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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연재 | 신동아·서울대 HK문명연구사업단 공동기획

문명의 십자로에 우뚝 선 ‘차탈 회윅’에 담긴 비밀

동서양의 접점 - 이스탄불과 아나톨리아

  • 고일홍| 서울대 HK연구교수·고고학 mahari95@snu.ac.kr

문명의 십자로에 우뚝 선 ‘차탈 회윅’에 담긴 비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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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명의 십자로에 우뚝 선 ‘차탈 회윅’에 담긴 비밀

터키 아나톨리아 전경

연재를 시작하며

서울대 HK문명연구사업단과 ‘신동아’는 역사학자, 문헌학자, 종교학자, 철학자, 건축학자 등으로 구성된 탐사단을 조직해 ‘문명의 십자로-이스탄불과 아나톨리아’를 주제로 터키지역을 탐사했다. 이 지역에는 동양과 서양이 교류하고 충돌해온 역사가 집약돼 있다. 인류 문명의 시원인 메소포타미아 문명이 이곳을 거쳐 유럽으로 흘러들어갔다. 고대에 이곳은 호메로스가 읊은 ‘일리아스’의 무대였고, 알렉산더 대왕이 동방정복 전쟁을 시작한 곳이었으며, 로마제국의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기독교를 공인한 이후로는 기독교 문명의 중심지였다. 근대 초 동로마제국이 오스만제국에 의해 멸망한 후로는 이슬람 문명의 중심지 역할을 해왔다. 보스포루스 해협을 사이에 두고 아시아와 유럽 양 대륙에 걸쳐 있는 국제도시 이스탄불은 이러한 오랜 영욕의 역사를 오늘날까지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기원전 8세기경 그리스인 비자스(Byzas)에 의해 건립돼 비잔티움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다가 로마시대에는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이름을 따 콘스탄티노플로 불렸던 이 도시는 로마시대인 4세기 초부터 오스만제국이 멸망한 20세기 초까지 16세기 동안 대제국의 수도였다.

‘신동아’와 HK문명연구사업단은 지면을 통해 동서양 문명이 교차한 역사를 선사시대에서 현대에 이르기까지 시대 순서에 따라, 그리고 신화, 종교, 전쟁, 건축, 예술, 과학 등 여러 측면에서 입체적으로 조명하기로 했다. 문명권 사이의 새로운 관계 정립이 요구되는 이 시대에 동서양 문명 교류사의 중요한 현장을 돌아보려는 이 연재기획에 많은 독자의 관심과 동참을 기대한다.

‘아나톨리아’는 아시아 대륙의 서쪽 끝에 해당되는 커다란 반도 지역을 지칭하는 용어로, ‘동쪽’ 혹은 ‘해가 뜨는 곳’이라는 뜻을 가진 그리스어에서 유래했다. ‘소아시아’라고도 하는 아나톨리아 지역은 오늘날 터키 영토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이 나라의 동쪽, 즉 아시아 부분에 해당된다. 아시아 대륙과 유럽 대륙이 만나는 지정학적 위치로 인해 아나톨리아 지역에는 예부터 이주, 교역, 정복전쟁 등의 이유로 많은 집단이 오고 갔으며, 그중 일부 집단은 그곳에 정착했다. 그 결과 ‘동서양 문명의 접점’이라 불리는 아나톨리아 지역에는 그러한 집단들이 남긴 수많은 유적지가 산재하며,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곳도 무려 아홉 곳이나 된다. 그렇다면 아나톨리아 지역은 얼마나 오래전부터 인류의 문화와 문명이 교차하는 지점으로서 중요한 역할을 했던 것일까? 그 해답의 열쇠가 되는 곳이 바로 차탈 회윅 유적이다.

