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4월호

기하학으로 드러낸 기독교 황제의 절대적 神觀

‘거룩한 지혜’의 판테온 하기아 소피아

  • 송유레|경희대 철학과 조교수·서양고대철학 euree_song@naver.com

    입력2013-03-20 11:29:00

  • 글자크기 설정 닫기
    기하학으로 드러낸 기독교 황제의 절대적 神觀

    하기아 소피아(성 소피아 성당) 내부에서 올려다본 돔 부분.

    서기 532년 동로마 제국의 유스티니아누스 황제(재위 527~565)는 콘스탄티노플에 대규모 성당을 짓는 공사를 시작했다. 수만 명의 사상자를 낸 폭동으로 불타버린 성 소피아 성당을 재건하기 위해서였다. 그렇게 해서 537년 ‘하기아 소피아’ 성당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 성당은 이전 성당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웅장하고 아름답고 다양한 재질을 갖춘 건축물이었다.

    하기아 소피아(그리스어로 ‘거룩한 지혜’를 뜻한다) 대성당은 역사상 가장 기독교적이었던 황제가 ‘새로운 로마’를 위해 건립한 기독교적 판테온이라고 할 수 있다. 동시대 역사가 프로코피오스는 이렇게 감탄했다.

    “만약 기독교인들에게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건물의 모형을 보여주면서 ‘이런 모습의 건물이 생길 수 있도록 성당을 허물기를 바라는가’라고 물었다면, 그들은 성당이 지금의 모습으로 바뀔 수 있게끔 파괴되게 해달라고 기도했을 것이다.”

    프로코피오스는 우리를 1500년 전의 콘스탄티노플(지금의 이스탄불)로 데려가 전대미문의 거대한 아름다움을 바라보게 한다. 그는 “그 높이가 하늘의 경계에 닿았고, 다른 건축물들 가운데 우뚝 솟아, 마치 위에서 나머지 도시를 내려다보는 것처럼, 도시에 속하지만 그것을 지배하면서 아름답게 장식한다”고 했다.

    건물의 안은 햇빛과 햇빛을 반사한 대리석의 빛이 가득 차서, 그 빛이 바깥으로 흘러넘친다고 묘사했다. 건물 중심부는 대칭적으로 배열된 거대한 벽기둥을 거느리며 그 위에 어마어마한 크기의 돔이 아슬아슬하게 놓여 있는데, 그는 그것을 “마치 창공에 떠 있는 것 같아 두려움을 불러일으킨다”고 표현했다.



    하기아 소피아는 유스티니아누스 시대의 기념비적 건축물이자 비잔틴 제국을 대표하는 상징물이다. 오랫동안 세계에서 가장 큰 성당이었고, 많은 성당의 원형이 됐다. 13세기 십자군의 콘스탄티노플 점령으로 반 세기간 로마 가톨릭 교회로 쓰인 때를 제외하곤, 비잔틴 제국의 종말에 이를 때까지 동방정교회의 대성당으로 사용됐다.

    1453년 술탄 메흐메트 2세가 콘스탄티노플을 함락시킨 뒤 하기아 소피아는 오스만 제국의 이슬람 사원으로 변모했다. 십자가와 교회의 종, 성상들은 제거됐고 모자이크 벽화들은 훼손되거나 두꺼운 회칠로 덮였다. 건물 바닥엔 양탄자가 깔렸고, 바깥엔 미나레트(이슬람 사원의 첨탑)가 세워졌다. 오스만 제국의 최고 건축가 시난(1489~1588)은 하기아 소피아를 모델로 삼아 슐레이마니에를 비롯한 많은 사원을 건축했다. 하기아 소피아는 그 모양이 비슷한 이슬람 사원들과 함께 이스탄불의 스카이라인을 형성한 것이다.

