두 사람이 떠올랐다.

137만 명을 분노케 한 두 사람

핵심 인물 색출을 시작한 것은 일본 민주당이었다. 4월 25일 제166회 일본국회 교육재생 특별위원회가 열리자마자 가와우치 히로시(川內博史) 민주당 의원은 “오키나와전 자결 강요와 관련한 검정의견을 제시한 자가 누구냐” “(새역모의) ‘새로운 역사교과서’를 집필, 감수한 이토 다카시(伊藤隆) 도쿄대 명예교수와 문과성 교과서 조사관인 무라세 신이치(村 涑頁信一)는 사제관계가 아니냐”며 포문을 열었다. 문과성 장관 이부키 붐메이(伊吹文明)는 “(검정심의회에는 다른 위원들도 참여해 검정의 최종판단을 내리기 때문에) 조사관이 최종적으로 검정의견을 달 수 있는 입장이 아니다. (새역모와) 검정심의회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며 검정 경과와 조사관의 명세를 밝히기를 거부했다. 그러나 가와우치의 질의는 문과성 조사관의 면면과 역할에 관한 공식적인 문제제기의 신호탄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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