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5월호

‘삼식이’가 닭갈비를 만든다고?

중년남성 요리강좌 인기몰이

  • 박은경 | 객원기자 siren52@hanmail.net

    입력2013-04-17 16:4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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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은퇴 남성을 위한 요리강좌가 인기다.
    • 국자와 프라이팬을 든 초로의 신사들은 요리를 통해 즐거움을 찾고 가족과의 관계 개선을 시도한다.
    • 요리 배우기가 은퇴생활 준비를 위한 필수 코스가 되고 있다.
    ‘삼식이’가 닭갈비를 만든다고?
    저녁 7시 무렵, 학생들이 집으로 돌아간 서울 강남의 한 고교 교정. 어둠이 짙게 깔린 텅 빈 운동장과 교사(校舍)를 지나 뒤쪽으로 돌아가자 환하게 불 켜진 건물이 눈에 들어왔다.

    쥐 죽은 듯 고요한 바깥과는 달리, 이 건물 1층에 자리한 요리강습실은 사람들로 북적거리며 활기가 넘쳤다. 머리가 희끗희끗한 중년남성들이 알록달록한 앞치마를 두르고 조리대 주위에 둘러선 채 요리강사의 설명을 한마디라도 놓칠세라 눈을 반짝였다.

    “집에서 닭갈비를 재울 때 올리고당이 없으면 물엿으로 해도 돼요. 한 숟갈 쓰자고 한 병 사다가 모셔놓으면 와이프들이 화냅니다.”

    강사가 툭툭 던지는 말에 수강생들이 연신 폭소를 터뜨렸다.

    “몸에 좋다는 버섯을 닭갈비 재료로 써도 되나요?”



    “아이고, 술을 안 가져왔네…닭갈비 곁들여 한잔하면 죽이는데!”

    “찹쌀로 죽을 쑬 때는 멥쌀로 할 때랑 물과 쌀의 비율이 다른가요?”

    수강생들은 문답 내용을 레시피가 적힌 종이에 꼼꼼히 메모하고, 스마트폰으로 요리과정을 찍으며 열심히 수업을 들었다. 1시간에 걸친 요리 시범이 끝나자 수강생들은 각자의 자리로 돌아가 2명씩 조를 이뤄 닭갈비와 전복죽 만들기에 돌입했다. 닭과 전복을 손질하고, 쌀을 씻고, 마늘을 다지고, 채소를 써느라 분주했다. 바쁜 손놀림과 도마질, 수돗물 틀고 붓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요란했다.

    밥하는 남편, 밥 못하는 남편

    요리강습반 반장을 맡고 있는 60대 초반 수강생 박정주(보험대리점 대표) 씨는 “여기 오기 전엔 라면 끓일 줄밖에 몰랐다”며 “직접 요리해보니 재미있어서 매주 월요일 강습시간이 기다려진다”고 했다. 그는 요리강습을 받는 게 쑥스러워 처음에는 아내에게 비밀로 했다. 첫 수업에서 직접 만든 음식을 집에 가져가서야 ‘이실직고’ 했다고. ‘남편이 요리한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던 아내는 두 번째 작품인 닭다리스테이크를 보고서야 남편의 변신을 믿기 시작했다. 박 씨는 “친구들과 여행 가서 요리 실력을 발휘해보고 싶은데 아내가 뜯어말렸다”며 아쉬워했다.

    박 씨를 요리의 세계로 이끈 이는 칠순의 신선명(보험대리점 대표) 씨. 5개월째 이 요리교실에 참석 중인 그는 “은퇴 후 개인사업을 하면서 시간 여유가 생긴 뒤로 ‘가족과 함께 요리해 먹으면 즐겁지 않겠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그간 배운 실력을 한껏 발휘해 아내 생일상을 직접 차렸다. 그는 “집에서 요리를 할라치면 아내가 ‘주방만 어지럽힌다’고 타박하지만, 주말만이라도 직접 요리하려고 한다”고 했다. 그는 인터뷰 내내 능숙한 솜씨로 마늘을 다지고 채소를 썰었다.