    하기아 소피아는 이스탄불의 유서 깊은 제1 언덕에서 마르마르 해(海)와 금각만(Golden Horn)을 굽어보고 있다. 지금은 기독교 성당도 이슬람 사원도 아닌 박물관이 돼 있지만, 건물에 들어선 방문객들은 거룩한 장소에 들어온 기분에 사로잡힌다.

    플라톤 기하학의 입체화

    하기아 소피아는 ‘거룩한 지혜’를 공간적으로 표현한 두 건축가, 트랄레스의 안테미오스와 밀레투스의 이시도로스가 없었다면 건축이 불가능했을 것이다.

    황제가 신봉한 것은 기독교 유일신의 지혜였지만, 건축가들이 거룩함을 표현하기 위해 사용한 지혜는 기하학이었다. 독실했던 황제는 기독교 정설을 확립하기 위해 주요 신학 논쟁에 관여했다. 나아가 제국 전체의 진정한 기독교화를 위해 이교(異敎)를 근절하고 이단(異端)을 축출하는 데 심혈을 기울였다.

    529년 아테네의 아카데미 철폐는 서양 고대 그리스-로마 문명의 종말을 상징한다. 그런데 하기아 소피아의 건축가들은 537년 유스티니아누스의 대성당을 건축함으로써 플라톤주의 기하학을 입체화하는 데 성공한다.

    플라톤이 세운 아카데미의 입구에는 ‘기하학을 모르는 자는 들어오지 마라’는 문구가 쓰여 있었다고 한다. 그만큼 플라톤주의 철학에서 기하학이 차지하는 위상은 높았다. 고대 후기 플라톤주의 철학이 재부상했을 때 철학의 주요 관심은 신학에 있었다. 기하학 역시 신학적 관점에서 재조명됐다.

    고대 후기의 ‘신플라톤주의’는 기하학을 형이상학적 신학의 공간적 표현으로 간주해, ‘거룩함의 기하학’을 전개한다. 안테미오스와 이시도로스는 이러한 기하학을 배우고 연구한 수학자였다. 그들이 설계하고 건축한 하기아 소피아는 기독교의 거룩한 지혜뿐만 아니라 고대 이교의 거룩한 지혜도 표현했다고 할 수 있다.

    안테미오스와 이시도로스는 당대의 저명한 수학자 에우토키오스의 영향을 받았다. 에우토키오스는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의 신플라톤주의 학원에서 수학을 철학 커리큘럼의 일부로 가르쳤다. 그에 앞서 수학을 가르쳤던 암모니오스는, 4세기 아테네에 재건된 아카데미의 수장인 프로클로스의 제자였다. 우리는 지금도 프로클로스가 쓴 유클리드 기하학 주석서를 읽을 수 있다. 프로클로스의 ‘유클리드 기하학 원리 주석서’는 신플라톤주의 기하학의 기본 저술이다.

    콘스탄티노플 출신의 프로클로스는 5세기 대표적 이교 철학자로서, 서양 고대철학을 전승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비잔틴 중세, 유대교, 이슬람교, 서구 라틴 중세와 르네상스에 전해진 서양 고대 철학, 특히 플라톤 철학은 대부분 프로클로스의 해석을 거친 것이다. 그가 죽은 후 반세기가 되기도 전에 아카데미는 철폐되고 철학자들은 페르시아로 망명해야 했지만, 그는 기독교의 위협 속에 살면서도 고대 철학의 종말이 임박했음을 감지하지 못했다. ‘고대의 지혜’가 영원히 지속되리라고 낙관한 것이다.

    그에게 영원한 고대의 지혜를 가장 순수하게 표현해주는 것이 플라톤의 철학이었다. 플라톤 철학을 제대로 해석해준 사람은 플로티노스였다. 그를 위시한 신플라톤주의자들은 플라톤 철학의 본질을 ‘신학’으로 보았다. 그들에게 신학은 이 세계 존재 원리를 탐구하는 형이상학이었다. 그들이 찾는 신성(神性)은 바로 이 세계 형이상학적 원리들의 총체였다.

