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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죄의 재구성 <마지막회>

‘디지털 로빈후드’ 가면 쓴 사이버 테러리스트

어나니머스와 해킹

  • 이창무│한남대 경찰행정학과 교수·형사사법학 jbalanced@gmail.com

‘디지털 로빈후드’ 가면 쓴 사이버 테러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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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인류 역사는 곧 범죄의 역사다. 세상을 바꾸는 건 범죄다. 그럼에도 범죄의 창(窓)을 통해 역사와 문명을 보려는 시도는 드물었다. 소돔과 고모라, 분서갱유,
  • 십자군전쟁, 마녀사냥, 종교재판, 인종청소, 매카시즘, 마피아, 9·11 테러, 금융위기 등 시대적 위기는 늘 범죄에서 비롯됐다. 이 지면을 통해 신화 시대부터 21세기까지의 범죄를 재구성하는 작업을 통해 역사와 문명을 들여다봤다. “성자(Saints)만이 사는 사회에서도 범죄는 존재할 것”이라는 에밀 뒤르켕의 말처럼 범죄는 숙명과도 같은 것이다. 마지막회 주제는 사이버 범죄다.
‘디지털 로빈후드’ 가면 쓴 사이버 테러리스트
영국에서 11월 5일은 특별한 날이다. 불꽃이 밤하늘을 화려하게 수놓는다. 1605년 11월 5일 가이 포크스가 영국 의회 의사당을 폭파하려다 실패한 사건을 기념해 불꽃놀이를 한다.

가톨릭 교도였던 포크스는 당시 국왕 제임스 1세가 가톨릭을 탄압하자 왕과 각료가 참석하는 의회 개원식에서 의사당을 폭파하려 했다. 그러나 중간에 거사 음모가 들통 나 포크스 일당은 모두 붙잡혀 처형당했다. 이후 영국 왕실은 국왕의 무사함을 축하하고자 불꽃놀이를 했다. 그러나 다수의 시민은 포크스의 거사 실패를 아쉬워하면서 실패로 끝난 의사당 폭파 계획을 기념하는 의미로 불꽃놀이를 즐겼다. 포크스가 ‘저항의 아이콘’으로 자리 잡은 것이다.

포크스가 세계적으로 유명해진 데는 영화 ‘브이 포 벤데타(V for Vendetta)’의 역할이 크다. 같은 이름의 만화책 시리즈를 토대로 영화 ‘매트릭스’를 연출한 워쇼스키 형제가 각본을 쓰고 영화로 제작한 것이 2006년 세계적 흥행에 성공하면서 ‘가이 포크스 가면’이 널리 알려졌다. 제3차 세계대전 이후 2040년 가상의 영국을 배경으로 한 이 영화에서 주인공 ‘V’는 완벽한 감시 및 통제 사회에서 전체주의 정권에 저항하는 무정부주의자로 나온다. V는 포크스의 가면을 쓰고 등장한다.

FBI도 해킹

포크스 가면이 사회적 관심의 대상으로 떠오른 사건이 2008년 1월 발생했다. 미국의 신흥종교집단 사이언톨로지(Scientology)의 열렬한 신자인 영화배우 톰 크루즈를 조롱하는 영상, 글이 인터넷에 돌아다니자 사이언톨로지 교단에서 이런 자료를 공유하는 네티즌에게 법적으로 경고하는 e메일을 보냈다. 그러자 해커 단체인 어나니머스(Anonymous) 회원들이 사이언톨로지의 웹서버를 다운시키는 한편 사이언톨로지 본부 앞에서 포크스의 가면을 쓰고 시위를 벌였다. 종교탄압에 항의한 포크스처럼 인터넷 통제에 항의하는 의식을 거행한 것이다. 이후 포크스의 가면은 어나니머스의 상징이 됐다.

어나니머스는 2010년부터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했다. 위키리크스의 줄리언 어샌지가 2010년 11월 미국 정부의 극비 문서를 폭로한 후 정부 압력에 의해 마스터카드 등이 위키리크스에 대한 기부금 처리를 중지했다. 어나니머스는 이에 대한 보복으로 디도스 공격을 해서 마스터카드 웹사이트를 다운시켰다. 또 2011년 4월 일본 소니가 플레이스테이션3를 해킹한 미국의 조지 호츠를 저작권법 위반으로 제소하자 소니에 대한 보복 차원에서 플레이스테이션 네트워크에 침입해 고객 7500만 명의 명단을 유출했다.

어나니머스는 미국 의회뿐 아니라 연방수사국(FBI)을 상대로도 해킹을 감행했다. FBI가 가만있을 리 없었다. 2011년 6월 FBI는 어나니머스에서 핵심적 역할을 담당하던 ‘Sabu’라는 아이디의 해커를 체포했다. 뉴욕에 사는 자비에를 몬세구르라는 이름의 28세 남성이었다. 몬세구르는 무려 124년형을 선고받을 형편이었다. 감형을 조건으로 몬세구르는 FBI 수사에 협조했고 어나니머스에서 적극적으로 활동하던 해커들이 미국에서 80여 명, 유럽 등지에서 20여 명 등 무더기로 체포됐다.

‘디지털 로빈후드’ 가면 쓴 사이버 테러리스트

국제 해커그룹 어나니머스는 상설 조직도 규약도 없다. 그들은 인터넷 통제 반대를 명분으로 범죄 행위를 벌이고 있다.

목적이 수단 정당화 못해

그럼에도 어나니머스는 와해되지 않았다. 수사망에 걸려들지 않도록 더욱 조심했고 은밀하게 움직였다. 어나니머스의 명성을 드높인 게 멕시코의 마약 카르텔 제타스를 굴복게 한 사건이다. 잔혹한 보복살인으로 악명 높은 제타스가 민간인을 납치했는데 그중에 어나니머스 회원이 끼어 있었다. 어나니머스는 멕시코 경찰본부를 해킹해 제타스와 협력한 혐의가 있는 경찰관, 언론인 등의 명단을 빼낸 뒤 납치한 회원을 풀어주지 않으면 명단을 공개하겠다고 협박했다. 제타스는 결국 그 회원을 석방할 수밖에 없었다.

어나니머스는 2011년 ‘아랍의 봄’ 때도 부패한 정부의 웹페이지를 해킹해 업무를 마비시키거나 중요한 정보를 빼내 반정부 시위대에 도움을 줬다. 2011년 9월 미국 뉴욕에서 벌어진 ‘월가 점령 시위’는 어나니머스의 힘을 확실하게 보여준 사건이다. 월가 점령 시위에서 일부 시위대가 포크스의 가면을 쓰고 나타난 것도 어나니머스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다. 시사주간지 ‘타임’은 2011년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100인 가운데 하나로 어나니머스를 선정했다. ‘지도자 없이 충격적 유머와 권위에 대한 경멸로 단결한 인터넷 벌떼’라는 게 타임의 촌평이다. 어나니머스 지지자들은 ‘자유전사’라거나 ‘디지털 로빈후드’ 같은 식으로 칭송한다. 비판하는 사람들은 단순한 ‘사이버 테러리스트’에 불과하다고 깎아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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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창무│한남대 경찰행정학과 교수·형사사법학 jbalanced@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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