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10월호

역사성 대신 본성 사론(史論) 아닌 도덕론

이광수 ‘민족개조론’에 담긴 시선

  • 오항녕 │전주대 역사문화학과 교수 hallimoh@hanmail.net

    입력2013-09-24 16:5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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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성 대신 본성 사론(史論) 아닌 도덕론

    일본의 식민지 논리를 철저히 내면화한 이광수. 1937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구속된 그는 재판 도중 ‘가야마 미쓰로’로 창씨개명한다.

    ‘신동아’ 9월호에서 다룬 주제는 동기(動機)의 오류, 그러니까 인과론의 일종이라고도 할 수 있는 동기의 문제였다. 다만 이 문제를 인간학적 차원에서 접근했다는 차이가 있다. 인간학이라고 하니 어렵게 느껴지겠지만, 뭔가 구체적인 역사적 상황과 무관한 ‘인간’이 존재하는 것으로 상정하고 거기서 역으로 역사적 사건의 원인을 설명해 들어가는 방식에서 나타나는 오류의 문제를 다룬 것이다.

    다시 이 문제를 다루는 것은 이런 생각 방식이 우리에게 익숙하고 또 쉽게 전이되고 내면화하기 때문이다. 그 얘기 먼저 하겠다.

    원시 민족의 변천

    역사학의 역사인 사학사(史學史)나 조선시대사 강의를 주로 맡았던 나는 한동안 기말고사 때 꼭 내는 시험문제가 있었다. 학기 초에 강의계획서를 설명하면서, 미리 기말고사 문제의 하나를 제시해 학기 중에 고민했다가 답안을 작성하라는 취지였다. 시험문제는 이랬다. 이광수(李光洙·1892~1950)의 ‘민족개조론’을 비판하라.

    언뜻 보면 충분히 가능할 것 같은데도, 학생들의 답안은 심정적 비판 쪽에 가까웠지 논리적, 사실적이라고 보기 어려울 때가 많았다. 대체로 80점은 넘는데, 95점 이상이 적었다고 해야겠다.



    그러던 어느 날 분단시대론을 비롯해 근현대사 연구의 주춧돌을 놓으신 강만길 선생님을 모신 식사자리가 있었다. 얘기를 나누던 중 나는 기말고사 경험을 선생님께 털어놨다. 좋은 문제라는 데 동감하시면서, 그러면 다음에는 단재(丹齋) 신채호(申采浩)와 비교해 서술하라는 방식으로 바꾸면 어떻겠느냐고 조언하셨다. 충분히 납득할 수 있는 접근 방법이었다. 역사학자이면서 해외로 망명해 독립운동에 매진하다 감옥에서 일생을 마친 인물과 이광수를 비교하면 설득력 있는 답안이 가능할 듯도 싶었다.

    그러나 나는 이를 시도해보지 못했다. 다만, 시도했더라도 인물 비교는 가능했겠지만 역시 이광수의 ‘민족개조론’ 자체를 비판한다는 목적을 십분 달성하지는 못하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무엇보다 내가 이광수를 비판하기엔 약했던 것이다.

    이광수는 파리 평화회의 이후 국제연맹이 조직된 시대를 ‘개조의 시대’라고 규정했다. 제국주의 세계의 개조, 생존경쟁 세계의 개조, 남존여비 세계의 개조. 이런 누구도 거부하기 힘든 근대 사상의 비전을 기조로 “이 시대사조는 우리 땅에도 들어와 각 방면으로 개조의 부르짖음이 들립니다. 그러나 오늘날 조선 사람으로서 시급히 하여야 할 것 개조는 실로 조선 민족의 개조외다”라고 선언했다.

    원시시대의 민족 또는 아직 분명한 자각을 가지지 못한 민족의 역사는 자연현상의 변천의 기록과 같은 기록이로되 이미 고도의 문명을 가진 민족의 역사는 그의 목적의 변천의 기록이요, 그 목적을 위한 계획과 노력의 기록일 것이외다. 따라서 원시민족, 미개민족의 목적의 변천은 오직 자연한 변천, 우연한 변천이로되 고도의 문명을 가진 민족의 목적의 변천은 의식적 개조의 과정이외다.

