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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동아·서울대 HK문명연구사업단 공동기획> 동서양의 접점 | 이스탄불과 아나톨리아

“천존(天尊)은 한 처녀에게 성령이 임하게 하였다”

중국화한 기독교 경교(景敎)

  • 최진묵|서울대 인문학연구원 HK연구교수 cjm813@snu.ac.kr

“천존(天尊)은 한 처녀에게 성령이 임하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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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중국에 기독교가 유입된 것은 당나라 때다. 동서 문화교류의 증거다. 그러나 불교 도교 유교의 흔적이 뒤섞여 있어 실체를 종잡기 어렵다. 1000여 년 전 중국에 전래된 기독교 흔적을 복원할 수 있을까.
“천존(天尊)은 한 처녀에게 성령이 임하게 하였다”

당나라의 수도 장안이었던 서안에서 1930년대에 찍은 대진사의 유적. 왼쪽의 큰 비가 대진경교유행중국비다.

서기 781년(당 건중 2년) 음력 1월 7일 일요일 아침, 중국 당나라 수도 장안성 서북쪽 ‘의령방(義寧坊)’의 대진사(大秦寺)에서 기독교의 중국 유행을 기념하는 기념비 제막식이 열렸다. 수염은 길렀지만 정수리 부분의 머리는 깎아서 불교 승려 같기도 한 경교(景敎) 사제가 목판을 두드리며 기도회의 시작을 알렸다. 동쪽을 향해 있는 예배당 한쪽 벽에는 당나라 고조부터 태종, 고종, 중종, 예종까지의 다섯 황제 초상화가 모셔져 있었다.

예배당의 본래 이름은 파사사(波斯寺·페르시아의 절)였다. 이것을 대진사로 바꾼 것은 얼마 전이었다. 황제는 예배당 이름을 바꾸면서 장안의 또 다른 대진사에도 친필 글귀를 하사했다. 기도회에 앞서 7언으로 이어진 음률의 찬송이 있었다. 오늘날 가톨릭 미사에서 사용하는 ‘대영광송’과 비슷한 노래였다.

끝없는 하늘이 깊은 경탄을 드리고,

대지가 거듭해서 평화를 염원하며, 인간의 본성이 믿고 의지하는 것은

이 셋을 아우르시는 인자로운 아버지 알라하(여호와)이시네.

기도회에선 가로 세로 길이가 비슷한 연꽃 문양의 십자가를 손에 든 신도들에게 세례를 주기도 했다. 이어 흰색 사제복에 반구 모양의 모자를 쓰고 십자가 목걸이를 한, 목자의 지팡이 같은 목장(牧杖)을 든 주교가 나와, ‘서청미시소경(序聽迷詩所經)’을 펼쳐 설교를 시작했다. 이 경전은 ‘예수 메시아경’으로 이해해도 될 듯하다. 경교가 중국에 들어온 후 처음으로 한역(漢譯)된 경전 중 하나일 것이다.

“먼저 천존(天尊)을 섬기고, 두 번째로 성상(聖上)을 섬기며, 세 번째로 부모를 섬겨라. 이것을 행할 때 천국이 이 땅에 임한다.”

도덕적 교훈을 담은 구절 뒤에 예수의 생애를 요약한 듯한 내용이 이어졌다.

“천존은 한 처녀에게 성령이 임하게 하였다. (…) 마리아는 임신 후 한 사내아이를 나았다. (…) 메시아에게 12제자가 있었는데 그가 고난을 완수했다. (…) 악한 사람들이 대왕 빌라도 앞에서 메시아를 위증했다. (…) 빌라도는 그를 죽이지 않을 수 없었다. (…) 이렇게 그는 이 세상의 백성을 위해 몸을 보시하였다. (…) 새벽에 그를 매달았는데 저녁이 되어서 사방이 어두워지고 땅이 흔들리고 산이 무너졌으며 또한 세상의 묘지 문들이 열렸고 죽은 자들이 모두 살아났다.”