    신플라톤주의자들은 ‘신을 닮는 것’을 철학의 목표로 삼았다. 그들은 신과의 동화(同化), 나아가 인간의 신성화를 위해, 인간적 사유에서 신적인 사유로의 상승을 요구했다. 수학은 신적인 사유로 올라가기 위해 거쳐야 하는 중요한 인식 단계였다. 수학은 플라톤의 ‘국가’에서 철인왕을 교육시키는 교과 과정에 들어 있다.

    플라톤은, 우리가 감각하는 이 세계의 존재 원리들은 감각이 아니라 지성으로만 접근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비감각적 원리들을 인식하기 위해 수학적 훈련이 유용하다고 판단했다. 비감각적인 수학적 대상의 인식을 연습함으로써 비감각적인 신적 원리의 인식을 준비하게 된다는 말이다.

    인간을 신성화하는 수학

    프로클로스는 이 세계의 신적 원리가 우리 영혼 안의 표상 공간에서 점, 선, 면 그리고 기하학적 도형으로 나타나거나, 공간적 표상 없이 순수한 양(量), 즉 수(數)로 나타난다고 여겼다. 수학적 대상은 신학적 대상의 양적, 공간적 표현이다. 따라서 수학적 인식은 형이상학적 인식의 그림자와 같은 것이다.

    나아가 그는 우리 영혼의 본성은 ‘수학적’인 것이라고 생각했다. 우리의 영혼은 기하학적 도형을 표상하면서, 사실은 우리 자신을 바라본다는 것이다. “마치 한 사람이 자신을 거울에서 바라보듯이, 영혼은 자신을 표상 능력 안에서 바라보고 그곳에서 [그것이 지닌] 도형들의 영상을 바라본다.”

    공간적으로 표상된 기하학적 삼각형은 우리 영혼에 내재하는 삼각형의 원형이 투영된 것이다. 하지만 우리의 영혼은 거울에 비친 도형들의 아름다움에 만족하지 않고, 거울에 등을 돌리고 자신을 찾아 자신의 내면으로 들어가 그곳에서 도형들의 원형을 바라보길 바란다. 나아가 자신을 넘어서 아무도 발을 들여놓지 않은 영원한 신들의 거처에서 어둡고 신비로운 도형들을, 신들의 꾸밈없는 아름다움을 보기를 바란다. 우리의 영혼은 수학을 통해 자신을 발견할 뿐만 아니라 자신을 넘어 신성에 다가간다. 이런 식으로 수학은 인간을 신성화한다.

    신플라톤주의 존재론에 따르면 존재 전체는 위계적 질서를 지니고 있다. 그 위계의 꼭대기에 만물의 원인이자 절대적 초월자인 일자(一者)가 있다. 이 초월적 일자로부터 다양한 존재가 펼쳐진다. 존재의 층위가 내려올수록 통일성이 약해지고 다양성이 강해진다. 통일성을 지닌다는 것은 그것이 어떤 ‘하나’로 한정되고 규정됨을 뜻한다.

    따라서 절대적 일자, 즉 ‘하나’ 자체로부터 전개되는 존재는 한정성의 감소와 무한정성의 증가를 동반한다. 이와 유사하게 산술학에서도 수가 1로부터 생겨난다. 1로부터 2가 생기고, 1과 2가 3을 산출한다. 이때 1은 한정의 원리이고 2는 무한정성이며, 3은 ‘한정된 여럿’으로서 첫 번째 수(數)로 간주된다. 기하학에서도 한정의 원리인 점으로부터 무한정한 선이 나오고, 이러한 선의 한정을 통해 이차원, 삼차원의 도형들이 나온다.