    이날 2시간 넘게 진행된 요리강습은 강남구청 평생학습팀이 마련한 남성요리교실 ‘아빠요리’ 프로그램이다. 문이슬 강남구청 주무관은 “수명 100세 시대를 준비하고 남성의 가사 참여 의식을 높이자는 취지에서 3년 전 남성 요리교실을 기획했다”고 했다. 해마다 서너 차례 수강생을 모집하고, 한 번에 두 달간 강습이 이어진다. 인터넷을 통한 선착순 모집인데, 두세 시간 만에 접수가 마감될 정도로 경쟁이 치열하다. 은퇴를 앞뒀거나 이미 은퇴한 50대 후반~60대 초반 수강생이 절반가량이라고 한다. 강남구청은 ‘아빠요리경연대회’도 열고 있다.

    이 요리교실에서 만난 50대 초반의 정문채 씨는 대기업 가전제품개발연구소 수석연구원으로 재직 중이다. 그는 “주변 선배들이 ‘마누라가 해주는 밥을 가만히 앉아서 받아먹기가 미안하다’고 하더라. 또 가족에게 봉사하고 싶은 마음이 있어서 요리교실에 나왔다”고 했다. 그는 “나이 든 남편 또는 아버지는 가족의 관심으로부터 점차 멀어진다. 내가 요리를 해주면 내게 좀 더 관심 가져주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있다”고 덧붙였다.

    아버지의 존재감 확인

    은퇴 후 집에서 밥을 한 끼도 안 먹으면 ‘영식님’, 한 끼 먹으면 ‘일식씨’, 두 끼 먹으면 ‘두식군’, 세 끼 다 먹으면 ‘삼식이’라고 한다. ‘삼식이’ 시리즈에 이어 요즘 회자되는 우스갯소리가 ‘은퇴 남편엔 두 부류가 있다. 밥할 줄 아는 사람과 밥 못하는 사람’이다. 이런 세태를 반영한 TV 광고가 중년남성들의 공감을 자아내며 화제를 모았다. 은퇴 남편이 부스스한 머리로 주방에 들어서자 식탁에 메모지 한 장이 놓여 있다. “곰국 끓여놨다. 다녀올게!” 난감한 표정의 남편 눈에 가스레인지 위에서 펄펄 끓어넘치는 곰국 찜통이 들어온다. 황급히 달려가 가스 불을 끄면서 남편은 “아내만 믿고 살기엔 인생 너~무 길다”며 푸념한다.

    시간이 지나면 시들해지는 여느 우스갯소리와 달리 ‘삼식이’ 시리즈는 한층 다양한 버전으로 진화하고 있다. 중년여성들에게 은퇴 남편을 위한 밥상 차리기가 그만큼 엄청난 스트레스를 주고 있다는 얘기다. 미래에셋은퇴연구소가 최근 서울과 수도권 거주 30, 40대 부부 400쌍을 대상으로 은퇴에 대한 인식 차이를 조사했더니 남편의 56%는 은퇴 후 하루의 절반 이상을 아내와 함께 보내고 싶어 했지만, 같은 생각을 가진 아내는 28%에 불과했다. 은퇴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로 남편은 ‘건강’ 다음에 ‘부부관계’를 꼽은 반면, 아내는 ‘건강’ 다음으로 ‘돈’을 꼽았다. 은퇴관에서만큼은 부부는 일심동체가 아닌 동상이몽인 셈이다.

    ‘삼식이’가 닭갈비를 만든다고?

    서울 강남구청이 진행하는 ‘아빠요리’ 교실.



