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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식이’가 닭갈비를 만든다고?

중년남성 요리강좌 인기몰이

  • 박은경 | 객원기자 siren52@hanmail.net

‘삼식이’가 닭갈비를 만든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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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은퇴 남성을 위한 요리강좌가 인기다.
  • 국자와 프라이팬을 든 초로의 신사들은 요리를 통해 즐거움을 찾고 가족과의 관계 개선을 시도한다.
  • 요리 배우기가 은퇴생활 준비를 위한 필수 코스가 되고 있다.
‘삼식이’가 닭갈비를 만든다고?
저녁 7시 무렵, 학생들이 집으로 돌아간 서울 강남의 한 고교 교정. 어둠이 짙게 깔린 텅 빈 운동장과 교사(校舍)를 지나 뒤쪽으로 돌아가자 환하게 불 켜진 건물이 눈에 들어왔다.

쥐 죽은 듯 고요한 바깥과는 달리, 이 건물 1층에 자리한 요리강습실은 사람들로 북적거리며 활기가 넘쳤다. 머리가 희끗희끗한 중년남성들이 알록달록한 앞치마를 두르고 조리대 주위에 둘러선 채 요리강사의 설명을 한마디라도 놓칠세라 눈을 반짝였다.

“집에서 닭갈비를 재울 때 올리고당이 없으면 물엿으로 해도 돼요. 한 숟갈 쓰자고 한 병 사다가 모셔놓으면 와이프들이 화냅니다.”

강사가 툭툭 던지는 말에 수강생들이 연신 폭소를 터뜨렸다.

“몸에 좋다는 버섯을 닭갈비 재료로 써도 되나요?”

“아이고, 술을 안 가져왔네…닭갈비 곁들여 한잔하면 죽이는데!”

“찹쌀로 죽을 쑬 때는 멥쌀로 할 때랑 물과 쌀의 비율이 다른가요?”

수강생들은 문답 내용을 레시피가 적힌 종이에 꼼꼼히 메모하고, 스마트폰으로 요리과정을 찍으며 열심히 수업을 들었다. 1시간에 걸친 요리 시범이 끝나자 수강생들은 각자의 자리로 돌아가 2명씩 조를 이뤄 닭갈비와 전복죽 만들기에 돌입했다. 닭과 전복을 손질하고, 쌀을 씻고, 마늘을 다지고, 채소를 써느라 분주했다. 바쁜 손놀림과 도마질, 수돗물 틀고 붓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요란했다.

밥하는 남편, 밥 못하는 남편

요리강습반 반장을 맡고 있는 60대 초반 수강생 박정주(보험대리점 대표) 씨는 “여기 오기 전엔 라면 끓일 줄밖에 몰랐다”며 “직접 요리해보니 재미있어서 매주 월요일 강습시간이 기다려진다”고 했다. 그는 요리강습을 받는 게 쑥스러워 처음에는 아내에게 비밀로 했다. 첫 수업에서 직접 만든 음식을 집에 가져가서야 ‘이실직고’ 했다고. ‘남편이 요리한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던 아내는 두 번째 작품인 닭다리스테이크를 보고서야 남편의 변신을 믿기 시작했다. 박 씨는 “친구들과 여행 가서 요리 실력을 발휘해보고 싶은데 아내가 뜯어말렸다”며 아쉬워했다.

박 씨를 요리의 세계로 이끈 이는 칠순의 신선명(보험대리점 대표) 씨. 5개월째 이 요리교실에 참석 중인 그는 “은퇴 후 개인사업을 하면서 시간 여유가 생긴 뒤로 ‘가족과 함께 요리해 먹으면 즐겁지 않겠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그간 배운 실력을 한껏 발휘해 아내 생일상을 직접 차렸다. 그는 “집에서 요리를 할라치면 아내가 ‘주방만 어지럽힌다’고 타박하지만, 주말만이라도 직접 요리하려고 한다”고 했다. 그는 인터뷰 내내 능숙한 솜씨로 마늘을 다지고 채소를 썰었다.

이날 2시간 넘게 진행된 요리강습은 강남구청 평생학습팀이 마련한 남성요리교실 ‘아빠요리’ 프로그램이다. 문이슬 강남구청 주무관은 “수명 100세 시대를 준비하고 남성의 가사 참여 의식을 높이자는 취지에서 3년 전 남성 요리교실을 기획했다”고 했다. 해마다 서너 차례 수강생을 모집하고, 한 번에 두 달간 강습이 이어진다. 인터넷을 통한 선착순 모집인데, 두세 시간 만에 접수가 마감될 정도로 경쟁이 치열하다. 은퇴를 앞뒀거나 이미 은퇴한 50대 후반~60대 초반 수강생이 절반가량이라고 한다. 강남구청은 ‘아빠요리경연대회’도 열고 있다.

이 요리교실에서 만난 50대 초반의 정문채 씨는 대기업 가전제품개발연구소 수석연구원으로 재직 중이다. 그는 “주변 선배들이 ‘마누라가 해주는 밥을 가만히 앉아서 받아먹기가 미안하다’고 하더라. 또 가족에게 봉사하고 싶은 마음이 있어서 요리교실에 나왔다”고 했다. 그는 “나이 든 남편 또는 아버지는 가족의 관심으로부터 점차 멀어진다. 내가 요리를 해주면 내게 좀 더 관심 가져주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있다”고 덧붙였다.

아버지의 존재감 확인

은퇴 후 집에서 밥을 한 끼도 안 먹으면 ‘영식님’, 한 끼 먹으면 ‘일식씨’, 두 끼 먹으면 ‘두식군’, 세 끼 다 먹으면 ‘삼식이’라고 한다. ‘삼식이’ 시리즈에 이어 요즘 회자되는 우스갯소리가 ‘은퇴 남편엔 두 부류가 있다. 밥할 줄 아는 사람과 밥 못하는 사람’이다. 이런 세태를 반영한 TV 광고가 중년남성들의 공감을 자아내며 화제를 모았다. 은퇴 남편이 부스스한 머리로 주방에 들어서자 식탁에 메모지 한 장이 놓여 있다. “곰국 끓여놨다. 다녀올게!” 난감한 표정의 남편 눈에 가스레인지 위에서 펄펄 끓어넘치는 곰국 찜통이 들어온다. 황급히 달려가 가스 불을 끄면서 남편은 “아내만 믿고 살기엔 인생 너~무 길다”며 푸념한다.

시간이 지나면 시들해지는 여느 우스갯소리와 달리 ‘삼식이’ 시리즈는 한층 다양한 버전으로 진화하고 있다. 중년여성들에게 은퇴 남편을 위한 밥상 차리기가 그만큼 엄청난 스트레스를 주고 있다는 얘기다. 미래에셋은퇴연구소가 최근 서울과 수도권 거주 30, 40대 부부 400쌍을 대상으로 은퇴에 대한 인식 차이를 조사했더니 남편의 56%는 은퇴 후 하루의 절반 이상을 아내와 함께 보내고 싶어 했지만, 같은 생각을 가진 아내는 28%에 불과했다. 은퇴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로 남편은 ‘건강’ 다음에 ‘부부관계’를 꼽은 반면, 아내는 ‘건강’ 다음으로 ‘돈’을 꼽았다. 은퇴관에서만큼은 부부는 일심동체가 아닌 동상이몽인 셈이다.

‘삼식이’가 닭갈비를 만든다고?

서울 강남구청이 진행하는 ‘아빠요리’ 교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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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은경 | 객원기자 siren52@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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