    프로클로스에 따르면 기하학적 도형의 계열은 원에서 시작한다. 원은 하나의 선이지만 자기 회귀를 통해 자신을 한정짓는 선이다. 이어서 두 선으로 이루어진 반원과 세 선으로 이루어진 삼각형, 네 선으로 이루어진 사각형이 따른다. 유클리드는 도형의 시작이 삼각형이라고 봤지만, 프로클로스는 정삼각형을 작도하려면 원을 사용해야 하므로, 삼각형이 원을 전제한다고 생각했다.

    기하학적 도형들은 곡선, 직선, 복합선으로 구성된다. 프로클로스는, 직선은 한정되지 않고 계속 뻗어가려는 경향을 지녔으나 곡선은 한정돼 있다는 이유로 곡선을 직선보다 우위에 놓았다. 따라서 완전히 한정되어 있는 단일 곡선인 원이 최상의 도형으로 인정된다.

    우주가 움직이는 질서

    그는 원의 단일성과 한정성을 강조하며 그 점에서 원이 존재의 최고 원리를 재현한다고 주장했다. 원의 내적 구성에도 주목했다. 결국 원의 중심이 모든 통일성과 한정성의 원천으로 제시된다.

    원 중심으로부터 반지름, 즉 다양성과 무한정성의 경향을 지닌 직선이 나오는데, 이 선은 무한히 뻗어나가지 않고 중심으로 회귀함으로써 원이 생기도록 한다. 원에 이어서 반원이 나온다. 반원은 하나의 곡선과 하나의 직선으로 이뤄졌고, 원의 단일성과 직선 도형의 복잡성을 매개한다. 직선 도형 가운데 가장 단순한 삼각형이 오고, 다음으로 보다 복잡한 사각형이 따른다.

    하기아 소피아의 중심부에 서서 위를 보면 가장 높은 곳에서 빛나는 황금 돔이 원을 보여준다. 이 원은 반원 모양의 아치 4개로 지탱되는데, 원과 4개의 반원이 만나면서 4개의 삼각형 모양 펜던티브를 만든다. 4개의 반원과 삼각형은 아래의 사각형으로 이어져 4개의 기둥벽을 만든다. 하기아 소피아는 이처럼 중심, 원, 반원, 삼각형, 사각형의 계열을 삼차원적으로 표현한다. 만물의 생성 원리를 입체적으로 재현한다(기사 도입부 사진 참조).

    기하학으로 드러낸 기독교 황제의 절대적 神觀

    하기아 소피아의 웅장한 외관.

    기독교적 관점에서 말하자면 콘스탄티노플의 대성당은 세계의 창조 원리를, 창조주의 거룩한 지혜를 드러낸다고 할 수 있다. 프로코피오스는 대성당이 주는 거룩한 느낌을 이렇게 표현했다.

    “누군가 기도하기 위해 이 성당에 들어간다면 인간의 능력이나 기술이 아니라 신의 능력이 이 작품을 만들었다고 인식하게 될 것이다. 그의 정신은 신을 향해 드높여지고, 창공을 노닐며, 신이 멀지 않게 기꺼이 스스로 고르신 집에 거하심을 믿게 된다.”

    구약 창세기에 창조주가 수학적 원리에 따라 이 세상을 창조했다는 이야기는 없다. 프로코피오스가 하기아 소피아의 설계에 적용된 ‘거룩함의 기하학’을 이해했기 때문에 거룩함을 느낀 것도 아니다.

    플라톤은 ‘티마이오스’에서 조물주의 우주 제작 신화를 제시한다. 여기에서 조물주는 무에서 유를 창조한 기독교의 창조주와는 달리, 혼돈에서 질서를 만들어내는 신적 장인(‘데미우르고스’)이다. 중요한 점은 신적 장인이 질서를 만들기 위해 수학적 원리를 사용한다는 점이다. 요컨대 플라톤의 조물주는 수학자다. 이 신화는 수학적 원리를 통해 우주의 질서와 구조를 이해할 수 있다는 견해를 암시한다.