    그는 조선 민족이 변하지 않고 정체돼 있었다고 말하지 않는다. 과거에 숱하게 변하였으되, 그 변천은 자연적이고 우연한 변천이지 목적의식적이고 통일적인 계획을 가진 변천이 아니었다고 주장했다. 곧 원시 민족의 그것이었지, 문명을 가진 민족의 변천은 아니라는 말이었다.

    미숙한 어른의 붓끝

    “서른 살을 기점으로 하여 어른다운 삶을 전개하는 마당에서 춘원은 아내 허영숙의 명령 앞에 무릎을 꿇고 있는 형국이다. 아내 허영숙은 그러니까 고아 출신의 춘원에겐 제2의 고향이요 어머니의 젖무덤과도 같은 것이다. 도산(안창호)이 그에게 아버지라면, 허영숙은 그에게 어머니였다. 춘원은 이 시점에서 방랑에 종지부를 찍을 수 있었다. (…) 방랑의 끝, 그것이 그에겐 귀국이었다. 춘원은 이 귀국을 하느님의 명령이라 주장하였다. 팔자로 정해진 것, 그것이 그의 강변이었다.”(김윤식, ‘이광수와 그의 시대2’, 솔, 2008, 28~29쪽)

    역사성 대신 본성 사론(史論) 아닌 도덕론

    우리가 알고 있는 식민사관은 도쿠토미 소호의 책 ‘조선통치 요의’에서 출발한다. 조선 사람들을 뼛속까지 천황의 신민으로 만들려고 했던 그는 1936년 이광수를 만났을 때 자기의 조선 아들이 돼 달라고 부탁했다. 사진은 정일성 저 ‘일본 군국주의의 괴벨스 도쿠토미 소호’ 표지.

    3·1운동을 주도했던 인물들이 아직 감옥에 있던 1921년 봄, 임시정부 대변인이던 이광수가 귀국했다. 물론 이광수는 수백만 명이 참가한 3·1운동을 체험하지 못했다. 또 아무리 2·8선언이 그의 사상과 동떨어진 일탈이었다고 해도 당시 상황에서 이광수의 귀국은 허영숙을 제외하고는 설명하기 어려웠다. 바야흐로 흔히 ‘문화정치’라고 불리는 일제의 고등 술책이 작동하던 시기였다. 이광수는 귀국 한 달 뒤인 5월 허영숙과 결혼했다.

    “도산을 한쪽 팔로 하고 허영숙을 다른 한쪽 팔로 한 춘원은 자기 말대로 이젠 청승스러운 중이 아니요, 바로 ‘임금의 아들’이었다. 천하에 무서운 것이 없었다. 무엇이나 하면 될 수 있는 상태였다. 날개가 돋아 펄펄 날 것만 같았다. 방랑은 끝난 것이다. 이제 어른이 된 것이다.

    어른이 된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이었던가. 한마디로 그것은 ‘민족개조론’을 주장하는 일이었다. 논설로써 민족적 경륜을 펼치는 일이었다. 이 집념과 자부심은 하도 강한 것이어서 그가 귀국하여 제일 먼저 착수한 사업이었다. ‘내가 아니면 이 민족을 구할 자 없다’는 명제보다도 ‘나만한 민족적 경륜을 가진 자는 없다’는 명제가 춘원에겐 너무도 크고 집요하여 그 강렬도는 글로 쓰고자 하면 논설보다 소설을, 또 소설도 자전적인 것도 아닌 허구적인 것으로 하라는 지배인 허영숙의 엄명을 거역할 정도였다.”(앞의 책, 32쪽)

    도쿠토미 소호

    이광수의 ‘민족개조론’을 이해할 수 있는 참고자료가 있다. 의외로 많은 이가 잘 모르는 인물이다. 도쿠토미 소호(德富蘇峰). 1910년 8월 강제 합방 이후 조선총독부 기관지 ‘경성일보’만 남기고 나머지 조선 언론을 통폐합한 장본인이다(정일성, ‘일본 군국주의의 괴벨스 도쿠토미 소호’, 지식산업사, 2005).

