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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 지옥에서 지루한 천국으로

  • 허태균│고려대 심리학과 교수

행복한 지옥에서 지루한 천국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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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관성의 욕구

물론 착각을 넘어 누구나 자신의 행동을 합리화할 명분을 다 가지고 있다(고 믿는다). 자기가 먼저 시작하지 않았고, 단지 손해 볼 수는 없어서, 가족을 위해서 어쩔 수 없이, 누가 시킨 것이기에 자신은 그래도 덜한 편이라고 얘기한다. 그러면서 다른 사람이 먼저 바뀌길 기대하며, 자신이 손해를 보지 않는 세상이 오면 그때는 원칙을 지키고 규범을 따르며 자기 소신대로 일관되게 살 거라고 얘기한다.

개인적인 면에서 보면 그런 측면이 전혀 없다고 하기는 힘들다. 한 개인과 사회의 관계라는 관점에서 사회적 존재인 인간이 사회의 영향을 받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하지만 한 사람이 자신을 제외한 5000만 한국인으로부터 영향을 받을 때, 자신은 다른 사람에게 영향을 주는 그 5000만 명 중 하나다. 사람들은 자신이 얘기하는 그 사회를 자신이 구성하고 있다는 사실을 종종 잊는다.

우리 사회가 ‘지옥’이 된 이유를 일부 소수의 사람 탓으로 돌리고 싶다면, 우리 대부분은 스스로가 사회에서 별 영향력이 없는 시시한 존재라는 점도 받아들여야 한다. 그래서 늘 다른 사람들이 영향을 미치는 대로 끌려 다니는 소신 없는 존재임을 인정해야 한다. 과연 우리 사회는 90%의 착한 한국인이 10%의 악마들이 만들어놓은 지옥에서 허우적대고 있는 걸까. 국민 대부분이 전혀 원하지 않는 지옥 한가운데로 어쩔 수 없이 떠밀려 들어와서 진정으로 천국으로 이사 가길 원할까.

다른 문화 속에서 그 문화 구성원들의 생각과 행동의 차이를 연구하는 비교문화심리학적 관점에서 보면 문화 간의 차이는 그 구성원들의 차이와 같은 말이다. 즉 문화가 사람에게 영향을 미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들의 생각과 행동의 전체, 그 자체가 곧 문화인 것이다. 한국과 다른 나라 사람들을 비교한 비교문화심리학적 연구들에서 문화 간 차이가 일관되게 발견되는 심리적 속성 중 하나가 일관성이다. 미국으로 대표되는 서구 사회의 심리적 특징에서 일관성에 대한 강조를 빼놓을 수 없다. 단순히 피상적인 사회적 체계의 일관성이나 행동적인 일관성이 아니다. 그런 일관성을 만들어내는, 일관성을 추구하는 인간의 근본적인 욕구를 얘기한다.



서구 심리학은 인간에게 일관성의 욕구(need for consistency)가 있다고 전제한다. 사고 체계의 주요 작동 원리 중 하나가 일관성이고, 나아가 사고와 행동 간의 일관성을 추구한다는 관점이다. 이런 관점은 심리학의 한 시대를 지배했다. 인간은 자신이 생각하는 바와 다른 행동을 했을 때 불편한 심리적 각성 상태에 빠진다는 인지부조화 이론(cognitive dissonance theory)의 근간이다. 좋아하는 물건을 사고, 좋아하는 사람에게 잘 대해주고, 좋아하는 후보와 정책에 투표하고, 싫어하는 음식은 피하게 되고, 무슨 이유에서든 그와 반대로 행동하면 의식적이건 무의식적이건 불편한 감정을 느껴 일관성을 회복하려고 노력하는 경향성을 갖는다는 논리다.