    ‘우주’를 의미하는 희랍어 ‘코스모스’는 원래 ‘질서’를 뜻하지만 ‘장식’을 의미하기도 한다. 고대 희랍인들은 질서를 아름다운 것이라고 생각했다. 질서를 아름다운 것일 뿐만 아니라 신성한 것으로도 보았다. 그들은 별들의 운행이나 계절의 변화에서 발견되는 규칙성에 감탄했다. 일식과 월식 같은 천문 현상에 매료됐고 밤낮을 번갈아 가며 하늘에 떠 있는 저 기하학적 도형의 물체를 신이라 불렀다.

    고대의 플라톤주의자들은 우주의 아름답고 신성한 질서를 유지해주는 보다 근원적인 신성이 있다고 믿었다. 그들은 만물의 수학적 질서에 관심을 기울였으며, 수학적 질서에서 궁극적 신성을 예감했다. 그들에게 수학은 신학의 모상이라 할 수 있다. 우리는 이러한 ‘신성한 수학’을 통해-그것을 믿든 말든- 하기아 소피아를 설계했던 건축가들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으며, 그들이 표현하고자 한 거룩한 지혜에 다가갈 수 있다.

    프로코피오스는 ‘건축물에 관하여’에서 하기아 소피아를 다루기 전에 황제의 업적을 다음과 같이 요약했다.

    “유스티니아누스 황제는 불협화음으로 동요된 나라를 넘겨받아 크게 확장했다. 그 뿐만 아니라 예부터 위협이 된 이민족들을 몰아냈다. 그의 치세에 많은 나라를 수월하게 로마 제국에 병합했다. 신에 대한 믿음이 잘못된 길에서 방황하고 여러 방향으로 갈라졌음을 알게 된 그는 방황으로 이끄는 길을 파괴하고 하나의 신앙이라는 반석 위에 세웠다. 또한 법률이 필요한 것보다 많이 생겨서 혼탁해지고 서로 모순을 일으켜 혼란에 빠지자 수많은 말장난과 속임수를 제거했다. 반역을 꾀한 자들을 사면했고, 부(富)를 풀어 주린 이들의 배를 불렸으며, 그들을 함부로 다룬 운명을 제압해 온 나라를 행복한 삶과 결혼시켰다.”

    동로마 제국 황제 유스티니아누스는 고대 후기에서 비잔틴 중세로의 이행기를 살았다. 실질적으로 비잔틴 시대를 연 주인공이다. 그는 북아프리카와 이탈리아, 피레네 지역까지 옛 로마 제국의 영토를 대부분 수복했고, 1000년 동안 축적된 로마법을 집대성하고 체계화해 ‘유스티니아누스 법전’을 편찬했다. 이 법전은 16세기 이래 ‘로마법대전(Corpus Iuris Civilis)’으로 불리며, 유럽 법제사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유스티니아누스는 옛 로마 제국의 영광을 되찾으려 한 ‘로마’ 황제라고 할 수 있지만 종교 측면에선 비잔틴 황제가 된다. 그는 국가와 교회가 조화를 이루는 기독교 제국의 거룩한 황제가 되길 원했다. 그는 황제의 신성화를 통해 비잔틴 중세를 연다.

    거룩한 황제를 꿈꾸다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기독교를 공인한 4세기 이래 로마 제국에서 국가와 교회의 경계선은 분명치 않았다. 당시 신학자인 카이사레이아의 주교 에우세비우스는 ‘기독교 제국’의 이념을 전개하면서 로마 제국을 천국의 모상으로, 황제를 신의 대리인으로 내세웠다. 그러나 콘스탄티누스 대제를 비롯한 이후의 황제들은 로마 제국의 전통에 따라, 적어도 명목상으론 그들이 로마 민중(Populus Roma-nus)의 대리인임을 잊지 않았다.