    그는 이른바 ‘민족동화정책’을 입안해 실행했는데, 이는 잠시 후 언급할 이광수의 ‘민족개조’와 식민지 ‘민족말살’이라는 사안과 연결돼 있다. 그가 남긴 책이 모두 400권이라는데, 그중 조선을 병합한 뒤 쓴 조선 지배 지침서가 ‘조선통치 요의’다. 그는 영국의 아프리카 지배와 일본의 조선 지배는 다르다는 식민사관을 편 인물이다. 그는 조선 정치사를 ‘음모사’라고 불렀다(하긴 요즘도 이렇게 인식하는 ‘역사학자’가 많다). 음모엔 정쟁이 따르게 마련이고, 조선의 붕당 싸움은 세계 어느 곳에서도 찾을 수 없는 악정(惡政)으로 묘사된다. 그 결론은 다음과 같다.

    (일본은 조선에 대한) 통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첫째, 조선인에게 일본의 통치가 불가피함을 마음에 새기도록 해야 한다. 둘째, 자기에게 이익이 따른다고 생각하게 만들고, 셋째, 통치에 만족하여 기꺼이 복종하게 하고 즐겁도록 하는 데 있다.

    도쿠토미는 그렇지 않아도 좌절에 빠져 있던(‘술 권하는 사회’를 보라) 조선 지식인들을 무력하게 만드는 데 기여했다. 이광수는 보통 사람들이 읽어야 할 책 8권을 선택하면서 필독서로 도쿠토미의 ‘소호 문선’을 포함시켰다. 이광수와 도쿠토미의 만남은 ‘매일신보’ 사장 아베의 주선으로 이뤄졌다. 매일신보에 ‘무정’을 연재하던 이광수는 연재를 마친 뒤 1917년 8월 부산항에서 도쿠토미를 만났다.

    1936년 이광수를 만났을 때 도쿠토미는 이광수에게 자기의 아들이 되어 달라고 부탁했다. 자신의 조선인 아들. 크게 되어달라고. 이후 이광수는 수양 동우회 사건으로 안창호와 함께 검거됐다가 재판을 받는 도중 ‘가야마 미쓰로’로 창씨개명했다. 그리고 도쿠토미에게 편지를 보내 말했다.

    역사성 대신 본성 사론(史論) 아닌 도덕론

    ‘그럭저럭 산다’는 건 흉이 아니다. 그럭저럭 살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역사의 경험은 보여준다. 인류의 이상이 ‘그럭저럭 살 수 있는 세상’을 만드는 것이라고는 할 수 없어도, 삶의 리듬을 챙기며 살 수 있는 세상은 누구에게나 소망이 아닐까. 식민지에선 종종 그 생존을 확보하기 위해 투항과 투쟁의 기로에 서야 했다. 사진은 서울 지하철 1호선 신도림역의 출근길.

    생존과 투항 사이

    ‘내 자식이 되어달라는 선생의 말씀을 들은 지 5년의 세월이 지난 오늘에야 선생의 간곡한 부탁을 따르게 되었습니다.……조선인은 앞으로 텐노오의 신민으로서 일본 제국의 안락과 근심 걱정을 떠맡고 나아가 그 광영을 함께 누려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국민 수업에 전념하게 되었습니다. 이제 조선이야말로 텐노오 중심주의로 나아가야 하리라 생각합니다.’

    이광수는 과거에만 그러한 게 아니라, 현재의 조선인도 스스로 이룬 것이 없다고 생각했다. 전등, 수도, 전신, 철도, 윤선(輪船·기선), 도로, 학교…. 즉 근대를 표상하는 문물을 이룩하는 데 기여한 바가 없다는 것이다. 조선인이 세운 교육기관이래야 고등보통학교 몇 개에 불과하고, 산업기관이래야 자본 1000만 원도 못 되는 구멍가게 같은 은행 몇 개가 있을 뿐이라는 것이다.

    이런 문제의식은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이 문제의식에 그가 무실(務實), 역행(力行)을 주장했던 목표가 담겨 있기 때문이다. 식민지 제국들은 이렇게 자신들이 근대 문명을 이루어갔다. 그 문명을 바탕으로 세계 곳곳에 식민지를 건설하고 있었다. 식민지 조선은 달랐다. ‘문명’의 탄생과 발전에 기여는커녕 그 ‘문명’의 주인들에게 종속돼버렸다.