    끼니 때마다 밥 타령을 늘어놓았다가는 ‘잘 차려진 밥상’ 대신 ‘이혼청구서’를 받기 십상인 게 요즘 남편들이다. 은퇴전문가들은 해마다 황혼이혼이 증가하는 이유를 ‘은퇴남편 증후군’에서 찾는다. 하루 종일 남편 없는 집에서 혼자 지내기를 수십 년간 해온 아내가, 남편이 집에 들어앉게 되면 그 자체로 스트레스를 받는다는 것. 부부싸움을 부르는 은퇴 남편 유형으로는 세 가지가 꼽힌다. 꼬박꼬박 점심식사 챙겨줘야 하는 남편, 잠옷바람으로 거실에서 빈둥거리며 TV만 보는 남편, 하루 종일 아내 뒤를 졸졸 따라다니며 시시콜콜 잔소리하는 남편.

    정문채 씨는 “요즘 남자 직원 중엔 요리에 관심 있는 사람이 많아 요리를 주제로 대화하다보면 소통이 잘되고 제품 개발에도 도움이 된다. 무엇보다 집에서 요리하면서 아버지로서의 존재감을 느낄 수 있어 좋다”고 했다. 그는 “지난 주말 아내와 딸, 아들이 좋아하는 요리를 하나씩 따로 만들어줬더니 딸이 친구들에게 자랑하겠다며 스마트폰으로 사진을 찍어갔다. 나이 들면 축구나 등산은 몸에 무리이고, 골프는 돈이 많이 든다. 요리는 가족과 함께 즐길 수 있어 노후 준비로 최고”라고도 했다. 공인회계사 이상엽 씨는 지난해 민간기업에서 마련한 ‘행복남요리교실’에 참여했다. 그는 “요리를 배우면 나이가 들어 아내가 내게 의지할 수 있을 거란 생각에 요리를 배웠다”고 했다.

    강남구청 이외에도 여러 지자체와 민간기업들이 중년남성을 위한 요리강습 프로그램을 마련하고 있다. 서초구 양재동 서초문화원의 ‘아버지요리교실’은 강좌를 개설한 지 벌써 3년째다. 정원 25명으로 3개월씩 진행하는데, 역시 은퇴 전후의 50, 60대가 주축이다. 양천구청도 한 달짜리 ‘아버지요리교실’을 매해 서너 차례 열고 있다.

    영등포구 시니어행복발전센터가 지난해 12월부터 시작한 ‘쿠킹 마이 라이프(Cooking My Life)’는 ‘은퇴남성의 가사 자립’을 목표로 내걸었다. 50세 이상만 참가할 수 있다. 주로 된장국, 김치찌개, 두부조림, 겉절이처럼 평소 자주 먹는 음식과 닭찜, 해물탕 등 특별요리를 가르쳐준다. 무역업체를 경영하다 은퇴한 뒤 ‘쿠킹 마이 라이프’에 참가했다는 서병원 씨는 “자격증 취득 위주로 가르치는 사설 요리학원과 달리 구청 프로그램은 가정식 요리를 배울 수 있어 큰 도움이 된다”며 “수강생 대부분이 요리 초보자인 남자임을 감안해 강사가 쉽고 꼼꼼하게 가르쳐줘 좋다”고 했다. 그는 강습 때 받은 레시피를 신줏단지 모시듯 소중히 보관한다고 한다.

    서울뿐만 아니라 전국의 지자체 중에도 비슷한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곳이 갈수록 느는 추세다. 민간기업과 백화점 문화센터에서도 남성요리강좌가 속속 개설되고 있다. 샘표 식문화연구소 지미원은 수년째 ‘남자들의 맛있는 수다 쿠킹 클래스’를 열고 있다. 매번 주제가 다른 특강 형식으로 1회 강습으로 끝나기 때문에 긴 수강기간을 부담스러워하는 남성들에게 인기다.

    롯데백화점 문화센터 담당자는 “요즘은 나이와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요리에 관심 갖는 남성이 많다”며 “한식이나 밑반찬 만들기 등 가정에서 쉽게 해먹을 수 있는 요리강습에도 중년남성들이 찾아온다”고 전했다. 샘표 프로그램에 참여한 적 있는 유병현 씨는 “요리를 배우기 시작하면서 주말에는 나들이 대신 온 가족이 함께 장을 봐와서 요리한다. 요리를 놀이처럼 즐기면서 대화도 많이 나눈다”고 했다. 요리를 매개로 한 팀워크(조직커뮤니케이션) 프로그램을 도입하는 기업들도 있다. 산악등반 등 극기훈련 프로그램은 나이 많은 임원들이 적극적으로 동참하기 힘들어 직책과 나이를 떠나 함께 어울리고 소통할 수 있는 요리 프로그램이 주목받고 있는 것이다.