    유스티니아누스는 민중의 대리인이길 거부하고 신의 대리인이길 선택한 첫 번째 황제다. 그는 권력이 민중이나 군대가 아니라 신으로부터 나온다고 믿었다. 527년, 황제의 대관식은 예전처럼 히포드롬 (마차 경주장)에 모인 민중 앞에서가 아니라, 민중을 제외한 채 황궁에서 거행됐다. 542년엔 오랜 전통의 원로원이 폐지된다. 새로운 황제는 신의 명령에만 복종하며, 지상의 제국을 신국(神國)으로 만드는 것을 목표로 했다.

    초기 유스티니아누스 시대의 것으로 추정되는 바르베리니 상아 판화가 황제관(觀)의 변화를 보여준다. 완전 무장을 한 채 이민족을 복속시키고, 제국의 중앙 권력을 쟁취한 황제가 십자가를 든 그리스도와 그를 에워싼 두 천사 아래에 서 있다.

    유스티니아누스 황제는 로마 제국의 기독교화를 위해 96개의 교회를 건축했다. 유통되던 금전(金錢)에 승리의 여신 대신 천사를 새기게 했으며, 선교 활동을 대대적으로 지원했다. 소아시아에서 선교사로 활동한 에페소스의 요한네스는 (과장을 섞어서) 7만 명을 개종시키고 100개의 교회와 12개 수도원을 창설했다고 자랑했다.

    유스티니아누스 치세에 3차례에 걸쳐 대대적인 이교 박해가 있었다(528~529, 545~546, 562). 황제는 기독교 제국의 이념에 반대하는 이들을 공직에서 파면했다. 이교적 문헌을 불살랐으며, 이교도를 사형에 처하기도 했다. 529년 아카데미가 철폐되면서 더 이상 이교의 철학과 천문학을 가르치는 것은 용납되지 않았다. 황제는 이교 신전들을 허물어 그 건축 자재로 교회와 공공건물을 세웠다.

    이스탄불의 관광명소로 손꼽히는 ‘지하 궁전’은 콘스탄티누스 시대에 시공해 유스티니아누스 시대에 완공한 지하 저수지다. 음산한 지하에 서 있는 336개의 거대한 기둥들은 한때 이교 신전을 받치던 것들이었다. 고대 종교는 그 지하 저수지에 수장됐다.

    황제는 기독교 내부의 이단 논쟁에도 깊이 관여했다. 그가 태어난 고대 후기에는 신학 문제가 대중적 관심사였다. 시장에서 성부와 성자, 성령 관계로 언쟁하는 장사꾼들을 보는 것은 흔한 일이었다. 신학적 견해 차이는 제국을 정치적으로 분열시키고 있었다. 가장 논란이 되었던 문제는 성자 예수의 본성에 관련된 것이었다.

    4세기 알렉산드리아의 신학자 아리우스는 성자는 성부와는 달리 영원한 신일 수 없다는 논변을 펼쳤다. 이에 기반해, 5세기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 네스토리우스는 ‘마리아가 신을 낳은 어머니(聖母·theotokos)일 수 없다’고 주장했다. 아리우스파는 325년 니케아 공의회에서, 네스토리우스파는 431년 에페소스 공의회에서 이단으로 판결받았다.

    비잔틴 시대를 열다

    기하학으로 드러낸 기독교 황제의 절대적 神觀

    성모와 성자에게 콘스탄티노플 도시 모형을 바치는 콘스탄티누스 대제와 하기아 소피아 모형을 바치는 유스티니아누스 대제.

    니케아 공의회는 성자 예수가 인간인 동시에 신이라고 선포했다. 이러한 성자의 본성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451년 소집된 칼케도니아 공의회에서 성자는 인성과 신성의 두 가지 본성을 지닌다는 이성론(二性論)을 정설로 채택한다. 그러나 시리아와 이집트를 비롯한 동로마 제국의 많은 지역에서 성자가 두 가지 본성을 지닌 것이 아니라 인성과 신성이 완전히 합일된 하나의 본성을 지녔다는 단성론(單性論)이 우세했다.