아나톨리아 고원의 남쪽에 있는 코냐(Konya)에서 남동쪽으로 50㎞ 떨어진 평야 한가운데 야트막한 구릉이 하나 솟아 있는데, 그곳이 바로 차탈 회윅 유적이다. 차탈 회윅은 이 지역의 신석기 시대인 기원전 6500년경 이후로 약 1000년 동안 당시로서는 어마어마한 인구를 가진 농경민 집단이 한곳에 계속 살면서 형성된 , 거의 도시 수준의 마을이었다. 이 농경민 집단은 진흙 벽돌로 잘 지어진 사각형의 주택에서 거주하다가 특이하게도 약 100년 주기로 오늘날 우리 식으로 말하자면 ‘재건축’을 했다. 그런데 이들은 기존의 주택을 완전히 철거하지 않고 그것을 부수고 메운 다음, 그 잔해 위에 새로운 주택을 지었다. 그 결과 약 1000년의 세월이 지나면서 최초의 마을이 조성됐던 자리에는 높이 20m에 달하는 인공 언덕이 형성됐다. 즉, 이 마을 최후의 거주민들은 20m 고층 건물의 꼭대기 층에 살았던 셈이다. 그런데 한때 인구가 6000명에 달하던 이 마을은 기원전 5600년경에 이르러 갑작스럽게 폐기됐다. 그 확실한 원인은 알 수 없으나, 아마도 기후변화의 영향을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이후 차탈 회윅 마을은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사라져버렸고, 그것의 물질적인 흔적인 인공 언덕은 자연 경관의 일부가 되었다. 그러한 상태로 약 7500년이 지나다가 1958년 영국인 고고학자 멜라트(J. Mellaart)와 그의 동료들이 차탈 회윅 유적을 발견하면서, 20m에 이르는 삶의 잔해에 숨어 있던 비밀이 하나씩 밝혀지게 됐다.

차탈 회윅 유적의 발굴은 오늘날에도 진행되고 있으며, 아직 유적 전체의 10%도 채 조사되지 않은 상황이다. 이 유적에 대한 발굴이 이렇게 더디게 진행되는 것은 유적의 규모 자체가 워낙 크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개발로 인한 유적의 파괴가 걱정되지 않는 상황인지라, 1993년 이래로 세계 각국의 고고학자들이 매년 여름 한철 동안 최신 발굴 기법을 동원하며 그야말로 세밀하게 조사를 진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이 쏟은 노력의 결과로 우리는 차탈 회윅의 마을에 거주했던 농경민 집단의 삶에 대해 놀라울 정도로 자세한 정보를 얻을 수 있게 됐다. 오늘날 고고학자들에게는 너무나 고맙게도, 당시의 거주민들은 주택을 폐기할 때 그 안에 담긴 자신들 삶의 흔적을 철저히 없애지는 않았다. 따라서 폐기된 주택들의 잔해를 조심스럽게 걷어내면서 고고학자들은 차탈 회윅 주민들이 어떠한 주택에서 살았는지뿐만 아니라, 그 주택 내 어느 지점에서, 그리고 어떠한 시설에서 잠을 자고 밥을 먹었는지, 또한 죽은 자들의 시신은 어떻게 다루었는지, 심지어는 그들이 어떠한 종교생활을 했는지까지 알 수 있게 되었다.

차탈 회윅의 주민은 누구인가?

차탈 회윅 유적은 이렇듯 남부 아나톨리아 지역에 살았던 신석기 시대 농경민의 삶에 대해 추상적으로만 인식하지 않고, 그들이 느꼈을 삶의 희로애락에 생생하게 접근하게 해준다. 그런데 차탈 회윅 유적은 대부분의 터키 여행 안내서에서 특별히 강조돼 있지 않다. 따라서 그곳의 존재도 모르는 채 터키 여행을 다녀오는 사람도 많을 것이다. 이는 참으로 안타까운 상황일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그곳의 중요성은 일찍이 호메로스가 노래했던 트로이나 히타이트 제국의 수도인 핫투샤 등 아나톨리아 지역의 유명 유적지에 결코 뒤지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차탈 회윅의 주민은 과연 어디에서 왔으며, 어떻게 살고, 무엇을 먹었으며, 어떠한 신앙을 가졌던가? 또한 그들의 이러한 삶의 방식은 어디로부터 영향을 받은 것이며, 이후 또 어느 지역으로 전파됐는가? 이 질문들에 대한 해답을 하나씩 찾아나감으로써 우리는 아나톨리아 지방이 갖는 ‘동서양 문명의 접점’으로서의 면모에 대해 더욱 자세히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아나톨리아 지역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것은 구석기 시대부터다. 이곳의 구석기 주민들은 동굴에 거주하면서 수렵과 채집에 의존해 생계를 꾸려나갔고, 아나톨리아 남서부의 오쿠지니(Okuzini) 동굴에서 확인된 것과 같은 동굴벽화도 남겼다. 그런데 이러한 수렵-채집민이 신석기 시대에 들어와서 농경을 자체적으로 수용했던 것 같지는 않다. 즉, 이들이 차탈 회윅 유적을 남긴 농경민 집단의 조상일 가능성은 낮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차탈 회윅에 처음으로 정착한 주민은 어디에서 온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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