그런데 인지부조화 이론이 한국 사회에서는 잘 들어맞지 않는다는 연구 결과가 많다. 한국 사람들은 자신이 믿거나 생각하는 바와 일치하지 않는 행동을 해도 크게 불편해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서구 문화와 동양 문화의 차이를 설명할 때 흔히 등장하는 개인주의와 집단주의에 대한 심리학적 논의에서도 일관성이 언급된다. 개인의 고유성과 욕구, 개인적 성취와 자아실현을 추구하는 개인주의는 자신이 믿고 원하는 바를 추구하는, 즉 개인적 차원에서의 일관성을 보장해주는 자유와 권리로 연결된다. 반면에 집단주의는 집단과의 조화, 집단의 목적을 우선시한다. 이런 문화에서는 개인적 일관성을 추구하는 행동은 흔히 이기적이고 사회성이 부족하다는 부정적 평가와 직결된다.

역동성, 기동성, 유연성

행복한 지옥에서 지루한 천국으로

행복의 조건은 뭘까. 하버드대 연구팀이 75년간 추적한 바에 따르면 결국 ‘사랑’이었다.

4명 이상 시켜야 먹을 수 있는 부대찌개를 팀원 전체가 먹으려고 하는데, 자신은 된장찌개를 원하기에 팀원들이 부대찌개를 못 먹게 되는데도 끝까지 된장찌개를 주장하는 직원을 상상해보라. 그런 상황 자체를 가능케 하는 메뉴 구성도, “하나로 통일하면 빨리 나온다”고 아무렇지 않게 얘기하는 종업원도, 그 상황에서 불편해하는 ‘싸가지 없는’ 직원도, 그 직원을 비난하는 팀원들도 개인적 일관성 따위는 그리 중요시하지 않는 우리의 모습이다. 그 많은 교육을 통해 옳고 그름에 대한 기준, 준법의식, 사회질서, 교통법규, 질서 의식을 가르쳐도 그런 사회가 되지 않는 근본적인 이유는 일관성과 관련돼 있다.

한국 사회가 행복한 지옥인 것은 그 지옥에서 우리가 가장 행복하기 때문이다. 세계에서 가장 뜨거운 음식을 호호 불어가며 먹는 우리에게, 뜨거운 욕탕에서 불린 몸을 거칠거칠한 때수건으로 아프도록 문질러야 시원하다고 느끼는 우리에게, 수백 가지의 폭탄주 제조법을 자랑하고 그 자격증까지 발부하는 우리에게 이 모두는 행복을 느끼는 순간이다. 과연 우리 사회의 어떤 부분은 우리가 원해서 만든 것이고, 어떤 부분은 원치 않았는데 누군가 만들어놓아서 우리가 억지로 빠져있는 걸까. 그런 것은 없다. 우리 사회의 모든 것은 우리가 만든 것을 넘어 그냥 우리 자신이다. 그래서 나는 유학을 끝내고 한국에 돌아왔을 때 정말 행복했다. 공항에서 나오자마자 버스가 뿜는 배기가스를 맡는 순간, 나는 흐뭇한 미소와 함께 중얼거렸다. “바로 이거야…”라고.

행복한 지옥에서 지루한 천국으로의 이동은 현재 우리 사회 갈등의 근원에 자리한다. 지난 10여 년 동안 정치적, 사회적 갈등의 중심에는 혁신과 원칙, 부패와 청렴, 성장과 분배의 논의가 있었다. 최근 우리 사회는 과거 비약적인 경제 발전을 이루는 데 기여했던 수많은 것을 거부하며 비난하기 시작했다. 원하든 원치 않든 그런 논란의 중심에는 사회적 역동성이 있다.

우리가 전 세계에 유례가 없을 정도의 발전을 이룬 배경에는 행복한 지옥을 만들어낸 무원칙, 무질서, 예측 불가능과 같은 부정적 측면의 다른 얼굴인 역동성, 기동성, 유연성이 있었다. 환경, 사회적 정의, 절차적 공정성, 인권과 같은 가치를 무시하고 정부 주도의 선택과 집중을 통해 경제 발전과 사회적 인프라를 구성했다. 기업들은 우리 정부뿐 아니라 전 세계의 정부와 기업에 뇌물을 건넸고, 한 기업의 이익을 다른 기업의 성장에 이용하는 배임과 횡령을 저지르며 세계적인 기업을 일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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