    유스티니아누스 황제는 칼케도니아 공의회의 신조를 지지했지만, 그가 사랑한 황후 테오도라는 단성론을 후원했다. 그는 ‘다른 믿음(heterodoxy)’을 탄압했지만, 단성론 논쟁으로 분열된 제국을 하나의 ‘올바른 믿음(orthodoxy)’으로 통일하는 데에는 실패했다.

    542년 제국 전역에 퍼진 역병으로 (프로코피오스에 따르면) 제국민의 절반이 죽었다. 558년 역병이 재차 밀려오자 사망한 이를 매장할 사람이 부족할 정도였다고 한다. 종말론적 분위기 속에서 유스티니아누스는 종교를 통해 제국을 안정시킬 방안을 모색한다.

    그는 제사 공동체로서의 국가라는 이교적 관념을 부활시켜 사회적 통합을 도모했다. 그리하여 십자가를 비롯한 기독교 상징물이 눈에 띄게 늘었다. 성상 숭배와 성인 숭배가 확대됐고, 성찬의 전례가 확립됐으며, 거리 행렬 문화가 도입됐다. 황제는 성모 마리아의 도움으로 역병을 이겼다고 여겨 마리아 숭배를 적극 지원했다. 마리아의 유품으로 간주된 옷과 허리띠가 소장된 콘스탄티노플은 ‘성모의 도시’로 이름이 났다.

    말년의 황제는 신학에 몰두해 논고를 집필했다. 그가 믿는 학설을 칙령으로 공포했으며, 교리 문제로 로마의 교황을 압박하기도 했다. 562년 하기아 소피아를 방문한 시인 파울루스 실렌티아리우스는 유스티니아누스 황제를 지상에서 멀리 떨어져 죄 많은 인간들을 아래로 굽어보는 신과 같다고 묘사한다. 황제는 신의 모상(imago Dei), 즉 살아 있는 ‘성인(聖人)’이 된 것이다.

    유스티니아누스는 제도적으로 황제의 신성화를 확립함으로써 비잔틴 시대를 열었다. 그는 거룩함을 찾아 국가를 버리고 사막으로 떠난 고대 후기의 수많은 수도승과 달리, 국가를 거룩하게 하고 국가를 다스리는 황제를 거룩하게 했다. 거룩한 황제를 향한 그의 야망은 절대 권력 추구와 관계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는 정치적 권력과 종교적 권위를 아우르는 지상 최대의 권력을 지향함으로써 천상의 절대 권력자인 신을 닮고자 한 것 같다.

    그는 황권 강화를 위해 대학살도 서슴지 않았다. 충실한 부하들의 숙청도 꺼리지 않았다. 프로코피오스는 황제가 “온 나라를 행복한 삶과 결혼시켰다”고 찬탄했지만, “자연이 다른 인간들로부터 악한 성격을 떼어내 이 사람의 영혼에 집중시킨 듯하다”며 비난하기도 했다.

    유스티니아누스는 집권 초기 양대 서커스 클럽 간의 충돌에서 시작한 ‘니카 폭동’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3만 명이 넘는 민중 학살을 명했다. 그 폭동을 기회로 정적을 제거함으로써 황권을 강화했다. 하기아 소피아는 니카 폭동의 잿더미 속에서 다시 태어났으며, 황제가 옳다고 믿었던 ‘거룩한 지혜’를 대변해야 했다.

    하지만 기하학이 더 이상 어느 학파나 종파의 전유물이 아니듯이 ‘거룩한 지혜’ 또한 특정 종교나 철학에 국한된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런 까닭에 하기아 소피아 안에서는 기독교인들뿐만 아니라‘이교도’, 무신론자들까지 신성함을 느낄 수 있는 게 아닐까 싶다.



    댓글 0
    닫기

    매거진동아

    • youtube
    • youtube
    • youtube

    에디터 추천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