    생존하기 위해선 ‘문명’의 주인들과 대등할 수 있는 길을 찾아야 했다. 어깨를 겨룰 수 있어야 했다. 이광수가 전등, 수도, 전신, 철도 등을 쭉 열거하는 것은 그냥 생각나는 대로 적은 것이 아니다. 바로 근대 ‘문명’이고 식민지의 ‘주인’들이 가지고 있는 것들이다.

    그런데 식민지는 그렇게 생존을 위해 확보해야 할 조건을 만들어가는 데도 결단을 요구했다. 제국과 식민지는 결코 대등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는 ‘문명’의 차이이며, 지배-피지배의 차이이기 때문이다. 식민지의 노동은 제국의 자본을 위해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대등하기 위해선 선택해야 한다. 투항할 것인가, 투쟁할 것인가! 투쟁을 선택하는 순간 대등해질 것이지만 위험하며, 그래서 투쟁하고 싶지만 마음뿐인 경우도 많다. 투항하면 실제로 대등해지지는 않겠지만 대등해졌다고 생각할 수는 있을 것이다.

    이광수의 ‘민족개조론’은 후자였다. 투항할 때는 대들지 않는다. ‘민족개조론’에 일제의 침략에 대해 일언반구도 없는 건 결코 우연이 아니다.

    본성 차원에서 본 역사

    투항이든 투쟁이든 선택해,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인지를 얘기하다보면 반드시 거치는 과정이 있다. 그렇다, 반성이다. 왜 지금 이렇게 되었는지를 묻고, 지금까지 진행돼온 사정을 점검한다. 회상하거나 일기를 들춰보는 것도 이때다. 이광수도 ‘민족개조론’에서 그리하였다. 그 기억과 기억하는 방식이 곧 이광수의 역사론이 된다. 이 부분이 정교해야 투항이 투항처럼 보이지 않는다. 거꾸로 일본제국의 입장에선 이 부분이 정교해야 침략과 지배가 침략이나 지배로 보이지 않는다.

    이광수는 식민지 상황의 원인을 악정(惡政)이라고 했다. ‘조선 민족의 쇠퇴의 책임은 그 치자 계급―즉, 국왕과 양반에게 있다.’ 정치를 문란하게 한 것, 산업을 쇠잔케 한 것, 국민교육에 힘쓰지 아니한 것, 사회의 풍기와 인민의 정신을 타락하게 한 직접의 책임이다. 자기 일신의 권세, 자기의 친척 붕우(朋友)의 출세, 자기와 운명을 같이하는 당파를 위해서만 행동하는 공직자들, 이것이 조선의 악정이었다는 것이다. “허위, 비사회적 이기심, 나타, 무신, 겁나, 사회성의 결핍”이, 조선 민족이 ‘금일의 쇠퇴’에 빠지게 한 원인이며, 그는 이를 자신의 ‘사론(史論)’이라고 했다.

    역사성 대신 본성 사론(史論) 아닌 도덕론

    ‘단종애사’ 집필 당시의 이광수. 1928년 무렵의 사진으로 곁에 앉은 사람은 부인 허영숙이며, 어린이는 아들 봉근이다.

    이를 그는 민족성이라고 했다. 투항하면서 침략이 빠지듯, 도덕을 말하면서 역사가 민족성으로 환원된 것이다. 그에게 조선은 역사의 대상이 아니었다. 그렇기 때문에 조선의 개혁정책, 민생정책, 문화와 사상 등엔 관심이 없었다. 그래서 그의 조선시대 이해는 역사에 대한 이해, 사론이 아니라 도덕론이다.

    멀리는 말 말고 이조사(李朝史)를 보건대 서로 속이고, 서로 의심하고, 시기하고 모함한 역사라 하겠습니다. 이조사와 같이 완인(完人)이 없는 역사는 아마 드물 것이니, 명망 있는 인물 중에 와석 종신한 사람이 몇 사람이 못 됩니다.……이를 민족적으로 보더라도 조선 민족은 적어도 과거 오백 년간은 공상과 공론의 민족이었습니다. 그 증거는 오백 년 민족생활에 아무것도 남겨놓은 것이 없음을 보아 알 것이외다.