현존하는 경전은 여기까지 전하고 있다. 예수 부활 이야기는 빠져 있지만, 예수에 대해 군더더기 없이 전하고 있는 것을 보면 원래의 경전에는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한자와 시리아 문자의 공존

기념비를 가렸던 장막을 걷어내자 ‘대진경교유행중국비(大秦景敎流行中國碑)’라는 글자가 보였다. 본명 또는 세례명이 ‘아담(Adam)’이고 한자 이름은 ‘경정(景淨)’이었을 사제가 이 비문을 참석자들에게 소개했을 것이다. 경정은 이 비문을 저술한 인물이다.

인간의 타락, 메시아의 탄생 및 그의 행적을 기록한 비문의 앞부분에 이어 경교가 어떠한 과정을 거쳐 중국에 정착했는지를 기록한 후반부가 소개됐다. 기념비 제막식은 특별한 경우였으나 경교도들은 7일마다 이러한 예배나 기도회를 열었다. 경교 사제들은 일상생활을 하면서도 하루 7번 기도를 했다. 그들은 노비를 갖지 않았으며 재물을 쌓지도 않았다. 자비를 베풀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계율을 지켰다. 경교도들은 그들의 신앙이 국가와 백성의 안정에 기여한다는 자부심도 갖고 있었다.

그로부터 840여 년이 지난 1625년(혹은 1623년) 이 비문이 발견됐다. 경교비의 발견은 근대 서방 기독교가 전래하기 이전에 동방 기독교가 먼저 유입됐음을 알려줬다. 우리는 이 기독교가 신라가 있는 한반도까지 전파됐을 가능성 때문에 커다란 관심을 가졌다.

종교는 문명의 교류, 충돌, 융합을 가장 생생하게 전하는 주제다. 비문에는 한자와 고대 시리아 문자가 함께 있었다. 때문에 바벨탑 이후 인류의 언어가 갈라졌다고 한 성서의 기록에 따라, 보편언어 보편문자에 대한 관심을 촉발하는 계기가 됐다. 중국 학자들이 중국어에서 보편문자의 가능성을 찾기 시작했을 때, 경교비는 그 열쇠의 하나로 인식된 것이다.

당시의 성서학자들은 성서를 다른 언어로 번역할 수 있는지에 대한 문제의식을 갖고 있었다. 여기에서 시작된 근원언어 복원에서 그들은 이국적인 중국어에 매력을 느꼈다. 경교와 경교비에 대한 탐색은 핵심적인 교리어들이 어떻게 번역됐고, 다른 종교적 관념들과 어떻게 혼합됐는지 연구할 수 있게 해줬다.

635년 중국에 처음 전해진 경교는 니케아 종교회의 이후 대두된 기독론 논쟁의 결과 에베소 공의회(431년), 칼케톤 회의(451년)에서 이단으로 정죄된 네스토리우스파가 주축인 것으로 알려져왔다. 서로마 지역과 지리적으로 떨어져 있던 동방교회 지역에서는 안디옥 총대주교구와 알렉산드리아 총대주교구가 양립했고, 후에 콘스탄티노플 교회가 총대주교구로 승격됐다.

네스토리우스는 428년 로마 황제 데오도시우스 2세의 청빙으로 콘스탄티노플 총주교로 부임한다. 네스토리우스에 의해 촉발된 기독론 논쟁은 그가 마리아를 ‘신의 어머니(Theo-tokos)’로 부르는 것을 거부하고 ‘그리스도의 어머니(Christo-tokos)’로 불러야 한다는 주장을 옹호하면서 비롯됐다. 그러나 네스토리우스의 견해는 크게 지지받지 못했다. 그는 주교직을 박탈당했다.

‘동부 시리아교회’

그후 네스토리우스의 지지자들은 에데사를 거쳐 니시비스와 셀레우키아를 지나 동방으로 진출했다. 오늘날 알려진 네스토리우스 교회다. 그러나 이 명칭은 시리아어를 주언어로 쓰는 동방교회가 그들을 부르는 명칭은 아니다. 동방교회에는 네스토리우스파 이외의 다른 신학전통이 존재했다. 근래에는 경교비가 세워지기 이전에 중국에 기독교가 들어갔다는 주장도 나온다. 따라서 중국 등지로 기독교를 전파한 것은 ‘동부 시리아교회’로 보는 것이 적절하다. 중국의 경교 유입과 쇠퇴에 관한 문헌 기록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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