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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기록, 그 진실과 왜곡 사이

개인은 개인이고 대중은 대중이다

동기(動機)의 오류

  • 오항녕 │전주대 역사문화학과 교수 hallimoh@hanmail.net

개인은 개인이고 대중은 대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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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동기(動機)라는 말은 인과(因果)의 사촌쯤으로 보인다. 어쩌면 인과의 일종인지도 모른다. 그런데 8월호에 실은 ‘인과의 오류’에서 다루지 않은 것은 ‘동기’에 내재한 특수한 의미 때문이다. 바로 인간학적 측면이다. 이 측면 때문에 인과론이 여러 오류의 가능성에도 불구하고 ‘역사적 설명’ 기능을 하는 데 비해, ‘동기론’은 종종 ‘비역사적 설명’으로 일탈한다.
개인은 개인이고 대중은 대중이다

친숙한 전래동요로 엮은 놀이음악극 ‘콩쥐팥쥐’. 전북 전주시, 김제군, 완주군은 콩쥐팥쥐 이야기에 등장하는 동네를 놓고 논란을 벌이기도 했다. 콩쥐팥쥐는 권선징악의 통쾌함 때문에 읽히고 또 읽힌다. 그런데 소설로 끝나야지 역사로 나오면 낭패를 본다.

쉽게 말하면 이렇다. 어떤 사건의 결과는 뭔가 이유가 있는 행동이고, 원인은 그 행동 뒤에 숨어 있는 생각이라고 이해하는 동기론은 인과론의 맥락에서 설명할 수 있다. 미국의 이라크 침공이 석유 때문이었든 사담 후세인 제거를 위해서였든, 이는 침공의 동기가 원인을 대신할 수 있다.

그런데 인과론의 맥락을 떠나 동기를 정형화한 행위의 패러다임으로 이해한다면 문제가 다르다. 그런 게 있나, 하는 독자도 있을지 모르겠다. 뒤에서 살펴보겠지만, 의외로 그런 일은 자주 일어난다. 조금 비꼬아서 말하자면, 나는 이런 오류를 “원인과 결과를 설명하는 통상의 의미로부터 시간을 초월한 인간학적 영역으로 넘어오면 생기는 것”이라 표현하고 싶다. 이때의 인간학이란 역사적 맥락이 거세된 논의를 말한다.

‘콩쥐-팥쥐론’과 거짓 기억

나는 이를 콩쥐-팥쥐론이라는 학술 용어로 설명한다. 일례로 역사를 공부할 때 자주 나오는 명분과 실리를 들어보자. 어떤 사람은 이 둘을 이분법적으로 갈라놓고 명분은 헛된 것, 실리는 바람직한 것이라는 콩쥐-팥쥐 논법을 적용한다. 콩쥐-팥쥐 논법이란, 동시에 있을 수 있는 정책이나 견해를 선/악 모드로 환원하는 ‘근대 한국 역사학의 포폄(褒貶)론’을 말한다. 이 신종 근대 포폄론은 당색과 근대주의를 배경으로 국사, 특히 조선시대사를 이해할 때 대중의 편견을 강화하며 교묘하게 기생하고 있다.

위의 말에서도 드러나듯, 콩쥐-팥쥐론은 어떤 인물에 대한 역사적 이해에만 국한된 개념이 아니라 우리의 사유 전반에 걸친 이분법, 환원론에 대한 반성이다. 다만 우리가 논의하려는 동기론의 익숙한 사례이므로 소개해두는 것이다.

동기론의 오류를 본격적으로 논의하기 전에, 역사학도의 눈을 끄는 기사 하나를 보고 가려 한다. 7월 25일(현지시간) CNN은 미국 매사추세츠공대(MIT)의 도네가와 스스무 교수팀이 26일자 과학전문지 ‘사이언스’에 거짓 기억 재현 실험에 관한 논문을 게재했다고 보도했다. 정보를 부호화해 쥐의 뇌세포를 조작함으로써 거짓 기억을 만들어내는 데 성공했다는 것이다.

