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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 다큐 | 잃어버린 근대를 찾아서-마지막 회

왕세자와 파혼한 민 규수의 슬픔

1920년대 서울

  • 박윤석│작가 unomonoo@gmail.com

왕세자와 파혼한 민 규수의 슬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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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지난 회 이야기
  • 일본의 힘은 러시아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우수리스크에서 활동하던 독립운동가 최재형은 4남7녀를 남겨두고 일본군에 끌려간다. 조선인은 러시아로 쫓겨 올라가고 러시아인은 조선으로 쫓겨 내려온다. 철새는 돌아갈 때가 정해져 있지만 망명객에게는 기약이 없다.
(제13장)

왕세자와 파혼한 민 규수의 슬픔

1915년 무렵 창경원(현 창경궁)에 벚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다.

봄의 개울이 남으로 흘렀다. 창경궁 담장으로 접어든 한림은 걸음을 멈추었다. 북쪽 박석고개 마루를 넘어 곧게 뻗어 내려오던 궁궐의 동쪽 담장이 그 종점을 앞두고 안으로 살짝 꺾여 들어간다. 담장 안에서 나란히 흘러내려오던 물길이 거기서 담장 밖을 나선다. 담장은 이제 개울과 안팎을 바꾸어 흐르다가 또 한 번 크게 꺾이며 궁궐의 남단을 휘돌아 종묘의 담벼락에 가서 붙는다. 물은 담과 갈라져 동으로 머리를 돌린다.

첫 모퉁이 돌담 아래로 담장 높이만한 너비의 개천이 흘러나온다. 지난 한 주 가랑비가 이어졌고 어제 5mm의 단비가 내린 뒤라 수구(水口)의 창살을 빠져 나오는 물결이 분주히 일렁인다. 담장 안에는 담장 키 두어 배나 되는 회화나무 대여섯 그루가 연초록 잎사귀를 4월의 바람에 살랑대며 물길과 담장 사이에 옅은 그늘을 드리우고 서 있다.

왕가의 물은 창덕궁과 창경궁을 한아름에 품은 뒷산 응봉 기슭에서 발원해 후원(後苑) 깊숙한 곳 왕의 우물에서 흘러나오는 물과 합류해 연못도 이루면서 시계 방향으로 흘러 담장 안쪽을 띠처럼 두르며 내려온다. 이어 담장을 벗어나 원남동을 거쳐 인의동과 연지동 사이를 비스듬히 질러 동대문경찰서 뒤로 돌아 종로 4, 5정목으로 빠져 광장시장을 끼고 청계천에 닿는다.

물은 많이 흐려졌다. 담장 안 지척에 동물원 우리가 있다. 왕족과 궁인이 떠난 궁궐에 어디선가 잡혀온 동물들이 서식한다. 그 위편에 박물관과 식물원도 생겼다. 전각들이 자리를 내주고 헐려나가면서 궁의 이름도 창경원으로 바뀌었다. 궁궐 밖 남쪽 몇 동네는 합쳐 원남동이라는 이름으로 개명했다. 창경원은 한 울타리나 다름없는 옆 창덕궁에 순종 이왕이 살고 있지만 더 이상 왕가의 공간이 아니다. 만백성, 아니 경성부민의 놀이터다. 교통이 좋은 요즘은 전국이 하루 생활권이라 국민적 유람지가 되었다. 잡인의 범접을 불허하는 지엄한 공간이라 금천(禁川), 명당수라 해서 옥류천(玉流川)으로 불리던 개울의 이름도 물 좋던 시절까지의 얘기다. 자식 보았다고, 장 담근다고 금줄 치던 풍습보다 먼저 부정 타지 말라고 궁궐에 둘러친 금천이 사라졌다.

개울에 바짝 붙어 담장 귀퉁이에 뚫린 쪽문 하나가 사람 손닿은 지 오래인 듯 함구하고 있다. 지붕도 없이 다리 들어 넘어야 할 작고 초라한 행색이지만 궁과 그 아래 민가를 잇는 최단 통로였다 한다. 소동문(小東門)이라 하여 일꾼들이 뻔질나게 드나들던 비상구였다.

선인문의 사계

원남동에서 전차를 내린 한림이 창경궁 동남쪽 귀퉁이의 개울과 담장을 지나 거슬러 오르는 동안 종점에서 돌아내려온 전차가 총독부의원 앞에 멈추었다. 올라갈 때 가득했던 전차는 텅 비어 두어 승객을 태운다.