    4년째 강남구청의 요리교실을 맡아온 이우현 강사는 “남성 대상 요리교실은 주부 대상 요리강습과 다르다”고 말한다. 수강생 대부분이 요리 초보이자 살림에 문외한이다보니 어떤 재료를 어디서 구할 수 있는지, 양념의 종류엔 뭐가 있고 각각의 쓰임새는 어떻게 다른지 등 기초부터 하나씩 꼼꼼하게 가르쳐야 한다는 것.

    “남성 수강생들은 이해가 안 되면 그냥 넘어가지 않아요. 시금치를 데칠 때 왜 소금을 넣어야 하는지, 생선 요리에 왜 술이 들어가는지 일일이 설명해줘야 해요.”

    그의 수강생들은 전현직 기업체 CEO나 임원부터 법조인, 의사, 교사, 금융계 종사자 등 매우 다양하다. 6개월에서 1년 가량 꾸준하게 배우는 사람도 많고, 3년째 배우는 수강생도 몇 명 있다고 한다. 싱크대에서 조리도구를 꺼낼 때마다 허리를 굽히고 무릎을 구부리다보니 아내가 얼마나 힘든지 알게 됐다는 한 수강생은 아내를 위해 수백 만 원을 들여 주방을 개조해줬다고 한다. 그는 “맛을 타박하거나 요리가 뭐가 어려우냐고 했던 남편들이 정말 반성을 많이 한다”며 웃었다.

    지난해 ‘행복남요리교실’을 처음 개설한 쿠킹앤 한희원 대표는 “커뮤니케이션 차원에서 요리 프로그램을 진행한다”고 했다. 요리를 통해 아내와의 커뮤니케이션을 원활히 하고 새로운 교우 관계도 쌓으라는 취지다. 이 프로그램에 참여했던 이상엽 씨는 지난해 한 송년모임에서 동기 수강생 몇몇과 직접 뷔페 음식을 마련해 손님을 대접한 기억을 잊을 수 없다. 그는 “주방에서 요리하면서 사춘기 아들과의 대화도 많아졌고, 아들이 나를 대하는 태도도 훨씬 부드러워졌다”며 “아들이 곧잘 설거지를 도와줘 아내가 무척 좋아한다”고 했다. 이제 그의 꿈은 은퇴 후 요리를 통해 사회봉사를 하는 것이다.

    “요리=커뮤니케이션”

    “요리교실 동기들과 함께 노숙자들에게 음식을 만들어주고 싶습니다. 그들에게도 좋은 재료로 만든 음식을 맛있게 먹을 권리가 있으니까요.”

    요즘 서점에선 남성을 위한 요리책도 눈에 꽤 많이 띈다. ‘장보는 남편 요리하는 아버지’ ‘아버지의 부엌’ ‘아내가 샤워할 때 나는 요리한다’ 같은 제목을 달고 있다. 교보문고 요리책 코너 담당자는 “40, 50대 중년남성들이 부인과 함께 와서 요리책을 사가는 경우가 많다”며 “최근 TV에 남성들이 요리하는 모습이 자주 나오니까 자연스럽게 관심을 갖는 것 같다”고 했다.

    “세상이 바뀌었으니 이제 남자들도 적응해야지요. 집안일은 부부가 서로 도와줘야 아내가 은퇴 남편을 짐스럽게 여기지 않고, 남편도 스스로 떳떳하지 않을까요. 요즘 가정에서 아버지의 순위가 애완견보다 밀린다고 하는데, 남자들이 직접 요리한다면 강아지보다는 순위가 올라가지 않을까요?” (이상엽 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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