    이게 이광수의 조선시대사 인식의 전부다. 물론 당시엔 ‘조선왕조실록’이 일반에게 공개되지 않았다. 그러므로 지금 우리가 접하는 만큼 풍부한 자료를 이광수는 이용할 수 없었다. 그러나 이는 자료 이전의 문제다. 식민지라는 사태를 역사가 아니라, 인간학적 본성의 문제로 치환하면서 생긴 문제다. 이렇게 어떤 인간이나 민족에 대해 역사성이 아니라 본성의 차원에서 접근하는 역사에 대한 태도 때문에 이광수의 ‘민족개조론’을 ‘역사기록의 왜곡’이라는 우리의 주제 속에서 다루는 것이다.

    반성하는 방법

    아무튼 이광수가 보기에, 민족을 개조할 때는 ‘그 민족성의 근저인 도덕에서부터 시작하여야 한다’. 여기서 잠깐. 앞서 원시와 문명의 대립을 말하면서도 곧바로 그런 도식화로 가기보다 이광수는 숱한 역사의 변천을 말했다. 결국 그런 변천에도 불구하고 이광수는 원시 민족과 문명 민족을 구분했다. 역사적 변천은 논리적 장치인 셈이다. 그런데 그 논리적 장치가 사실에 부합하기 때문에 설득력을 갖는다. 이 정도는 계산하고 쓴 글이 ‘민족개조론’이다.

    민족성을 논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그는 곧바로 민족성의 개조를 논하지 않는다. 먼저 장점을 말한다. 그게 사실에 부합하는 측면도 있고, 개조를 위한 동력을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는 조선 민족의 장점을 너그럽다, 사람을 사랑한다, 청렴하다, 자존심이 강하다 등으로 요약했다. ‘한문식 관념’으로 말하면 인과 의와 예와 용이고, ‘현대식 용어’로 말하면 관대, 박애, 예의, 금욕적 염결(廉潔), 자존, 무용, 쾌활이라고 불렀다.

    그런데 그 장점은 결점이 되기도 한다. 관대 박애하므로 현대 국민이 가지는 배타적 애국심을 가지기 어렵고, 상공업의 발달은 보잘것없었으며, 예의를 숭상하다가 허위로 흘렀고, 낙천적이고 현실적이다 보니 심오한 철학적 사색이나 과학적 탐구에 대한 노력을 경시했다고 했다. “조선 민족을 금일의 쇠퇴에 끌은 원인인 허위와 나타와 비사회성과 경제적 쇠약과 과학의 부진은 실로 이 근본적 민족성의 반면(半面)이 가져온 화(禍)입니다.”

    그가 보기에 이는 부속적 성격이다. 고치면 된다. 개조하면 된다. 투항의 논리, ‘민족개조론’은 그의 창씨개명과 청년들에 대한 참전 선동으로 귀결됐다. 두 가지를 더 생각해보고 논의를 마쳐야겠다.

    역사성 대신 본성 사론(史論) 아닌 도덕론

    벽초 홍명희. 이광수가 조선 역사를 민족성이라는 세탁기 속으로 밀어넣은 반면, 벽초는 문학의 이름으로 되살려냈다. 그의 ‘임꺽정’ 1, 2, 3은 사마천의 ‘사기열전’보다 뛰어난 걸작이라고 생각한다.

    1946년 독일 나치의 전쟁범죄를 심판한 뉘른베르크 법정에선 인종말살이라는 개념이 만들어졌다. 그러나 인종말살은 이미 오래전 유럽 열강의 식민지 점령 과정에서 토착 민족에 대한 조직적 학살에서 시작됐다. 인종학살이 인종주의에 뿌리를 두고 있음은 물론이다. 백인들은 약탈을 합리화하기 위해 인디언들이 동물인지 인간인지 물었다. 답은 동물이었고, 따라서 인디언 살해는 범죄가 아니었다.

