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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기록, 그 진실과 왜곡 사이

에펠탑의 기억 왜곡과 실학의 허구성

학문적 착시현상의 주범 ‘시대착오’의 오류

  • 오항녕│전주대 역사문화학과 교수 hallimoh@hanmail.net

에펠탑의 기억 왜곡과 실학의 허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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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레오파트라의 코’란, 안토니우스가 클레오파트라에게 넋이 나가 로마에서 신망을 잃고 악티움 해전에서 패해 클레오파트라와 안토니우스가 자살한 사건을 두고 파스칼이 ‘클레오파트라의 코가 한 치만 낮았더라도 세계의 역사는 달라졌을 것’이라고 말한 데서 유래했다. 여기서 세계의 역사는 곧 ‘지중해의 역사’이므로, 파스칼이 생각하는 세계가 매우 협애했거나 다른 세계에 대해 무식했음을 알 수 있다. 게다가 파스칼은 공연히 역사 얘기를 꺼내어 역사학에 대해서도 무지를 드러냈다.

코가 높았다는 우연한 사실이 세계사를 바꿨을 것이라는 그의 말은 종종 역사의 우연을 중시하는 사람들에 의해 널리 인용된다. 그러나 파스칼은 코에 앞서 클레오파트라가 여자였다는 우연을 말했어야 한다. 또 이집트 여왕이었다는 사실이 상황을 어떻게 만들어갔는지부터 이해했어야 한다. 우연은 중요할 수 있고 때로 가슴 뛰게 하지만 객관적 조건, 자유의지와 함께 생각하면서 그 우연의 맥락을 검토하지 않으면 한낱 가십에 그치고 만다. 그 결과 파스칼의 말은 숱한 사람이 인용했지만, 악티움 해전에 대해 아무것도 설명해주지 못했다.

그렇다고 우연은 중요하지 않으며 사소한 일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또 우연은 개인적인 문제라는 뜻도 아니다. 우연이라는 것이 파스칼처럼 역사 현상에 대한 무지에서 나온 도피라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거듭, 나는 “우연이란 서로 원인이 다른 여러 사건의 만남이다”라고 정의한다. 담배를 사러 나갔다가 음주운전하는 차에 받혀 죽는 일부터, 김영삼 대통령과 정상회담이 예정돼 있던 김일성 주석이 갑자기 죽는 일까지, 역사에는 서로 원인이 다른 둘 이상의 사건이 만나는 경우가 많다. 우연은 개인적인 문제일 수도, 사소할 수도, 경우에 따라서는 무지의 소산일 수도 있다. 그러나 우연은 사회적인 산물일 수도, 매우 중요할 수도, 알면서도 인정할 수밖에 없는 것이기도 하다.

바로 이러한 우연의 복잡성 때문에, 카역시 그랬듯이, 우연이라는 문제를 역사에서 논의할 때 마땅한 가닥을 타지 못하고 더 어렵게 만든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나의 정의에 따르면 우연은 객관적 조건이나 자유의지에 기초해서 생기는 변주임을 알 수 있다. 이 변주, 날씨 예보만큼이나 예측하기 어려운 변주가 지금도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길이 엇갈리는 연인들의 안타까운 이별에서부터, 전쟁이 그친 평화로운 시기에 태어나 살고 있는 행운에 이르기까지. 이런 느낌이 과거에 투영될 때, 우리는 아쉬워하고 한탄하기도 하고 안도하고 뿌듯해하기도 하는 것이리라.

이야기의 조건



통상 이야기는 어떤 사건이(what) 어떻게(how) 일어났는지를 보여준다. 여기서도 논란이 있기는 하다. 예를 들어 우리가 기본교재로 삼고 있는 ‘역사가의 오류(Historian´s fallacies)’의 저자 피셔(D H Fischer)는 ‘왜(why)’라는 질문을 경계한다. 직접적인 원인부터 어떤 행위의 목적에 이르기까지 ‘왜’라는 물음의 함의 자체가 갖는 모호성 때문이다.

반면 카는 ‘왜’라는 질문을 중시한다. ‘왜’에 대한 논의가 아예 책의 한 장(章)을 이룬다. 역사가도 다른 과학자처럼 ‘왜?’라는 질문을 끊임없이 던지는 동물이라고 생각한다. 둘 다 일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피셔처럼 애매한 질문을 경계할 필요도 있고, 카처럼 통상적인 질문으로서의 ‘왜’를 본연의 궁금증(=호기심)으로 인정할 수도 있다.

그런데 이야기(서사)는 꼭 ‘왜’라는 질문에 대한 답은 아닌 듯하다. ‘무엇이, 어떻게?’라는 질문만으로도 이야기는 구성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점과 관련해, 이런 식의 이야기(story-telling)가 역사학뿐 아니라 일상생활이나 인접 분야의 학문에서도 공통된 용법이라는 피셔의 견해에 동의하는 편이다. 즉 핵심은 ‘어떤 일이 일어났는가?’라는 점이다.

이제부터 이야기하기에서 나타나는 오류를 살펴볼 텐데, 이야기는 원래 복잡하다. 우리의 관심은 시간과 이야기의 문제다. 서사에서 나타나는 시간적 정합성(integrity)의 문제다. 혹자는 시간(Time)이라는 것의 성격이 갖는 복잡성을 문제 삼을지도 모르겠다. 이럴 때 쓰는 좋은 탈출구가 있다. 그냥, 지금 우리 머릿속에 떠오르는 시간, 바로 그것을 말하는 것이다.

이번 호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시대착오(anachronism)의 오류다. 이 오류는 어떤 사건이 실제 일어난 시기(시대)가 아닌 다른 시기에 일어난 것처럼 묘사, 분석, 판단하는 것을 말한다. 단순한 연대(날짜) 착오가 이런 오류를 낳을 수도 있다. 하나의 대상, 사건, 용어가 잘못 쓰이는 것도 마찬가지다.

이 오류 중 먼저 들 수 있는 것이 현재주의(Presentism)의 오류다. 영미권에서는 현재주의를 ‘휘그 역사학(Whig history)’이라고 하는 모양이다. 하지만 현재주의의 용법은 정작 휘그들(Whiggery)과는 별로 상관이 없다고 한다. 현재주의는 현재의 관점으로 과거의 어떤 사실을 해석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트랙터를 사용하는 현재 농촌의 관점에서 호미와 쟁기를 사용하던 고려, 조선의 농업을 해석하는 것이다. 이런 오류의 대표적인 사례가 널리 알려진 ‘실학(實學)’이라는 개념이다.

실학의 현재주의

그동안 실학은 대략 “조선후기의 반(反)주자학 내지 탈주자학적 사상조류로, 주로 17세기에 이수광, 유형원 등에서 태동해 안정복, 이익, 정약용, 박지원, 박제가 등 18~19세기 학자들에 의해 발전된 근대 지향적 사상”을 가리키는 말로 통용됐다. 그래서 실학은 탈중화(脫中華), 민족주의, 민본주의, 과학주의를 내용으로 한다고 이해되어왔다. 당연히 상공업을 중시했다고 이해했고, 봉건적 신분제 및 지주-전호제 역시 부정하는 사상이라고 해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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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항녕│전주대 역사문화학과 교수 hallimoh@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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