낯익은 동대문경찰서 직원이 길 건너 함춘원동 언덕길을 뛰어내려오면서 전차 운전수에게 손을 흔든다. 왕궁의 바깥 정원이던 함춘원은 그 다양하던 나무들과 함께 사라지고 동산에는 총독부의원이 넓게 들어서 있다. 그 맨 선두에 적벽돌과 화강암의 웅장한 본관 건물이 동판 덮인 2층 지붕에 아침 햇살을 반사하며 창경궁과 창덕궁의 목조 전각을 내려다보고 서있다.

20여 년 전만 해도 이 자리를 포함해 동산 전역엔 경모궁(景慕宮)이 자리하고 있었다. 사도세자를 추모하는 사당이었는데, 역대 왕 대부분을 합사해 모신 종묘 전체와 맞먹는 규모였다.

총독부의원 입구의 완만하게 굽은 비탈길을 포드 자동차 한 대가 급하게 오른다. 현관 입구 포치의 석조 아치 아래 자동차가 육중하게 진입하면 누군가 높은 분이 부축을 받아 내릴지도 모른다. 작년에 돌아가신 고종과 지금 창덕궁에 계신 순종의 건강은 총독부의원으로부터 일상적으로 점검되고 관리되어왔다. 그렇게 해도 하룻밤 사이 급서를 막을 수 없었고 평생의 심신허약을 돌려놓지 못했다. 당대 최고 귀인의 하나였을 사도세자는 평생을 짓누르는 신경증으로 괴로워하면서도 파멸적 종말에 이르기까지 제대로 치료 한 번 받지 못했다.

한림은 조금씩 높아지는 담장 길을 걸어 선인문(宣仁門) 앞을 지난다. 내시와 신료들이 분주히 드나들던 궁궐 동쪽의 주출입문이다.

창경궁에 살던 사도세자를 가둘 대형 뒤주가 영조 임금의 특명에 따라 운반되어 들어가던 문이다. 세자의 비대한 몸집을 감당할 만한 쌀뒤주를 궁내에서 찾지 못했던지 아니면 사용을 꺼린 것인지 선인문 밖 궁궐수비부대에서 물색되었다. 이틀 전 세자는 가뭄 끝에 찾아든 폭우를 뚫고 아버지를 죽이겠다며 궁궐 담장 아래 수문을 빠져나가 밤거리를 헤매다 돌아왔다고 한다. 경희궁의 처소에서 창경궁의 아들을 찾아온 국왕 영조의 명에 따라 27세의 세자는 임오년 7월의 화창한 초여름 날 마당을 가로질러 뒤주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처소로 돌아가지 않고 뒤주를 감시하던 임금은 8일 만에 뒤주를 열어 아들의 죽음을 확인하고 비로소 풍악을 울리며 환궁했다고 한다. 외국과의 전투에서 이기고 돌아올 때 연주하도록 마련한 개선가였다고 하는데 조선왕조에서 별로 사용할 일이 없던 곡조였다.

일찍이 영조의 아버지 숙종으로부터 총애를 받다 마침내 사약을 받은 장희빈이 죽어 이 선인문으로 나갔다. 장희빈이 남긴 아들은 경종 임금이 되고 곧 이복동생 영조에게 왕위를 물려주었다. 그 사이 4년간 결벽증이라 할 만큼 예민한 성격의 영조가 느낀 불안감은 극에 이르렀으나 결국은 50년 넘게 재위하는 최장수 국왕이 되었다.

직계혈통은 아니지만 호적상으로 사도세자의 고손자가 되는 고종은 갑신년의 정변이 일어나던 초겨울 밤을 이 선인문 밖에서 지샌 일이 있다. 개화당과 일본이 연합한 친위쿠데타를 청나라 군대가 진압하기 위해 지휘본부를 선인문 밖에 차려놓고 국왕 탈환작전을 벌인 날이었다. 갑신정변 주도 측이 내건 정강 14조의 첫째 조목은 청나라에 붙들려간 대원군을 모셔오고 청나라에 조공을 더 이상 바치지 않는다는 내용이었다. 청국군은 그 2년 전 임오년의 여름에도 군사반란이 일어나자 황해를 건너와 진압하고, 며느리 부부로부터 정권을 탈환한 대원군을 바다 건너 천진 땅에 유배 보냈다. 그리고 충주 땅으로 몸을 피한 민비를 호위해 서울로 환궁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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