    인종말살이 인종의 생물학적 멸절을 목표로 한다면, 민족말살이라는 인류학적 개념은 그 사람들의 문화를 파괴하는 것이다. 민족말살은 말살의 집행자들과 상이한 사람들의 생활양식과 사고방식을 체계적으로 파괴하는 것이다. 결국 인종말살은 사람들을 육체적으로 죽이지만, 민족말살은 사람들을 정신적으로 죽인다(삐에르 끌라스트르, 변지현-이종영 옮김, ‘폭력의 고고학’, 울력, 2002, 69~70쪽).

    민족말살, 민족동화

    ‘문명(Civilization)’이란 말은 19세기 중엽에 만들어진 근대적 산물이다. 바로 유럽의 자기의식이다. 식민지에서의 민족말살은 식민지 야만인들을 ‘위해서’ 행해지는 것이다. 야만의 비참하고 헐벗은 삶의 질곡을 벗어나 인간의 품위와 민주주의적 권리와 행복을 누릴 수 있도록 ‘문명인’들이 도와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민족말살의 인도주의 윤리다.

    그러므로 민족말살에는 문명들 사이에 위계가 확실하다. 열등한 문화(원시 민족)와 우월한 문화(고등 민족)가 있다. 물론 후자는 유럽 백인 문명이다. 이 열등과 우월의 차이를 인종말살의 관점에선 비관적으로 보기 때문에 생물학적으로 제거해야 하지만, 민족말살의 관점에선 낙관적으로 보기 때문에 모델을 제시하고 가능하다면 동화할 수 있도록 변화시키고 개선시킬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광수와 민족말살의 논리가 만나는 지점이고, 왜 일제강점기 후반에 이광수가 일제의 민족동화 정책에 자연스럽게 결합했는지 이해할 수 있는 대목이다.

    안타깝지만 나는 신채호 선생과 이광수를 비교하는 것만으로는 학생들의 기말고사에서 기대한 목표를 달성할 수 없으리라고 생각한다. 단재가 역사학자이긴 했지만, 그도 이광수와 유사한 역사학적 오류에 빠져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이쯤에서 떠오르는 인물이 있다. 벽초 홍명희(洪命熹·1888~1968) 선생이다. 벽초에 이광수와 최남선을 보태 조선의 3대 천재라고 불렀다는데, 내가 보기에 이광수와 같은 반열에 놓기엔 너무 아까운 인물이다.

    ‘임꺽정’의 기억

    역사성 대신 본성 사론(史論) 아닌 도덕론
    오항녕

    전주대학교 인문대학 역사문화학과 교수

    고려대학교 사학과에서 조선시대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지곡서당(태동고전연구소)에서 한학을 공부했으며, 국가기록원 팀장으로 기록관리도 공부했다.

    ‘조선의 힘’(역사비평사), ‘기록한다는 것’(너머학교), ‘조선초기 성리학과 역사학’(고대 민연) 등 10여 편의 저·역서가 있으며, 그 외 논문 50여 편이 있다.


    벽초는 ‘임꺽정’의 저자로 알려져 있다. 월북해서 부수상까지 지낸 이력 때문에 한동안 ‘임꺽정’은 우리가 읽을 수 없었다. ‘임꺽정’에 대해 우리는 ‘의적 임꺽정’의 활약을 기대하지만, 벽초는 ‘임꺽정’에서 조선의 정화(精華)를 그려내고 싶다고 말했다. 어떤 분들은 ‘임꺽정’ 1, 2권을 읽으면서 언제 임꺽정이 나오느냐고 불평한다는데, 나는 ‘임꺽정’ 1, 2, 3권이야말로 어떤 역사서보다 그 시대를 잘 그려냈다고 생각한다.

    벽초가 실록을 봤는지는 모르겠지만, 또 실록과 ‘임꺽정’을 같은 차원에서 비교할 수는 없지만 문학적 상상력을 차치하더라도 벽초의 탁월한 역사적 통찰은 높이 평가돼야 할 것이다.

    이제 나는 이광수의 ‘민족개조론’을 기말고사 문제로 내지 않는다. 또 내게 된다면, 이번엔 벽초와 비교하는 문제를 내보고 싶다. 물론 역사학의 입장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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