거짓 기억의 존재는 심리학자들 사이에서도 낯익은 주제 중 하나다. 그러므로 새삼스러운 현상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거짓 기억의 메커니즘을 뇌에서 확인했다는 의미는 매우 크다. 단기기억과 장기기억의 메커니즘을 밝힌 뇌과학이 거짓 기억의 메커니즘까지 설명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도네가와 교수는 “사람의 기억은 믿을 수 없는 것이라는 점을 계속 상기시켜야 한다”고 말했다. 거짓 기억이 실제 기억을 대체할 수 있다는 점에서 도네가와의 말은 정당하다. 일어나지 않은 일에 대한 거짓 기억을 가진 사람이 그 기억을 실제 일어났다고 굳게 믿는 것이 어찌 바람직한 상황이겠는가.

그렇지만 역사학은 이런 사태에 대비해 수천 년 동안 대책을 강구해왔다. 우리가 10여 차례에 걸쳐 살펴본 ‘역사기록의 오류와 진실’이라는 주제가 바로 그것이다. 나는 지금 ‘기억은 믿을 수 없다고 상기시키는 것’을 넘어 ‘어떻게 믿을 수 있는 기억을 전할 수 있을지’ 이야기하는 것이다.

호모 사피엔스?

개인은 개인이고 대중은 대중이다

인간의 기억을 송두리째 바꾸는 ‘토탈 리콜’은 가능할까. 도네가와 교수진은 실험용 상자에 쥐를 넣고 발에 전기 충격을 줬다. 그리고 유전학적으로 상자에서 충격받은 기억에 반응하도록 쥐의 뇌세포를 바꿔 거짓 기억을 심었다. 2012년 개봉 영화 ‘토탈 리콜’.

관념적 오류(the idealist fallicy)라는 것이 있다. 배타적이고 좁은 의미에서 인간을 호모 사피엔스(Homo sapiens)라고 치고 인간의 행동을 해석하는 것이다. 이런 환원론의 어리석음은 이미 명백하다. 어떤 개별 인간이 어느 정도 ‘사피엔스’라면 그는 동시에 ‘분노하는(furens) 인간’(세네카)이고, ‘노는(ludens) 인간’(호이징하), ‘만드는(faber) 인간’, ‘듣는(odiens) 인간’이기도 하다. 단순히 인간이라는 존재의 합리적 요소만 분리하면 인간성과 합리성 둘 다 왜곡하게 된다. 흔히 인간은 ‘정치적 동물’이니, ‘지적 동물’이니, ‘경제적 동물’이니 하는 논의들이 여기에 포함된다.

역사학자로서 호모 사피엔스 대신 ‘노는 인간’에 주목한 호이징하(J. Huizinga)는 놀이 역시 하나의 의미 기능이며 문화의 기초라고 보았다. 지난 설날 먼 데 사는 동생들이 모처럼 휴가를 내서 왔고 우리는 연 이틀 동안 윷놀이에 정신을 잃었다. 간간이 사촌동생, 처남, 장모님이 들락날락하며 패가 나뉘었고, 쉴 새 없이 먹으며 소리를 지르고 탄식했고 발을 굴렀다(윷놀이를 해본 사람은 알 것이다). 아마 단독주택이 아니었으면 벌써 아래층에서 뛰어올라왔을 것이다. 오죽했으면 집으로 돌아간 제수씨는 몸살이 났을까! 이걸 어떻게 지혜와 어리석음이라는 잣대로 잴 수 있겠는가.

왜 노름꾼이 자신을 잊도록 도취하는가? 왜 축구 시합에 그 많은 사람들이 열광하는가? 이렇게 놀이에 열광하고 몰두하는 것은 생물학적인 분석으로는 해석할 수가 없다. 그러나 놀이에 이렇게 열광하거나 몰두하는 것, 즉 미치게 만드는 힘 속에 놀이의 본질, 원초적인 성질이 깃들어 있다. (…) 동물은 논다. 그러므로 틀림없이 동물은 기계적인 동물 이상이다. 인간은 놀며, 논다는 사실을 안다. 그러므로 분명 인간은 이성적 존재 이상이다. 왜냐하면 놀이란 비이성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호이징하, 김윤수 역, ‘호모 루덴스’, 까치, 1993, 9~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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